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글벙글식당
박재명
목젖이 성대를 꽉 누르고, 입은 입대로 굳어져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를 꼭 깨문 채 “아부지요, 이제 그만 집에 가입시더~” 라며 가까스로 말을 꺼냈습니다. 아버님도 이제 체념하셨는지 대답대신 회한의 한 줄기 눈물로 생의 마지막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버님의 몸은 백짓장처럼 점점 창백해지며 체온은 뚝뚝 떨어지고, 가족들은 창밖으로 드리워지는 어둠처럼 절망의 나락으로 하염없이 빠져 들었습니다.
6년이 넘도록 아버님의 육신을 괴롭히던 간암에 대한 마지막 수술 결과를 두고, 너무 많이 상해서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담당의사는 말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갈 곳은 아버님의 어릴 적 추억을 품고 있고, 한평생의 애환을 무던히도 달래 주던 고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님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듯 삶을 향한 끈은 놓으시고 그만 집으로 가시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구급차는 국도 5호선의 밤길을 헤치며 고향을 향했습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시작된 통증은 고향집에 다다를 때까지 내내 괴롭혔습니다. 모르핀도 소용없던 고통은 고향에 도착하면서 모든 짐을 내려놓으신 듯 편안해 지셨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오시던 정든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머무실 것을 간절히 바랬지만, 끝내 아버님은 얼마지 않아 초겨울의 찬바람을 타고 그렇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 부는 계절이 되면, 스산했던 그해 겨울풍경과 함께 벙글벙글 식당이 기억의 저편에서 다시 떠오릅니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한 대학병원 앞에 있던 벙글벙글 식당의 육개장이 그리 맛있어 출장 오는 날은 꼭 들렀다고 하셨습니다. 한 때 아버님 병환 중에 설상가상으로 어머님까지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하시던 날, 상심이 크셨던 아버님을 위해 바로 그 식당을 찾아 나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식당들은 모두 약국으로 바뀌고 없어 졌습니다. 그 맛을 꼭 한번 보고 싶어 하셨는데 많이 섭섭하다며 쓸쓸히 발길을 돌리시던 생전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껏 먹는 것에 대한 의미를 별로 두지 않았으나 요즘은 인생을 즐기는 중요한 것들 중의 한 가지가 먹는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맛을 통하여 살아 있음을 확인하며, 포만감을 통하여 잠시나마 근심을 덜어내고, 향수를 추억하며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식도락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물며 저보다 훨씬 오랜 세상을 사신 어르신들이 맛을 통하여 느끼신 인생은 감히 제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아버님 살아생전에 왜 벙글벙글 식당을 좀 더 찾아보지 않았는지 이제 와서 후회로 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며 그 식당도 함께 사라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웃 블로그를 통해 근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있던 장소에서 동성로 부근으로 이전했으며, 그 집의 육개장 맛은 여전히 일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뚝배기 한가득 붉은 양념 빛깔이 찰랑거립니다. 4천 원짜리 이 음식 하나로 40여년을 이어왔음에, 생각건대, 그저 목 메여 오는 집! <따로>는 선지가 들어가고, <육개장>은 양지가 들어가지요. 구수하고 얼큰한 조금은 달작지근하기도 한 이 맛, 입에 감치는 그 맛 생각나 가끔 가 보았습니다. 넘치도록 담아 낸 육개장에 밥 한 그릇, 실파무침에 마늘다짐. 먹음직한 깍두기 하나가 반찬의 전부입니다.” -네이버 블로그 ‘窮卽通’ 중에서 -
블로그 이웃을 통해서 생전에 아버님이 즐기시던 육개장의 맛이 그대로 전해 옵니다. 비록 이웃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아버님이 그리던 그 맛을 지금이라도 찾으러 가겠다던 생각은 가득한데,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1년 넘는 시간이 또 훌쩍 지나갑니다.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딱히 대구에 갈 일도 없었거니와 어쩌다 한번씩 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기를 서둘러서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상상하는 벙글벙글 식당 육개장은 아버님의 추억에서 나의 추억으로 유산되었습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해가 짧아지고 어둠이 내리는 겨울의 길목에 아버님 기일이 다가옵니다. 해를 넘기기 전에 그곳을 꼭 찾아 가보고 싶습니다. 사진 속으로나마 벙글벙글 식당의 간판을 보니 아버님 살아생전에 4천 원하는 육개장 한 그릇 대접하지 못한 후회가 목에 가시처럼 걸려옵니다. 당신이 계시지 않는 그곳에 살아있다는 이유로 혼자 맛보겠다며 찾아 가려니 이 또한 돌이키지 못할 죄스러움으로 밀려옵니다. 아마 벙글벙글 식당에 들러 육개장을 앞에 두면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목젖이 또 한 번 곤두서서 울컥 하고 눈물을 쏟아버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