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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원문 글과 사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십시요.ㅠㅠ
https://blog.naver.com/ktusjye/221948044834
제주 본섬 올레 마지막 코스다.
A, B코스가 나뉘어지는 두 곳 중,
15코스 중산간으로 이어지는 A 코스다.
작년 제주도에 정착한 지인을 만나러 가는 옆지기에게
고내포구에 내려달라 부탁하여
16코스 출발점에 도착한다.
용천수, 우주물에서 출발하여
역방향으로 길을 찾아간다.
번화한 포구마을을 지나
밭담 사이로 난 돌길을 지난다.
밭담사이 길 양쪽,
풀이 말끔하게 베어져있다.
아직 2월도 초운을 벗어나는 중 인데
이리 파릇한 풀을 보는 느낌이
다시 한 번 온화한 남녘 기온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뱀이 자주 출몰하고, 비가 오면 물이 넘쳐
마을사람들조차 외면하던 길을
제주올레가 정비하였단다.
뱀의 제주어가 배염이라
'배염올레'라고 명명하였다.
뒤로 완만하게 누운 산이
고내봉이다.
밭 땅바닥에 앉은 농부가
미리 캐놓은 농작물을 다듬으며 담고있다.
고내로를 지나고
일주서로 건널목을 건너서
고내오름, 고내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올레는 고내봉 아래
포장도로로 방향을 안내한다.
홀로 걷는 길,
언제 다시 이곳에 올까 싶은 마음에
왼쪽 고내봉을 향해 걸음을 돌린다.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정상으로 올라간다.
가끔씩 몸을 돌리면
애월항 방파제가 눈에 들어온다.
거침없는 조망을 기대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능선에 다다라
정상 전망대 앞에 선다.
고내봉은 해발 175미터로
고내마을로 부터 한라산을 가린 형세다.
고니오름,고노오름 등으로 불렀다.
고래등허리를 닮은 형상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다섯개 봉우리에 각각 명칭이 붙어있다.
주봉인 북쪽 망오름을 비롯하여
진오름, 방애오름, 넙은오름, 상뒷오름으로 불렀다.
나뭇가지에 가리고 해무가 낀 전망은
그리 맑지않다.
다음을기약할수 있다면 좋으련만
자주 맞게되는 아쉬운 순간이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온 방향 너머로 내려선다.
마을의 이면, 남쪽 사면으로
무덤 수십기가 자리잡고 있다.
계속되는 내리막을 내려가다
잠시 돌아본 남사면이다.
목책으로 잘 정비된 길을 걸어 내려가면
산자락 중턱 넓은 평지에 선다.
그 곳에 자리잡은 사찰, 보광사다.
조금 더 내려가
고내봉을 두른 포장도로,
올레코스와 합류한다.
다시 2차로 애상로와 만나
잠시 따라가는 길,
뒤돌아 본 고내봉이
속내를 드러낸 쑥스러움때문인지
훨씬 왜소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이내 중산간 밭길로 들어선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 시금치가
낯선 운명,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밭담 사이로 난 길이
다시 짧게 이어진다.
대여섯 일손을 구한 농부의 밭이
수확으로 분주하다.
붉은색 물이 오른 매화가
머지않아 봄맞이 축제에 쓸 폭죽처럼
꽃망울을 터트릴 채비를 마쳤다.
드문드문 집들이 자리잡은
마을길을 지나는데
계절을 잊은 장미가
세상이 궁금한듯
담장 위로 빨간 꽃을 올려놓았다.
마을 앞 도로를 지나고
2차선 차도를 지나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고즈넉한 숲 속,
드물게 선 소나무가 만들어낸
동양화같은 풍경속으로 잠시 젖어든다.
그런 호사도 잠시,
성긴 나무 사이 외길을 지난다.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바뀌는 풍경을 맞는다.
올레길을 잘 걷고 있다고
허공에 파닥이는 파랑과 빨강리본은 위안도 되지만
콩나물 시루속 같은 안주도 된다.
혹시 리본만 쫓다가
정작 더 제주스러운 풍광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아쉬움.
하지만 큰 그림은 올레길,
한동안 리본이 보이지 않으면 당황하게 된다.
올레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작 이름도 연락처도 나눌 수 없고
그 순간이 지나면 얼굴도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스친 사람들이 더 애틋한건
무작정 걷기 좋아서 왔다기보다는
무언가 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내 속내가 투영된 것이겠지만...
꽤 많은 가구가 흩어진 마을이다.
그 뒤로는 안개가 가리웠다.
그 너머 바다가 펼쳐져 있을까,
그 때나 지금이나 궁금하다.
걷는다.
그저 걷는다.
뭍과는 다른 풍광을 보러 왔다는 것,
그저 구실에 불과하다.
눈 안에 담기는 풍경은 허상이다.
그 시간들을 그려내면서
이렇게 사진을 열어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그 때를 정리하며
남들과는 또 다른 시간속으로 침잠할 뿐이다.
이 시간마저 지나면
그 곳은 다시 무지가 된다.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흰 말 두마리가 쇠파이프 울타리에 갇혀 한가롭다.'
이 길 느낌을 읽기에
한 계절로는 부족하다.
껍질을 손으로 간지르면
잎이 움직인다하여 간즈름나무,
무더운 여름 꽃을 피우면
백일을 간다는 백일홍나무,
중국 자미성에서 들여왔다하여
자미화라고 불렀던 배롱나무,
잘자라고, 뿌리가 길게 뻗지않아
무덤가에 심었다.
무덤가에 심어진 배롱나무를 볼 수 있다고 소개한
'백일홍길'이다.
하지만 정작 올레길에서는
무덤을 볼 수 없다.
꽃이 피지않은 배롱나무는
구별할 능력이 안되니 어쩔수 없다.
옛날 남해안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룡이 파도를 일으켜 배를 뒤집는 심술을 막기 위해
매년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해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얌전한 처녀를 선발,
곱게 화장을 시켜 바닷가 바위로 보내
해룡이 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 마을을 지나던 왕자가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처녀 대신 바위에 앉아 있다가 용을 퇴치한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얼마 동안 머물던 왕자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왕자는 출몰한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백일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마을을 떠난다.
매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왕자를 기다리던 처녀는
그만 깊은 병이 들어 백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는다.
약속한 날짜에 돌아온 왕자는
그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듬해 무덤 위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마치 왕자를 기다리듯
매일 조금씩 피는 꽃이 백일을 넘겨 이어지므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백일홍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한 번 핀 꽃이 백일간다는게 사실일까?
하지만 실상은
꽃이 진 자리에 새 꽃이 필 뿐이다.
납읍리에 들어섰다.
이 곳 역시 제주 4·3의 아픈 유적이 있다.
1948년 소개령이 내리자
인근 해변으로 주민들은 피신한다.
1949년 소개령이 해제되어 돌아왔지만
여전히 공비가 출몰하는 등 치안이 불안해지자
온 마을을 둘러 높이 4미터 성을 쌓았다.
25개소에 초소를 세웠다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슴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북문과 빌레못 사이
약 삼백미터만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를 '4·3유성'이라고 부른다.
정작 마을을 둘러보며
4미터 높이의 담장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도 약 3백여미터 그 흔적이 있다고한다.
종려나무 뒤로
인공연못이 보인다.
'공동정호', '새못'이다.
1937년, 당시 애월 도로 총감독이
마을 각 호에 필요한 돌을 다듬어 가져오게하여
큰 못과 작은 못 두 개를 만들어
물이 통하게 만들었다.
1973년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인근 사장물과 함께 마을 공동식수로 사용하였다.
납읍리사무소 앞,
무인 농산물판매대가 보인다.
이 고장에서 생산된
무공해 농산물만 취급한다는 안내문이 있다.
관리는 누가하는지,
보관상태가 형편없다.
특히 귤은 상해
곰팡이로 허옇게 변한 것도 보인다.
마을 중심을 지나지만
좀처럼 사람은 보이지않는다.
길가 공중화장실 앞,
올레 중간스탬프가 보인다.
멀리에서 보이던
울창한 숲으로 들어간다.
납읍리 난대림지대, '금산공원'이다.
노꼬메오름에서 흘러내린 용암으로 형성된
애월 곶자왈 끝자락에 있다.
자연림을 원형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다.
훼손을 방지하기위해 설치된 계단이
그 자연스러움을 훼손하였다.
마을 한 쪽을 차지한 곶자왈 만여평이
인간과 공존한다.
인간은 그 속에서
쉼과 위안을 얻는다.
제주도에는 남자들이 지내는 유교식 포제와,
여자들이 무속식으로 지내는 당굿이 있다.
특히 납읍리 포제는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 6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해마다 봉행되고 있다.
납읍리 포제를 지내는
포제단이 있는 포제청이다.
예전 선조들이
풍류를 즐겼다는 송석대와 인상정,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나무 밑 넓은 데크에 후손들의 시화가 걸려있다.
금산공원과 맞닿은 민가가
여늬 마을가 다르지않다.
금산공원을 빠져나와
담장너머 동산같이 안온한 난대림이 보인다.
그 거친 위용을 고스란히 숨기고 있다.
민가 담장너머
귤이 꽃처럼 피어있다.
제법 큰 마을을 지나자
많지는 않지만
가호가 자리잡고있다.
올레는 다시 숲으로 들어가더니
오른쪽 보이지않는 담 아래
훤히 트인 밭이 펼쳐지는데
빽빽한 나무 사이 위태로운 외길이 이어진다.
나무가지의 얽힘, 무성한 덤불,
생긴 모양은 복잡하지만 단조로운 풍경이다.
단순해보이지만 복잡한 곳,
길들여진 편안함속으로 접어들게 되리란
기대 아닌 현실은
즐거운 마음으로
미로같은 숲으로 들어갈 힘을 준다.
1136번 중산간서로를 따라가던 올레가
다시 산간으로 들어선다.
펼쳐지는 풍경이
제주스럽다는 느낌이다.
밭담이 구부러지고
밭 사이 방풍림이 보인다.
한동안 풍경에 매료된다.
왼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과오름이다.
펼쳐지는 풍경은 새로운듯
눈에 익은 느낌이다.
곽봉로에 갈라지는 올레가
선운정사 이정표를 보고 들어간다.
어음천을 지나는 금성 2교,
다리를 건넌다.
역시 물없는 건천이다.
태양을 받으며
사진은 실루엣이 된ㄷ
웅장한 한옥건물,
사극 속 도성을 보는 느낌이다.
몸통이 분해된 커다란 동상,
발과 몸의 일부분만 남아있다.
아마도 불상의 일부가아닐까 추측한다.
돌이 넓게 널부러진 뒤로
한옥이 보인다.
걸어온 길을 잠시 뒤돌아 본다.
빈 벌판에 뜬금없는 비석이 서있다.
'한국인 위령탑',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
사연이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본다.
이 일대 삼천여평 부지위에
오키나와에 조성된 한국인 위령탑을 이전해
'제주 국제 평화공원'을 조성할 예정이었던 것 같다.
오키나와에 조성된 한국인 위령탑은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 옥쇄작전 최후 생존 지휘관이었던
후지키 쇼겐의 노력과 한국정부 등의 도움으로 1975년 세워졌다.
당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을 조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망설임없이 출가했던 그는
2014년 4월 향년 92세의 나이로 제주도 선운정사에서 안식을 찾았다.
생전 "유골을 평화의 섬 제주에,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740인의 한국인 청년병사와 함께
잠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가족들은 이 유지를 받들었다.
후지키 쇼켄스님은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에서
740명의 조선인 징병군을 지휘하던 일본군 학도병이었다.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으로,
후지키 스님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강제노역을 하는 이들에게
일본이 곧 패망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다독였다고 한다.
밤에는 곳곳에서 귀신 울음소리가 같은 것이 들렸는데 알고보니
아리랑'을 목 놓아 부르는 소리였다.
뜻도 모르는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전우애를 다졌다.
미국 점령지에서 먹을 것을 훔치려다 총상을 입게 된 그는
미군 포로로 붙잡히게 됐고, 가까스로 탈출해
전우들에게 돌아왔지만 이미 모두 숨진 뒤였다.
혼자 살아남은 그는 몸을 조국을 향해 뉘인 채 숨진
조선인들을 바라보며 영혼에 약속했다.
'당신들의 유골을 기어코 조국으로 보내드리겠다'고 말이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지만 미군에게 저지 당했고,
스님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말에 곧장 머리를 깎았다.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현장에서 어렵사리 시신을 수습했지만
일본 정부가 당시 숨진 사람들과 합사해버리면서 결국 약속을 지키기 못했다.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던 그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인 1만여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한국인 위령탑'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한국 정부와 레슬러 역도산 등의 도움을 받아
1975년 드디어 한국인 위령탑을 세웠다.
한국 각지에서 공수해온 돌을 쌓아 분묘형태로 만든 탑 옆에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비석도 세웠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본 곳곳 사찰에 흩어져있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한국으로 보내기로 마음 먹은 그는 2014년 92세의 나이로 숨지기 직전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봉환 사업을 추진했다.
<출처 : https://www.news1.kr/articles/?3554448>
선운정사 입구에 다다랐다.
대웅전이 있고
범종각이 보인다.
종의 색깔이 황금색이라
'황금범종각'으로 이름 붙여져있다.
대적광전이다.
대웅전과 대적광전, 어느 곳이 본당일까?
대적광전 앞에 설치된,
일종의 미로찾기 같은 구조물이다.
'선운정사 법성도'라는 안내문이 있다.
사각형의 도형이 '법'에서 시작하여
'불'에서 끝난다는 설명이다.
선운정사에서 건너다 보이는 건물이다.
선운정사에서 불사중인 시설같은데
아직 공사중인지 창문이 없다.
본당 안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보인다.
제주도 문화재 자료 제 10호로 지정되었다.
건너편으로 보이던 신축중인 건물이다.
선운정사의 전체적인 가람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수 없다.
선운정사를 나와 다시 올레를 따라는 길,
대상물교를 건너는데
비스듬한 수로가 보인다.
'금성천'이라는 하천이다.
평소 건천인 수로를 가로지르는
길이 보인다.
올레꾼들과 나누려는 교감이 느껴진다.
귀덕리를 지나는데
밭담길이 길게 이어진다.
'영등할망 밭담길'로 명명하여
밭담을 잇거나 복원하였다.
귀덕리는 제주 신화의
영등할망이 들어오느 것으로 알려졌다.
귀덕리는 예전 '돌여' 또는 '돌덕'이라 불렀다.
북쪽 바다에는 썰물때만 드러나는
여가 둘, 큰여외 작은 여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한 때 학자와 무인이 많이 배출되어
귀덕현으로 승격되었다가 현재는 귀덕리가 되었다.
언덕 위 건물이 보이고
앞쪽 파랑색과 주황색 지붕 개집이 보인다.
시야가 넓게트인 밭이 나타난다.
'사장밭'이다.
예전에는 관전으로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다.
제주도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무예를 길러 자력으로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부임한 목사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백성들이 무예를 익히도록하기 위해
각지에 사장터나 밭을 만들어
신분에 관계없이 평소에 활쏘기를 하도록 장려하였다.
또한 진에서 사시를 열어
특출한 사수에게는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앞쪽 꽤 넓은 연못에
물이 가득 차있다.
연못을 지나는 올레,
'영새생물'이라고 소개하고있다.
예전 제주에서 집을 지으려면
찰흙이 많이 필요했다.
화산지대라 귀한 재료였다.
이곳에 찰흙이 있던터라 파낸 자리에 물이 고였다.
구간을 나누어 식수로 사용하거나
여름철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 외 새들이 날아들어 노닐어
염새서물, 염서생이서물 등으로 불렀다.
일주서로를 지난다.
마을 앞,
헐벗은 팽나무사이로 들이비치는 햇살이
옅은 안개에 흩어져 부담스럽지않다.
바다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들녘,
양상추 밭 끄트머리에 들무더기같은 암석이
검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눈으로는 구별이 쉽지않지만
암석군 위 반석에 거대한 궁돌이
1702년 탐라순력도에 유적지로 표시되어있는 선돌이다.
그 형상에 위엄과 신비를 읽어낸 선조들은
마을의 액운을 막고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를 지냈었다고 한다.
출발이 늦어진 탓에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데다
구름에 가리워 어두운 느낌이다.
옅게 드리운 안개까지
사진에 담긴 느낌이 몽환적이다.
가는 길 오른쪽 안에
망대가 있고 그 위에 비석이 보인다.
길 건너 오른쪽에
수원리사무소가 자라잡고있다.
한 해 전, 저쪽에서 올레를 걷다가
방향을 잘못잡고 A코스로 들어섰다가 돌아선 기억이 있다.
오늘 여정의 종점,
공교롭게도 제주 본섬 올레의 종착지,
15코스 A, B구간 분기점에 이르렀다.
아직 섬 세 곳이 남았지만
제주 본섬 올레를 완주한 느낌이 뿌듯하다.
출발한 곳과 끝나는 곳이 다른,
교통편이 가장 큰 애로였다.
가장 큰 아쉬움은
내가 누린 올레가 1/4쪽 이라는것이다.
온전히 즐기려면 사계절,
꽃과 무더위와 단풍과 눈을 만끽해야 하는데
어정쩡한 간절기에 마무리한 것이다.
어차피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나름대로 만족하고자 한다.
그 이후로 두 달 여,
제주도에 머무르며 숲길과 오름을 즐겼다.
뭍 안쪽에 살며
동경하다시피했던 바다는 많이 들어찼는지
기대 이상의 만족을 느꼈다.
아뭏든 일정대로 정리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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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차장님의 발길따라 저도 마음으로 걸어봅니다.
마무리 여정까지 무사히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 오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