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기근에 대비한 식량조달 방안. 救荒補遺方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一山 金斗鐘(1896~1988) 박사 기념문고안에 구황서가 1종 들어 있다. 그간 이 코너를 통해 몇 종의 구황서를 소개한 바 있다. 『救荒撮要』(14회, 500년 이어온 世宗의 濟生偉業, 1999년10월18일자), 『救荒??穀秘方』(414회, 닥쳐올 兵難에 생명을 보전할 方策 - 2009년4월27일자), 『救荒指南』(543회, 강요된 굶주림, 그 아픈 기억, 2012년6월28일자, 그리고 『新刊救荒撮要』(683~685회, 2015년6월11일, 6월18일, 6월25일자) 등이다. 특히 1660년(현종원년)에 간행한『신간구황촬요』는 오늘 소개할 책과 마찬가지로 신속이 펴낸 책이라서 연관성이 깊다.
김두종(1896~1988)은 의사학자이자 서지학자로 일평생 수없이 많은 전적문화재와 고서적을 직접 수집, 발굴하여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대표작 『한국의학사』(탐구당, 1966)와 『한국고인쇄기술사』(탐구당, 1972)에 집적되었다. 그는 생전에 모은 전적 가운데 귀중한 자료의 상당수를 지난 1970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였고 도서관에서는 그의 아호를 따서 개인문고인 ‘一山文庫’를 별도로 설치하여 기증 자료를 비치, 운용해 오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는 지난 2007년 김두종이 기증한 ‘일산문고’ 귀중 자료를 대상으로 전문가의 해제와 목록을 곁들여 『선본해제』를 간행한 바 있다. 이 해제집에 수록된 자료들은 2003년부터 도서관에서 추진해 온 고서해제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186종 628책을 대상으로 하였다고 밝혀져 있으며, 1945년 이전 수집자료는 조선총독부고서분류법을, 1946년 이후 수집분에 대해서는 박봉석편 한국십진분류법(KDCP)에 따라 분류해 놓았다.
일산문고본 『선본해제』에서는 총류, 철학·종교, 역사·지지, 어학· 문학, 정법·경제·군사, 이학·의학, 산업·교통 등 이상 7가지 대주제로 구분하여 분류하였다. 이렇듯 기증서의 분류항목으로만 보아도 예술과 공업을 제외한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수집된 일산문고의 다양성과 관심영역의 방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이학·의학편에 의서로 보이는 책에 대한 해제는 단 1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아 전공자의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강점기 의학을 전공하고 『한국의학사』와 『한국의학문화대연표』(탐구당, 1982)라는 의학문화사에 대한 전문저작을 펴낸 학술적 성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 다른 한편, 해제집 권미에 첨부된 일산문고부록에도 다수의 의학서가 눈에 띠어 별도의 논구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행이도 일산문고 선본해제에서 전혀 보이지 않던 의서 해제는 뒷날 동 도서관의 『선본해제』 15집(2013, 총986종 가운데 148종 381책 상세해제 수록.)에서 의서류만을 대상으로 별도의 해제집을 펴냄으로써 다소간 부족한 공백을 메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일산문고본 의서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해제는 『醫林類證集要』,『增補萬病回春』,『痘瘡經驗方』등 겨우 3종에 불과해 일산문고 의서류의 전모를 파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며, 그 가치와 중요성을 파악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의서류에 해당하는 문헌은 총 20종 57책에 달한다. 이 가운데 같은 책인데 판종만 다른 판본을 감안하여 제하면 의서의 종수는 『고사촬요』4종, 『증수무원록』3종, 『증보만병회춘』2종을 비롯하여 『東醫寶鑑(雜病篇)』, 『時種通編』, 『攷事新書』, 『欽欽新書』, 『東垣十書』,『痘瘡經驗方』등 14종에 상당한다.
전체 20종 의서를 주제별로 분류해 보면 『의림류증집요』, 『동의보감』, 『증보만병회춘』, 『동원십서』등 종합의서가 4종, 『시종통편』, 『두창경험방』등 방역서 2종, 『흠흠신서』, 『증수무원록』등 법의학서 2종, 군진의학서 1종(『군중의방비요』), 구황서 1종(『구황보유방』), 양생서 1종(『중정준생팔전』), 수의서 1종(『신집찬도원형료마집』), 그리고 의학상관서 2종(『고사촬요』, 『고사신서』) 등이다.
俗方, 창의적인 전승지식의 활용, 救荒補遺方
이 책의 편찬 경위를 살펴보면 결국, 단독으로 편찬되기보다는 기존에 전해지던 『救荒撮要』를 비롯한 구황서의 부족한 면모를 보충하고 새로운 지식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660년 判中樞府事의 직임에 있던 송시열이 쓴 『신간구황촬요』의 서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편찬 당시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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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황보유방』 |
“…… 서원현감 신속은 세종대왕께서 펴내신 『구황촬요』1편에다 보유방을 붙이고 언해하여 널리 배포하였다. 보유방은 촬요에 없는 것을 매우 자세하게, 또한 매우 적절하게 수록하였다.” 여기서 세종 때 구황서란 사실『救荒辟穀方』인데, 후대 명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구황촬요』를 간행하면서 항상 세종대 처음 펴낸 것을 기본으로 삼았기에 두 가지 책을 동일시하였다. 하지만 현재 아쉽게도 세종대『구황벽곡방』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이 책 『구황보유방』의 편찬을 주도한 신속은 발문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옛날 세종대왕께서 백성들이 굶어 죽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벽곡방을 펴내어 …… 명종대에도 가장 요긴한 것을 뽑아 언문을 붙여 『구황촬요』라 하고 팔도에 널리 배포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흩어지고 潛谷 金相公(金堉)이 다시 간행하였으나 이 역시 산일되어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자신이 새로 보유한 방식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다음에서 그 경과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이 고을(西原, 즉 지금의 청주지방) 수령으로 온 뒤에 불행하게도 흉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게 되었다. 그러나 수령으로서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을 수수방관만 할 수 없어 이 책을 다시 펴내기로 하였다. 이에 醫方書를 참고하고 냉이를 채취하여 먹는 法, 토란재배법 등 듣고 본 경험을 보유하여 재난에 해를 입어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한다.”
이 발문을 쓸 당시 신속의 벼슬은 通政大夫 行西原縣監, 西原鎭兵馬僉節制使로 되어있다. 다시 풀어서 설명하자면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새로 즉위한 1660년 『구황촬요』에 누락된 구황법을 중국에서 입수한 서적과 민간에서 전해진 俗方에서 채집하여 『구황보유방』을 편찬하고 다시 언해를 붙인 다음, 이전에 나온 『구황촬요』의 내용과 합하여 『신간구황촬요』라는 이름을 붙여, 널리 펴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중국을 통해 입수된 새로운 지식들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자. 인용서에는 ‘본초’와 ‘齊民要術’, ‘范勝之書’, ‘壽世’, ‘入門’이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證類本草』, 『齊民要術』, 『范勝之書』등은 조선 전기부터 널리 이용되어왔으니 새로울 것이 없고, 고작 명대에 나온 『수세보원』이나 『의학입문』정도가 새롭다 할 것이니 그다지 신지식을 대폭 수용했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어색해 보인다.
이에 비해 전래의 경험지식이라 할 ‘俗方’은 여러 곳에서 수재되었는데, ‘辟穀絶食方’에 3조, 羊蹄根 1조, 芋 1조, 大棗 1조, 萎蕤 1조 등 다수 등장한다. 또 인용서가 밝혀지지 않은 雜物食法의 여러 조문들이나 杆城葛根, 造淸醬法, 謫仙燒酒方 등도 역시 조선에서 전래되거나 대대로 전승된 경험지식이 크게 반영된 내용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잡물식법을 보면 솔잎을 잘 찧어 걸쭉하게 갈아서 여기에 곡물가루를 넣어 묽게 죽을 끓인다. 예전 방식은 처음에 찧어서 덩어리 채 햇볕에 말려 다시 찧어 가루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맛도 나빠질 뿐만 아니라 죽을 끓이기 어렵다고 적혀 있다. 또한 옛사람들은 흉년에 黃蠟을 먹고 굶주림을 면했으나 이것을 삭이려면 반드시 대추를 씹어 먹어야 한다고 말해 그간에 실제 경험에서 채득한 실전 지식들이 보태어 졌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