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구름(김병우)
아파트 14층 계단을 걸어서 오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엘리베이터 정기점검이 하필이면 오늘 이 시간일 게 뭐냐며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이걸 머피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아니, 건강을 생각한다면 그 반대인 샐리의 법칙이라고 해야 더 맞을텐데,
오래전 신혼 때다. 부엌을 밟아서 들어가는 단칸방에 살다가 14평 임대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 기뻤다. 5층짜리 아파트였는데 제일 꼭대기 층에 배정이 되었다. 그 당시 단층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계단으로만 오르내려야 했다. 더구나 서민 아파트는 연탄보일러가 주종을 이뤄 매달 연탄을 집집이 들어놓는 게 큰일이었다. 겨울나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을 좁은 보일러실에 빼곡히 들어놓아야만 한다. 그때는 보일러실 천장이 닿을 정도도 차곡차곡 쌓아둔 연탄만 쳐다봐도 배가 불렀다.
연탄을 배달 아저씨가 지게로 일일이 지고 날랐는데 고층은 연탄값이 저층보다 조금 더 비쌌다. 단체로 연탄이 들어오는 날은 아파트 계단을 청소하는 날이었다. 제일 꼭대기 층에서 아래층을 향하여 “물 내려갑니다. 물!”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층마다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서 아래층으로 힘껏 쏟아부었다. 남편은 화장실의 물을 그릇에 담아서 나르고, 아내는 계단바닥을 플라스틱 빗자루로 쓸었다. 청소하는 동안 아낙네들 소리로 복도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간혹 바빠서 청소에 참여하지 못하는 세대가 생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청소 삼매경에 빠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1층까지 내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소매나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손에 비를 든 채 서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청소가 끝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인심이 넉넉한 집으로 모여 각자 챙겨 온 음식들로 즉석 뒤풀이가 열렸다. 고향 집에서 가지고 온 고구마를 그 자리에서 쪄 김장김치와 같이 막걸릿잔을 돌리며 공동체의 친분을 다져갔다.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형편들을 잘 아는 처지라 내 일처럼 서로서로 도와가며 가깝게들 지냈다.
서민 아파트는 계단 청소를 통해 그들의 애환을 함께하였다. 계단은 이웃 간의 정을 나르는 매개체였으며 소통의 장이었다. 남정네들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여도 아파트 계단에 들어서면 온순한 양이 되었다. 내 집에 도착했다는 푸근한 마음과 이웃을 배려하려는 생각이 깊었으리라. 나 역시 술에 취한 날은 갈지자걸음으로 계단 난간을 잡고 5층까지 오르면서 몇 번이나 계단에 걸터앉아 쉬었다. 그런 취태를 계단은 묵묵히 다 받아주었다. 다음날이면 아무개 집 누가 술이 떡이 되었다는 얘기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돌이켜보니 그때처럼 이웃 간에 마음을 터고 지냈던 적이 그 이후로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빛바랜 흑백영화를 보는 듯 감회가 새롭다.
늦은 오후, 동네 어귀를 지나치려는데 상가 계단에 힘없이 앉아 있는 낯익은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종일 파지 박스를 주우러 돌아다녔으나 억세게 재수 없는 날이라 허탕만 쳤다고 했다. 할아버지 것으로 보이는 빈 자전거가 계단 옆에 쓸쓸히 서 있다. 손수레 등 재빠른 다른 경쟁자들에게 뒤처졌던 모양이다. 자전거 뒤 높다란 거치대 짐받이가 허전했다. 아직 끼니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말에 주머니에 잡히는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여 드렸더니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받으셨다. 고맙다는 말 대신에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였다. 무엇이 그토록 미안한지 돌아서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못했다.
계단은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들이 잠시 쉬어가는 고마운 장소다. 노숙자에게는 무거운 짐 보따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로댕’도 계단에 걸터앉으면 한결 더 멋있어 보이고,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 무대가 되었던 스페인광장의 계단이 없었더라면 그 멋진 장면이 탄생할 수가 있었을까? 연인들에게 계단은 가위 바위 보를 외치며 서로의 사랑을 싹틔우는 가교역할 고리다. 경기장이나 공연장에 모여서 환호하는 군중들의 모습도 계단이 있으니 더욱 빛이 나는 것 같다. 한때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바닷가 모래사장 언덕배기에 있는 돌계단에 앉아 넋 놓고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달랜 적이 있었다. 이 모든 게 드러나지 않지만, 무언의 응원을 보내는 계단의 힘이지 않을까?
계단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빛과 음악이 반응하여 LED 조명과 피아노 선율이 발끝에서 터져 나오니 건강도 챙기고 재미와 흥미도 더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한다. 요즘은 도심 곳곳에서 이런 계단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지역에는 3.1만세운동 길 아흔 계단이 있다. 계단 길에는 3.1운동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있어 오르내리면서 숙연한 분위기에 젖어본다.
젊었을 때는 두세 개의 계단을 껑충껑충 뛰다시피 가볍게 오르내렸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매어 쓸 수 없듯이 어떤 일을 이루는 데는 밟아야 할 순서가 있다. 그것을 무시하면 일을 그르치기가 십상이다. 세상만사(世上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계단이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2019.10.12.)
첫댓글 5충 서민 아파트의 계단청소, 나도 한 때 그런 APT의 3층에서 살아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웃과 정을 나누던 좋은 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옆집도 모르고, 아래 윗집은 층간소음으로 원수처럼 지내고 있는 집도 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시절 APT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주셔서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계단이 힘든 길만이 아님을 선생님의 글을 통해 느껴봅니다. 어렵던 시절 계단은 연탄 배달부의 고난의 계단이기도 하고 그을 통해 윗층. 아랫층 사람들이 하나되어 정을 나누는 통로가 되기도 하니, 계단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름 선생님의 글을 따라 아득한 옛날 신혼살이 하던 아파트를 다녀 왔습니다. 연탄 부억은 아니었지만 계단청소를 하는 장면에서는 같은 아파트에 혹시 살았었나 할 정도로 그 날의 기억과 흡사합니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이웃이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사람이 살아 가는 곳곳에서 만나는 계단은 편리의 장소이기도 하고 낭만의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파트 계단에 얽힌 정겨웟던 시절을 추억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민 아파트에 살던 옛추억을 떠올려 회상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사실 우리가 연탄을 연료로 쓰던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난방용으로 사용하던 연탄이 생각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짧은 흑백영화 보는듯 눈에 선합니다. 사람냄새나는 그 시절이 그립기도합니다. 계단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하신 필력이 돋보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계단 오르기를 피해가는 시대인데 계단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일으키게 합니다. 서민 아파트에서 생활하던 모습들. 우리 나이세대에 대부분이 겪었던 경험들입니다. 리얼한 삶의 모습 잘 감상했습니다.
계단은 단계인가 봅니다. 아무리 급해도 두세계단은 몰라도 한꺼번에 여러개단을 오를 수는 없겠지요. 단계는 무시할 수 없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신혼때 5층 아파트 의 4층에서 살았는데 라인이 모두 계단 청소하던 생각이 납니다.
잊고있든 추억을 소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계단이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어갑니다. 그래도 서민 아파트의 행복했던 삶은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해주는 소중한 소통의 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5층아파트가 대세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주공이나 시영등 공영아파트 위주이고 구입가도 비교적 저렴했지요. 저는 그 시절 공영아파트 청약 놓치고 어렵게 민영아파트에 당첨되어 처음으로 아파트 생활시작하여 지금끼지 두곳을 더 이사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아파트 생활을 떠올리게 하네요.
연탄보일러 뚜껑에 온수가 방을 데우고 남는게열로 두말짜리 말통의 물을 데워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했지요. 새마을 연탄보일러 정말 효율이 좋았고 연료비를 절감했습니다. 그때 이웃도 많았고 사람사는 냄새가 났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서민아파트의 계단 청소에 얽힌 이야기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살아서 움직입니다. 따뜻한 이웃들과 잘 지내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계단에 얽힌 배고프고, 힘들고 또는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