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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문학](가을호)의 <시론과비평>란의 <지난 계절의 시 읽기>에 "기이한 시대의 풍경과 시"라는 시평을 실었습니다.
귀한 지면 허락해주신 [생명과문학] 김윤환 편집주간님과 편집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대학원 시절 우리문학 세미나 이후 공식적으로 [문학잡지]에 실린 제 첫 비평글입니다. 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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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지난 계절의 시 읽기>
기이한 시대의 풍경과 시
여국현
김림, 「그곳에만 가면」 (계간 『시와문화』, 2021 여름호, 통권 58호)
김영란, 「고구마」, (계간 『푸른사상』, 2021 여름호, 통권 36)
김학중, 「마스크」, (계간 『문학인』, 2021 여름호)
이동재, 「포스트모던 시대의 시론」 (계간 『불교문예』, 2021 여름호, 통권 93호)
이중기, 「매상가마니와 시집」 (반년간 『작가』, 2021 상반기, 통권 78호)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지만 코비드-19 바이러스 확산은 멈추지 않는다. 더 기승이다. 연일 보도되는 감염자 수가 2천 명을 넘더니 곧 4천까지 치솟을 것이라 한다. 사람들의 발은 더 꽁꽁 묶이고 마음은 한여름 볕 아래 까맣게 타들어 간다. 인간의 노력이 바이러스의 위력 앞에 무력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가운데 지구 곳곳에서는 이상 기후 현상들마저 연일 들려온다. 7월 평균기온이 10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던 브라질에 한파와 함께 폭설이 내리고, 유럽에서는 홍수와 대화재가 동시에 발생했다. 그리스 화재를 보도하는 영상은 제목 그대로 지옥의 한 장면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모두 인간의 탐욕이 지구에 가한 폭력으로인한 당연한 대가라는 점에서 안타깝고 공포스럽다.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팍팍해지고 내일이 아닌 오늘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올림픽은 치뤄지고 선거철은 다가오고 사람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살아간다. 뜨거운 볕 아래 공사장 노동자도, 가게와 좌판을 지키고 있는 상인도, 비대면 공간에서 땀 흘리는 학생도 교사도, 다가올 선거를 앞두고 요란스레 이합집산하는 정치인도, 다 오늘의 자기 일에 분주하다. 그리고, 시인들은 변함없이 시를 쓴다. 이런 세상에 시인은, 시는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여름호 계간지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몇 편을 읽는다.
우리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시간은 배달된다
거리를 두고 시간은 점점 빨라진다
시간과 속도가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두 눈을 뜨고
두 눈을 안간힘으로 뜨고
속도의 거리를 잰다
부딪치지 않게
지나치지 않게
그러면서 빠르게
우리의 얼굴은 흐려져 속도가 된다
두 눈을 뜨고 본다 우리의 허락을
인간답게 우리의 얼굴이 지워지는 것을 허락한다
속도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시간은 빨라지느라 우리를 더 많이 쓴다
우리는 빨리 우리를 시간에 빼앗긴다
휴식이 없이
시간이 온다
표정은 낯선 시간이 되었다
가끔 신호가 속도를 멈출 때
여기가 어디인지 서로에게 묻는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마스크를 쓴 그들은 모두 혼자였다
--김학중, 「마스크」 전문
코비드-19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 길거리에 늘어난 배달 오토바이들이다. 4인이상 집합금지 등의 조치로 가정음식배달이 급증하면서 국내 대표적인 한 배달업체의 경우 2015년 이후 4년 통계만 해도 매출액이 다섯 배 증가했다고 한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오토바이 배달원, 시인의 눈에 마스크를 쓴 그가 보인다. 그가 배달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시간이다. 소비자에게도 그에게도 시간은 곧 돈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하지 못하면 그의 노동은 그만큼의 대가를 잃고, 더 빨리 더 많이 배달 할수록 수입은 늘어난다. 시간은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된다. 그러니 필요한 건 무조건 시간의 단축. 그 위험한 질주 속에서 “얼굴은 흐려져” 이윽고 “지워”진다. “인간답게 지워지는 우리의 얼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미 이윤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인간이니 “얼굴이 지워지는” 것이 “인간답”다는 건 역설적 진실이 된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인간성을 “시간에 빼앗긴” 그들에게 “휴식은 없”다. 얼굴이 사라진 채 마스크로 존재하는 그들은 서로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모른 채 모두 “혼자”가 되어 거리를 달린다. “마스크를 쓴 그들”도, 그들에게 음식을 건네받는 우리도 그렇게 “모두 혼자였다.” 시인이 보는 지금 여기 우리의 풍경은 이처럼 아프고 기이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이륜차 교통사고 건수와 사망자 증가 기사가 떴다. 서울에서 이륜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의 30%가 배달종사자라고 한다. 기이하고 이상한 풍경은 또 있다.
이상하지?
확실히 그곳은 이상한 곳
그곳에만 가면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된단 말이지
저잣거리에서 손이 붓도록 악수하던 기억도
돌아서면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마는
약속이나 하지 말지
뿌리 내리지 못할 공약만을 남발하여
끝내는 부도수표라니
참 이상도 하지
그곳에만 가면
또렷하던 귀가 어두워지고
눈이 슬며시 닫힌다던가
풍요로운 미래를 점지하는 풍수의 땅
그곳에만 가면
모두가 손을 놓고 뒷짐을 진다네
다, 터 탓인 게야
강물에 갇힌 섬
물살 따라 썩은 모래만 불러 모으는 지형 탓
우리 섬이 되지 못한
나의 섬, 너의 섬
---김림, 「그곳에만 가면」 전문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멀산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 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되어 여의도汝矣島가 되었다고 한다.(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내 섬, 네 섬. 서로 자기 섬이라 우길 수도, 서로 네 섬이라 양보할 수도 있는 그 섬에만 가면 하나같이 자기 섬이라고만 우기고, “귀도 어두워지고/ 눈도 슬며시 닫힌” 채 자기가 했던 말도 까맣게 잊고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되어버리는 그곳은 확실히 “이상한 곳”이다. 심부름꾼이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잊은 채 “손을 놓고 뒷짐을 진” 게으름뱅이들이 되어버리는 곳.
그래, 어쩌면 “터 탓”일 수도. “강물에 갇힌 섬,” “썩은 모래만” 모으는 그 지형 탓일 수도. 그러니 썩고 썩은 모래들만 가득 쌓여, 썩은 내 진동하는지도.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고, “강물에 갇힌” 아니 강물에서 스스로 벗어난 썩은 모래들 퍼내고 새 모래 부어 넣는 일, 모래가 못할 그 일, 결국 강물이 할 일. 다시 그 강물의 시간이 오고 있다. 쓸만한 큰 모래, 잘 고를 일이다.
세상은 이런데, 이 기이한 세상에 시는, 시인은 무엇을 하고, 할 수 있을까. 한때 빛나던 이카루스의 날개도 아폴로의 태양 전차도 잃었다는 건 누구보다 시인이 잘 안다. 빛나던 광장의 시간은 가고 고독한 골방의 시간이 세상을 휩쓰는 시절, 시인의 눈은 자연스럽게 자기를 향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땅에 떨어진 날개를 주워든 시인이 자신의 날개가 무엇인지, 어찌 태어난 것인지 성찰할 수 있다는 건. 그 첫 소리는 그러나 아프고 아픈 자조섞인 고백이다.
일찍이 공자께서 뜰을 지나가고 있는 아들 백이에게 물었다
시는 배웠느냐
백이가 대답했다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단다
어느 날 내가 온종일 누워 있는 아들에게 물었다
요즘도 시를 읽느냐
아들이 얼버무렸다
뭐 그냥……
내가 짜증나 말했다
시를 읽으면 사람 노릇을 하기 어렵다
(중략)
내가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왜 자꾸 시를 읽느냐
시는 그로써 좌절케 할 수 있고
그로써 눈멀게 할 수 있고
그로써 고립될 수 있으며
진짜 원망할 수 있다
가깝게는 아비를 고깝게 여기며
멀리로는 모든 정규직
심지어는 대통령조차 발가락의 때만큼도 생각지 않고
쓰잘데없는 인간들이나 책 이름만 잔뜩 알게 된다
(중략)
그나저나 시는 정말 생각에 이로움이 없고 백해무익하다
제발 담배 끊기 전에 시부터 끊어라
--이동재, 「포스트모던 시대의 시론」 부분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던 시절, 시는 날개였고 빛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는 “시를 읽으면 사람 노릇 하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시는...좌절”과 ‘눈멂’과 “고립”의 이름이 되더니 급기야 “생각에 이로움이 없고 백해무익”한 “원망”만 부르는 것이 되고 마침내 담배보다 먼저 끊어야 할 것이 되고 말았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시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라는 시인의 자조섞인 한탄을 누가 탓하며 큰소리로 부정할 수 있을까. 시와 시인의 날개는 이미 꺾였으니.
그러나 답은 언제나 질문 속에 있고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온다 하지 않던가.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시대가 가고, 시 아닌 온갖 ‘말 같지 않은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이기에 오히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시 없이, 시를 배우지 않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가? 사람답게 말할 수 있는가?”
“시야말로 인간 이성이 최고로 발현되는 예술”이라 한 에드가 앨런 포의 말을 떠올려본다. 즉흥적이고 무의미한 말들의 홍수 속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인간 사고의 정수이자, 인간 본연의 언어인 ‘시’, 시를 쓴다는 일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이동재 시인의 저 냉소적인 아이러니는 바로 이 질문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에 시인은 무어라 답할 것인가. 다른 시인의 조용한 답을 들어보자.
우루과이라운드 먼 우렛소리 아래 첫 시집 묶을 때
나는 70년대 아버지 매상가마니 떠올렸다
아버지가 세상에 써 보인 글자는 딱 세자가 전부였다
굵은 새끼줄 겹겹으로 동여 쟁인 매상가마니마다
흰 헝겊쪼가리 꼬리표의 이름 석 자
李哲魯,
이 글자 말고 따로 써 보인 아버지 글씨 나는 본 적 없다
징용 피해 도망간 만주에서 되놈 머슴 살다가
일본으로 밀항해 생선장수 하다가
뒤꿈치로 눌러 담아왔다는 헐값, 일본 지폐 두 자루
동대문시장 포목점에서 불로 말아먹은 뒤
아버지는 매상가마니로만 이름 석 자 세상에 내걸었다
쓰던 낫은 대장간 가서 열 살 손에 맞도록 벼려버린 아비
열두 살 등에 꼬마 지게 지워 산으로 보내고
나중에는 버리더라도 배워 손해 볼 게 없는 건 농사라며
네 열네 살에 쟁기질 써레질도 시킨 독종,
나는 시집 묶을 때마다 아버지 매상가마니 떠올렸다
거기에 이름 걸 만큼 치열했느냐고 차마 묻지는 못했다
---이중기, 「매상가마니와 시집」 전문
첫 시집을 낼 때의 마음을 기억한다. 세상에 처음 나를 다 드러내는 것 같은 그 느낌. 뿌듯함과 함께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두려움. 시인은 어땠을까. 시인은 그때 “아버지”를, 아버지의 “매상가마니”를 떠올렸다. “매상가마니”는 추곡을 한 쌀을 담은 가마니다. 일년 농사의 결과이자 전부. 거기에 달린 “헝겊쪼가리 꼬리표의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가 쓴 유일한 글자였던 이 글자는 그러나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징용 피해 간 머슴살이, 밀항, 생선장수, 뒤꿈치에 담아온 일본 지폐 두 자루, 화재로 날아간 동대문시장의 포목점을 거쳐 남은 아버지 인생, 아버지 삶의 전부였다. “매상가마니로만 이름 석 자 세상에 내건” 아버지는 그 이름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담아 건 것이었다. 첫 시집을 내면서 그런 아버지의 이름을 떠올린 시인은 이후 “시집을 묶을 때마다 아버지 매상가마니”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차마, 감히 묻지 못했다. “거기에 이름 걸 만큼 치열했느냐고.”
“거기”는 두 곳을 향한다. 일차적으로는 아버지의 매상가마니다. 아버지는 정말 그 매상가마니에 이름을 걸 만큼 치열했는가. 시인은 “차마 묻지는 못했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답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리고 시인의 시집. 아버지의 매상가마니 같은 시인의 시집에 자신의 이름을 걸 만큼, 자신의 전 생을 걸 만큼 치열했는가, 스스로 묻는 시인. 누구라도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도 우리도 안다. 자신의 “이름을 걸”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전 생을 거는 그런 마음으로 시를 대하는 그 태도, 그 태도에 답이 있음을. 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말하는 “인간의 언어”로서 “시”가 발아할 수 있음을.
“인간의 언어”인 시가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명이 있다면, 잊어서 안 되는 일, 잊히지 않는 일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김영란 시인에게 제주 4·3 항쟁은 기억이고 기록이며, ‘현재’다.
한 입 베어 물면 가슴께로 오는 통증 내 나이 다섯 살 아버지가 건네신, 마지막 인사하듯이 손에 꼭 쥐어주신,
후다닥 나가시는 길 뒤따르던 총소리, 영문 모른 어머니 내 손 잡고 뛰었지 솔밭 기어 산등성이 올라 토끼처럼 숨었지 별들의 보호 받으며 밤이면 마을로 내려왔어 도둑처럼 제집 털어 해 뜨기 전 산으로 갔어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산이 집이었지 나를 지킨 집이었지 그게 오름이란 걸 커서야 알았어
산사람이 폭도라면 우리도 폭도였지 폭도가 빨갱이라면 우리도 빨갱이지 어느 날 군인에게 잡혀 학교에 갇혔어 예쁘기로 소문난 고모 어디론가 끌려갔지 돌아오지 않았어 물을 수 없었지
풀려나 집으로 와도 집은 집이 아니었지 아버지 찾아 고모 찾아 집에 가듯 산으로 갔어 토벌대다! 하는 찰나 어머니가 꼬꾸라졌어 십 년 넘게 옆구리에 총알 박고 살아야 했지 명 긴 게 벌이라던 어머니, 팔순 넘게 사셨어
아버지 대신 편지가 왔지 마포형무소 소인을 달고
그것으로 끝이야 어디에도 아버지는 없었어 정뜨르 비행장에서 처형 소문이 돌았지 제 손으로 구덩이 파래서 총 쏘아 죽였다지 작은아버지는 거기서 죽었어
기막히고 기막히고 억울하고 억울해 다섯 살 그 가을을 잊어본 적이 없어
아직도 가슴에 걸려 내려가지 않아
---김영란, 「고구마」 전문
두어 달 전 제주 한달살기를 하면서 올레길을 걸었다. 올레길 곳곳에 4·3 항쟁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이 시에 대해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다섯 살 화자의 기억 속 총소리와 함께 사라진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 영문도 모른 채 경황 없이 헤어진 가족, “제 집을 도둑처럼 털어야” 했고, 폭도라면 폭도, 빨갱이라면 빨갱이여야 했던, “군인에게 잡혔다 끌려간 고모가 돌아오지 않아도 물을 수 없었던” 가족. “십 년 넘게 옆구리에 총알 박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 “마포형무소 소인을 달고” 온 편지로만 남았을 뿐 “어디에도 없”는 아버지, “제 손으로 구덩이 파”고, 그 구덩이 속으로 총 맞고 죽어간 작은 아버지. 그 모든 일이 “기막히고 기막히고 억울하고 억울해…잊어본 적이 없”는 “다섯 살 그 가을”이 “아직도 가슴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화자에게 그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시인은 잊을 수 없어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이 기록으로 과거는 시인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기억 속 과거에서 현재의 의미가 된다.
시인이 넘쳐나는 시대다. 한 페친은 페이스북의 50대 이상 남자는 모두 시인인 것 같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시인이 많으니 시도 그러할 것이다. 그 많은 시인과 시가 지금 여기, 제대로 발 딛고 서서 맑은 눈과 가슴으로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고 시를 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러나, 쉽게 답하기 어렵다.
지난 여름 만난 문학잡지들에서 다섯 편의 시를 보았다. 김림, 김학중 시인은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선 이상한 시기의 뒤틀린 풍경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이동재, 이중기 시인은 그런 시대 속에서 빛을 잃은 시의 의미와 시 쓰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김영란 시인은 과거 개인의 기억과 기록을 현재 우리의 기억과 기록으로 옮겨내는 시의 역할을 보여준다. 이들 시와 시인들에게서 오늘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기이한 세계의 풍경과 함께 시인과 시가 해야 할 책무의 성실한 수행을 본다. 그렇게 시는 계속 쓰여야 한다.
<여국현_ 1965년 강원 영월 출생. 2018년 『푸른사상』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새벽에 깨어』, 전자시집 『우리 생의 어느 때가 되면』과 『셀레스틴 부인의 이혼』외 다수의 번역. 『푸른사상』 기획위원, 『우리詩』 편집위원. 중앙대, 방송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