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바람 / 송덕희
아침 회의를 마치고 밀린 결재를 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머리는 미용실에서 손질하여 멋을 낸 티가 난다. 작은 장식용 구슬이 달린 보라색 긴 원피스를 입었다. 귀고리, 목걸이, 반지까지 색을 맞췄다. 군살 없이 날씬하고 허리는 꼿꼿한 데다가 키도 훤칠하다.
교재를 팔러 온 걸까? 아니면 보험 설계사인가? 바쁜데 어떤 말을 해서 얼른 돌려보낼지 머리를 굴린다. 학교는 학생들이 안전하게 공부하는 곳이라 외부인이 연락도 없이 들어오면 안 된다.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이 교문에서 거르지 못했나 싶어 신경이 쓰였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광주교대 6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가 한둘이 아닌데, 뭘 보고 믿을까? 교육감 000와 친하다. 000 국장이 내 집안사람인데 어제도 같이 밥 먹었다, 연금을 자식들에게 다 주고 돈을 벌어야 할 처지다. 온갖 이유를 댄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런 분 같지 않다. 쉽사리 예측이 안 된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왔나요?” 눈을 바라보며 묻는다. 얼굴은 나이가 꽤 들어 보인다. 의자를 내주며 일단 앉으라고 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단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보험을 들라고 하지 않을까? 영업하는 사람처럼 매무새가 말쑥하고 말씨도 세련됐다.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며 섣부른 추측을 계속한다. 최대한 간단히 말할 것을 눈으로 재촉하면서.
바쁠 텐데 먼저 양해를 구한다는 말을 두어 번 하고, "우선 제 소개 자료를 보여 드릴게요." 한다. 두툼한 푸른색 서류철을 보조 가방에서 꺼낸다. 그것도 다섯 권이나.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간다. 표지에는 제목과 연도, 이름을 정성껏 써 붙였다. 주소, 경력 등 개인 정보가 가득한 교원 인사 기록 카드가 첫 장에 있다. 손때가 묻어 누렇고 귀퉁이가 닳았다. 나이는 일흔아홉, 전남 나주에서 근무하다 퇴직했다. 나와 같은 대학을 졸업한 선배님이 맞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 대접했다. 뒷장에는 교사 시절에 받았던 표창장, 연구대회 실적으로 받은 상장, 연수 이수증 등이 차곡차곡 꽂혔다. 두 번째 파일은 두툼하다. 삐뚤빼뚤 쓴 2학년 학생의 일기에 선생님이 일일이 의견을 달았다. 원고지 쓰는 법을 가르친 빨간 색연필 자국이 묻었다. 학부모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쓴 손 편지도 있다. 교실 환경이 한눈에 들어 있는 사진이 빼곡하다. 게시판에 아이들 그림을 반듯하게 붙이고, 가장자리에는 억새꽃으로 멋스럽게 꾸몄다. 단풍잎과 망개나무 열매를 꽃병에 담아 놓았다. 교실이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난다. 4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자료를 모아 둔 것이다. 교육자로 걸었던 길이 제대로 보였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놀랐다. 어떻게 이런 걸 버리지 않고 지금껏 간직하고 있는지 혀를 내둘렀다. 볼 때마다 교사로 살아온 지난날을 되새김할 수 있어 좋단다. 정년 퇴임식 장면을 찍은 사진이 다른 한 권에 가득했다. 가족, 친척, 지인들 백여 명이 참석한 성대한 잔치였다. 돈은 어느 정도 있고, 자녀들도 나름대로 잘산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말끝을 흐렸다. "제가 학생들에게 바른 생활을 주제로 수업하고 싶습니다.” 더 늦기 전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교단에 서고 싶단다. 마지막 소원이라며. 의외의 요청을 듣고 당황했다. 으레 이익을 챙기러 온 걸로 단정해 버린 내가 부끄러웠다. 간절한 바람이 담긴 눈빛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요즘 학생들 앞에서 수업하기 힘들 텐데, 나이도 많은 분이 할 수 있을지 선뜻 대답이 안 나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날마다 운동해서 다리도 튼튼합니다.” 내 마음을 먼저 읽은 말이다. 지금도 동기, 후배들과 춤을 배우러 다니고 가족과 소통하면서 매일 즐겁게 산다. 일상을 털어놓으며 믿어 보란다. 부담이 덜한 학년을 골라 담임 선생님의 양해를 구해 보겠노라고 했다. 선배님의 소원을 이뤄 주고 싶었다.
며칠 후에 3학년 두 학급에서 수업했다. 예의를 지키자는 주제에 맞게 자료를 준비했다. 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학생들의 흥미를 끌었다. 기분 좋은 말로 인사하는 실습을 하며 마무리했다.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크게 외쳤다. 간절한 바람을 이루면 도파민이 솟구치나 보다. 뿌듯한 기운이 나에게 전해졌다. 학교를 떠난 지 15년이 넘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뜨거운 열정이 솟을까? 평생을 가르치는 일로 보람을 얻고 살아온 천생 교사였다.
아이들한테 얻은 힘으로 재충전하여 기분 좋게 지낸다. 수업 장면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지인들에게 보내고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부러워한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혹시 선배님처럼 멋진 분이 문을 두드린다면 망설이지 말고 문을 활짝 열어야겠다.
첫댓글 요즘 아이들에게 '예의'를 강조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만 혀를 찰 뿐, 직접 나서서 교육할 생각은 못 할 텐데 열정이 남다르세요. 교단에서도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지도하셨을 듯.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명감을 가진 좋은 선생님이셨을 겁니다.
첫 문단과 제목을 연결 지어 불순한 바람을 상상했는데 이렇게 고상한 바람이라니. 하하.
제목에 낚이신건가요? 고상한 바람, 좋은 표현이군요. 고마워요.
저도 딴 생각을 했습니다. 멋진 선생님 이셨네요.
바람이 바램으로 다시 바뀌어야겠군요. 하하하. 잘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와, 이런 멋진 선배님도 계시는군요. 감동입니다.
그렇죠? 이런 선배님은 어디에도 없을거에요. 저도 감동... 고마워요.
인생을 멋지게 도전하며 사는 분이시네요. 저희도 본받으려면 건강을 우선 챙기시게요. 하하. 체력이 정신도 움직이는 듯요.
대단한 선생님이시죠? 우리도 그렇게 열정 가득한 생활을 할 수 있겠지요. 건강을 밑거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