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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 다이어트 / 디스크,오십견, 관절염/ 만성난치질환/ 체질진료/전통 장침
27강 좋은 글쓰기
1. 이해되어야 하는 언어
지난 번에 숙제를 내준 게 있다. ‘불상현 사민부쟁’이라고 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도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고 한, 노자의 이야기가 우리 상식에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여러분들의 생각을 써보라고 문제를 내주었다.
그래서 성실하게 많은 학생들이 답안을 내주었다. 아주 잘 썼다. 모두 잘 썼고, 상당히 진지하게 썼기 때문에 이번 시간에는 여러분들이 숙제를 해온 것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문장이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지, 일일이 예를 들어가면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기로 하겠다.
문제
훌륭한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노자는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어떠한 의미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자기의 견해를 피력해보라.
논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험관한테 보여주는 글이라는 것이다. 정직하게 이야기해서 위대한 문장을 쓰려는 게 아니라, 시험관한테 보여서 점수를 많이 받는 게 장땡이다. 1차적으로는 시험관이 읽어서 빠른 시간 내에 정확하게 이해되는 글이 좋은 글이다. 자신은 이런 의도로 표현을 했는데. 상대가 내 생각과 다르게 읽어버리면 곤란하다.
모든 문장은 의사소통가능성(understandability)을 전제로 한다.
모든 언어는 이해되기 위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해되지 않는 언어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주장을 해도 좋다. 모든 언어는 이해되기 위한 것이다.
헤겔이라는 사람이 글을 썼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를 못한다면, 헤겔은 질 나쁜 사람이다. 그건 볼 필요도 없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쓰는 철학자는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아주 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본 받을 필요가 없다. 우선 쉽게 이해되는 문장을 써야 한다. 그게 대전재다.
모든 언어는 이해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이걸 하나하나 여러분들에게 지도를 해주겠지만, 내가 지도하는 게 정답도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원칙이 없다. 원칙이 뭔가 내 머릿속에는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여러분들이 쓴 것보다는 내가 고쳐놓은 게 훨씬 나을 거야. 그렇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 원칙을 다 내가 이야기해줄 수가 없다. 그러나 case by case 하나하나 도올 김용옥 같으면 이렇게 쓸 거라고 알려주겠다. 참고하기 바란다.
2. 명료성
처음은 박지훈 것이다. 한 번 해보자. 상당히 잘 썼다. 한 번 읽어보자.
[사람은 꿈속에 있을 때는, 1) 자신이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 갑자기 선생님께서 시험을 본다며 시험지를 나누어 주시고, 어느새 시험을 보고 있는 자신을 보며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그리고는 깨고 나서야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있는 곳이 혹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있는 곳이 혹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2) 이 험한 세상에서 깨면 자신을 위한 새로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될 수 있다. 이처럼 또 하나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어야만 지금까지 있었던 곳이 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자신이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지 못한다.
->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 속에 있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참 근사한 문장인데, 여기 제일 처음 문장은 ‘사람은 꿈속에 있을 때는, 자신이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지 못한다.’ 틀린 문장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꿈속에 있을 때는’는 꿈에 관한 이야기니깐, 나 같으면 이렇게 고치겠다. ‘사람은 꿈 속에 있을 때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 속에 있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이게 좀 나을 것이다.
여기서 ‘꿈’이라는 명사보다는 ‘꿈꾸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계속 끌어가는 것이 의미를 더 명료하게 한다.
이런 것을 문장의 평행구조(parallelism)라고 한다.
2) 이 험한 세상에서 깨면 자신을 위한 새로운 현실이
-> 깨고나면 이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위한 새로운 현실이
그리고 그 다음에 ‘이 험한 세상에서 깨면’이라고 했다. 이것도 좀 이상하다. 이 ‘험한 세상이라는 것’ 하고 ‘깬다’는 사태는 관계가 없다. 그러니깐 ‘깨고나면 이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위한 새로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가 더 좋을 거 같다.
그리고 어순을 바꾸는 게 좋다. 이 험한 세상에서 깬다는 것은 아니다. ‘깨고나면 이 험한 세상에서’로 바꾸는 게 좋겠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문장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적 인간의 본연을 조화롭게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도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적 인간의 본연을 조화롭게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인간의 본연을 비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해버렸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대결을 시켰다. 그런데 인간의 본연을 비자본주의라고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문장은 조금 위험하다. 나 같으면,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적일 수도 있는 인간의 본연을’이라고 바꾸어서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겠다.
비자본주의적 인간의 본연
-> 비자본주의적일 수도 있는 인간의 본연
그러니깐 약간 애매하게 해야할 곳은 애매하게 할 줄 알고, 명료하게 해야 할 곳은 명료하게 해야하는 것이다. 그게 문장의 묘미다. 그걸 내가 어떤 법칙을 가지고 가르쳐줄 수는 없다.
그러니깐 뭔가 여지를 두어야 할 곳은 여지를 두고, 아주 자신있게 이야기해야 할 때는 굉장히 간결하고 치밀하고 자신있게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
3. 메타포
다음을 읽어보도록 하자.
[모든 물이 같은 높이에서 유지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 표현은 결국 짓밟고 올라가는 이미지를 말하기 위해서, 물이 같은 높이에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물이라는 것은 흘러 내려가는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이런 메타포는 강하게 의미를 강화하지 않는다.
‘모든 물이 같은 높이에서 유지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것이다.’라는 표현은 메타포의 이미지가 잘 오지 않는다. 이런 것도 고민해 보자.
메타포(metaphor, 은유)를 쓸 때는 반드시 그것이 나의 논지를 강화시키는 맥락에서 동원되어야 한다.
메타포를 쓸 때에는 굉장히 정확한 것을 써야 한다. 내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를 풍부하게 강화시켜주는 메타포를 골라서 읽는 사람이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문장은 조금 애매하다.
4. redundancy
[그 뜻은 우리가 숭상하는 위인들을 숭상하게 되면]
‘그 뜻은 우리가 숭상하는 위인들을 숭상하게 되면’에서도 문제는 없지만, 이것도 영어로 말하면 redundancy가 있다. 불필요한 반복이 있다.
redundancy :불필요한 중복, 군더더기 말
여기서 ‘위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숭상하고 있다는 뜻이 들어가므로 ‘그 뜻은 우리가 숭상하는 위인들을 숭상하게 되면’이 아니라 ‘그 뜻은 우리가 위인들을 숭상하게 되면’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
우리가 숭상하는 위인들을 숭상하게 되면
-> 우리가 위인들을 숭상하게 되면
위인 앞에 있는 ‘숭상하는’는 빼버려도 된다.
5. sentence connection과 몽따즈
[1)그러하기 때문에 노자께서는 2)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보자면 전에 인터넷 뉴스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3)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 1위가 4)손석희 아나운서처럼 되라. 이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매우 좋은 말일 수 있다. 5)손석희라 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운서이자,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정말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을 손석희 아나운서처럼 키우려면 어찌 될까? 우선적으로는 좋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보내려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남들보다 아이가 뒤처지지 않게 공부시키려 일을 매우 열심히 할 것이다. 일을 좀더 많이 하여 돈을 많으러(많이 벌기 위하여) 남들에게 해가 되도 그 일을 무조건적으로 열심히 할 것이다. 여기서 사민부쟁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싸우려 들 것이니 말이다.]
1) 그러하기 때문에 -> 그러기 때문에
[그러하기 때문에 노자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 보면, ‘그러하기 때문에 노자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라는 문장도 전달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러하기 때문에 노자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했다.'라는 게.. 한 문장이라도 이런 게 들어가면 안된다. 여기서 ‘그러하기 때문에’도 너무 고어투적이다. ‘그러기 때문에’이라고 하면 된다.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될 수 있는대로 조사 하나라도 줄이는 게 좋다.
2)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 불상현(不常賢)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도 ‘그러기 때문에 노자께서는 불상현(不常賢)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바꾸는 게 좋다.
정확하게 어떤 주제를 말하든지, 그 주제를 반복해 주는 게 좋다. ‘그렇게 말씀했다’와 같은 표현은 한 문장이라도 들어가면 안 된다. 논술을 할 적에 그렇게 애매한 말은 쓰면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셨죠.’와 같은 것은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눌 때는 써도 되지만, 문장에 쓰면 통하지 않는다.
3) 가장 하고 싶은 말 1위 -> 하고 싶은 말의 1위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 1위가’라고 했는데, 여기서 ‘가장 하고 싶은 말 1위’라는 것도 redundancy가 있다. 왜냐하면, 1위가 ‘가장’이다. 그러니깐 문장을 줄여서 말한다면,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의 1위가’로 바꾸면서 ‘가장’이라는 말은 뺄 수 있다.
4) 손석희 아나운서처럼 되라. 이것이였다.
-> ‘손석희 아나운서처럼 되라.’는 것이었다.
‘손석희 아나운서처럼 되라. 이것이었다.’도 이런 것보다 그냥 인용문으로 써준다. 요즘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의 1위가 ‘손석희 아나운서처럼 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명료하게 해 주는 것을 sentence connection이라고 한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할 때는 정확하게 연결하고, 또 정확하게 끊어야 할 때는 또 과감하게 끊는 게 문장에서 아주 중요하다.
@ sentence connection
한 문장과 한 문장 사이의 연결구조
5) 손석희라 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운서이자,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손석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운서이자, 지식인이다.
‘손석희라 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운서이자,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는데, 이것도 지저분하다. 왜냐하면 문장을 그냥 탁 자를 때는 과감하게 잘라도 된다. 뭐냐하면 ‘손석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운서이자, 지식인이다.’ 이렇게 하고 끝내도 된다.
‘~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없이도, 손석희라는 주제가 이미 나왔기 때문에, 그 다음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운서이자, 지식인이다.’라고 끝내도 전혀 문제가 없다. sentence connection을 짧게 짜르면 더 강렬하게 의미가 들어간다.
한 문장과 한 문장 사이는 아무것도 없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엄청한 관계가 발생한다. 이런 것을 영상에서는 몽따즈 기법이라고 한다.
몽따즈(montage)
장면의 배열로 장면 이상의 논리나 효과를 발생시키는 연결방식
우리 글에도 몽따즈 효과가 있다. 그래서 요글과 요글에서 딱 끊는 게 좋겠다.
짧은 문장과 문장의 배열만으로 그 사이에서 많은 숨은 논리가 발생한다.
문장은 에두를 필요가 없는 곳에선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고, 또 뭔가 여지를 두어야 할 데는 ‘~일 수도 있을’ 것이라든지 ‘~인 것처럼 보인다’고 에두른다. 이런 것이 적절하게 배합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문장이라는 것을, 내가 일률적으로 강의할 수가 없다.
6. 문장력 기르기
문장력을 기르려면, 매일 일기를 쓰는 게 좋다. 오늘 일어난 일을 집에 가서 조금씩이라도 일기를 쓰는 게 좋다. 복잡하게 다 쓸려면 피곤해서 일기를 도저히 못쓴다. 습관이 안된다. 그러니깐 몇 줄만이라도 오늘 일어났던 일을 간단하게, 인상적인 것만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오늘 일어난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쓰려면 도저히 일기를 못 쓰는 것이다. 그러니깐 오늘 일어났던 것 중에서 뭔가 인상적인 것을 써보는 습관을 들이자. 이런 것들이 결국 문장력을 기르는 첩경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일기 쓰는 것을 권하고, 편지를 쓰는 것도 권한다. 인터넷 채팅으로 쓰는 글은 안 된다. 그건 문장이 늘지 않는다. 그건 그야말로 채팅이다. 말을 천만번 해도 문장이 안 느는 것과 같다.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글을 전혀 못쓰는 사람이 많다.
일기 쓰는 습관은 문장훈련의 첩경이다. 간결하게 하루의 사건을 기록할 수도 있고 반추적인 나의 내성을 기술할 수도 있다.
채팅은 문장력하고 연결이 안되는 채팅 스타일이다. 그건 별로 소용이 없다. 앉아서 종이에다 대고 연필로 써보는 게 진짜 문장이다. 왜냐 이렇게 앉아서 연필이나 볼펜으로 쓰는 순간에 반추가 일어난다.
글을 쓰는 순간에 계속 피드백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컴퓨터에서 자판을 누르는 것하고 전혀 질이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내 말을 잘 듣고, 문장 연습을 하면 좋겠다.
7. 맥락의 일치
‘당연히 이것 역시 사민부쟁인 것이다.’라는 쓴 것은, 사민부쟁의 내용은 ‘다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내용은 ‘다툼’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깐 이것도 명료하게 쓰자면, ‘당연히 이것 역시 쟁인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사민부쟁’이라고 하지 말고, ‘쟁’이라고 하는 게 좋다. ‘쟁’옆에 가로를 치고 한문으로 ‘쟁(爭)’이라고 써주는 스타일도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한다.
그걸 더 명료하게 하려면 ‘당연히 이것 역시 불필요한 쟁인 것이다.’ 라고, ‘불필요한’이라는 형용사를 넣어준다. 그러면 더욱 명료해진다. 그런데 ‘이것 역시 사민부쟁인 것이다’라고 하면 이상하다. 왜냐하면 ‘쟁’을 이야기해 놓고, 노자의 ‘사민부쟁’를 인용하는 것은 맥락에 맞지 않는다.
당연히 이것 역시 사민부쟁인 것이다.
-> 당연히 이것 역시 불필요한 쟁(爭)인 것이다.
문장은 맥락의 일치(contextual consistency)가 중요하다.
의미를 명료하게 끌고 가야 한다. 뒤죽박죽이 되면 안된다.
8. 끊고, 붙이고
[이번에는 이야기를 넓혀서 말해 보자면, 세계적으로 아직도 종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 글을 간단하게 하면, ‘이번에는 이야기를 넓혀서 말해보자.’라고 딱 끊고, 그 다음에 그냥 ‘세계적으로 아직도 종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면 된다. 이렇게 자르니깐 강력한 문장이 된다. ‘넓혀서 말해 보자면,~’ 이러면 지저분하고 유치한 문장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문장이라는 것은 짧게 끊으면 아주 강렬하게 될 때가 있고, 반대로 끊은 것을 연결해서 맛이 있을 때가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이런 것이 아주 재미있다.
‘이번에는 이야기를 넓혀서 말해 보자면, 세계적으로 아직도 종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쓰면, 근사한 문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야기를 넓혀서 말해보자!’라고 끊고, 거기다가 감탄사 같은 것을 넣고, 그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아직도 종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면, 명문(名文)이 된다.
이번에는 이야기를 넓혀서 말해 보자면, 세계적으로 아직도 종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 이번에는 이야기를 넓혀서 말해보자! 세계적으로 아직도 종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어떤 문장은 끊어야 하고, 어떤 문장은 붙여야 명문이 된다. 정말 요술 같다. 이걸 어느 때 끊고, 어느 때 붙여야 할지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다년간에 걸쳐 수없는 반복을 통해서 알게 된다. 문장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대가들한테 이렇게 지도를 받으면, 문장력이 확 늘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다 .
9. 동사적 용법, 불필요한 강조
그 다음을 보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일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십자군 전쟁이 그러한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일이 있을 수 있고’라고 썼는데, ‘팔레스타인의 일’이라고 명사화시켰다. 그런데 가급적이면, 명사적 용법보다는 동사적 용법을 쓰는 게 항상 강력하다. 전달이 훨씬 더 명료해진다. 그러기 때문에 이럴 경우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고 있고’ 라고 하면 아주 명료해진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일이 있을 수 있고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고 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일이 있을 수 있고~’ 이건 아주 유치한 문장이 된다. 자! 세계를 보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고 있고,’라고 하면, 얼마나 문장이 강력해지는가?
그 다음에 콤마를 찍고,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십자군 전쟁이 그러한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야기 다음에 갑자기 십자군으로 튀었다. 문장의 평행구조(parallelism)가 깨져 있다. 둘 사이에 뭔가 넣어주어야 한다. 나 같으면, ‘또 역사적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자군 전쟁이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고 싶다. ‘또 역사적으로’이라고 넣으라는 말이다. 그러면 문장이 명료해진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지는 않으니깐, ‘매우’라는 말은 빼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자군 전쟁이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면 된다. ‘매우’가 들어갈 이유가 없다.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십자군 전쟁이 그러한 것이다.
-> 또 역사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군 전쟁이 그러한 것이다.
필자는 강조를 하려고 ‘매우’를 넣었지만, 강조하지 않을 때에 강조를 한 것이다. 문장이라는 것에 이런 묘미가 있다.
10. 주어의 생략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인이라는 사람을 숭배하고 숭상하다가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 자기가 숭상하는 성인이 다르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백년에 걸친 전쟁을 했으니 말이다.]
이 문장도 명료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는 빼도 된다. ‘흔히 말하는 성인이라는 사람을 숭배하고 숭상하다가’는 당연히 ‘우리가’ 하는 것이니깐 빼도 된다. 우리말은 주어를 구태여 집어넣지 않아도 될 때는 생략하는 게 좋다. 그게 오히려 더 명료해진다.
한국어는 주어를 명시하지 않아서 더 명료해질 때가 많다.
인도 유러피안어군에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흔히 말하는 성인이라는 사람을 숭배하고 숭상하다가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라는 것도 이상하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로 바꾸고, ‘자기가’라는 말도 여기서 쓸 필요가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숭상하는 성인이 다르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백년에 걸친 전쟁을 했으니 말이다.’로 바꾸면 된다.
‘걸친’이라는 형용사적 용법을 쓰지말고 동사적인 것으로 바꾸면, ‘수백년에 걸쳐 전쟁을 했으니 말이다.’ 이게 훨씬 파워풀하다.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 자기가 숭상하는 성인이 다르다
-> 다른 나라 사람들과 숭상하는 성인이 다르다
수백년에 걸친 전쟁을 했으니 말이다
-> 수백년에 걸쳐 전쟁을 했으니 말이다
11. 구태의연한 표현의 변경
[이것 역시 사민부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태 예를 든 것을 토대로 종합해 보자면,]
‘여태’라는 말도 좋지 않다. ‘지금까지’로 바꾼다. ‘여태’라는 말은 좀 구태의연하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을 토대로 종합해 보자면, 노자의 말씀은 전혀 지나침이 없고, 세계라는 넓은 범위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말씀인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된다. 이렇게 아주 작은 것이지만, 표현을 바꿀 수 있다.
이 글에서 말한 포인트는 아주 훌륭하다. 예를 든 십자군 문제라든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같은 것이다. 자기들이 숭상하는 사람들만 최고고, 남들이 숭상하는 사람들은 나쁜 놈이라고 각자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싸운 것이다.
모든 종교가 하나의 교주만을 받들고, 남이 다른 교주를 받들면 나쁜 것이라며 싸우는 게 종교분쟁인데, 이런 종교분쟁은 인류를 몇 천년 아니 몇 만년 갉아먹은 흉악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깐 노자 말인즉 그럴려면, 아예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고 한다.그러면 아예 문제의 소지가 없어진다. 무슨 위대한 사람이 있고, 성인이 있고, 무슨 해탈한 사람이 있고, 성불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인간 위에 인간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런 의미에서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종교분쟁을 생각하면 아주 절실하게 와 닿는 문제다. 김민우 군의 논지는 아주 훌륭했다.
인간 위에 인간을 두지 말자! -노자-
12. 명확한 논지
그 다음에 이상규 군의 글이다.
[고대 중국의 학자 노자라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지 말라’라는 말을 했는데, 나는 이 문구를 ‘본받다’와 ‘숭상하다’라는 말의 차이점을 중점으로 두고 생각해 보았다. 어떤 사람을 숭상한다는 것과 그 사람을 본받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본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훌륭한 점을 본보기로 삼아 자기발전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지만, 숭상시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된 점까지도 감싸주는 등 무조건적으로 한 사람을 우러러 보는 것이다.]
이상규(중앙고 2년)는 매우 명료한 하나의 논지를 세워 이 문제를 접근하였다.
이상규는 아주 훌륭한 논지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본받는다’와 ‘숭상한다’를 나누어서 생각하고, 그 차이를 말하고 있다. ‘본받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따르지만, 그 사람의 나쁜 점은 취하지 않고, 그 사람을 비판할 수도 있고, 그 목적이 자기 발전이다. 그런데 ‘숭상한다’는 것은 무조건 존경하고, 그 사람의 나쁜 점까지도, 모두 감싸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을 숭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석가 아니라 예수나 공자, 소크라테스도 숭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단지 그 사람들을 본받아야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포인트는 굉장히 훌륭하다.
숭상하다와 본받다는 다르다. -이상규-
이런 스타일의 논술 작성은 굉장히 점수 받기가 좋다. 왜냐하면 주제가 명료하고, 나 같은 사람이 아닌, 보통 교수가 채점하기에 너무도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주 상식적이고, 굉장히 논지가 명료하기 때문에 점수 받기가 좋을 것이다.
13. 중복 피하기
단지 몇 가지만 지적하겠다.
중간 쯤에 ‘더 이상 의식의 발전이 진보하지 못하는 등’과 같은 어려운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런 것은 redundancy가 심하다.
영어에서 문장을 고칠 때 많이 쓰는 말인데 ‘더 이상 의식이 발전하지 못하는 등’이라고 쓰면 된다. 발전, 진보 이런 말들을 구태여 반복적으로 어렵게 쓸 필요가 없다. 중복헤서 쓸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의식이’라고 주어를 쓰고, ‘발전하지 못한다.’는 동사표현을 쓴다. 이렇게 하면 뜻이 아주 명료해진다.
더 이상 의식의 발전이 진보하지 못하는 등
-> 더 이상 의식이 발전하지 못하는 등
14. 문장 끊기
그 다음 밑에서 4째줄을 보자.
[서로 간에 충돌이 일어나 싸움이 일어날 염려가 있을 수 있는데 노자가 ‘使民不爭(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지니)’라는 말을 뒤에 덧붙인 것은 이러한 문제점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아까처럼 ‘만약에 숭상시 하는 사람들이 각각 다를 경우, 서로 간에 충돌이 일어나 싸움이 일어날 염려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마침표를 찍는다.
싸움이 일어날 염려가 있을 수 있는데
-> 싸움이 일어날 염려가 있다.
이런 문장은 연결할 필요가 없다. 뒤에 ‘때문일 것이다’가 연결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두 문장 사이에 연결사를 붙일 필요가 없다. ‘있을 수 있다.’라고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그러면 훨씬 더 의미가 강력해진다.
15. 동사적 표현
제일 마지막에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라고 썼다. 이것도 ‘것’, ‘것’이라고 2개가 들어갈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라고 ‘것’이 하나만 들어가면 된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이런 표현은 redundancy하다. 이런 것도 좋지 않은 표현이다. 그런 것을 고치면 이 글은 굉장히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 싶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는 말씀이신 것 같다.’라는 글이 있는데, 이게 이상한 것이다. 직접적인 표현을 쓰도록 한다. 동사를 직접 쓰는 게 좋다.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하는 것인데, 동사적 표현을 직접 쓰는 게 좋다. ‘말씀’이라고 명사화시켰다. 이런 게 좋지 않다.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고 ‘말씀하다’라는 동사로 바꾼다.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는 말씀이신 것 같다.
-> 현인을 숭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될 수 있는대로 동사적 표현을 많이 쓰는 게 좋다. 동사는 움직이는 것이고, 명사는 안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니깐 명사를 많이 쓰면 움직이지 않으니깐 문장에 힘이 없다.
동사적 표현을 많이 써야 문장이 역동적이 된다.
동사를 많이 써야 문장이 움직인다. 그래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싸워라!’ 그러면 되는 것을 ‘투쟁의 자리에 존재하라’ 이렇게 쓰면 전달이 잘 안된다. 그냥 ‘싸워라!’ 그러면 된다. 흔히 명사적 표현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주 바보같은 것이다. 동사를 직접 쓰기 바란다.
16. 명료한 표현
제일 마지막 문장도 고쳐보자.
[그러므로 불상현(不常賢)은 아무 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숭상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아무’라는 표현이 이상하다. ‘아무 현인이라고 불리는’ 이라고 하지 말고, 더 명료하게 하려면, ‘아무’는 뻰다. ‘아무’를 넣으면 전달이 잘 안 된다. ‘그러므로 불상현은 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숭상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된다.’고 바꾸도록 한다. 이렇게 명료하고 정확하게 바꾼다.
그러므로 불상현(不常賢)은 아무 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숭상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 그러므로 "불상현은" 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숭상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된다.(수정문)
17. 양명학의 지혜
[주제 : 왜 노자는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라 하지 않았는가?]
[내용 : 그 이유는 이렇다. 만약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을 숭상한다면 꼭 그 사람처럼 되려고 하고, 그 사람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자연스러운 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1)가령 자신이 히틀러를 숭상했다고 치자. 그때는 자신이 히틀러처럼 생각하게 되어서 마땅히 유대인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자기가 숭상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생각이 아니라면 멸시하는 경향 등이 생길 것이다. 만약 다른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지 않고 살았을 땐, 2)자신의 생각을 무한하게 하여, 자신의 주장을 떳떳하게 밝히고 마음의 문을 열어서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자는 괜히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여 자기 자신을 망치는 3)것보단, 숭상하지 말아, 자신을 더 강하게, 4)좋은 쪽으로 되게 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 같다.]
이것도 아주 좋은 이야기다.
‘인간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자연스러운 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인간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자연스러운 양심’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양명학에서 하는 말과 거의 같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반대편에서 왕양명이 펼친 철학이다.
왕양명(王陽明, 1472~1528) : 명나라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 주자학의 리학(理學)적 사고에 반대하여 심학(心學)을 주창하고 보다 민중적 사상을 폈다.
그 양명학에 양지양능(良知良能)이라는 표현을 쓴다.
양지양능(良知良能)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앎과 능력, 인간은 꼭 배워야 훌륭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
적자지심(赤子之心)이라고 해서, 인간은 원래 타고난 자신의 양지양능(良知良能)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흐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래적인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게 양명학의 주제다.
그런데 홍민호는 중학교 1학년이지만, 이건 자기 이야기를 쓴 거 같다. 양명학의 아주 중요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
홍민호의 사고력은 왕양명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홍민호의 양지(良知)다.
그러니깐 홍민호나 왕양명이나 비슷한 사람이다. 홍민호의 생각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말하려고 하는 포인트에 대한 예가 명료하다.
‘가령, 자신이 히틀러를 숭상했다고 치자.’라는 글은 이왕이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쓰는 거니깐, 과감하게, 강하게 남에게 전달하려면, 주어를 확실하게 하는 게 좋다. ‘자신‘이나 ’자기‘라는 말은 문장에서 쓰지 않는 게 좋다. ‘가령 내가 히틀러를 숭상했다고 치자. 그때는 나는 히틀러처럼 생각하게 되어서, 마땅히 유대인이 죽어야....’라고 하는 게 훨씬 강력하다.
1) 가령, 자신이 -> 가령 내가
주어를 애매한 말로 쓰지 않는 게 좋다. 주어를 쓸 적에는 명료한 주어를 사용하자.
주어를 쓸 때는 명료한 주어를 사용하자!
이 말의 논지는 정확하다. 내가 만약에 히틀러를 숭상하면 히틀러가 생각하는대로 다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유태인들을 몇 백만을 가두어다가 죽이고, 그 사람들의 기름을 뽑아서 쓴 것이다. 당시 이빨에 남아있는 금덩어리를 다 합친 것만 해도 눈덩어리만한 크기였다. 무지막지한 놈이다. 히틀러가 결코 좋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히틀러처럼 나쁜 사람아 아니고 훌륭한 사람인데, 예수의 이름으로 인간 세상에서 저지른 죄악은 히틀러가 저지른 것보다 천만배 더 크다. 종교를 빙자해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죄악이 저질러 졌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모독이 아니고, 위대한 사람을 숭상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만약 다른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지 않고 살았을 땐, 자신의 생각을 무한하게 하여,’라는 표현에서 ‘무한하게 하여’는 전달력이 떨어진다.
그 밑에 있는 ‘떳떳하게 밝히고, 마음의 문을 열어서’와 같은 것은 영어로 말해서 figurative(비유적)해서 뜻이 명확한데, ‘무한하게 한다.’는 표현은 명확하지 않다.
나 같으면 ‘자신의 생각을’이라고 명사화하지 않고 동사화 시키겠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끝없이 펼쳐서 자신의 주장을 떳떳하게 밝히고’라고 하겠다. ‘끝없이 펼치다.’라는 아름다운 비유의 문학적인 표현을 쓰겠다. ‘무한하게 하다’라는 말보다 이게 좋다.
2) 자신의 생각을 무한하게 하여
-> 자신의 생각을 끝없이 펼쳐서
‘괜히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여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보단,’도 ‘보다는’이라고 풀어서 명료하게 하는 게 좋다.
3) 보단-> 보다는
‘숭상하지 말아, 자신을 더 강하게, 좋은 쪽으로 되게 하기 위해 이말을 하는 것 같다.’는 표현도 그냥 ‘되게 하라고’로 바꾸는 게 좋다.
4) 좋은 쪽으로 되게 하기 위해
-> 좋은 쪽으로 되게 하라고
18. 명확한 주제 제시
현인을 숭상한다고 다투게 되는 것은 그것으로 다투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숭상하는 방식들이 잘못되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 현인을 숭상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일류 사회로 발전하려면 현인이 있어야 된다. 현인을 숭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현인을 숭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숭상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 김하남 상명부속여중 1학년
그런데 내가 숭상한다고 해서, 남한테 숭상을 강요하고, 내가 믿는 진리만이 영원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그런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문제이다. 현인을 숭상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김하남은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설득력 있다.
[노자는 현인을 숭상하면 백성들 사이에 경쟁이 생겨 1)싸우게 된다고 하지만 2)요즘 세상에 현인이 한둘인가.]
이 문장은 전달이 잘 안된다. 전체를 읽고 나니깐 말하는 의도를 알겠는데, 이 문장만 보면, 너무 경솔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이라는 말 앞에서 끊는다. ‘싸우게 된다고 하지만’이라고 쓰지말고, ‘노자는 현인을 숭상하면 백성들 사이에 경쟁이 생겨 싸우게 된다고 했다.’라고 끊는다.
1) 싸우게 된다고 하지만 -> 싸우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어찌 현인이 하나의 모델만 있을 것인가?’라는 이야기인 거 같다. 어떻게 한 종류의 현인만 있을 수 있나? 현인은 많은 것이고, 각자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 스타일대로 숭상하면 되는 것이고, 그걸 다 다양하게 관용하면 된다는 것이 이 글의 포인트로 보인다.
요즘 세상에 현인이 한둘인가.
-> 그러나 요즘 세상에 어찌 현인이 하나의 모델만 있을 것인가?
핵심적인 주제를 상대방에게 명료하게 전달해야 한다. 시험관에게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를 명료하게 앞에서 전달해 놓아야만, 그 뒤에 끌고 가면서 자기논리를 펴기가 쉽다. 앞에서 애매하게 말하면 뒤에 가서 상당히 힘들어진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앞에서부터 명료하게 쓰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