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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f 2017.7.30.사도행전메시지(13) 찬송가 204(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세 가지 죽음 역사
ubf말씀/사도행전12:1-25
요절/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기도/영광의 하나님이시여, 생명과 진리의 구주 예수님를 보내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로 우리를 살리시고 세상을 구원하시오니 감사합니다. 이 컴퓨터 시대에 주 예수의 이름을 사랑하는 귀한 주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온 세상에 역사하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여 이시간 부족한 종을 불쌍히 여기사 도우셔서 사도행전 12장에 나타난 죽음의 진리를 깊이 나누며 주 예수의 사랑을 충만히 덧입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 승천하신 후 오순절성령강림부터 시작된 인류역사의 성령시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놀랍고 감사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겨자씨와 같이 미미해 보이지만 성장하여 거대한 영향력을 갖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누룩과 같이 은밀하지만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 각자에게 기적이요 영광의 승리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령께서 안디옥의 이방인들 가운데 어떠한 역사를 이루셨는가 깊이 배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귀한 성경선생들이 이방인들을 섬겨 진리를 가리칠 때에 안디옥에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니 세상이 변한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도 이러한 성령의 역사의 중심에 있습니다. 주께서 2학기 우리를 통해서 단국대중심으로 위대한 성경공부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12장 말씀은 죽음에 관한 진리를 조용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가지의 죽음에 대해서 배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죽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의사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생일에 관해서는 우리의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택할 수 없었고 외모나 재능의 유전자도 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다릅니다. 죽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관심과 노력여하에 따라 우리의 죽음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실로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고 하루하루의 삶의 방향을 깊이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6. 야고보의 죽음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여기서 헤롯은 유대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그는 로마황제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차지한 그 부친을 닯아 세속지향적이었고 능란한 정치술수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이루는 데에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활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있는 믿음있는 사람을 죽여서 군중들의 관심을 거기로 돌리고 자신의 통치에 유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속의 권력자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마귀의 세력들에 속해 있습니다. 헤롯은 하나님을 믿는 교회를 먹잇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교회는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고 어린 양과 같이 온순하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세상권력은 전쟁하고 다투고 술취하고 춤추고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교회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는 곳이었습니다. 교회는 주 예수로 말미암은 생명의 빛이 있었습니다. 세상 권력자 헤롯은 어떠한 악을 행하였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He had James, the brother of John, put to death with the sword'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세상에 이러한 미친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야고보는 요한의 형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고깃배에서 부르셨을 때에 아직 청소년에 불과한 귀엽고 착한 동생 요한을 데리고 아버지와 배를 뒤에 둔 채 눈물을 흘리며 주를 따랐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청년이요 형이요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와 더불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형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야고보에게 무슨 죽일만한 죄가 있었겠습니까? 헤롯에 비할 때에 그가 무슨 잘못을 많이 했습니까? 그는 남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간음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돈욕심을 내고 사치를 행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야고보는 순결한 비둘기요 순하디 순한 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야고보가 헤롯에게 붙잡혀 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여러분 순교가 무엇입니까? 순교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는 모습 중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죽음입니다. 순교는 창조주 하나님과 메시야 그리스도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순교는 어떻게 보면 의문이 남는 죽음입니다. 사탄마귀의 종에게 예수님의 성실한 제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얼핏 허무해 보이고 억울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는 이 세상의 어둠을 깨우는 가장 강한 광선과 같습니다. 순교를 주위 사람의 영혼을 찔러 쪼개어 믿음을 갖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죽음입니다. 야고보의 순교의 피는 온 세상에 전해져서 오늘날까지 진리의 교회에 영원한 소망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당시 모든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사람은 모름지기 이렇게 죽어야 한다‘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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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모두 순교자의 은혜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를 믿고 사랑하여 그 진리의 말씀을 위해 피흘리고 죽은 야고보를 따르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 귀한 복음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예배를 보는 이 은혜가 야고보의 죽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또 우리가 다 순교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칼에 대응하지 않고 죽임 당해야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반항하지 않았듯이 또 야고보 사도가 칼에 분개하지 않고 겸비하게 죽었듯이 순교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형제 선교사가 위암에 걸려서 투병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UCLA에 공부하고 있다가 위암으로 귀국하였는데 수술을 해보니 3기말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빨리 미국에가서 양들을 섬겨야 한다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양들에게 3개월 치료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순교자입니다. 이제 41세인데 이 선교사 가정을 주께서 거룩하게 사용하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의 양무리를 먼저 생각하고 주의 사명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는 순교자입니다. 순교의 죽음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죽음입니다.
37.베드로의 죽음
3,4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 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 말씀은 헤롯이 야고보를 죽여 정치적인 이득을 보자 베드로는 죽이고자 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헤롯은 ‘아 한 명 더 죽이면 내 인기가 더 높아지겠네’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혔습니다. 베드로는 이 때에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아 내 친구 야고보도 죽었으니 나도 죽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 저를 받아주세요, 예수님 저를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교회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교회는 야고보가 죽을 때에는 엉겹결에 당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베드로가 잡혀 옥에 갇히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베드로에게 새로운 죽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유월절 다음날 처형되기 위해서 저녁에 기다릴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6-11절을 보면 베드로가 어떻게 감옥에서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처형 전날 밤에 베드로는 두명의 군인 사이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잠을 자야했습니다. 헤롯은 베드로를 잠잘 때에도 두명의 강포한 군인과 함께 쇠사슬에 묶었던 것입니다. 감옥 밖에는 파수군들이 엄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의 묶음과 감시는 하나님의 천사들의 도음에 있어서는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천사들은 베드로의 쇠사슬을 끊고 띠띠우고 옷입혀서 감옥밖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아무것도 알 수없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베드로는 천사와 함께 첫째 파수와 둘째 파수를 유유히 통과했고 쇠문이 저절로 열려 완전히 감옥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주의 천사를 통해서 헤롯의 손과 교회를 무시하던 악한 백성들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볼때에 베드로는 야고보와 같이 순교하기를 각오하고 원했지만 주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순교가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을 알 수있습니다. 즉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순교과 꼭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야고보와 다른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죽음은 자기의 육신의 소망을 끊고 주의 양무리를 먹이는 사명을 섬기는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주의 사명을 감당하고 일주일에 세팀씩 일대일을 한다면 우리는 순교자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죽음을 깨달을 때에 우리의 인생은 진정으로 천사와 동행하는 초월적인 제자인생이 될 것입니다. 12-17절을 보면 베드로가 마가의 집에 갔을 때에 형제들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형제들은 베드로의 목숨에 대해서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방문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에게 주의 역사를 설명하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완전히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살아서 사명을 감당하되 야고보와 같이 순교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39). 베드로는 비록 살아서 감옥을 나왔지만 사실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죽고 주의 사명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날마나 기억해야할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순간마다 이 죽음을 즐거이 택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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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헤롯의 죽음
19절을 보십시오. 헤롯은 베드로를 찾지 못하자 파수들들을 죽였습니다. 헤롯은 참으로 악독한 자요 사람의 피흘리는 것을 파리 잡는 것보다 못하게 여기는 자였습니다. 파수군들의 죽음은 허무하고 가치가 없었습니다. 헤롯의 또한가지 큰 죄는 자기중심적인 교만이었습니다. 20-22절을 보면 헤롯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뛰어난 자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왕궁의 양식을 먹는 까닭에 오히려 헤롯에게 한마디도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헤롯은 이 점을 잘 이용하여 그들을 다스리는 데 이용했습니다. 두로와 시돈 인들은 어찌하든 헤롯의 미움을 받으면 손해이므로 헤롯의 침소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해서 헤롯과의 화목을 청하였습니다. 이처럼 헤롯은 참으로 악행을 하고서도 백성들로부터 화목을 청함받을 정도로 정치적 위치가 탄탄한 자였습니다. 큰소리 뻥뻥 치고도 도리어 아부를 받으며 사는 자였습니다. 21,22절을 보면 헤롯의 화려한 모습과 연설의 광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수려한 외모와 으리으리한 왕복차림과 자신만만한 음성으로 하는 연설은 백성들의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소리쳤습니까?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백성들은 헤롯에게 완전히 압도당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헤롯은 마치 오늘날의 대스타와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오늘날 여학생들이 영화배우를 보고 오빠를 외치다가 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에게 발을 동동구르며 울고 외치는 북한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나갈 때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헤롯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나 과 23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헤롯의 죽음은 속된 말로 ‘비명횡사’요 ‘급사’였습니다. 헤롯의 죽음은 허탈하고 비웃음거리입니다. 그 아름답던 모든 것들이 벌레먹어 썩은 것처럼 처량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는 천국에 대한 소망없이 준비도 없이 어느날 사라진 것입니다. 헤롯의 죽음은 예수믿지 않는 자의 슬픔 죽음을 대표합니다. 그날 그날 육신의 유익을 따라 살지만 언제죽을지 모르는 허무한 인생의 종말입니다. 이런 인생은 사람들에게 영혼의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의 죽음에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헤롯과 같이 죽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헤롯과 같이 죽으면 그 자녀들이 재산다툼을 하고 그 아내는 남편이 잘 죽어 기회를 잡았다 생각하고 그 친구들은 그의 인생을 술안주로 삼고 즐깁니다. 헤롯과 같은 죽음은 인생의 부끄러움이요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는 죽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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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세가지 죽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자기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입니다. 현재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 장차 우리의 죽음을 결정합니다. 이번 여름은 예년보다 덥다지만 우리는 주안에서 새롭게 감사하며 생명의 일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신 말씀을 따라 하루하루 순교자의 길을 가게 하여주십시오.
할렐루야 아멘 !
ubf 2017.7.30.사도행전메시지(13) 찬송가 204(예수로 나의 구주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