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잠깐 동네를 걷다가 쓸쓸한 노인이 아무 뜻 없이 봉창문을 여는 걸 보았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내 발자국 소리를 사그락 사그락 눈 내리는 소리로 들은 것 같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문 밖과 문 안의 적요寂寥가 소문처럼 만났다 적요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탱탱하여서 느슨할 뿐 안과 밖의 소문은 노인과 내가 귀에 익어서 조금 알지만 그 사이에 놓인 경계는 너무나 광대하여 그저 문풍지 한 장의 두께라고 할 밖에 문고리에 잠깐 머물렀던 짧은 소란함으로 밤은 밤새 눈을 뿌렸다
어제오늘 끊임없이 내리는 눈에 관하여 나직나직하게 설명하는 저 마을 끝 첫 집의 지붕
나는 이제 기침소리조차 질서 있게 낼만큼 마을 풍경 속의 한 획이 되었다 나도 쓸쓸한 노인처럼 아무 뜻 없이 문 여는 비결을 터득할 때가 되었다 실은 어제 밤새워 문고리가 달그락거렸다
문고리에 손 올리고 싶어서 나는 문을 열었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50명의 응모작을 읽으면서, 몇 년 전에 심사했을 때와 달리 작품의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되어 놀라웠고 그래서 심사가 다소 힘들지만 즐거웠다. 수주문학상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작품도 소홀하게 읽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해서 심사는 다소 더디게 진행되었지만, 박형권의 「쓸쓸함의 비결」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에는 두 심사위원의 의견이 쉽게 일치했다.
「쓸쓸함의 비결」은 자연의 변화와 기운이 하나의 사물 속에서 감지되는 순간,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무심한 몸짓 속에 감춰져 있는 순간을 행복하게 포착한 수작이다. 이 시는 그 순간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이 광풍처럼 지나간 자리, 욕망과 희망과 기대가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는 쓸쓸함이 사실은 얼마나 풍요로운 세계인가를 슬쩍 내비쳐 보여준다.
노인이 봉창문을 여는 순간에 갑자기 생기는 안과 밖의 광대한 경계, 노인과 나를 가르는 낯선 경계,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아득한 경계들이 “문풍지 한 장의 두께”로 압축되는 과정은 음미할만하다.
시적 자아가 사라져서 하나의 풍경 속에 조화롭게 녹아드는 희열의 경험, 세속적인 모든 것들의 가치와 의미가 무화되는 지점에 대한 종교적 미학적 원리를 한 노인이 문을 여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이야기에서 이끌어내는 방법은 탁월하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그중에서 시적 자아의 몸과 마음에서 오랫동안 숙성되어 일체가 되어버린 원시적인 바다의 싱싱함과 생동감을 실감나게 그린 「가덕도 탕수구미 시그리 상향」은 매혹적이다.
수상작과 함께 논의된 응모작들 중에서는 이정연, 김현서, 이성목의 작품이 주목할 만하였다. 이정연의 「칼」은 시적 자아의 몸에서 날아오르려는 새의 내밀한 움직임과 생명력을 칼날을 쥘 때의 감각으로 향상화한 가작이다. 설명할 수 없고 개념화할 수 없는 몸의 고유한 살아있는 느낌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힘이 뛰어나다.
김현서의 「얼룩의 영역」은 한 여자를 관찰하면서 내면의 미세한 움직임을 끓어 넘치는 냄비의 국물, 마른 양파껍질 등과 같은 사물 이미지로 연결시키는 방법이 볼만하다. 시적 자아의 내면에서 그녀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꿈꾸면서 여자와 연애를 재구성하는 방법도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두 응모자의 작품이 보여준 기량과 개성은 수상작에 뒤지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다소 고르지 못해 아쉽게 내려놓아야 했다. 이성목의 「찌라시」는 지하실로 잘못 들어온 귀뚜라미며 매미 등을 관찰하며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의 세계를 허구의 이야기로 재구성한 흥미로운 작품인데 몇몇 상투적인 시어들이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켰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