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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출신 여헌(旅軒) 문인(門人)의 고찰
김영호(金泳豪)
Ⅰ. 들어가는 말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작용되는 변인을 귀속적(歸屬的) 요인과 환경적(環境的) 요인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귀속적 요인은 출생적 의미를 갖는다. 어떤 가문에서 어떤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가에 따라 삶의 질이 생의 출발점부터 차별화 된다. 상류사회에 속하는 가문에서 훌륭한 부모로부터 생을 부여 받은 경우는 대체로 순탄한 생로(生路)가 보장될 수 있다. 그러나 하류계층에 귀속되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힘든 삶의 역경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부모와의 만남은 제1차적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이다.
두 번째로 만나는 중요한 환경적 요인은 부부의 만남일 것이다. 비록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재주와 미모가 출중하여 상류계층 출신의 배우자를 만나게 되거나 좋은 직업을 갖게 된다면 한꺼번에 사회계층 몇 단계를 별 무리 없이 상승할 수 있어서 부부의 만남은 제2차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세 번째는 스승과의 만남이다. 옛날이나 오늘날을 막론하고 인간은 자연계의 수많은 종(種) 가운데 가장 무력한 출생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개인이 가진 성장가능성(growth potential)과 교육가능성(education possibility)을 어떻게 계발(啓發)하는가에 따라 지성의 연마와 기능의 발달은 차이가 나타날 수 있어서 교육이란 수단을 빌려 차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이 내재적 가치를 발현하기 위해서 맺게 되는 사제(師弟)관계는 매우 중요한 만남이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우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나 다 가진다.
현세(現世)에도 훌륭한 스승 밑에서 수학(修學)한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학문적 능력을 갖게 되어 사회가 공인하는 지위를 보다 쉽게 부여 받아 아름다운 생활을 부럽게 영위할 수 있다. 그래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제의 만남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경주 출신자로서 조선시대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문인(門人)이 많은 것도 그와 같은 연유(緣由)가 아닐 수 없다. 여헌 선생의 문인이 많은 것은 아마도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수단적 가치로서의 학문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일생을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학문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관직이 30여회 제수 되었으나 출사(出仕)한 것은 몇 번에 지나진 않았다는 사실과 ‘천지사이에 붙어사는 모든 물건이 나그네 아님이 없다’라는 초월적(超越的) 거시체계(巨視體系)에 관심을 가지고 우주 자연과 하나 되는 영원한 우주 자연인으로 일생을 살았다는 자연합일(自然合一)의 견해가 여헌 선생을 존경하고 그 문인이 되어 배우면서 자랑스럽게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훌륭한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 문인들과 서로 만나 학문적인 대화를 하면서 인격을 도야(陶冶)하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서 만이 아니라 문중(門中)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여헌 선생의 시대는 500여 년 전이라 오늘날에 비하면 문화적・정치적 상황과 지역적 특징이 많은 차이가 있어서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경주인으로서 『여헌급문제현록(旅軒及門諸賢錄)』에 수록되어 있는 명사(名人士)에 곽습(郭霫, 경주), 권응생(權應生, 두류문중, 진천현감), 권기(權旡, 두류문중,선교랑), 권임(權恁, 두류문중, 조산대부), 권도(權燾, 두류문중, 통덕랑), 김경두(金景斗, 魚淵문중, 봉화현감), 김종일(金宗一, 沙谷문중, 성주목사), 손노(孫魯, 경주), 이환(李皖, 양동문중), 이호(李皞, 양동문중), 정사진(鄭四震, 대동문중, 사부), 정사물(鄭四勿, 하동문중, 사도시직장), 정극후(鄭克後,하곡문중, 王子師傅), 최동량(崔東亮, 가암문중, 용궁현감) 등이 발견된다.
이 명사(名士)들은 여헌(旅軒) 선생이 1606년(선조 39, 53세)에 영천 입암(立巖)의 산수와 경관에 매료되어 이곳에 거주하던 동봉 권극립(權克立) 등 입암사우(立巖四友)의 요청과 도움으로 만활당(晩活堂)을 낙성하고, 그곳에서 함께 교유(交遊)하며, 학문연구와 강론 등을 할 때 경주 지역의 많은 문사(文士)들과 더불어 여헌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 같다. 경주출신 여헌 문인을 전부 찾아 상론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제한 사항이 있어서 그 중에서 경주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김씨 병판공파 어련문중 출신 김경두, 안동권씨 두류문중 권응생, 경주김씨 태자공파 사곡문중 김종일, 연일정씨 노실문중 정사물, 경주최씨 가암문중 최동량 등 모두 다섯 분에 대한 생애와 학문에 대한 것을 각기 행장과 묘갈문에서 고찰하여 현세를 살아가는데 참고 자료로 제시하고자 한다.
Ⅱ. 경주출신 여헌(旅軒) 문인(門人)
■ 조산대부 봉화현감 김경두(金景斗,1548-1609)
1. 가계
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제삼공자 경주군(慶州君) 영분공(永芬公) 휘 명종(鳴鍾)의 27세손이다. 고조는 참봉 휘 첩(牒)이고, 증조 휘 귀일(貴一) 충암공(忠菴公)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도사를 역임하면서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한(韓) 상당군(上堂君)과 같이 북방을 지켰다.
정해년에 이시애란(李施愛亂)가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김관(金瓘), 손소(孫昭), 차운혁(車云革) 등의 제현과 종군하게 되었다. 마운령에 진을 치고 군복을 초록색으로 위장하여 산을 등지고 바위에 의지하여 세차례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가선대부행밀양도호부사(嘉善大夫行密陽都護府使)에 제수 되었다. 1473년 성종 4년 6월 26일에 이조에 계하여 이등에 입공되었다. 그것을 축하하는 시를 받아 시권(詩卷)을 이루었는데 여기에 우의정 이인손(李仁孫), 영의정 황수신(黃守身), 호조참판 김순(金淳), 예조참판 조효문(曺孝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등의 시가 모두 있었으며 속동문선 제7권과 점필재 시집 제5권 등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시중(詩中)에서 보면,
“와룡거처인여문(臥龍居處人如問) 상재음중일로천(桑梓陰中一路穿)”
‘제갈량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을 물으면 상재 그늘 속으로 길 뚫려 있다고 하오.’라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김귀일시축(金貴一詩軸)』에 보낸 시구(詩句)에서 충암공 김귀일을 제갈량에 비유하고 있어서 오늘날도 매우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성종 갑인년(1494)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였다. 부음을 들은 성종은 매우 슬퍼하며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를 증직하면서 요광원 사방 10리를 사패하였으며, 상여가 하사 되었다. 그 상여는 상여각에 수백년 동안 귀중한 유물로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60년대 새마을사업 당시 산소 부근의 마을 사람들이 팔아버려서 현재는 못 찾고 있다. 또한 요광원 사방십리가 사패(賜牌)되었던 것으로 보아 충암공은 난(亂)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공훈에 대한 것은 『조선왕조성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왕고(王考)는 영암훈도(靈巖訓導)를 역임한 휘(諱)신종(信宗)공이고, 황고(皇考)는 조선 명종 16년 윤5월 21일에 효자정려를 받고, 통례원 좌통례(左通禮 등을 역임한 휘응규(應奎)공이다. 백부는 정려효자이며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그 훈공(勳功)으로 선무원종공신2등에 책록 되었으며 가선대부 금군별장(禁軍別將으로 승차(陞差)한 휘응벽(應璧)공이고 계부(季父)는 정려효자 음사옹원주부(蔭司饔院主簿) 휘응정(應井)공이다.
삼효각(三孝閣) 어련정(魚淵亭)
아우는 훈련봉사(訓練奉事) 휘 형두(亨斗)공과 훈련첨정 선무원종공신3등 휘건두(建斗)공이며, 종제(從弟)는 무과에 합격하여 관(官)이 사헌부 감찰(監察)에 오른 휘 광두(光斗)공이다.
장자는 통덕랑 휘부홍(復弘), 차자 통덕랑 휘익홍(益弘), 질(姪)은 사옹원주부 증예조참의 휘예홍(禮弘), 통훈대부 군자감정(軍資監正) 휘인복(仁福) 종질은 장사랑 휘상홍(尙弘), 통정대부 중추부사 휘극홍(克弘) 등 이하 번성하며, 후손들은 경주시 내남면 화곡리 어련(魚淵)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어련마을에는 삼효자공의 충(忠)과 효(孝)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어련정(魚淵亭)이 건립되었다. 최초의 어련정은 삼효자공이 복결(服闋) 후에 어버이를 숭모하고자 지은 우모(寓慕)의 정자였는데 세구연심에 퇴락하였고 또한 여러 난리에 병선(兵燹)을 입어서 쓸모없게 되어 1918년에 중건을 하였다. 이 정자 역시 규모가 적고 100년이 지나는 동안 재건축이 불가피하여 1974년에 구정을 철거하고 규모를 확장하여 다시 지었는데, 당시 중동 석유파동 등으로 인한 물가 급등 때문에 불실하게 시공되어 2011년에 다시 대폭 수즙(修葺)을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22년에 자손과 각 지역 향유(鄕儒)들이 삼효자공의 충효정신을 기리고 이어 받고자 어련정계(魚淵亭稧)을 창계(創稧) 하여 330명의 계원이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정기 계회를 갖고 향음주례를 하면서 교육적 기능을 해 왔다. 그후 산업사회의 도래로 1960년대 후반에 자손들의 다수가 세거지를 떠나 경향 각지로 혹은 외국으로 우거하게 되어서 불가피하게 오늘날은 계회는 중단되었으나 후손들이 숭조화친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2. 생애
공의 자(字)는 사앙(士仰)이고 호(號)가 간와(澗窩)이며, 삼형제 중 맏이로 1548년 명종(明宗) 무신년 4월 22일에 출생하였다. 자상하신 할아버지 훈도공(訓導公)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아 일찍이 소년기에 학문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특히 공은 증조부가 공신이고 아버지 삼형제분이 정려효자로서 선무원종공신(2등)과 통례원 좌통례와 인의(引儀) 등을 벼슬하여 가급인족(家給人足)한 문화적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孝子月城金應璧·應奎·應井의 旌閭]
효와 충을 중요시여기며 실천행동을 할 수 있도록 품성을 도야하고 학문에 심취하는 가훈에 따라 배우고 익히면서 정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도내 유림 및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 결과 학문적 수준과 인품에 대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1582년 선조(宣祖) 임오 10월 16일에 도내 문신(文臣)들의 천거(薦擧)로 34세 때 조산대부봉화현감(朝散大夫奉化縣監)에 제수되어 3년간 봉직하였다.
『旅軒全集(여헌전집)』 하권, 『及門諸賢錄(급문제현록)』에 게재되어있는 사적(事蹟(사적)은 다음과 같다.
"金景斗字士仰 號澗窩 官縣監 新羅宗姓也 宣廟戊申生 公有異質 甫十歲有志力學旣長 與族叔翠竹堂應鳴同遊於先生之門 得聞性理之學 一日 作詩 贈先生 曰 嗟吾君子學 淡淡似溪淸 天理勝私慾 幽居遠世情 先生每敬重焉 丁亥以道臣薦 除奉化縣監 爲政以德 有韓世循吏之風 子孫居慶州魚淵"
“ 김경두의 자는 사앙(士仰) 호는 간와(澗窩)이고 관직은 현감이며, 조선 선조 때 무신년에 출생하니 신라의 종성이다.
공은 남과 다른 점이 있었으며(公有異質), 뜻이 있어 힘써 배워서 열 살 때는 이미 학문적으로 장성하였다(甫十歲有志力學旣長 ). 족숙인 취죽당 응명과 더불어 여헌 선생의 문도들과 교류하였으며(與族叔翠竹堂應鳴同遊於先生之門) 성리학을 듣고 이치를 알았다(得聞性理之學). 하루는 시를 지어 어헌 선생에게 증정하였다(一日 作詩 贈先生).
嗟吾君子學 우리의 군자학이 감탄스럽네.
淡淡似溪淸 맑은 냇물과 같이 맑고 맑구나.
天理勝私慾 세상의 이치가 사사로운 욕망을 이기는데
幽居遠世情 그윽한 곳에 살고 있으니 세상의 정이 멀어졌네.
여헌 선생은 매일같이 공경하면서 소중하게 여겼다(先生每敬重焉). 정해년에 본도의 관리들이 천거하여 봉화현감을 제수 받았다(丁亥以道臣薦 除奉化縣監). 덕으로서 다스렸으며(爲政以德), 한나라 시대의 관리와 같이 국법을 중(重)하게 여기는 풍이 있었다(有韓世循吏之風). 자손은 경주 어련(魚淵)에 살고 있다(子孫居慶州魚淵).”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그 성적이 장원(壯元)이라든지 특별히 우수하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종9품인 참봉직(叅奉職)에 임명되어 출사(出仕)하는 것인데, 김경두공은 조산대부(朝散大夫)라는 종4품의 품계이면서 종6품의 직위인 현감(縣監)에 제수(除授)되었다는 것은 그 학문적 수준과 인품이 출중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공은 광해군(光海君) 난정(亂政)에 환멸을 느껴 상위의 직으로 승차(陞差)하기 위해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았으며 현감을 끝으로 관료 생활을 마감하고 경주시 남간(현 탑동)에 동송정(東松亭)을 지어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공이 44세가 되던 해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오직 나라를 구하고 왜적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가는 향민을 구하기 위해 백부 휘응벽(應璧)공과 아버지 휘응규(應奎)공의 지시에 따라 제(弟) 형두(亨斗)와 건두(建斗), 매서(妹壻) 이삼한(李三韓), 족조(族祖) 월암공 휘호(虎) 더불어 동시 창의하여 문천(蚊川)과 계연(鷄淵) 등의 사활(死活)을 건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나라가 위난(危難)할 때 일문(一門)에 아버지 삼형제와 삼형제 등 6명이 창의하여 나라와 향민(鄕民)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신명에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분연히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공도 공(功)을 세웠지만 특히 백부 휘응벽(應璧)공은 선무원종공신2등, 아우 건두(建斗)공은 선무원종공신3등의 공훈을 세워 충효양전(忠孝兩全)으로 보국위민(報國爲民)하여 어련문중(魚淵門中)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며, 그 명성이 오늘날까지 미쳐 세칭 동도삼효자(東都三孝子)문중으로 불러지고 있다.
공은 1609년 광해(光海) 을유(乙酉) 11월 24일에 졸하여 묘소는 경주시 내남면 화곡리 56번지 어련정(魚淵亭) 후산 선조하(先兆下) 서록(西麓)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은 『동경지(東京誌)』, 『금오승람(金鰲勝覽)』, 『경주읍지(慶州邑誌)』, 『울산읍지(蔚山邑誌)』등에서 전해오고 있다.
이상과 같이 김경두공은 충출어효(忠出於孝)라는 말과 같이 아버지의 효행을 본받아서 충의(忠義)의 단정(丹精)을 스스로 함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헌 선생 및 그 문도들과 교류하면서 체득한 학문적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통훈대부 행 진천현감 권응생(權應生, 1571-1637)
공은 일찍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고 인격을 바르게 닦았으며, 나라가 위난할 때 창의(倡義)하여 위국충정(爲國忠貞)을 다하였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노헌의 생애에 대해 개괄하고, 그의 가계, 학문, 충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가계
공의 자는 명세(命世)이고 명은 응생(應生)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시조 권행(權幸)의 25세손이다. 권행은 본래 성이 김씨 신라 종성(宗姓)이며, 견훤(甄萱)이 고창(古昌)을 포위하였을 때 당시 고창군 태수(太守)로서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창의하여 견훤(甄萱)을 병산(甁山)으로 유인하여 격파하였다. 그래서 김행(金幸)은 태조 왕건으로부터 능병기달(能炳幾達) 하였다는 칭송을 들었으며, 왕건은 특별히 권(權)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켜서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태사라는 벼슬을 내리고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亞父功臣)에 봉해졌다.
공의 아버지는 참봉 사의(士毅)이고, 할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낸 덕린(德麟)이며, 증조부는 휘 계중(繼中) 봉직랑(奉直郞)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다. 고조는 휘 명추(命錘) 봉직랑행상의원 직장이고 증조는 휘 효충(孝忠)이며 벼슬이 사직(司直)이다. 5대조의 휘는 수해(壽海) 관(官)이 사정(司正), 6대조는 사직 행조산대부 의금부경력(經歷)을 역임한 휘 관(寬)이며, 7대조는 여조(麗朝)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판제용(判濟用) 감사를 역임한 휘 초(軺)이다.
8대조 감찰규정 휘 희정(希正), 9대조 낭장郎將) 문하시중(門下侍中)증숭록대부의정부좌참찬추밀원사 시(諡)희경(僖敬) 휘 용일(用一), 10대조는 충렬왕 경인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문지후 증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參判) 추봉(追封) 영가군(永嘉君) 휘 혁(奕), 11대조는 문과에 급제한 휘 수(粹), 12대조 별장부정 행 병조정랑 휘 양준(良俊), 13대조 정용위별장행병조정랑 휘 세위(世位), 14대조는 호장(戶長) 좌윤(佐尹)을 역임한 휘 지정(至正)이며 시조 권행의 10세손으로 좌윤공파(佐尹公派) 파조(派祖)이다.
이상의 상계에서 보면 시조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한 대도 빠짐없이 국가 관료로 봉직하였음을 쉽게 발견된다.
공은 오남삼녀(五男三女)를 두었으며 장자는 선교랑(宣敎郞) 휘 기(炁), 차자 승질조산대부(陞秩朝散大夫) 휘 임(恁)은 소암(疎庵) 임선생(任先生)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인조 을유년에 학문이 우수하여 사옹원 참봉에 천거되어, 조정(朝廷)에 경사가 있어서 질조대부에 올랐다. 삼남 도(燾)는 통덕랑, 사남 묵(黙)은 첨지, 계남 열(烈)은 선교랑(宣敎郎)이다. 손자는 모두 13명으로 번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노헌(魯軒)공의 가계는 시조로부터 파조 좌윤공에 이르기까지 한 대도 빠짐없이 호장, 별장 등으로 위민봉사 하였고, 파조 좌윤 공으로 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정랑, 중문저후, 문하시중, 감사사직, 사정, 직장, 첨정 등의 중책을 맡아 덕치(德治)하여 대한 갑족 대성의 화벌가문을 빛냈다. 또한 하계(下系) 자손들도 자질과 학문이 뛰어나 사마시에 입격하고 무과에 합격하여 방명(芳名)이 가문을 잇게 하였으며, 임란에 창의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참전하여 보국이충으로 전과를 올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니 공의 선대와 후대가 모두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임란에 창의 전공으로 부조지전(不祧之典)의 은전(恩典)을 받은 현조가 한 분이며 여헌 장현광 선생의 문하에 수학하여 유학의 문명을 떨친 학자가 네 분이며, 부모를 잘 섬겨 위인자자의 도리를 다해 작설지전(綽楔之典)을 받은 정려(旌閭) 효자가 한 분 등으로 충・효・예가 삼전(三全)한 자랑스러운 세인 귀감의 문벌을 이루었다.
2. 생애와 충의
공은 선조 4년인 1571년 9월 5일에 밀양 관포리(館浦里)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기의(岐嶷)하고 군우(羣友)들과 더불어 놀지 않았으며 7, 8세 때 능히 스스로 글 읽기에 노력하고 맡은 일을 잘 수행하여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이 아이는 훗날 우리 선조의 유업을 이룰만하니 내 가히 아들을 두었다 하겠노라.”했다. 성장하면서 더욱 뛰어나게 활달하여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두려워하였다. 평소에 남들과 정성과 믿음으로 대하고 친소를 두지 않았으며 지절(志節)이 깨끗하고 씩씩하였으며 세속과 더불어 아부하기를 부끄러워하였다.
1592년 노헌의 나이 22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파죽지세로 전국을 초토화 시키는 적세에 드디어 난여(鑾輿: 임금의 수래)가 피란(避亂)한다는 소식을 듣고 종숙인 매와 사민(士敏)과 함께 분함을 참지 못하였다. 눈물을 지우면서,
“우리 집이 대대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오랫동안 입어왔는데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나라를 위해 죽기를 어찌 싫어하리오.”하면서 드디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경주성이 함락된 뒤 처음으로 시도한 계연전투(雞淵戰鬪)에 참전하여 적을 무찔렀으며, 문천회맹에 참가하여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영천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적을 물리쳤다.
김호(金虎)장군이 주도하는 노곡전투와 경주성수복작전에 참전하여 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경상좌우도의 인후지(咽喉地)인 당교에서 숙부 사민(士敏)과 함께 참전하여 적군의 북상을 저지하였으며, 두 차례에 걸친 팔공산회맹에 참가하였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방어사 곽재우 장군이 지휘하는 화왕산회맹에도 참가하여 여러 고을 의사들과 함께 적을 막는 데 입공하였다.
1596년(선조29년)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빈장(殯葬)과 제전(祭奠)을 하나 같이 상례(喪禮)를 따르는데 유감이 없었다.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지극한 정성과 효도로 봉양하였으며, 전란이 평정된 후 어머니의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을사년(1605년, 선조38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임자년(1612년, 광해4년)에 재능이 뛰어남으로써 처음으로 침랑(寢郞)에 천수(薦授)되었고, 직장(直長) 봉사(奉事)를 역임하고, 병진년(1612년, 광해8년)에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당시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혼조(昏朝)의 정치가 어지럽고 인륜이 무너짐으로 부임해서 얼마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내 여러 진신장보(縉紳章甫)와 함께 영창대군을 위하여 연명(聯名)으로 항소(抗疏)해서 말을 다해 구하는데 힘쓰니 남들이 모두 옳다 하였다.
계해년(1623년) 인조1년)에 북부주부(北部主簿)에 제수 되었다가 사헌부감찰로 전보되었고 곧 통훈대부(通訓大夫)행(行)진천현감(鎭川縣監)의 교지를 받아 도임하였다.
현감 재직 시에 선정을 베풀어 온 고을이 칭송했으며, 나라에서 동의보감(東醫寶鑑) 한 질을 특별히 하사(下賜)하여 선정을 칭찬하고 보상하였다.
공은 본래 환로(宦路)에 뜻이 적어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응천(凝川) 별서(別墅)로 돌아와 명리(名利)를 끊고 옛 선열의 시가를 읊었으니 취미가 같은 오한 (聱漢) 손기양(孫起陽)과 더불어 사귄 정이 매우 깊었다.
그 후 안강(安康) 옛집에 돌아와서는 시서(詩書)와 사기(史記)로써 스스로 즐기고 형강의 절경을 사랑하여 호숫가에 형강정사를 지어 유유자적하며 생활하였다. 대암(大庵) 박성(朴惺),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 등과 교유(交遊)하며 동경지(東京誌) 편찬에 힘썼다. 유고로 『두고세고(杜皐世稿)』 한 질이 전한다.
공은 인조 25년(정해, 1637년) 10월 23일에 병으로 침실에서 세상을 마쳤다. 향년 77세였다. 후손들은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충현묘(忠顯廟)를 건립하여 불천위(不遷位)로 향화(香火)를 받들고 있다.
3. 학문
공의 배움은 유아기부터 시작되었다. 여헌선생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하며 학업에 정진하니 선생께서 더욱 장허(獎許)했으며, 일찍이 동경지(東京誌)를 찬술케 하여 고도(故都) 경주 문헌의 증험을 얻게 이르렀고, 또 효제, 충신을 삼는 계를 맺고 함께 힘썼다.
여헌선생이 만년에 입암(立巖)에 유거(幽居)할 때 세 아들을 보내 수학하게 했고, 선생이 역책(易簀)하자 유문(遺文)을 편집하고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제향(祭享)하는 일에 힘을 다하면서 미치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다. 또 한강(寒岡)과 우복(愚伏) 등 여러 현문(賢門)에 나아갔고, 가는 곳마다 보고 느끼니 학문의 얻음이 더욱 깊었다. 또한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과 더불어 내왕하면서 서로 질문하여 칭찬을 받았다.
공은 저명한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학문에 심취하여 덕의와 문학을 수립하고, 도(道)를 즐겨 사우(師友)와 강구하고 연마하였다.
공의 글에는 스승 여헌 선생을 따라 학문을 배운 규모절도와 일상생활의 동정과 언어세행의 상세함과 그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엿볼 수 있다.
쌍봉 정극후는 공을 애도하는 제문에서 ‘유림의 영수(領袖)이니 사림(士林)이 엄숙하였고 경건과 공경으로 퇴폐한 풍속을 진흥시키니 한 고을이 존경하고 심복하였다.’하고 하였다. 여러 명사들이 보낸 서간과 만사(輓詞)에 ‘태산의 정기요, 규성(奎星)의 빛이로다.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며 당세의 모범이다’라는 말이며, 여러 명현(名賢)이 기대하고 칭송해서 말한 것이 아직도 공안(公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극찬의 문증(文證)에서 볼 때 노헌의 무하(無瑕) 고결(高潔)한 인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의 유집 『두고세고(杜皐世稿)』에 많은 유문이 수록되었다.
공은 은사(恩師)의 반구(返柩)에 참예(參詣)하여 지은 만사에 ‘과화풍법(過化風法)도 이제 그만이니 다시 뵙기 어렵도다.’라는 구절에서 여헌 선생이 생세(生世)에 제자들을 가르치고 좋은 방향을 이끌어 주신 올바른 가르침과 풍채와 태도를 표현한 것으로 볼 때 선생의 심오한 학문과 고매한 인품이 제자의 마음에 영결의 눈물을 흘리게 한 노헌의 애절한 표현은 그의 도덕적이고 높은 학문적 수준을 느끼게 한다.
공은 스승의 장례를 애도하면서 지은 제문에서,
“여헌 선생의 도를 태산교악(泰山喬嶽)에 비유하여 한없이 높다하였고, 덕은 비가 개인 맑고 밝은 하늘에 뜬 달처럼 깨끗하고 높고 밝다” 하였으며, 춘풍과 같이 따뜻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그 가르침을 우러러 존경하고 있음 발견된다.
그리고 ‘우주의 뜻을 담당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자질을 갖추어 필경 동해를 밟는 마음이 있다.’는 표현에서 여헌 선생이 우주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는 것과 그 연구는 동해를 밟을 정도로 넓고 깊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상에서 서술한 내용은 공의 문집인 『두고세고』를 참조하여 기술한 것이다. 그의 문집에서 공은 다음과 같이 수범적인 생애를 보낸 충신이요 지방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공은 대한 갑족대성인 안동권씨 두류문중에서 출생하였으며, 시조로부터 고려조, 조선조를 거쳐 당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관료로서 위민보국(爲民報國)하였다.
둘째, 공은 7, 8세부터 스스로 글을 읽기에 노력하였고, 여헌(旅軒)선생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연마하여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세 아들 권기(權旡, 선교랑), 권임(權恁,조산대부), 권도(權燾, 통덕랑) 등 모두 여헌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하여 사부자(四父子)가 여헌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었다.
셋째, 공은 약관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귀중한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창의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참전해서 전과를 올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넷째, 공이 진천현감 재직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들었고,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다섯째, 공은 명리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혼조에 사직하고 명사와 교유하며 학문에 심취하였고, 유학자와 더불어 동경지(東京誌)를 편찬하여 경주의 문화유산을 지키게 하였다.
여섯째,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장례식에 참예하여 제문을 지어 호곡하며 제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공은 이와 같이 77세에 졸 할 때까지 여러 방면에서 올바른 삶의 철학을 배워서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며 대의(大義)에 살았음이 발견되어 경주의 자랑스러운 명현(名賢)이 아닐 수 없다.
힘든 역경을 거쳐 이름을 바르게 살아온 자취는 오늘날 세태에서 볼 때 삶의 정향(正向)을 제시하는 교훈적 메시지(massage)를 담고 있어서, 이는 마땅히 깨달아야 할 사료(史料)라 생각된다.
* 자료제공 및 감수: 권혁근(權赫根, 玉山書院 有司 역임)
■ 증계공랑 사도시직장 정사물(鄭四勿,1574-1649 )
1) 가계
공은 영일인(迎日人)으로 자는 역안(亦顔)이고 호는 곤봉(昆峯)이다. 상조는 고려 지주사(知奏事) 휘 습명이며, 고려사 본전에 의하면 의종(毅宗) 때 의종의 비행과 향락을 간하였다가 의종의 미움을 받고 자결하였다. 그 후 3세를 지나 휘 인신(麟信)은 태학박사(太學博士), 휘 지태(之泰)는 전서(典書), 휘 종흥(宗興)은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휘 림(林)은 판서로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고조이다. 휘 인언(仁彦)은 판서. 휘 광후(光厚) 판서이며, 고조는 장사랑 휘 문영(聞英), 증조는 승의랑(承議郎), 왕고(王考)는 통정대부 휘 유(瑜), 황고(皇考)는 선무랑 군자감주부 휘 삼외(三畏)이며 통정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상과 같이 공봉(昆峯)공은 전통 명문가에서 만력 1574년(甲戌) 3월 16일에 출생하였다.
2) 생애와 학문
안주목사(安州牧使) 정문승(鄭文升)이 쓴 행장(行狀)에서 보면 곤봉은 유년기부터 영오(穎悟)하고 영매(英邁)하여 청호재(淸虛齋) 손엽(孫曄)이 보고 “이 아이는 영특하고 재능이 뛰어나 반드시 훌륭한 인물로 성취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淸虛齋孫公 見之亟稱曰 此兒英妙必成偉器).
8세에 모부인 상을 당하여 애척(哀慽)을 다하니 사람들이 감동하였고, 생원인 숙부는 “이 아이는 효성이 지극하니 참된 효성이다(此兒孝誠 眞天性也)”라고 하였다. 비록 아동기에 어머니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지극한 효행이 범아(凡兒)와는 달랐음을 느끼게 한다.
세거지 영천을 떠나 흥해로 이사하여 2세(世)를 살다가 다시 영천 황강(黃岡)으로 돌아와 살았다. 일상생활은 매우 규범적이었다. 늦잠을 자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바르게 하여 가묘(家廟)에 알묘(謁廟)하고 집안을 고루 청소를 한 다음 종일토록 단좌(端坐)하여 독서에 열중하였다. 학문에 정진하여 일찍이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특히 지은 시부(詩賦)는 많은 이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특히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영효사(詠曉詞)을 좋아하여, 그것을 본떠 석양부(夕陽賦)를 지어 악부(樂府)에 맞춰 곡에 실어 단번에 낭송하니 모두들 칭찬하였다.
아우 쌍봉 극후(克厚)와 같이 여헌 장현광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깊은 학문과 빼어난 덕행으로 선비들 세계에서 주종을 이루어 우뚝하였다.
여헌 선생은 곤봉을 처음보고 특별하게 친구의 예로 대해 주며, 자를 ‘역안(亦顔)’으로 하라고 지어 주면서
“『논어』는 바로 성현이 가르침을 베풀어서 사람을 만드는 모범이니 좌우가 이 책에 종사하여 세상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지극한 맛을 얻는다면 비루한 이 사람이 그대의 자를 역안(亦顔)이라 한 것 또한 표덕(表德)에 으레 쓰는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旅軒先生 一見異之 待以友禮 命字曰亦顔 以書조 之曰 論語一部 乃聖賢說敎作人之模範 惟左右從事於是書 味于世人所不能味至味 則所以請字以亦顔者 非表德之例語而已) .
공은 여헌 선생의 말씀을 정성스레 편액으로 삼으며 “이로써 더욱 『논어』를 마음 깊이 연구하고 음미하여 몸소 체험 하는데 힘써야겠다(於是公扁齋曰 事斯益治 論語潛心硏究以爲體驗).”라고 다짐하자 선생은 글로써 격려하기를, “나는 사람들이 능히 뜻을 세우지 않음을 근심하는 것이지 진실한 뜻을 한 번 세우면 어떤 큰 사업도 이룰 수 있으며, 어떤 먼 길도 이르지 않음이 있겠는가(先生又書以勉之曰 吾人患不能立志 志苟一立 何大業之不可做 何遠程之不可至哉).”하였다.
곤봉은 학문에만 뜻을 두고 과거시험을 즐겨하지 않았으나 노부모가 계시어 열심히
정진하여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하고 1613년(癸丑) 사마시 생원과 2등 14위로 입격하였다. 1615년(乙卯) 아버지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사리를 하였고, 그 후로는 뜻을 굳게 하여 학문에만 전심전력하였다.
여러 유생과 도모히여 전쟁으로 회록지재를 입은 향교를 크게 중수하여 명륜당 상량문을 찬하였고 임고서원의 이전을 한강과 여헌 두 선생에게 품의하여 서원이전을 주관하였다.
1631년(신미(辛未)에 임금이 재난대책 방안을 모든 신민에게 구할 때 당시의 폐단 세 가지를 언급한 상소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첫째, 과거에서 낙방한 선비들을 군역에 복무시키지 말고 무술을 익히도록 할 것.
둘째, 남쪽의 정병을 서쪽으로 보내지 말고 장목(裝木)에 대신 종사 시킬 것.
셋째, 관청에 붙잡아 두 왜적의 포로들을 전세(田稅) 대신 노비의 공목(貢木)에 대신할 것 등이다. 이 상소문에서 곤봉이 비록 초야(草野)에 있지만 식자(識者)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폐단을 구제하는 계책(計策)을 제시한 것은 진정한 우국지심(憂國之心)이 아닐 수 없다. 1636년(丙子)에 여헌 선생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을 때 아우 쌍봉과 함께 선생을 모시고 조령에 이르러 선생이 병이 나자 급히 돌아오면서 공에게 기행을 부탁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座中爲宿儒 좌우를 둘러보니 모두가 덕을 갖춘 선비로다.
精工窮事物 열심히 공부하여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였구나.
또 마전포(麻田浦)를 지나다 개연(慨然))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漢水東流盡 한강 물은 동쪽에서 끊어지고
孤城北面類 외로운 한양성은 허물어졌구나.
沙頭一片石 모래톱에 한 조각돌이 되어
應令後人唆 후세사람들로 하여금 슬프게 하는구나.
공은 여헌 선생이 입암(立巖)에서 은거(隱居)할 뜻을 두고 들어가자 여러 문인들과 의논하여 선생이 거처(居處)할 집을 마련하였으며, 1642년(壬午)에 여헌 선생을 추모하여 임고서원에 배향하려고 조정에 상소(上疏)를 의논할 때 영남에서 뛰어난 선비로 우러러 존경하는 바가 있어 사림(士林)으로부터 소수(疏首)로 추대(推戴) 되었다.
특히 수년간 투병하면서도 역학 연구를 계속하자 제자들이 건강을 염려하여 만류하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하면서 “병중에 책을 보는 것도 심신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하며 밤늦게까지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병이 심해지자 맏아들에게 “효도와 우애의 도를 지키고 간곡한 마음으로 장례를 잘 치르라.” 당부하고 1649년(己丑) 2월 29일에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1659년 사림에서 공의 뛰어난 학행을 기려 관찰사와 조정에 알려 특별하게 계공랑(啟功郎)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간추리면 공은 다음과 같은 것이 발견된다.
첫째, 공은 연일정씨 문한세가에서 태어났다.
둘째, 공은 영오(穎悟)하고 준특(俊特)한 재능을 타고나서 유아기부터 남달리 뛰어났다.
셋째, 공은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지극한 효행이 범아(凡兒)와는 달랐다.
넷째, 여헌 선생을 가르침을 바르게 수행하여 모범을 보였다
다섯째, 학문의 수단적 가치보다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며 정진하여 저명한 유학자로 거명되었으며, 사림(士林)이 추천하여 계공랑(啟功郎)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에 추증(追贈)되었다.
■ 통훈대부 성주목사 김종일(金宗一, 1597-1676)
1. 가계
공은 『경주김씨태자파대동보(慶州金氏太子派大同譜)』에서 보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예손(裔孫)이다. 이름은 종일(宗一), 자는 관지(貫之), 노암(魯庵)은 호이다. 아버지는 선무랑행군자감직장으로 임진왜란 때 백씨 행파공(杏坡公)과 함께 창의하여 참전한 휘(諱) 경룡(慶龍)이고, 1597년 12월 27일에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조봉대부행군자감부정 휘 응허(應虛)이고, 증조는 봉정대부 사재감첨정 휘 광재(光載), 황고(皇考)는 조봉대부 행충익위동지제교겸춘추관기주관 휘 훤(暄)이며 5대조는 성균관생원 통덕랑 휘 처형(處衡), 육대조는 조봉대부행사간원지제교 겸춘추관편수관 세자시강원필 휘 순(恂)이다. 칠대조는 성균생원 휘 경존(敬存)이고 팔대조는 고려옹(高麗翁) 성균생원 휘 양(讓)이며 구대조는 정순대부판전교시사 휘 인식, 십대조는 봉익대부판도판서 휘 탁(晫)이다. 십일대조는 봉익대부예의판서 진현관대제학 휘 남기(南基)이며 예의판서공파 파조이다.
공의 장자 세평(世平)은 건원능참봉 청백리 익위익찬을 역임하였고, 손자 홍정(弘鼎)은 시강원필선을 역임하였다. 증계손(曾系孫)은 유곤(裕昆)이며 현손은 음사용(蔭司勇)상진(尙振), 상덕(尙德)등이다. 이하는 번성하여 불록이다.
공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상계와 하계의 대부분 세대가 국가 관료로 참여하여 위민보국한 현조(顯祖)로서 문한세가를 이룩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787년에 창건한 정산서당(靜山書堂)에서 매년 3월 초정에 후손과 향유(鄕儒)들이 석채례(釋菜禮)로 봉향(奉享)해 오고 있다. 정산서당은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老堂里)에 소재한다.
2. 효행
공은 안강현 북쪽 노당리에 살았으며 9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는데 성인과 같이 하였다. 물도 먹지 않고 슬퍼했다. 어머니가 애써 죽을 먹게 하니, 그는 “어머니께서 먼저 드시면 저도 먹겠습니다.”하지 어머니가 한 모금 먹으면 그도 따라 먹었다. 일찍이 술을 마시자 어머니가 이를 책망하자 평생토록 금주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장례 절차와 제사를 예를 다하였고 여묘(廬墓)하는 동안 죽으로 연명(延命)하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중에 있을 때 수박을 먹고 싶어 하였으나 생산되는 계절이 아니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평생토록 수박을 먹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선적에 기록하였다. 나이가 74세이다.
자는 관지(貫之) 호는 노암(魯庵)이다. 조정에 있을 때 바른 말과 굳은 절개로 이름이 났다. 인성군(人城君)의 아들 셋의 전은(全恩)을 간청하는 장계를 동계(桐溪) 정온(鄭蘊)과 함께 올렸다.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김자점(金自點) 등의 죄를 논하니 조정의 대신들이 숙연해 하며 경탄하였다. 정축년(1637) 사서(司書)로서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瀋陽)으로 가 온갖 고난을 겪고 돌아와 박로(朴籚)의 모함을 받고 영덕에 유배되었다. 효종 때 예송(禮訟)이 일어나 사리에 어긋나는 사례가 있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상소하여 배척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많은 치적이 있으며 문집이 전한다(金宗一 居安康縣北魯堂村 九歲而孤執喪如成人 少年嘗使酒 母責之 自是至老絶口不飮 母歿葬祭盡禮 廬墓주粥一不歸嫁 母病欲嘗西瓜 非時不得用 至老不食西瓜 鄕人善籍 年今七十四年(續)字貫之 號魯庵 立朝多危言直節 人城君三子之全恩也 與桐溪鄭蘊力請陳避辭啓 江都之失守也 論金自點等罪 朝著肅然敬憚 丁丑以司書陪昭顯世子瀋陽 備經艱驗 爲朴로 等構禍還配盈德 孝宗禮陟時議승張 疏斥誤禮諸臣 歷典州郡皆有治績 有文集).
* 자료출처 : 李相弼 譯(2010).國譯 金鰲勝覽. pp.459-460
3. 학문
노암은 2세 때 말을 알아들었고, 3세 때는 글자를 풀이하였으며 곧게 자란 공은 민망할 정도로 남보다 크게 일찍 뛰어나게 영리하여 아동이 소학을 읽으면 곁에서 듣고 아주 민첩하게 많은 것을 스승과 같이 외울 수 있었다.
노암은 12세 되던 무신년(1608)에 어머니 명(命)으로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에게 글을 배웠다. 배움에 나아 간지 일 년 만에 학업이 크게 발전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통하고 더구나 효경(孝經)과 논어(論語) 등은 침식을 잊고 읽었다.
17세 때 향시(鄕試)에 합격했다. 이 때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이 경주부윤으로 와서 그를 형강(兄江)에 청하여 함께 유람할 것을 청했으나, 포의(布衣)의 신분이라며 기꺼이 응하지 않았다. 후에 과거보러 서울에 가니 동악이 사사로이 찾아와 <홍도(紅桃)> 시를 지어 주자, 그는 차운하여 3수를 남겼다. 무오년(1618)에 우복 정경세(鄭經世)를 찾으니 우복은 금세 만나기 어려운 인재라 하며 예로써 대우하였고, 신유년(1621)에 잠와(潛窩) 이명준(李明俊)을 만나 뵈었다. 을축년(1625) 8월에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니 그의 나이 29세이다.
1) 시(詩)
노암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詩)는 만사(輓詞)를 합하여 28수(首)이다.
다.
만여헌장선생(輓旅軒張先生)
선생의 임종 시에 공은 심양에 있어서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묘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뒤에 조문을 하였다(先生易簀時公在瀋不及故己卯還朝後追而哭之).
<1>
洛水烏山孕化精 낙수오산잉화정 낙동강물 금오산 정기 받아 태어나셔서
大東偉器自天成 대동위기자천성 대동의 위대한 인물 스스로 하늘이 되셨네.
顓蒙未卒薰陶業 전몽미졸훈도업 착하고 어린 아동 훈도 끝내지 못하고
却恨身縻萬里程 각한신미만리정 원통하게 몸 고삐로 만리를 떠나시네.
* 전(顓): 오로지 전. 착하다. 어리 섞다. 중국 고대 제왕의 이름. 미(縻): 고삐 미. 큰 줄.
<2>
恭惟盛德膺休期 공유성덕응휴기 공경하고 생각하니 성덕은 가슴 따뜻하게 멈추네요.
三達尊爲百世師 삼달존위백세사 세 가지 존귀한 말씀 백세의 스승이셨네.
講契徽言今已矣 강계휘언금이의 강학계에 들려주신 아름다운 말씀 이제 이뿐이네요.
臨風西向哭公私 임풍서향곡공사 중풍으로 떠나셨다니 서향하여 혼자 곡 하나이다.
. 삼달존(三達尊): 조정에서는 작위를 숭상하고 향리에서는 윗사람을 존경하며, 세상에 처 해서는 덕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
위 두 만사는 노암이 심양에 있을 때 여헌의 부음을 들었으나 귀국하여 조문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그 후 조정에 돌아와 곡을 하고 지은 시이다. 노암은 여헌(旅軒)이 낙동강의 맑고 깨끗한 흐름과 금오산의 장엄한 정기를 받아 태어나서 동방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고 존숭하고 있다. 강학계를 결성하여 여헌의 훌륭한 말씀을 들었는데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조정에서는 벼슬의 직위를 숭상하고 마을에서는 어른을 종경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덕을 존중하라는 삼존달(三尊達)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다.
輓權魯軒應生
만권노헌응생
耆老東都又失君 기노동도우실군 경주에 또 덕망 있는 군자를 잃었으니
人間何處接餘論 인간하처접유논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 여담을 논할까
盛年氣岸爭推右 성년기안쟁추우 성년의 견실한 마음 서쪽에 밀려 간하고
半世襟期自不羣 반세금가자불군 반세상 품은 회포 스스로 흩어지네.
奔走服勞非素履 분주복로비소이 분주히 힘썼으나 만족한 지위 아니라도
歸來謝病閉重門 귀래사병폐중문 사병하고 돌아와 귀중한 문을 닫으셨네.
呑聲此日身千里 탄성차일신천리 소리 감추며 이날 몸은 천리를 떠나가니
欲寫哀詞秪斷魂 욕사애사지단혼 슬픈 글 쓰고자 하나 단지 혼을 끊는다오.
이 시는 노헌이 여헌 문하에서 학업에 정진하여 덕업과 문명이 높아 참봉에 제수되어 출사하였는데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지은 만사이다. 만사를 짓고자 하니 혼이 끊어진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볼 때 노헌의 고결한 인품과 높은 학문의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상의 시와 만사 이외에 문집 2권에는 소계(疏啟) 14편, 서 2편, 제문 4년, 갈지(碣誌) 2편, 행장 1편, 문집 3권에는 전책(殿策), 잡저(雜著) 2편, 부록에는 시 2편, 행장, 묘갈명, 묘지명, 만사, 제문, 가장후서, 가장후발 외 4편의 글들이 실려 있다. 이들의 글들을 소상하게 분석하여 감히 평할 수는 없으나, 문치가 섬세하고 다양하며 따뜻한 인간애의 고결한 정신을 담고 있어서 감명을 아니 느낄 수 없으며, 용단과 정대함이 탁월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4. 관료 생활
『노암선생문집(魯庵先生文集』 1권(卷)에 의하면, 공은 선조(宣祖) 30년 정유(丁酉) 1597년 12월 27일(癸未)에 경주 안강현 사리동에서 출생하였다.
2세 때 말을 알아들었고, 3세 때는 글자를 풀이하였으며 곧게 자란 공은 민망할 정도로 남보다 크게 일찍 뛰어나게 영리하여 서책을 보지 않더라도 유아가 읽을 수 있었으며 다소 민첩하게 많은 스승의 글을 외울 수 있었다.
공은 29세 때 별시에 장원하여 73세 상의원정(尙衣院正)을 끝으로 관직을 마치고 79세 하세하였다. 관료생활 44년 동안 제수된 관직 즉 성균관 전적, 공조・예조좌랑, 양제동찰방,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금교도 찰방 등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소를 올려 부임하지 않은 것이 괴로움을 끼치는 것 같아서 마침내 병조정랑, 진주판관, 사헌부지평, 사간원 정언, 시강원문학, 봉정대부평안도사, 성균관직강, 이강도사, 상시사, 순천부사, 의검부검상, 홍문관수찬 지제교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 사인, 삼척부사, 울주부사, 금산군수, 상의원정 등 다양한 관직에 올라 책무를 바르게 수행하여 위민보국(爲民報國)하였다.
이상의 문적을 통해 살펴 볼 때 노암의 효행과 보국정사는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다.
첫째, 대대로 국가 관료를 역임한 문한세가의 후예로 태어났다.
둘째, 2살 때 해언(解言)을 하고 3세 때 글을 이해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생득적으 로 총명한 예지를 지닌 영재였다.
셋째, 아동기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어머님으로부터 가정훈육을 발 받았고, 훌룽한 스승을 만나 면학 정진하였다.
넷째, 논어와 효경에 심취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위기지학을 중시여기며 효도를 실 행하였다.
다섯째,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차례 벼슬이 제수 되었으나 매년 사양하고 도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관직을 탐하기보다 자기 수양을 중시 여겼다.
여섯째, 중앙의 다양한 관직과 여러 고을의 부사, 목사 등을 맡아서 위민봉사 하였다.
일곱째, 볼모로 억류된 소현세자를 잘 받들어 총애를 받았다.
여덟째, 병자혼란을 당하여서는 평안도사로 참전하여 토적하는데 충성을 다 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노암은 국정이 불안한 시기에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와 사별하였으나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해 학문에 심취하였고, 벼슬에 나아가 대소 관직을 맡아 공명정대하게 복무하였으며, 옳다고 판단한 정사에 대해서는 귀향으로 가는 일이 있더라도 정당하게 주장한 관료였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어서 경주 고을을 빛낸 자랑스러운 관료이었기기에 그 정신과 신념, 열정은 현세인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해 본다.
■ 용궁현감 최동량(崔東亮, 1598-1665)
1. 가계
공의 본관은 계림사량부이다. 상조는 조선조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가감 사성(司成)을 역임한 휘 예(예(汭)는 청렴함으로 명성이 높았다. 누전하여 증조 휘 삼빙(三聘)은 순릉참봉(純陵參奉)을 역임하고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 휘 신보는 선교랑이며 가선대부 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아버지는 휘진립으로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이었으며 자헌대부 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정무공이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증(贈)정부인(貞夫人) 서산(瑞山)류씨(柳氏)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장자 국선(國璿)은 행의(行誼)로 사옹원참봉에 제수 되었고, 국침(國琛), 국원(國瑗), 국규(國珪)는 모두 통덕랑이며, 장녀는 진사 이계, 차녀는 사인 이덕장에게 출가하였다.
2. 효행과 우애
공의 호는 송정(松亭)이고, 1598년 경주부 남쪽 이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몇 번 읽으면 곧장 잘 외웠다. 성실하고 부모를 잘 섬겼다. 명을 거역하지 않았고 멀리 나가 놀지 않았다. 그래서 정무공이 매우 아끼고 사랑하였다. 공이 집에 있을 때 부모를 정성으로 모시며 맛있고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며 여러 형제들과 우애가 남달리 자상하고 곡진 돈독하였다. 고아가 된 조카와 혼자된 누이를 돌보며 재산을 덜어 구휼하고 집안일을 조리 있게 다스렸다. 후진들을 정성을 다해 교화하고 타인의 선행을 들으면 도움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1924년(甲子)에 상배(喪配)를 하였고, 6개월 뒤에 정부인 어머니 상을 입었다. 당시 아버지는 가덕첨사(加德僉使)로 근무하고 있어서 공이 부신부관(附身附棺)을 주관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게 하였다. 의심스러운 것은 여헌(旅軒) 선생에게 질문하여 바르게 실행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에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참전하였던 아버지 정무공이 필마(匹馬)로 전장에 달려갔다는 소문을 듣고 공은 눈물을 흘리며 “주상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고, 아버지는 전쟁터로 달려갔는데 신하와 자식 된 자가 감히 편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1637년 목천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의 전사를 듣게 되어 통곡하며 밤을 재촉하여 험천 전쟁터에 도착했다.
시신을 수습하여 갖은 고생을 겪으며 운구하니 행상들도 모두가 탄식하며 도와주고 위로해 주었다. 묘 곁에 여막을 설치해서 3년간 시묘(侍墓)하면서 3년산을 마칠 때까지 집에 가지 않았다. 집이 갑작이 화재를 당해 처자식이 거처할 곳을 잃었지만 집안 걱정은 하지 않고 오직 조석으로 산소를 돌보며 슬퍼하였으니 출천지심에 의한 효행이 아닐 수 없다.
3. 관료생활
공은 1641년(신사)에 대사헌 정세규가 공의 행의(行誼)를 듣고 조정에 보고하여 특별히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천거되었으며, 1646년(丙戌)에는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이 제수 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49년(己丑)에 지평현령(砥平縣令)으로 승진되었으나 그 고을이 청나라 사신이 내왕하는 길목이기에 그들을 접대하는 것은 아버지의 순절과 관련하여 마땅하지 않아서 입궐하여 입소하였으나 받아지지 않아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652년(壬辰)에 개령현감(開寧縣監)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당시 흉년이 들어 기아가 극심하여 도적떼가 대낮에도 노략질하니 선량한 현민(縣民)들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부임 즉시 구거법(鉤鉅法)으로 도적의 우두머리를 적발하여 법도로써 무겁게 다스려서 마을을 안정시켰다.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사사로이 집어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짐작해 볼 수 있다.
1656년(丙申)에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가 제수되었고, 이어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감에 부임하여서는 낡은 옛 제도를 혁파하고 폐단을 없애 백성의 고통을 덜게 하여 정사를 돌본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다.
재상의 뜻에 거슬리게 되어 관직을 버리고 돌아오니 관리와 백성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공의 강직하고 방정한 성품과 분명하고 정밀하게 정사를 처리한 것을 상사가 바르게 인식하지 않아서 관직을 버리고 만 것을 볼 때 공은 의론(議論)에 통쾌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공은 지성으로 효도 하였고,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의례를 행할 때는 여헌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어긋남이 없었다. 관직을 수행함에 청렴결백하여 추호도 백성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았으며, 정의를 구현하면서 바른 정사로 다스렸다.
Ⅲ. 나가는 말
경주 출신 여헌 문인 가운데, 경주김씨 영분공파 어련문중 김경두, 안동권씨 두류문중 권응생, 경주김씨 태자공파 사곡문중 김종일, 연일정씨 하곡문중 정사물, 경주최씨 가암문중 최동량에 대한 가계와 생애, 효행 및 관료생활 등을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을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섯 분의 향현들은 모두가 여헌 문인으로써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 모두가 누대로 관료와 효자를 배출한 전통가문 출신이었다.
둘째, 지극한 효성과 돈독한 우애를 실천하며 모범을 보였다.
셋째, 학문을 함에 있어서 출세를 위한 수단적 가치보다 본질적 가치에 비중을 두고 정진하였다.
넷째, 국란을 당했을 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창의하여 적과 싸웠다.
다섯째, 환로(宦路)에 연연하지 않고, 정사이념에 맞지 않으면 기꺼이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여섯째, 퇴임 후에는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상의 다섯 분은 ‘천지사이에 붙어사는 모든 물건이 나그네 아님이 없다’라는 여헌 선생의 생에 대한 이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시범적으로 보여준 향현(鄕賢)으로 그 가르침을 표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현세인(現世人)들도 깊이 음미(吟味)하고 마땅히 따라야할 표본(標本)이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