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환영합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밥”을 읽고)
그래도
호감
내 주변에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보다 박강수의 ‘바람이 분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고집한다. 갈대 서걱거리는 소리 같은, 에드가 모루의 첼로처럼 낮게, 깊숙이 서로의 것을 마모시키면서 같이 마모되면서 내는 소리 같은 이소라의 음색은 진하다. 무슨 노래든 불렀다 하면 슬프다 못해 처연하다. 눈물 나게 만든다.
아말피 코스터 해변을 배를 타고 가면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들을 땐 더 눈물 났다. 고개를 바람에 맡기고 하늘과 바다, 벼랑 끝에 들어 선 집들을 보면서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울고 있다. 해변의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지금 이 순간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느낌이 든다. 그 노래 말들을 생각해 보면 사랑과 이별도 내 것인 양 느끼고 가슴 아파한다. 그런 사랑의 아픔을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다.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이별이고, 이별보다 더 슬픈 것이 망각이라고 했다. 망각하면 사랑했던 기억마저 지우니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한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고 그래서 모두가 좋을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가진 어미라면 다 알거다. 내 자식 일이라면 뭐든지 할 사람이 어미라는 걸. 작가가 사랑이란 같이 크레바스에 빠져 죽는 일이 아니라 날개가 없더라도 하늘을 사랑하는 라이트 형제의 노력과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을 때 고마웠다. 매일매일 내가 날개를 만들어 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사람은 조금씩은 변한다. 그게 눈에 확 보이는 건 아니지만 서로 부딪히다 보면 조금씩조금씩 서로 방향을 수정한다. 가끔씩은 한 마디씩은 들어 주려고 하는 노력들을 나름은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조금씩조금씩 서로 달라져 있다. 나는 그걸 믿는다.
‘버섯 전‘ 이야기에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라는 노랫말을 그대로 옮겨 적어 놓았다. 같은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호감이 간다. 호감가는 이유도 많다.
‘바람이 분다.만큼 좋아하는 노래가 또 있다. 이현우의 ‘비가 와요’다. 이현우는 사실 체구부터가 그렇게 크지도 않다. 베스트 드레서처럼 말쑥한 옷차림의 이현우, 그 갸느린 남자가 부르는 노래는 기대 이상이다. 비 오는 날 들으면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열 번은 기본이다. 작가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쓴 작가가 보고 싶어서 서울서 뱅기 타고 조금 전에 내려왔다. 버스는 너무 오랜 시간이라 힘에 부칠 것 같아서. 급성 편도선염과 근육통이 와서 며칠 동안 살 떨리게 아팠다. 지금도 여진처럼 몸이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나기는 한데 열은 떨어졌고 근육통도 참을 만하다. 운전하기 힘들어서 남편보고 모임장소까지 태워 달라고 하려다가 관뒀다. 남편과 성씨도 같은 윤가여서 눈인사라도 드리고 가라고 할까 하다가 얼른 멈췄다. 남편이 얼른 한 다리 걸치고 바로 따라 붙이는 불상사가 날까봐서.
추억의 소환
두 번째 이야기는 달래 된장찌개다. 작가는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들을 적었다.
내게도 따뜻하고 좋기만 한 외할머니가 계셨다. 한실에 밭 매러 가실 때도 나를 데리고 가셨다. 언덕쯤에 난 익은 땡깔(꽈리)을 따서 주고 밭 두둑 옆에서 소꿉놀이를 하면서 혼자 잘 놀고 있으라고 하셨다. 어린 나는 온갈 풀을 따서 김치도 만들고 나물도 무치며 놀았다. 할머니가 깔아 주신 무명천에 앉아 땡깔로 구멍을 파서 씨앗을 빼내고 그 안에 텅 빈 공간을 만든다음 꽈리를 불기도 했다. 물론 꼭지와 연결된 부분에 힘을 주다 터뜨린 게 훨씬 많았지만. 또 어떨 땐 새콤달콤한 그 맛에 꽈리를 만들기 전에 냉큼 주워 먹어 버린 적이 더 많았다. 할머니는 새벽장에 갈비단을 사러 가실 때면 항상 나를 데리고 가셨다. 나무장사가 파는 장작이며 갈빗단을 어느 놈이 실한지 잘 살핀 다음에 한 단을 고르시고는 춥다며 꼭 의자에 앉쳐놓고 펄펄 끓는 단술 한 사발 사 주셨다. 할머니가 하고 계셨던 명주 수건을 풀어 머리에서 볼까지 칭칭 동여매 주시고도 또 옷매무새를 다잡아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외할머니는 추로 흰 옷을 입으셨다. 늘 손으로 풀을 하셔서 항상 밥알 냄새가 났다.
외할머니가 군불을 땐 다음에 남은 잔불에 생선을 구워 주셨다. 할머니처럼 작은 체구에 생선, 메가리다. 작아도 뼈대 있는 놈이어서 항상 칼로 포를 뜨듯이 등의 뼈를 떠낸 다음에 모태 위에 올려 왕소금을 칠칠 뿌려 구워 주셨다. 아궁이 앞에 앉아 지켜가며 타지 않게 잘 구운 매가리 위에 잔파를 송송 썰어 갖은 양념을 넣은 양념장을 끼얹어 주시면 얼마나 그 살이 연하고 맛이 있던지. 언니도 그 생선이 얼마나 맛있던지 자기에게 20원이 생겼는데 그 돈을 외할머니께 드리며 시장가면 메가리 사 와서 꼭 구워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해 주었다.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약과를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쌀을 씻어 꼬두밥을 지어 돗자리에 펴서 말린다음, 노릇노릇 볶아 가루를 내셨다. 알갱이가 뭉치지 않도록 일일이 손으로 비벼가며 엿물을 끓여서 조금씩 나누어 부어 치대고 또 치대셨다. 동글동글 팥소처럼 뭉친 공모양의 반죽을 참기름칠을 한 약과틀에 넣고 볼쏙 조금 올라올 정도로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꼭꼭 누른다. 다 맡든 것은 다시 약간 말린다. 솥뚜껑 위에 기름을 붓고 자작하게 튀겨내듯이 노릇노릇 구워낸다. 집청을 한 약과는 껍질 벗겨 실낱같이 곱게 채 썬 밤을 말려 껍질 벗긴 깨를 입혀 고명을 한다.
요즘 백화당의 약과는 그 맛의 근처도 못간다.
색색의 전과도 야채가 알른알른 반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아름답다. 엿이 너무 많아도, 너머 작아도 안 되는 약과보다 한 수 위의 음식이다.
외할머니가 그렇게 만드셔서 차리는 명절상은 꽃밭이다.
해봤지만 도저히 흉내도 못 내고 있다. 외할머니가 많이 그립다. 지금은 내가 예쁜 옷도 사다 드리고, 편한 신발도 사다 드릴 수 있는데. 자박자박 걸어서 모시고 구경도 시켜 드릴 수 있는데 안 계신다. 겨우 외할머니 기일이 되면 언니에게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 사다 상에 올리라고 봉투 하나만 삐쭉 내민다.
외할머니가 가르마를 타고 쪽진 머리를 하고 항상 흰 옷을 입으셨다. 외할머니가 수줍게 웃으시던 모습, 긴 휘파람 소리처럼 한숨을 토해내시던 소리가 생생하다.
다시 너를 만나고
교직을 떠난지 몇 년이 되었다가 다시 잠시 기간제 교사를 하게 된지도 몇 달이 지났다. 여전히 즐겁다. 남들은 1학년이 힘들다고 하는데 난 1학년이 제일 귀엽다. 아이를 처음 보내 보는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히 궁금한 게 많다. 대부분의 민원 전화도 1학년 학부모 전화가 많단다. 선생님들은 그게 가장 1학년 하기 힘들다고 한다. 기간제 구하는 문의 전화가 오는데 1학년 이라고 하면 바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고 한다. 나는 1학년이라고 해서 조금 긴 기간이긴 해도 하겠다고 했는데. 그래 봤자 여덟 살 아이다. 지가 아무리 얄밉게 굴고 약아봤자 아이는 아이다. 어떻게 그렇게 고자질을 열심히 하는지 내 같으면 담임 선생님이 건성건성 대꾸하면 그냥 포기해 버릴 만도 한데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며 끝까지 할 말을 다 한다. 얼마나 열심히 말하는지 모고 있으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누가 이 늙은 여자를 그렇게 예쁘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고, 매일 편지 써 주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도 매일 달라붙고, 누가 그렇게 인간을 온 몸으로, 온 맘으로 환대 하겠는가?
작가는 어묵탕에서 여자 아이의 긴머리를 샴푸 해주고 빗겨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그 이야기가 나올 때 맞아맞아 라고 공감 100%를 했다. 교직을 떠난 지 제법 되어서 놀기만 했는데 여름이 다가올 무렵 기간제 교사를 하러 나오라고 하자 몇 학년이냐고 물었다. 1학년이라고 했다. 기간이 좀 길다고 했다. 그게 좀 걸리긴 했지만 1학년이라는 소리에 얼른 한다고 했다. 내가 1학년 하고 싸워서 뭐 할 거고? 그냥 애들이 행복하게, 배움이 즐겁게 하면 되는 거지. 학교가 오고 싶은 곳이고, 즐거운 것이라는 걸, 배움이, 친구가 좋다는 걸 느끼게 해주면 그만이다. 1학년 선생님은 준비물이 많다.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도장을 알림장이나 공책에 찍어 주길 원한다. 그래서 스탬프도 색깔별로, 도장도 깔맞춤을 한다. 뿐만 아니라 여자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준비물도 있어야 한다. 여자 아이들에게는 머리빗도 브러쉬와 가르마를 탈 수 있는 꼬챙이 촘촘한 밧이 있어야 한다. 고무줄도 색색별로 있어야 하고, 가끔 방울과 핀도 있어야 한다. 어떤 여자 아이는 보면 어떻게 저렇게 머리를 예쁘게 땋아 묶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해 보내는 사람 있다. 그런 반면 꼭 우리 딸아이처럼 사자 털 같이 그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헤치고 오는 아이도 있다. 나는 우리 아이 다닐 때 엄마가 바쁘다는 이유로 무조건 단발머리에 머리띠를 하라고만 했지 제대로 무릎 앞에 앉혀서 머리를 묶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제 그 못 해 본 것들을 지금 해 볼 수 있게 된 거다. 아이보리 비누 냄새 나 땀띠 나면 바르는 파우더 같은 가루분 냄새가 나는 아이들의 살 냄새를 맡으며 머리를 빗겨 준다. 무릎에 앉혀서 머리를 빗겨주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그러면 보고 있던 친구들도 멀쩡한 머리를 몇 가닥 뽑아 일부러 다시 빗겨 달라고 한다. 내가 딱 보니까 일부러 푸는 거 아는데. 그러면 또 묶어 준다. 그런 것도 행복한 추억이다. 나는 거인의 정원처럼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면 새도 울지 않고, 꽃도 피지 않은 죽은 세상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은 모든 것들을 살아 있게 해준다, 나는 세상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림, 열중하는 모습, 끊임없이 쏟아내는 질문들 그런 것들을 때로는 성가스러워 하면서도 기특하고 사랑한다.
발제-당신을 기억하는 밥(그래도).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