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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너 철드는 거 보고 죽는 거야.
동미: (뜨거워서 절규) 내 소원도 죽기 전에 너 정착하는 거 보고 죽는 거다~
나난: (문득) 야, 그럼 정준이랑 해!
동미: 뭐어? 정준이?
씬80. 떡볶기 포장마차
떡볶기를 이쑤시개로 찍어 먹으면서
나난: 사기결혼도 정준이 정도 돼야 동의해주지 누가 받아주겠냐?
동미: 농담도 좀 가려서 해라, 응? 걔 지금 상태가 어떤 줄 아냐?
나난: 김지혜?
동미: 그 기지배 사표 낸단다. 청첩장 찍을 일만 남은 거지 뭐, 이제.
나난: (오뎅국물 후루룩 마시고) 존경스럽다.
동미: 나는 준이 그 자식이 더 대단해. 어떨 때는 저거 저능아 아닌가 싶다니깐. 도대체 지한테 뭐가 남는다구 그 지랄이야, 지랄이…….
나난: 사랑이 남는다잖니.
동미: 그러니깐 저능아지.
동미가 대사 치고 있으면 은근슬쩍 자기 앞으로 떡볶기 접시 끌어오는 나난.
그 모습 알아채고 포크로 마지막 떡볶기 확 찍어버리는 동미.
씬81. 정준의 사무실
사무실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는 지혜.
고개 숙이고 있는 정준에게 오더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며 허리 숙여 인사한다.
정준, “네…….” 하며 같이 고개 숙였다 들면 지혜와 눈이 마주친다.
씬82. 지혜의 집 앞 (밤)
가로등 아래에 서있는 정준, 담배를 피우고 있다.
벤츠 한대가 골목으로 들어와 집 앞에 선다.
몸을 숨기는 정준.
차에서 지혜가 내리더니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정준. 참담한 심정이다.
출발하는 벤츠. 지혜가 대문에 들어서려는데…….
정준, 비장한 표정으로 담배를 훅, 튕겨버리더니 갑자기 벤츠 앞으로 뛰어든다.
끼익, 멈추는 벤츠. 놀라는 지혜.
놀란 벤츠남, 운전대에 고개 묻고 있다 천천히 고개 들면 살벌한 표정의 정준, 팔을 벌리고 차를 막아서고 있다.
벤츠남OFF: 뭐, 뭡니까?
대답도 없이 꿈쩍 않고 서있는 정준.
벤츠남: 당신, 뭐야?
벤츠남, 겁에 질리는데 정준, 노려보며 손으로 척! 뭔가를 가리킨다.
일방통행 표지판 인서트.
정준, 인상 북 긋고 거칠게 팔 휘저어대는…….
정준: 절루 빼, 절루!
이를 보고 있는 지혜
씬83. 동미의 방
동미, 침대에 누워 사업계획서를 슬렁슬렁 넘겨본다.
그때 철커덕,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미는 밖을 쳐다보며 “준이니?” 물어본다.
그런데 밖에서는 대답 대신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쿵, 들린다.
동미, 후다닥, 달려 나간다.
정준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와서는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힌다.
방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 가 꽝 하고 닫는 정준.
곧 이어 ‘철컥’ 문 잠그는 소리와 쿵! 하는 소리 들린다.
동미: 야, 괜찮아? 문 열어봐, 어서.
정준: (OFF) 괜찮아! 혼자 있게 내버려 둬!
동미: 문 열어보라니까!
정준: (OFF, 버럭) 괜찮다니까!
동미: ……. 거기 내 방이야.
잠시 후, 동미의 방문 열리고 비틀거리며 나오는 정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동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씬84. 정준의 방
비틀비틀 방에 들어선 정준, 풀썩 침대에 몸을 던진다.
하아~ 숨을 몰아쉬던 정준, 문득 주머니를 뒤적여 줄줄이 붙어있는 복권 10장을 꺼낸다.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으로 복권 한 장을 긁는다. 또 다른 것을 긁는다.
정준, 보다가 복권을 던져버린다.
싱글즈 3
씬85. 본사 건물
긴장된 얼굴로 본사건물을 들어가는 나난.
나난NA: 며칠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서트> 호텔커피숍
선보러 나가서 남자 앞에서 수줍은 듯 고개도 제대로 못 드는 척 하는 동미.
제법 핸섬한 상대편 남자는 동미가 맘에 드는 눈치다.
카메라 빠지면, 여기저기 선보는 커플들……. 복장만 다를 뿐 비슷비슷한 분위기.
나난NA: 동미는 예쁘게 치장을 하고 선을 보러 나갔고…….
<인서트> 정준 사무실
책상 위에 박스를 올려놓고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정준.
나난NA: 정준이는 사표를 냈고 -굳은 얼굴로 로비를 걷는 나난.
나난NA: 나는 마음의 결정을 미룬 채 삼사분기 영업회의를 하러 본사에 갔다.
씬86. 본사 복도
땡, 하고 승강기가 층에 도달하는 소리.
승강기 문이 열리자 내리는 나난, 걸어가려다 흠칫 멈춘다.
너무나 눈에 익은 복도의 풍경. 독특한 마네킹이 동상처럼 서있다.
이곳은 전에 근무한 의류사업부가 있는 층이다.
나난, 서둘러 승강기에 다시 타려고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올라가고 있다.
당황하는 나난. 비상구를 찾는데 뒤에서 “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이영숙과 김지현이 마네킹을 들고 가다가 다가온다.
뒤에서 김지현과 이야기하며 웃던 천부장의 얼굴이 뭐 씹은 표정이 된다.
이영숙: 웬일이세요?
나난: (짐짓 환하게 웃고) 분기 영업회의. 오래간만이다. (지현에게) 지현씨! 새 브랜드 잘 나간대매? 축하해.
김지현: 선배님 덕분이죠. 선배님이 워낙 원만하셔서 그런지, 여기저기 거래처 도움 많이 받았어요.
나난: (민망) 어, 그게 내 덕인가, 지현씨 능력이지……. (천부장 보며) 천부장님!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악수 청하며)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천부장: (얼떨결에 손잡고) 어……. 어.
이영숙: 우리 오랜만에 라운지커피 맛 좀 볼까?
나난: 아냐. 커핀 다음에 하자. 좀 늦었거든. (천부장 보고) 부장님, 담엔 확실하게 매상 올려 주실 거죠? (천부장의 히프를 툭툭 치며) 그럼 수고하세요.
한줄기 진한 땀을 흘리는 천부장. 영숙과 지현도 벙쪘다.
쾌활한 걸음걸이로 비상구문으로 향하는 나난.
나난NA: 그들을 보는 순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원래 나는 여기에 있어야 했다.
씬87. 하이락 클럽
나난, 헬퍼들과 함께 입구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한다.
심난한지 경직된 표정의 나난.
나난NA: 아니다, 나는 여기 있어야 한다. 웃어, 나난! 넌 잘하고 있잖아. 웃어!
굳은 표정 애써 풀며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미소 짓는 나난.
나난NA: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못난이예요.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나가는 손님.
나난NA: 웃기세요? 네, 저두 제가 웃기네요.
왁자지껄한 홀 내를 애처로이 바라보는 나난.
나난NA: 맥주두 웃기고……. 샐러드두 웃기고……. 누룽지탕두 웃기고…….
기운 빠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들어오는 점장.
나난NA: 나 같은 인간에게 월급 주는 저 아줌마도 웃기네요……. 아~~ 웃긴다!!! 하하하
혼자 껄껄 웃는 나난.
그때, 점장 뒤에서 삐죽이 나타나는 상호. 팔에 깁스를 했다.
웃음을 거두고 상호를 보는 나난.
<CUT TO>
혼자 시무룩히 앉아있는 상호.
점장, 힐끗 상호를 보곤 이내 모른 척 하며 데스크에서 업무를 본다.
상호에게 다가가는 나난.
가만히 보다 상호의 깁스에 손을 뻗는 나난. 상호가 찔끔하다가 가만있다.
나난, 펜으로 상호의 깁스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는 상호.
열심히 그리는 나난.
깁스를 물끄러미 보는 상호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깁스에 꽤 능숙한 솜씨로 그려진 만화 캐릭터.
상호, 씩 웃는다. 나난도 씩 웃는다.
씬88. 레스토랑
탁자 위에 반지 함을 꺼내 놓는 나난.
수헌은 긴장된 얼굴로 난을 쳐다본다.
난은 반지 함을 쑤욱 수헌 앞으로 밀어버린다.
수헌은 절망적이다. 체념하듯 반지 함을 집어드는 수헌, 쓸쓸히 반지 함을 툭 열어본다.
안이 비어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난을 쳐다보는 수헌.
난이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어 보여주면 손가락에 껴져있는 반지.
얼굴이 환해지는 수헌. 반지가 끼어져 있는 손을 든 채 환히 웃어주는 나난.
나난: 좋아?
수헌: (웃으며) 응. 좋아.
수헌 웃다가 짐짓 정색을 하더니 묻는다.
수헌: 저번에 했던 질문……. 다시 할게. 천만 원 벌어다주면 일 그만 둘래?
나난: 그만두면?
수헌: 공부하라고. 패션쪽 아직 하고 싶어하잖어. 이제라도 본격적으로 공부해서 다시 덤벼보는 건 어때?
나난: 공부?
수헌: 사실은 나 곧 뉴욕에서 근무하게 될 것 같아. 그래서 결혼 서둘렀는데 오히려 잘됐다. 공부하고 싶으면 해. 물론 천만 원까진 못벌어다 주지만…….
수헌을 쳐다보는 나난…….
씬89. 용산 전자 상가
나난과 동미, 카탈로그를 들고 컴퓨터 매장을 구경하며 걷고 있다.
나난의 표정이 그리 밝진 않다.
동미: 뭘 고민 때려? 그게 네가 원하던거 아니었어?
나난: 맞어…….
동미: 아침 적당히 해주고 밤에 적당히 서비스만 해주면 남편이 학비도 대주고 용돈도 주겠다는데, 그런 찬스가 어디 있냐?
나난: 맞어…….
동미: 이야, 남자 하나 나타나니까 몽땅 해결되는구나.
젠장, 누군 쓰리 고에 청단, 홍단 다 하는데
난 이게 뭐냐? 어휴, 배야, 아이고, 배 아파 죽겠네.
나난: 그러지마, 나도 찜찜해. 남의 손 빌려 밑닦은 것처럼…….
내가 원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이뤄졌는데……. 뭐냐, 이 허한 기분은…….
동미: (어깨동무하며) 찜찜하긴 뭐가 찜찜해? 그게 니 복인데…….
나난: 그런가? 그래두……. 다시 공부 시작한다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동미: 그나저나 뉴욕 갈려면 일 그만둬야겠다. 겨우 감잡은 거 같더니, 아깝다야…….
나난: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심각해진다.)
동미: 왜?
나난: (울상) 동미야, 나 진짜 결혼해? 나 진짜 결혼하는 거야?
씬90. 패스트푸드점
동미: (끄덕이며) 응!
맞은편의 나난, 햄버거 입에 한가득 물고 눈 똥그래지며 놀라는
나난: 세상에! 기어코 결혼하는구나!
동미: 걔 청첩장 받던 날, 대빵 술 처먹고 와선 통곡을 해대는데……. 아휴, 정말 등신이 따로 없더라.
나난: 정준이도 불쌍하긴 하지만, 지혜 걔도 대단하다. 부럽다, 부러워! 어차피 인생은 한방인데, 난 왜 그런 거 한번 못해보는 거지? 참, 너 선본 건 어떻게 됐어?
동미: 말도 마. 정육점의 돼지 고기된 느낌, 뭔지 알겠냐? (콜라 들더니) 자자, 꿀꿀한 얘기는 그만하고, 못난이 결혼 축하한다, 건배!
나난: (맞부딪치며) 건배!
건배를 하고 콜라 잔을 입에 댔던 동미가 갑자기 가벼운 욕지기를 느낀다.“우욱,……. “
쳐다보는 나난. 동미, “왜 이러지?” 하며 배를 쓰다듬는다.
나난: 야, 아까 너 배아프다 매? 똥 눠, 똥!
동미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슥해 보이고는 다시 콜라를 마시는데 이번엔 강한 욕지기가 올라온다. 콜라를 “푸하” 토해버리는 동미.
놀란 얼굴로 나난을 돌아보는 동미. 놀라는 나난
씬91. 동미집 거실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임신진단시약.
빨간색, 양성반응이다!
식탁에 얼빠진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동미와 나난.
동미, 자기 냉장고로 가서 물을 꺼내 마시더니 소파 쪽으로 걸어와 털썩 앉는다.
소파에 기대 우두커니 앉아있는 동미와 식탁의 나난. 둘 다 혼자 생각에 빠져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는데……. 갑자기 야!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는 나난
나난: 잘됐다!
동미: 뭐어?
나난: 둘이 결혼해!
동미: (어이없어 말을 못 잇는다.)
나난, 신나서 온몸 들썩하며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나난: 이렇게 될려고 정준인 차인거고, 넌 여태껏 남자 복이 없었던 거야! 맞아! (박수 짝짝) 우리 합동 결혼하자! 아우, 내가 그 생각을 왜 못했지? 정준이라면 나도 맘 편하게 너 맡기고 떠날 수 있겠다! 내가 왜 이렇게 찝찝한가 했더니 너 때문이었어. 참, 맞어 맞어! 니들 둘이 결혼하면 너 창업도 할 수 있잖아. 정준이라면 오케이 할 거야. 내 부조금도 떼서 니들한테 쏜다! (짝짝) 아우, 잘됐다, 너무 잘됐다. 너 올핸 잘풀리려나 보다, 결혼하겠다, 사장되겠다, 애까지……. 어머머, 한큐에 싹쓸이다, 너! 축하해, 동미야! 한턱 쏴라!
동미, 기가 막혀 보고만 있다가 이윽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입을 뗀다.
동미: 충격이 컸구나, 너…….
그때 현관문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난, 눈 반짝하며 “정준이 왔나보다”하며 현관 쪽으로 달려간다.
동미, “야!” 외치며 저지하지만 이미 문이 열리면서 정준이 들어온다.
정준: 나 왔다! 어? 난이도 있었네?
나난: (겅중겅중 춤추듯) 정준아, 이거 봐라~ (임신시약을 척 내밀고)
일어나 나난을 쫓아가 말리려다 그 자리에 우뚝 서는 동미, 경악한다.
정준: (나난이 웃자 따라 웃으며) 그게 뭔데?
나난: (감격에 겨워) 글쎄, 임신이래! 너무 잘됐지!
하며 손으로 동미 가리키려는데, 나난의 손을 덥썩 잡는 손. 동미다.
동미: (감격한 듯 나난의 손잡고 흔들며) 축하해, 난아! 축하해!
휙, 나난을 돌아보는 정준. 헉! 벙찌는 나난.
동미: (정준에게) 반지도 받고, 결혼얘기까지 끝났단다야.
어리둥절한 정준,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나난, 해명하려고 입만 뻐끔대는데 동미, 갑자기 나난의 목에 팔 두르고 말못하게 옥죄며
동미: 앙큼한 지지배,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챙피하지두 않니? 하하
그제야 실감한 정준, 나난 손잡으며 기뻐하는…….
정준: 축하한다! 잘됐다야. 좀 이르긴 하다만 요즘 세상에 그게 흠이냐? 뭐 먹고 싶니? 내가 다 해줄게.
정준의 어깨 너머로 무언의 대화하는 동미와 나난.
노려보는 나난을 향해, 손바닥 싹싹 비비며 ‘제발, 제발’ 입모양으로 사정하는 동미.
나난: (당황. 동미 눈치 보며) 음……. 내가……. 뭘 먹고 싶어 했더라…….
동미: 고기!……. 먹고 싶단다…….
정준: (동미 확 째리며) 네가 먹고 싶은거 아니구?
나난: 아냐, 아냐, 나 고기 먹고 싶어. 아유, 먹고 싶어 죽겠네.
정준, 나난을 고이 모셔다 소파에 앉혀놓더니 “잠깐만 기다려!” 식탁으로 달려간다.
엽기토끼 앞치마를 입는 정준. (앞치마를 입은 엽기토끼)
동미, 나난 쪽으로 오더니 둘이 계속 무언으로 투닥거리는…….
정준, 냉장고에서 재료들 꺼내며
정준: 우리 사촌형이 산부인과 하는데, 전화해줄까?
헉, 당황하는 나난, 그게 아니. 말하려 하자 동미, 눈 부라리며 협박하고…….
나난: 아, 아냐……. 나, 다니는 병원 있어.
정준: 그래? 참, 나 청주 간다. 저번에 말했지? 박주임님이 자꾸 와서 도와달란다……. 경쟁이 덜하니 전망도 괜찮구 어차피 나 하던 일이구……. 오래 생각했는데, 결정했어. 그래서 니들 합치라고 하려 했는데 안 되겠네.
동미, 너 다른 룸메이트 알아봐야겠다.
동미: 어, 그래…….
나난: (동미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너 정말 집에 갈 거야?
정준: 응. 나 서울보다는 아무래도 지방체질인 거 같아. 야, 이 동미. 너 거기 왜 앉아 있어? 이리 와서 파라도 썰어!
동미: (궁시렁)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
칼을 들고 동미에게로 오는 정준.
정준: 그럼? 홀몸 아닌 난이가 하리?
나난: (어이없고)
동미: 아니, 당근 내가 해야쥐. 파리 하자~ (콧노래 부르며) 파리 파리~
동미, 룰루랄라 부엌으로 가는 뒷모습
씬92. 동 거실
버너 위에 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다.
거실에 앉아 쨍, 하고 소주잔을 부딪치는 세사람. 나난의 잔은 쥬스다.
겉으론 환하게 웃고 있지만 서로의 생각과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고기 굽던 정준, 동미가 얌체처럼 고기를 낼름 집어먹으려 하자 얼른 막고 나난에게 준다.
어이없지만 할 수 없는 나난. 동미는 장단을 맞춘다. “하하하…….”
나난, 웃고 있지만 동미를 보는 눈이 얼핏 어두워진다.
웃고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의 모습이 아주 느린 동작으로 계속 되는 가운데…….
나난NA: 우리들은 자축했다. 원래 희망했던 삶에서 멀어졌으면서도 오히려 그걸 자축했다. 축하해! 실연당하고 도망가는 정준아! 축하해! 친구 애를 임신한 동미야! 축하해! 피난삼아 결혼하는 난아! 마니마니 축하해…….
그때 핸드폰 소리가 정적을 깨고 동작들이 정상으로 된다.
정준이 핸드폰을 받는다.
“여보세요?” 소리치던 정준, 얼굴이 굳어지면서 베란다로 나가 문을 닫고 통화를 계속한다.
둘이 얘기하는 모습 뒤로 베란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하는 정준의 모습이 보인다.
나난: 너, 왜 그래?
동미: (정색) 경고하는데 너 입만 뻥끗해도 다신 너 안 본다.
나난: 왜?
동미: (고기 뒤집으며) 하지 마.
나난: 왜? 정준이 애잖아!
동미: (째리며) 아니라면?
나난: (경악) 뭐? 아냐?
동미: 맞다해도 이건 준이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나난: 너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냐!
동미: (정색) 나 경고했다, 입 다물어!
그때 정준이 급한 얼굴로 들어와서 앞치마 벗으며 외투를 입는다.
정준: 야, 미안한데 좀 나가봐야 할 것 같다. 니들끼리 먹어라.
나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정준: 급한 일이 좀 생겼어.
후다닥, 나가려는데 나난이 소리친다.
나난: (입안에 음식 튀어가며) 안 돼! 가지마!
놀라는 동미. 놀라는 정준.
나난: 가면 안 돼. 니가 꼭 있어야 돼!
정준: 미안하다. 정말 정말 축하하구, 내가 나중에 거하게 쏠게.
나난: 안된다니까! 일은 무슨 일? 지금 이게 너한테 젤 중요한 일이야!
정준: (머뭇) 지혜한테 무슨 일이 있나봐…….
멈칫하는 나난.
정준: 동미야, 난이 좀 달래주고 있어. 부탁한다, 응?
다시 한 번 사정을 하고 후다닥, 밖으로 나가는 정준.
“정준아!” 외치며 쫓아가는 나난, 문밖까지 나갔다 터덜터덜 들어온다.
한숨 쉬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동미.
그때 나난, 잽싸게 동미의 소주잔을 뺏는다.
나난: 빨리 말해. 응?
동미: (상추에 고기 싸며) 내 문제야! 제발 헷갈리게 하지말구 입 다물어!
나난: 어쩔려구?
동미: (고기쌈을 나난 입에 처넣으며) 당분간 주둥이 좀 다물고 있어라, 생제르망 속옷 다 너 줄께.
나난: (입이 미어터지게 고기 씹으며) 사이즈가 안맞어.
동미: 샤넬 향수도 줄께.
나난: (우적우적 씹으며) 내 취향이 아니야.
동미: (화를 벌컥 낸다.) 야!
나난: (우물거리며 웅얼웅얼) 좋아, 대신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지?
동미: 뭘?
나난: 너, 정준이도 좋대면 결혼할 맘은 있지?
그때 불판에 불꽃이 훅 일어난다!
매캐한 연기가 마구 피어오르자, “어, 탄다 타!”하며 괜히 법석 피우는 동미.
“응?” 하며 추궁하는 나난을 피해, 더 난리법석 피우는 동미.
답답하고 속상한 듯 동미 보는 나난.
씬93. 버스 정류장
긴장된 표정으로 정류장에 서 있는 정준.
그 앞에 버스 한 대가 섰다 지나간다.
정준 옆에 서 있는 지혜.
두 사람, 천천히 마주 본다.
씬. 설렁탕집
어색한 침묵.
지혜, 힘들게 입을 뗀다.
지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언제지, 어서옵쇼에서였나, 설렁탕 먹고 나서, 음, 그러니까 내가 제일 짜증날 때가 언제냐면, 그 사람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질 땐데, 더 짜증나는 건 능력도 없는 주제에 성격만 좋은 사람인데, 물론 최악은 능력도 없는 게 성격까지 드러운건데, 훗, 내가 진짜 진짜 짜증나는 건 그 사람이, 능력도 없고 성격만 좋은 그 인간이 자꾸……. 자꾸……. 사실 웃긴 얘긴데, 내가 그 사람을……. 자꾸……. 자꾸…….
정준: (말 자르며) 내가 젤 짜증나는 게 뭔지 알아?
지혜: (고개 들어 정준을 본다.) …….
정준: 딱 한마디면 될 걸, 삥삥 돌려 길게 말하는 거. 그거, 나 좋아한다는 소리잖아.
지혜: (눈물이 맺힌다.)
정준의 눈에 지혜의 트고 갈라진 입술이 들어온다. 그동안 저토록 속앓이를 했을 터다.
정준, 주머니에서 입술연고를 꺼내 지혜에게 직접 발라준다.
이런 정준을 애틋하게 보는 지혜. 마주 보고 미소 짓는 두 사람,
그때 버스가 부앙~ 지나간다.
그런데 왠지 싸한 분위기. 지혜의 표정이 심상찮다.
지혜: 냄새는 어쩔 건데?
그제서야 민망한 듯 슬쩍 한쪽 손드는 정준.
씬94. 하이락 클럽
주방에서 나오던 나난에게 점장이 가보라며 눈짓을 한다.
단골 할아버지가 입구에 들어서고 있다.
할아버지를 인도하던 서버를 보내고 나난, 직접 주문 받으려 무릎 꿇는다.
나난: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세요?
할아버지: 잘 있었지?
나난: 네! 근데 왜 혼자 오셨어요? 할머닌요?
할아버지: ……. (미소) 갔어.
나난: (혹시?)
할아버지: (슬픈 미소) 멀리……. 갔어…….
말뜻을 깨달은 나난, 눈에 눈물이 핑 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나난, 울컥해 할아버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만다.
할아버지, 담담히 미소 지며 나난의 등을 토닥거려준다.
할아버지: 괜찮아, 괜찮아……. 아주 좋게 갔어.
먼데 바라보며 애잔히 미소 짓는 할아버지의 눈에도 살짝 눈물이 맺힌다.
씬95. 동미 정준집
식탁에 간단한 반찬 몇 개만 차려져있다.
밥을 푹 떠서 입안에 쑤셔 넣는 동미, 꾸역꾸역 씹다가 입을 틀어막은 채 화장실로 달려간다.
쭈그려 앉아 변기에 힘겹게 토해내고 있는데 달그락 소리가 들리며 정준이 들어온다.
동미가 어찌할 새도 없이 정준, 그 모양을 보고 만다.
정준: 왜 그래?
동미, 대답 대신 우욱~ 하며 토한다.
동미, 들켰다 싶어 당황한 눈빛으로 돌아보는데
정준: 그러게……. 술 좀 작작 먹어라. 위에 빵구날 만도 하지.
정준, 쯧쯧 혀를 차며 동미의 등을 두드려준다.
동미: 됐어, 저리가!
정준, 아랑곳없이 동미의 등을 두드린다.
동미, 변기 물을 내리고 일어나 칫솔에 치약을 묻힌다.
정준, 문에 기대어 동미를 보고 있다.
동미: 나가. 나 오줌눌거야.
“어” 하며 돌아서려던 정준, 다시 동미를 돌아본다.
정준: 동미야…….
동미, 양치질하며 거울 속으로 정준을 본다.
정준: 나랑 같이 가자.
동미: (놀라 칫솔질 멈추는)
정준: 난이도 가면 너 혼자 서울서 뭐하니? 니 사업, 서울 아니면 못하는 것도 아니고 지방 가도 승산있어. 방세 빼서 한푼이라도 보태는게 낫지 않니? 나랑 사무실 나눠쓰면서 같이 일하자.
동미: ……. 준아…….
정준: 응!
동미: (피식 웃으며) 너나 잘해.
정준: 잘 생각해봐.
동미: 이 동미 뜨면 서울이 운다! 갈 때 남자나 하나 붙여주구 가라.
정준: 으이구, 하여튼…….
동미: 나쁜 것들, 나한테 그 정도 선물도 못해? 에라이, 나쁜 년놈들아, 잘먹구 잘살아라! 펴엉~ 생!
정준, 어이없어 웃다가 동미에게 팔 벌리며
정준: 자!
동미: 뭐?
정준: 또 잊어버린 모양인데, 나두 엄연히 남자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빌려줄게. 얼른!
팔을 활짝 벌리고 재촉하는 정준. 동미, 허, 하고 웃어버리더니 정준의 품에 안긴다.
동미를 꼬옥 안아주는 정준. 동미도 정준의 등을 안는다.
정준: 어때?
동미: 더 꽉 안아봐!
정준: (좀 더 힘주어 안는다.) 됐어?
동미: 더 꽉!
정준: (좀 더 세게 안는다.)
동미: 따뜻하긴……. 한데……. (떨어지며) 안을 맛이 안 나네! 갑바 좀 키워라, 얌 마?
정준: (자존심 상해) 그런 너는? 옆구리 살 좀 빼!
투닥거리는 두 사람.
씬96. 산부인과 병원 입구
산부인과 병원 문을 열고 나오는 동미,
착잡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간다.
동미의 눈에 들어오는 거리의 사람들, 밝은 얼굴들.
씬97. 하이락 클럽 (밤)
영업이 끝난 텅 빈 홀. 점장과 나난이 소주 한 병을 놓고 마주 앉아 있다.
나난, 점장이 따라준 술잔을 고개 돌리고 홀짝 마시더니 캬, 인상을 찌푸린다.
주방장이 안주거리를 챙겨들고 나와 그들 옆에 앉는다.
나난, 점장 잔에 술 따르며 점장과 주방장의 눈치를 본다.
나난: 저…….
점장: 잘 있어…….
나난: ? (보면)
점장: 나 관둘 거야.
나난: (놀라 넘치게 따르고) 네?
점장: (소매 툭툭 털며 소주잔 기울인다.) 집근처에 가게 하나 낼까 해. 여기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우리 상호……. 애도 크고……. 힘드네…….
주방장: 가게 데려다놓고 구구단, 받아쓰기시킬라구 그런댜. 좀 더 크면 서빙도 시킬 겨, 아마…….
나난: 점장님…….
점장: (주방장 쿡 치며) 대답 해보시지? 미리 연습 겸…….
주방장: (헤, 웃는다.)
점장: 내가 본사에 추천서 넣었거든. 물론 시험에 합격해야 말이지만…….
주방장: 내가 시험이라곤 떨어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여. 운전도 한 번에 붙었구먼.
점장: 참!
점장,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나난에게 내민다. 상벌 뺏지다.
나난: !
점장: 원랜 다음 달에 하기로 했는데……. 내가 직접 달아주고 싶어서……. (나난의 가슴에 뺏지를 달아준다.) 뇌물이야.
주방장: 족쇄지, 족쇄. 더 몸 바쳐 충성하라는…….
가슴의 뺏지를 만져보는 나난.
씬98. 거리 (밤)
차 안. 심각한 표정으로 자료들을 보고 있는 나난.
수헌: F. I. T는 캐빈클라인이 나온 학교래. PARSONS도 유명하다더라. 차도 두 대 있어야겠다, 각자 다니려면……. 자기, 면허증은 있다고 했지?
나난: 꼭……. 가야되는 거지?
수헌: 응! (사이) 왜, 외국 가서 살기 싫어?
나난: 아니, 그건 아니구…….
그때 스르르, 멈추는 차.
수헌: 섰다…….
나난: 그러게…….
<점프>
수헌, 쭈그려 앉아 차 밑을 들여다보고 있고 나난, 옆에 서서 손전등으로 비춰준다.
나난: (담담)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고개 돌려 나난을 올려보는 수헌. 뚱한 나난.
수헌, 나난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긋 웃는다.
나난: 왜? (얼굴 만지며) 뭐 묻었어?
수헌: 내가 얘기했었나? 자기 첨 봤을 때…….
씬99. 회사 앞 (수헌의 비전)
자동차 밑. 차체 부속을 만지는 손.
수헌, 땀 뻘뻘 흘리며 한손으로 부품을 고정하고 한 손을 차 밖으로 내밀어 스패너를 집으려 하는데 손이 안 닿는다.
한껏 손을 뻗어 더듬더듬하는데 갑자기 여자 종아리가 나타나며 스패너가 없어진다.
어? 수헌, 차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종아리에서 서서히 올라가면 나난의 상기된 얼굴이 앙각으로 보인다.
어깨에 마네킹을 짊어진 나난, 스패너를 들고 수헌 손에 쥐어주려하고 있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나난, 아무 말 없이 수헌에게 스패너를 주고는 돌아선다.
땅바닥에 부려진 가방을 메고,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힘겹게 다시 걸어가는 나난.
순간 주위 풍경은 모두 흑백, 나난만이 컬러로 움직이다.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나난만이 슬로우로 천천히 멀어진다.
E: 쿵! 쿵! (수헌의 심장 뛰는 소리)
수헌E: 왜 있잖아, 씨에푸같은거 보면…….
순간 주위의 모든 것들은 정지되고 오직 한 사람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거. 자기 처음 본 순간이 바로 그랬어.
자기가 한발 한발 멀어지는데 그때마다 내 심장소리가 쿵쿵, 했어. 그냥……. 처음부터 무작정 좋았어…….
씬100. 차 안 (현실)
미소 짓는 나난의 얼굴 위로
나난NA: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다.
차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가고 운전석에 앉은 수헌, 앞을 보며
수헌: 근데 있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 아마 내일은 더 좋아질 거구…….
감격스런 나난 얼굴 위로
나난NA: 바로 이 말이 듣고 싶었다! 보면 볼수록 좋아진다는 말…….
나난: 나두…….
애틋하게 서로 바라보던 두 사람, 천천히 키스한다.
카메라 빠지면, 두 사람이 탄 승용차는 앞바퀴가 들린 채 견인차에 끌려가고 있다.
씬101. 동미 정준집 거실
동미, 소파에 기대어 TV 시트콤을 보며 낄낄 웃고 있다.
주방에선 나난이 큰 들통에 한가득 미역국을 끓이며, 상차린다.
나난: 정말 걔 무섭다. 결국 파혼하고 돌아와? 그럴 거, 왜 진작 못 그랬대?
동미: 걔가 우리보단 어른이다. 우리 못해본거 다해봤잖아.
나난: 나 참…….
동미: 근데……. 준이……. 얼굴이 변했더라. 누구 닮았어…….
나난: 누구?
동미: (흉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사이) 많이 컸드라…….
나난, 한심한 듯 혀 쯔쯔 차며 밥상 들고 와서 동미 앞에 놓는다.
나난: 먹어……. 애 낳은 거랑 똑같대. 또 안먹구 썩혀 버리지 말고 다 먹어.
동미, 숟가락 들자 나난, 측은하게 보고…….
동미: (묵묵히 먹으며) 증권한텐 얘기했어?
나난: 더워도 긴팔 입어. 찬바람 쐬지 말구…….
동미: 잘 생각해서 결정해. 일이든, 결혼이든…….
나난: (조심스레) 후유증은 없대니?
동미, 멈칫하더니 담담히 말한다.
동미: 앞으로……. 애, 못 가질지도 모른대.
TV에선 방청객 웃음소리 빵 터지고 나난, 얼어붙는다.
TV 돌아보며 푸스스 웃는 동미.
나난, 눈물이 글썽하더니 동미를 끌어안는다.
나난: (울며) 불쌍한 것……. (동미 등을 찰싹 치며) 으그, 이 독한 것! 그런 소리 듣구서 어째 덜컥 저질렀어! 그냥 낳는다구 그러지! 으구, 독한 년, 독한년……. 엉엉~
동미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소리 내어 우는 나난.
난감한 표정의 동미, 외려 나난을 위로해야 할 처지다…….
동미, 나난의 등을 두드려주고 나난, 더 복받쳐 운다.
나난: 너 애 낳을 수 있어. 맞어, 그럴 거야~ 그지?
동미: (담담) 맞어.
나난, 눈물범벅인 얼굴 쳐들며 “뭐?” 묻는다.
동미: 네가 그럴줄 알고 수술 안했어…….
나난: (멍한)
동미: 나, 잘했지?
나난, 동미의 눈을 들여다보다 냅다 동미를 일으키며 다짜고짜 끌고 나가려 한다.
나난: 가자!
동미: 밥 먹다 말고 어딜?
나난: 병원가! 이년이 장난할게 따로 있지, 니 인생이 장난이야? 가서 지우자!
그때 동미, 배 움켜쥐고 아악~ 신음 소리낸다.
나난: (놀라) 왜? 왜? (동미 배 살펴보고 난린데)
동미: (멀쩡한 얼굴로) 말조심해, 애 듣는다.
나난: (분개하여) 이게 증말?
동미, 핸드백에서 뭔가 꺼내더니 나난에게 툭 던진다.
태아의 초음파 사진이다.
동미: 애가 얼마나 센서티브한지, 카메라 들이대니까 척 손을 드는 거 있지! (거만한 표정으로 손흔들며 흉내) 하이!
씩씩거리던 나난, 얼결에 초음파 사진 들여다본다.
초음파 사진 인서트. 형태도 없는 콩알만 한 태아 모습.
나난, “어디?”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어머~” 탄성 나오는…….
그러다 정신 차리고 버럭 소리 지르는 나난.
나난: 일어나, 얼른 병원가자!
동미: (목석처럼 버티고 앉아 째리며) 애, 낳을 거라면?
나난: 그럼 지금이라도 준이 잡아! 너 그럴 권리 있어! 결혼해서 애 낳고 살면…….
동미: (째리며) 결혼, 안 할거라면?
나난: (경악하여 비틀) 뭐야?
동미: …….
나난: 왜? 결혼도 안한 지지배가 애는 낳아서 뭐해?
동미: 내 애니까…….
나난: 뭐?
동미: 내 애니까!
나난, 얼빠진 채 서있고 동미, 다시 시트콤 보며 밥 먹기 시작한다.
나난, TV 확 꺼버린다. 째려보는 동미.
나난: 준이 때문에 희생하는 거야?
동미: 내가 누굴 위해 희생하는 인간이냐?
나난: 너 그 애 하나 땜에 전부 잃어도 좋아?
동미: 애 듣는다…….
나난: (멈칫하더니 쿠션으로 동미배 가리고) 넌 백수야. 애낳으면 앞으로 직장도 안 잡히고, 결혼은커녕 데이트도 못할거야. 그래도 좋아, 엉?
동미: 왜 구질구질하게만 생각해? 더 많은 걸 얻게 될지 누가 알아? 나 원래 결혼 생각 없어, 데이트를 왜 못하니? 이렇게 섹쉬한데……. 나 돈 많이 벌거야. 그래서 우리 애랑 평생 행복하게 살거야!
나난: 미친 년! 느이 엄마, 아부진? 정준인? 다 잃어도 좋아? 나까지두?
동미: 넌……. 못 그래.
눈물이 나려는 나난, TV 위에 놓인 말라비틀어진 허브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바닥에 산산조각 나는 허브 화분.
나난: 이 까짓 허브 하나도 못키우는게 무슨 애를 키워?
동미: (정색)
나난: 그렇게 쿨한 척 하면 멋있을 줄 알아? 하나도 안 멋있어. 제발 솔직해져봐, 좀!
동미: 너나 솔직해. 넌 지금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준이랑 나랑 결혼하면 누가 젤 행복할거 같애? 나? 정준이? 웃기지마, 너야!
나난: 뭐?
동미: 니 눈엔 내가 불쌍하지? 난 니가 불쌍해. 그렇게 밖에 생각 못하는 니가 더 답답하다고! 그래도 난 너보고 이래라 저래라 소리 안 해.……. 넌 나난이구, 난 이동미야. 난 나답게 살테니까, 넌 너답게 살아. 날 좀 가만 놔둬! 니가 아직 내 친구라면…….
순간 동미의 뺨을 때리는 나난.
휙 돌아가는 동미의 얼굴.
나난, 때려놓고 자신도 당황한다.
동미: (뺨 만지더니 차분하게) 나,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기적인 년이야.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는 나난.
나난: 그러게 왜 했어! 화해하라니까 왜 해가지구 지랄이야?
동미: 그러게 왜 화해하래?
나난, 동미 째려보며 후다닥 핸드백 챙겨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 주방으로 간다.
가스레인지 위의 미역국이 담긴 들통을 들고 쿵쾅거리며 나가버리는 나난
쿵! 닫히는 현관문.
씬102. 거리
걸어가는 나난. 들통에서 미역국이 넘실거려 새어나온다. 속상한 나난…….
씬103. 동미의 거실
깨진 허브 화분을 멍하니 보고 있던 동미, 밥상을 끌어당겨 미역국을 먹기 시작한다.
씬104. 거리
패션숍 유리창에 비친 나난의 모습. 유리창 안의 마네킹에 나난의 모습이 겹친다.
길가에 서서 안을 바라보고 있는 나난의 뒤로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오간다.
씬105. 동미 정준집 앞 (낮)
용달차에 가득 짐을 실은 모습.
정준의 차 지붕에도 트렁크를 매달았다. 짐을 싣는 정준과 지혜는 즐거워하는 얼굴이다.
대문 앞에 선 나난과 동미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
정준: 분위기 왜 이래? 니들 또 먹을 거 가지구 싸웠지?
동미: (퉁명) 내가 넌 줄 아냐…….
정준: 섭섭해서 그래? (지혜 들을 새라 작은 소리로) 웃으면서 보내주라, 좀…….
그때 지혜가 선물꾸러미를 들고 다가온다.
흐뭇하게 지혜를 보는 정준.
동미, 미소지어주는데 나난, 혼자 뭐라 뭐라 꿍시렁댄다.
나난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동미.
지혜: (선물 내밀며) 축하드려요. 예쁜 애기 낳으세요.
나난. 어이가 없다. 멍하니 있는 나난을 툭치며 선물을 대신 받는 동미.
동미: 아유, 고마워.
정준: 이걸 왜 네가 받냐?
동미: 무거울까봐……. (나난에게 준다.)
나난: (어정쩡하게 받는)
정준: 니들, 자주 놀러올거지? 동미 너, 혼자 술퍼먹지 말고 가끔 바람 쐬러와.
나난: (꿍시렁) 아주 눌러앉는 수도 있지…….
동미: 하하, 얘가 섭섭해서 자꾸 이런다. 야, 얼른 가라! 차 기다린다.
정준: 그래, 갈게. 난아, 짜식……. 니 맘 알어! 잘 있어!
나난과 동미를 툭 치고 돌아서는 정준. 지혜도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그때 나난가 이들을 부른다.
나난: 잠깐만!
그 소리에 돌아보는 지혜와 정준. 동미는 난의 팔목을 세게 잡는다.
나난, 헉! 아픈 걸 참고 애써 의연한 표정으로 한걸음 나선다.
갑자기 긴장이 도는 분위기.
정준: 왜?
순간 동미와 눈이 마주치는 나난. 둘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데
지혜: 언니……. 걱정 마세요. 저……. 잘할게요.
해맑게 미소 짓는 지혜.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정준. 절박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동미.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들을 보는 나난의 속에선, 만감이 교차한다.
이윽고 동미의 팔을 뿌리치며 한발 나서는 나난.
나난: ……. (지혜에게 선물 들어 보이며) 고마워요.
지혜: (해맑게 웃으며) 뭘요!
나난과 동미에게 손을 흔들며 차를 타는 정준과 지혜.
점차 멀어지는 정준의 차와 용달차.
손을 흔들어주는 나난과 동미. 동미는 미소를 짓고, 나난은 심난하다.
씬106. 나난의 집 (밤)
수헌, 세면대의 하수구 연결 관을 고치고 있고
나난, 욕실 문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수헌: (씩 웃으며) 자꾸 봐도 좋아?
나난: (픽 웃으면)
수헌: 좋지? 남자있으니까 좋지? 사랑스러워 죽겠지?
나난: 그래, 죽겠다.
수헌: 이런 건 진작 말을 하지,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냐 미련하게?
나난: 미안해서 그렇지…….
수헌: 뭐가 미안해, 당연하지.
나난: 그게 아니라……. (보다.) 수헌씨, 미안해…….
수헌, 나난을 본다.
씬107. 나난의 옥상마당 (밤)
수헌, 심각하게 나난의 얘기를 듣고 있다.
나난: 그동안 난 내가 패션쪽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보니깐 무작정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덤볐던 거 같애. 혼자 끙끙 애만 쓰고, 왜 날 알아주지 않는 거지? 잘되면 내 덕이고, 잘못되면 다 남 탓이고……. 내 모습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그것만 생각하고 살았던 거 같애. 근데 여기서 일해 보니깐, 어느 날 보니까 내가 일을 즐기고 있는 거 있지. 물론 재능이 있는 건가? 헷갈리기도 해. 근데 해보고 싶어. 끝장 보고 싶어. 나란 인간이 도대체가 똥인지 된장인지 알긴 알아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아, 사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할거야. 나, 보기보다 성질 더럽거든? 천만원 벌어다줘도 앙앙대면서 바가지 막 긁을지 몰라. 맨날 술퍼먹고 짜증부릴지도 몰라. 지금은 내가 무슨짓을 해도 이쁘대지만, 그럼 엄청 짜증날 거야. (눈물 글썽이며) 나 그러기 싫어. 후회하기 싫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 괴롭히기 싫어. ……. 나 사실, 무지하게 쪽팔렸다. 남자 하나 나타나니까 다 이뤄지는 것두 쪽팔리구, 자기한테 기댈 생각만 하는 내가 쪽팔렸어. 난, 난 수헌씨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인가, 그 생각은 왜 한번도 안해봤나, 그것두 쪽팔려. 지금은 아니야. 난 아직 혼자서도 못 서있는거 같아. 그래서 나 결혼할 수 없어.
수헌: (보면)
나난: 당분간은.
나난, 손가락의 반지를 빼서 수헌에게 준다.
나난: ……. 나한테 시간을 좀 줄래? (사이) 나중에……. 내가 웃을 때……. 그때 같이 웃어줄 수 있어……. ?
수헌, 심각하게 반지만 만지작거릴 뿐 말이 없다.
긴 침묵.
수헌: (뜬금없이) 또 고장 난데 없어?
나난: ?
수헌: 지금 말해. 나중에 변기에서 세수하지 말구.
나난: …….
나난의 손을 잡는 수헌.
수헌: 내가 말 안했든가? 나, 기다리는 게 특기라고.
수헌, 나난의 손에 반지를 다시 끼워준다. 눈물이 맺히는 나난.
수헌: 멋있어 죽겠지?
씬108. 사무실
저녁 해가 들어오는 환한 유리창. 창에 쳐 있는 블라인드가 몇 개 떨어져 나가있다.
금방 이사를 한 뒤에 따르게 되는 깔끔함과 허전함, 조금의 지저분함이 뒤섞인 그런 공간.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용팔이.
먼지가 군데군데 뭉쳐서 공같이 굴러다니는 사무실을 휘 훑어보는 용팔이,
용팔: 생각보다 넓네.
뒤이어 동미와, 선호, 솜털 보송한 20대 초반의 남자들 서넛이 컴퓨터를 들고 들어온다.
동미의 지휘 하에 부산스럽게 책상을 배치하고 컴퓨터를 설치하기 시작하는 남자들.
나난NA: 동미는 드디어 자신의 팬클럽을 동원해 창업을 감행했다. 모두 다 동미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인간들이라고 한다. 물론 그건 순전히 동미의 말이지만…….
<점프>
고사상 위에 올려진 컴퓨터 모니터에 웃는 돼지머리가 떠있다.
개업고사를 지내고 조촐한 파티를 하는 창업멤버들.
동미가 무리의 중앙에서 좌중을 리드하고 있다. 동미의 한마디에 깔깔깔 웃는 멤버들.
이 때, 벌컥 문이 열리며 동미부가 들어선다.
분노에 가득찬 얼굴로 동미를 노려보는 동미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의 동미.
동미부: 어느 놈이여? 설마 이것들 다는 아니겄지?
<점프>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
나난NA: 동미의 아버지는 동미를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선언하고 그 길로 내려가셨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코에서는 아직도 코피가 흐르는 동미.
쭈뼛거리며 동미의 옆으로 가 앉는 나난.
나난: ……. 미안하다. (혼잣말) 아, 어머닌 혼자 알고 계시래니까…….
동미: (쏘아본다.)
나난, 시선 피하는데 동미가 픽, 하고 웃어버린다. 기가 막혀하는 나난.
나난: 이래두 낳을 거냐?
동미: (고개를 끄덕이는 동미.)
나난: 나중에 니 새끼가 왜 자긴 아빠가 없냐고 물어보면?
동미: 우리 새끼는 부모 닮아서 착할 거야. 그런 거 묻는 대신 “엄마 날 낳아줘서 고맙습니다” 할 거야.
나난, 한심한 듯 동미를 쳐다보다가 툭 한마디 던진다.
나난: 그래, 낳아라. 낳아.
그 말을 못 들었는지 의아한 얼굴로 동미가 고개를 돌려 나난을 쳐다보면
나난: 애 낳으라고.
동미: ???
나난: 내가 아빠 할 테니까 니가 엄마 하라구. 우유값 떨어지면 내가 벌어다 주고 호적가지고 누가 말하는 인간 있으면 내가 호치케스로 주둥아리를 박아줄게.
동미: 난아…….
나난: 너 나 알지? 뭐든 걸리적거리는 거 있으면 내가 다 물어뜯어 버릴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알았어, 이동미?
동미, 멍든 얼굴을 실룩이는데 우는 건지 웃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씬109. 도로(수헌의 차안)
잔뜩 긴장한 수헌의 얼굴.
나난OFF: 좀 풀어라, 풀어! 누가 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줄 알겠다!
수헌: 그냥 폐차시킬걸.…….
의자를 앞으로 당겨 거의 앞 유리에 얼굴을 들이대고 운전하는 나난.
주위 차들은 휙휙 지나가는데 나난의 하얀 아반떼는 거북이걸음으로 아장아장 달린다.
나난: 도대체 누굴 걱정하는 거야? 나야, 차야?
수헌: 나야…….
나난: 뭐?
수헌: (심각) 비행기에서 떨어질 확률과 내가 공항에 도착하지 못할 확률 중에: 어떤 게 높을까?
나난: (발끈해서 고개를 틀고) 박수헌!
수헌: (놀라) 어어……. 꺾어! 꺾어!
반대편 차선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던 나난의 차가 휙 방향을 튼다.
씬110. 인천 공항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