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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운 목사의
"나의 어린 시절"
맹꽁이이라는 아이
그 아이의 별명은 맹꽁이였습니다. 그의 이름 믿을 신(信), 뿌리 근(根) ‘신근이’를 일본말로 ‘싱꽁(信根)’이라 불렀기 때문에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동네 아이들은 ‘싱꽁 맹꽁, 싱꽁 맹꽁’이라며 놀려댔습니다.
처음에 그 아이는 맹꽁이라는 별명을 싫어했기 때문에, 자기를 맹꽁이라고 놀려대는 아이들하고 싸우고는, 몸이 약한 그는 번번이 얻어맞고 울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럴 적이면 그의 어머니는 그가 울며 들려주는 사연을 듣고는 이런 말로 달래곤 했습니다.
“맹꽁이라면 대수냐? 맹꽁이가 얼마나 좋은 건데. 너 맹꽁이 소리 들어 봤지? 맹꽁맹꽁 하면서 울어대는 맹꽁이는 그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란다. 뻐꾸기는 산에서 뻐꾹뻐꾹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맹꽁이는 흙탕물 속에서 맹꽁맹꽁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은 흙탕물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맹꽁이를 사랑하신단다.”
어머니는 손으로 코를 쥐고 맹꽁이 소리를 내기도 하고, 뻐꾸기 소리도 내며 이야기하는 바람에 맹꽁이는 언제 울었더냔 듯 싶게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이런 말도 들려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이야. 너를 배었을 적에 내가 태몽(胎夢)을 꾸었는데...”
“엄마, 태몽이 뭐예요?”
“응, 사람이 엄마 뱃속에 처음 생겨날 때 꾸는 꿈을 태몽이라고 한단다. 너를 배었을 때 내가 태몽을 꾸었는데, 커다란 고목(古木) 나무가 있었어.”
“고목 나무가 뭔데요?”
모르는 말만 나오면 반드시 물어보는 맹꽁이였습니다.
“응, 고목 나무라는 건 말라죽은 것 같은, 오래 된 나무를 말한단다. 그런데 그 고목 나무 저 꼭대기에 하아얀 예쁜 꽃이 피어 있지 뭐니?”
“그래서요?”
“그런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거야.”
“뭐라구요?”
“글쎄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이다’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거야.”
“누굴까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가요?”
“꿈을 깨고 나서 나는 하두 신기해서 외할머니께 가서 꿈 얘기를 했지 뭐니.”
“그랬더니요?”
맹꽁이는 재미있는지 말을 재촉하였습니다.
“글쎄, 그랬더니 외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얘야, 태몽이다. 태몽! 이런 감사할 데가 있나! 하시면서 기뻐하시지 뭐니.”
“그래서요?”
“이렇게 해서 네가 태어난 거란다.”
그러자 질문 잘하는 맹꽁이가 또 물었습니다.
“고목 나무에 꽃 핀 꿈이 왜 태몽이라는 거지요?”
“응, 외할머니 말씀이,
‘얘야, 네 나이 마흔 하나인데 나무로 치면 고목 나무가 아니냐? 그런데 그 꼭대기에 꽃이 피었으니, 네게 자식을 주신다는 꿈이 아니겠니?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이」라니...’ 하시는 거야.”
“아하! 그렇구나.”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이’야. 그러니까 아이들이 널더러 맹꽁이라고 놀려도 싸우지 말고, 아까 엄마가 한 것처럼 네가 ‘맹꽁맹꽁’ 하고 맹꽁이 소리를 내 보렴. 아마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거야. 너두 재미 있구. 알았지?”
“녜, 알았어요.”
그 후부터 맹꽁이는 아이들이 ‘맹꽁이’라고 놀려대면, 아까 엄마가 한 것처럼 제 손으로 코를 쥐고, ‘맹꽁맹꽁’ 하고 노래를 불러서 싸우지 않고 동무들과 사이 좋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맹꽁이는 몸이 약했습니다. 어머니가 늦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젖이 귀하기도 했지만, 체질이 약하여 늘 병치레를 하였습니다. 맹꽁이네 교회는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에 있는 아리실 교회였는데, 1895년에 그의 할아버지 오인선(吳鄰善)이 세운 교회로서, 맹꽁이가 어렸을 적에는 그의 아버지 오연영(吳連泳) 장로가 목회(牧會)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 교회를 순회하던 여자 전도사 두 분이 있었는데, 박정동(朴貞同) 전도사와 김득순(金得順) 전도사였습니다. 박정동 전도사는 맹꽁이네 집에서 머물면서 사경회(査經會)를 인도하였는데, 그가 올적이면 맹꽁이는 늘 앓고 있어서, 그의 엄마가 밤을 꼬박꼬박 새우기 일수였기 때문에 함께 밤을 새우기도 하였습니다.
박 전도사는 맹꽁이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아가야, 너는 이 담에 커서 느 엄마 돌아가시면 건을 두 개 써야겠다.”
사람들은 맹꽁이가 네 살을 못 넘길 거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의 형과 누나들이 두 돌지나 죽은 아이가 자그마치 아홉이나 되었으니까요.
맹꽁이의 아버지 오 장로는 아이가 재롱부릴 때만 되면 죽어 가자, ‘욥과 같은 인내로’ 참고, 하나님께 금식 기도를 하며 매달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게도 후사(後嗣)를 주십시오.”
몇 해 만에 하나님에게서 응답이 왔는데, ‘딸 둘에 아들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맹꽁이 위로 딸 둘이 잘 자라, 큰 딸(永順), 작은 딸(完淳)이 각각 열 살, 여덟 살 되었을 때에 얻은 아들이 맹꽁이였습니다.
그런데 맹꽁이의 바로 위의 형도 두 돌지나 죽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대개가 맹꽁이도 두 돌지나 죽을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맹꽁이의 엄마는, 이 아이가 아무리 병치레가 심하긴 해도 죽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을 했고, 오 장로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맹꽁이의 이름을 ‘믿음으로 얻은 자식’이란 뜻으로 ‘信根’이라 지었던 것입니다.
외할머니의 옛날 얘기와 「천로 역정」
맹꽁이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외할머니가 사랑하는 큰딸에게서 얻은 첫 외손자이니 얼마나 사랑했겠습니다. 틈만 나면 한 집 건너에 있는 맹꽁이네 집에 오셔서는, 어린 외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세 살 때부터 한 2 년 간 외할머니에게서 옛날 이야기를 들은 맹꽁이는 그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들려 준 이야기를 모르고 다시 시작하면 맹꽁이는
“그 얘기는 접때 들은 얘긴데, 다른 얘기 해 주세요.”
하고 말하여 외할머니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외할머니가 이야기가 딸리자 화를 내시며,
“이젠 할 이야기가 없으니 나가 놀아라.”
하시며 밖으로 내쫓으려 했습니다.
그래도 맹꽁이는 나가지 않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대니까, 할머니는 할 수 없이
“거짓말 이야기도 좋으냐?”
하고 물었습니다.
“거짓말 이야기도 있나요?”
하는 맹꽁이에게 외할머니는
“내가 만든 이야기거든.”
하시며 즉석에서 그럴 듯한 이야기를 꾸며 들려 주셨습니다.
맹꽁이는 훗날 아동 문학가가 되어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써 주게 된 동기가, 바로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창작 이야기에 있었다고 회고하며, 외할머니께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참으로 이야기를 잘 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흥선(興宣)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생질녀로서 고종 황제 시절에 대궐에도 자주 놀러 가서, 명성황후(明成皇后)도 뵙곤 했답니다. 이런 가문의 출신이라서 그런지 궁중(宮中) 비화(秘話)를 많이 아는 외할머니는,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곤 했는데, 어린 맹꽁이에게는 모를 말 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맹꽁이는 모르는 말이 나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한 번 일러주면 다 기억하기 때문에, 외할머니는 나중엔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고금소총(古今笑叢)]에 나오는 음담(淫談)까지 들려 주셨는데, 그 이야기들은 네 살 박이 맹꽁이에게는 모를 말, 이해 못할 행동 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말을 자꾸 질문하는 통에 외할머니는
“설명해 주어도 너는 아직 모른다.”
고 웃으며 설명을 회피했습니다.
그럴라치면 맹꽁이는 굳이 설명해 달라고 떼를 쓰다가, 나중에는 아버지 오 장로에게 이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오 장로는 장모님에게
“그런 얘기를 어린것에게 들려주시면 됩니까?”
하고 싫은 소리를 하자, 외할머니는 무안해서 집으로 올라가시고 맹꽁이는 난생 처음으로 종아리를 맞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외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못 듣게 된 맹꽁이는, 누나들이 읽고 있는 [천로 역정]이란 책을 크게 읽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책에는 삽화가 많이 들어 있어서, 어린 맹꽁이는 누나가 없을 때 그 그림들을 보면서, 누나가 읽던 이야기들을 생각해냈습니다. 누나들이 [천로 역정]을 한 번 다 읽어 주자, 맹꽁이는 그 책 그림들을 보며 그 책 내용을 외워서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누나들에게, 맹꽁이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리실 교회에서는 새로 결신자(決信者)가 오면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주로 주일날 오후와 수요일 예배 후에 가르쳐 주었습니다. 맹꽁이도 그 자리에 앉아서 함께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몇 번을 일러 줘도 모르는 것을, 맹꽁이는 한 번만 일러주면 기억해 버리기 때문에, 어른들은
“맹꽁이 보기가 창피하니 낼부터는 데려오지 말아.”
라고 하여 맹꽁이는 한글 강습에 못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한글을 알게 된 맹꽁이는, 집에서 무슨 책이건 닥치는 대로 읽어보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누나들에게 물어서, 네 살에는 웬만한 글은 다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책이 귀한 시절이라 어린 맹꽁이가 읽을 책이라곤 [천로 역정] 뿐이기 때문에, 수도 없이 읽어 그 내용을 달달 외었고 책은 다 낡아 버렸습니다.
새벽기도와 가정 예배
맹꽁이네 여섯 식구는 매일 새벽 네 시면 일어나 새벽 기도회엘 갔습니다. 아버지가 손수 지은 예배당은 열 댓 평(坪) 정도밖에 안 되는 한 일(一)자 집이었는데, 반을 갈라 휘장을 치고, 왼쪽에는 남반(男班), 오른쪽은 여반(女班), 강대상(講臺床)은 중앙에 있었습니다. 맹꽁이는 여섯 살까지는 여반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새벽 기도회에는 20 여명이 나와 기도를 하였습니다.
맹꽁이는 이 때의 추억을 '새벽 길'이란 어린이 찬송가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1.
하얀 눈이 소복히 내린 새벽에
엄마 손을 잡고서 예배당 갑니다.
뽀드득뽀드득 발작 소리 장단을 맞추는 새벽 길,
엄마 손 잡고서 가는 길 즐거운 새벽 길.
2.
불도 안 핀 마루에 무릎 꿇고서
작은 손을 모아서 기도를 드립니다.
내 나라 위하여 기도하고, 내 이웃 위하여 가도하고,
부모와 형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네,
3.
새벽 기도 마치고 밖에 나오니
동녘 하늘 붉으래 먼동이 터옵니다.
짹짹짹 참새의 노랫소리, 집마다 마당의 비질 소리,
오늘도 기쁘게 살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이 노래에서는 ‘즐거운 새벽 길’이라 했지만, 그것은 어른이 되어 추억할 때 생각이고, 그 당시 어린 마음에는 아파서 못 가기를 바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오 장로는 아이가 웬만큼 아플 때는 억지로 들쳐업고 갔습니다.
어른들이 돌려 가며 기도할 때 어린 맹꽁이는 이때다, 하고 잠을 잡니다. 그러다가 찬송 소리에 놀라 깨어서는, 맑은 목소리로 열심히 찬송을 불렀습니다.
맹꽁이는 찬송 부르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특히 높은 음을 잘 내었기 때문에, 악기 없이 하이 테너인 아버지가 높은 음에서 시작하면, 나중에 가장 높은 음에서는 모두들 음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한 옥타브 낮춰 부르기가 일수인데, 이 때 높은 음을 제대로 부르는 건, 아버지와 두 누나, 그리고 맹꽁이 뿐이었는데, 아이 목소리는 튀기 때문에 가장 잘 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맹꽁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이 담에 성악가(聲樂家)가 되어라.”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맹꽁이 자신은 성악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두 아들과 며느리는 성악가가 되었고, 손녀 둘도 성악을 전공하였습니다. 맹꽁이는 목사가 되어 작곡가로서 찬양대를 30 여년간 지휘하였고 지금도 70이상된 노인찬양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두 무릎 관절염으로 입원
맹꽁이는 아홉 살에 「남사공립심상소학교(南四公立尋常小學校)」에 들어갔습니다. 한국 사람이 교육받는 것을 꺼리던 일본인들은 소학교에 들어갈 때도 시험을 치렀습니다. 맹꽁이네 마을에서 세 사람이 시험을 치렀는데 맹꽁이 하나만이 합격을 했습니다. 학교는 6킬로나 되는 먼길이었습니다. 맹꽁이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친구도 없이 먼길을 어떻게 다니느냐고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다행스런 것은 맹꽁이의 외사촌(外四寸) 형 인원(仁源)이가 3학년에 다니고 있고, 그가 맹꽁이보다 네 살이나 위였기 때문에 맹꽁이 아버지는 그의 월사금을 대 주어 가며 아들을 잘 데리고 다니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맹꽁이는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인원이 형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형네 집에 가서 일본어 책은 못 읽지만 「조선어독본」이란 책은 다 읽어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1939년, 당시만 해도 왜인들은 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맹꽁이가 학교에 가자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인원이는 자기 반 친구들에게 맹꽁이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얘는 언문(諺文)을 다 안다.”
“야, 거짓말 마. 이제 1학년에 들어온 놈이 우리도 다 깨치지 못한 언문을 어떻게 다 안다는 거냐?”
그러자 인원이는 준비했던 「조선어독본」을 맹꽁이에게 내밀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맹꽁이가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자 아이들은 탄성을 올렸습니다.
“얘는 내 동생이야. 누구든지 얘를 건드리면 죽을 줄 알어.”
인원이가 모인 아이들에게 이렇게 선포를 하였기 때문에 몸이 약한 맹꽁이이지만 건드리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약한 맹꽁이는 한 학기를 겨우 다니고 병이 들었습니다. 두 무릎이 아파 걷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에서 약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였고, 좋다는 민간 요법은 다해 보았지만 병은 점점 깊어, 이제는 발을 옮겨 놓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어 기도만 하던 아버지도 하는 수 없이 오산(烏山)의 병원으로 갔습니다.
“무릎 관절염(關節炎)입니다. 서울 큰 병원으로 가보시지요.”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말에 맹꽁이 아버지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서 ‘주여, 주여!’ 하고 주님만 찾고 있었습니다.
10월 어느 날, 맹꽁이는 부모와 함께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다행히 당시 병원장 이용설(李容卨) 박사는 맹꽁이 아버지가 노회에서 만나 잘 아는 장로님이었습니다.
“아니, 오 장로님이 웬 일이십니까?”
“자식 놈이 무릎 관절염에 걸려서 입원하려고 왔습니다.”
“저런! 몇 해 전에는 큰따님이 늑막염 수술을 했는데…, 참 따님은 잘 있습니까?”
“예, 장로님 덕분에 살아나서 이제 열여덟 살입니다.”
“제 덕이라니요?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래도 장로님이 직접 집도(執刀)하셔서 그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건강을 회복했으니, 무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맹꽁이는 그 날로 입원을 했습니다. 지금은 헐리고 없지만, 세브란스 병원은 당시 서울 역 근방에서는 제일 높은 붉은 벽돌 집이었습니다.
입원실은 4층이었는데, 서울역이 바라보이는 남쪽 모퉁이 방이 맹꽁이의 입원실이었습니다. 두 무릎에서 피고름을 두 번이나 빼내고, 두 다리 밑에 판자를 대고 붕대로 감아 고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전기 치료를 했습니다. 맹꽁이는 두 다리를 늘 뻗고만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정말 괴로웠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내려가고, 어머니가 간병을 했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즐거움은 있었습니다. 선교사 간호원이 가져다주는 그림 맞추기에 재미를 붙인 것입니다. 신문지 절반 만한 두꺼운 판자 종이에, 앞뒤로 칼라로 인쇄한 그림을, 예순 여섯 조각으로 꼬불꼬불 잘라 봉투에 넣어 놓은 것인데, 제 자리에 맞추기만 하면 들고 다녀도 떨어지지 않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어린이 교육용 그림이었습니다.
먼저 온 아이들이 하루 종일 걸려 맞추고는, 다 맞추었다고 손뼉을 치는데, 선교사 간호원이 맹꽁이에게 해 보라고 갖다 준 것입니다.
맹꽁이는 그 그림 조각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림 조각마다 창세기니, 출애굽기니 하고 성경 이름들이 씌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하! 성경 66권 이름이 다 있구나!)
그러며 맹꽁이는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 이름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하나 찾아 맞추니까, 5 분도 못되어 다 맞추었습니다.
“야아, 다 맞췄다!”
맹꽁이가 그러며 손뼉을 치자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정말! 희한도 해라. 이 어려운 걸 어떻게 금새 맞출 수가 있었니?”
“아주 간단해요. 성경 이름 순서대로 맞추니까 너무너무 쉬워요.”
“아니 그럼 너 성경 66권 이름 순서를 다 안단 말이냐?”
“그럼요, 노래를 다 외우거든요.”
“어디 한 번 불러 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서
사무엘 하서와 열왕기 상서.
열왕하 역대기상 역대기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와
욥 시편 잠언과 전도 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서...
맹꽁이가 성경 66권의 이름을 하나도 안 틀리고 노래로 부르자 사람들은 손바닥이 찢어져라 하고 박수를 했습니다.
이리해서 맹꽁이는 병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맹꽁이는 이 때 경험을 살려, 훗날 찬송가위원회에서 전문위원으로 어린이 찬송을 편집할 때, 성경 이름노래를 채보(採譜)하여 실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맹꽁이는 잠결에 자기 얼굴에 떨어지는 따뜻한 물방울에 잠을 깨었습니다. 아직 날이 밝지도 않은 새벽에 어머니가 맹꽁이 이마에 손을 얹고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기도를 들으셔서 제 다리를 낫게 해주세요.”
맹꽁이도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맹꽁이가 입원한 방에는 여섯 사람이 있었는데, 18세 된 소년 유복이란 아이도 오른쪽 무릎 관절염으로 입원해 있었습니다. 유복자(遺腹子)인 그는 엄마 혼자서 벌어먹는 집이었기 때문에, 혼자서 목발을 짚고 다녔습니다. 꼬박 침대에만 있는 맹꽁이는 절뚝거리며 다니는 유복이가 부럽기까지 하였습니다.
맹꽁이가 입원한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11월의 어느 날, 맹꽁이 아버지는 연시(軟柿)를 잔뜩 가지고 왔습니다. 맹꽁이네 집에는 감나무가 많았는데, 어른 주먹만큼이나 큰 감을 100여 접씩 따서 마을 집집마다 맛보라고 도르고, 나머지는 두었다가 식구들도 먹고, 교회 손님 대접에 쓰고 있었는데, 병원으로 가져와 환자들과 간호사들, 또 담당 의사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어린 맹꽁이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소가 떠오릅니다. 아버지가 떡이나 엿이나, 감을 유복이에게 주면, 유복이는 손을 내밀면서
“아닙니다. 저는 안 주셔도 됩니다.”
하고 서너 번이나 사양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받질 말아야지, 손은 내밀면서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는 유복이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맹꽁이는 Yes, No가 분명한 성격입니다. 손해볼까봐 태도를 어물거리지를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자기 생각을 분명히 하라고 교육을 받은 때문도 있겠지만, 타고 난 성격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유복이의 말과 그의 손이 기억되는 지도 모릅니다.
맹꽁이는 이런 성격 때문에 평생 동안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고 이런 성격을 더욱 굳혔습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 5:37)
맹꽁이의 퇴원 날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퇴원 절차를 다 밟아 놓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셔서 우리아들이 두 다리 성하게 퇴원하게 되었으니, 우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시다.”
다른 환자들도 곁에 모여 퇴원하는 맹꽁이를 축하하며 아멘 하고 화답하였습니다.
“원장님 말씀이 그 동안 무릎 관절염으로 입원한 사람 중에 완치되어 퇴원하는 것은 우리아들 뿐이랍니다. 무릎을 자른 사람도 있고, 넓적다리까지 자른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유복이도 꼭 우리처럼 완치되어 퇴원하기를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등에 업혀 병원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원장 이용설 장로님이 오셔서 맹꽁이의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습니다.
“너는 믿음이 독실한 부모님을 만나 행복하겠다. 네가 이렇게 완쾌되어 퇴원하는 것은 기적(奇蹟)이야. 우리 병원 생긴 이래, 너같이 중한 관절염 환자가 완치되기는 처음이야. 아무쪼록 무리한 운동은 삼가고, 건강하게 잘 자라서 이 나라의 큰 일꾼이 되어라.”
바이올린과 오르간
1941년 겨울, 맹꽁이네 집에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 처녀들을 「정신대(挺身隊)」란 미명하에 일본군 위안부로 잡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년한 딸을 둘이나 둔 오 장로네 가정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먼저 스무 살이나 된 큰딸을 시집보내기로 했습니다. 신랑은 박(朴) 씨 성을 가진, 막내 외숙의 처가 쪽 사람인데, 사진을 보니 아주 미남자였습니다. 재주도 많은 청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가정인가를 따졌습니다. 외숙 말로는, 아버지는 안 계신데 어머니가 교회 집사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랴부랴 약혼을 하고 결혼을 시켰습니다.
맹꽁이는 처음 맞는 매형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잘 생긴 미남인데다가 바이올린이란 악기를 가지고 와서 무슨 곡조건 말만 하면 켜대는데 너무나 좋았습니다.
맹꽁이는 몇 달 동안 함께 사는 매형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왼쪽 턱으로 악기를 누르고, 왼손 네 손가락으로 줄을 눌러가며, 오른 손에 잡은 활로 문질러대면,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맹꽁이는 바이올린에 미쳐 버렸습니다. 무언가 시작하면 미쳐 버리는 게 맹꽁이의 성질입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바이올린만 붙들고 연습을 합니다.
“그 바이올린 그만 하고 공부 좀 해라.”
하고 누나가 말하면
“안 해두 다 알아. 나 4학년 것까지 다 떼었는걸.”
맹꽁이는 그러며 바이올린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그랬습니다. 맹꽁이는 무슨 책이건 붙들면 다 읽어야 놓는 성격이었습니다. 읽은 것은 그냥 외워 버리기 때문에, 지금은 4학년 교과서를 달달 외울 정도였습니다.
맹꽁이의 바이올린 실력은 날로 향상되었습니다. 그럴수록 바이올린에 매달리던 어느 날, 또 다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맹꽁이는 목요일에 청소 당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마지막 시간이 창가(음악) 시간이었습니다. 전교가 4학급밖에 안 되는 이 학교는 4학년까지만 있었고, 5-6학년은 송전(松田)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전교에 풍금은 단 하나 뿐이어서 음악 시간이면 학생들이 풍금을 자기 교실로 옮겨다 놓고 수업을 하던 시절입니다.
맹꽁이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풍금이 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Yamaha 오르간은 학교의 보물 제1호였습니다. 누구든지 몰래 오르간을 치다 들키면 여지없이 1주일 정학 처분입니다.
어느 목요일, 청소를 다 마치고 동무들은 다 돌아갔는데, 맹꽁이는 풍금이 궁금하여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페달을 밟고 건반을 눌렀습니다. 그리고는 풍금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가려 해도 발이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다시 페달을 밟고 소리를 작게 하여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번을 하다 보니 재미가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기미가요」를 쳤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희한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돌아다보니, 호랑이로 유명한 일본인 교장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교장이 웃으면서 일본어로
“너 제법이구나. 언제 배웠니? 너네 집에 오르간 있는 모양이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르간 같은 거 없어요.”
“그럼 오르간은 언제 배웠니?”
“오늘 처음 치는 거예요.”
“오, 그래? 그런데 그렇게 잘 쳐?”
맹꽁이는 대답을 못하고 언제 주먹이 날아올까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르간은 그렇게 양 손가락으로 치는 게 아니야. 자 봐라. 내가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열 손가락으로 짚어 나갈 테니까 잘 봐 두었다가 그대로 해 봐.”
음악 선생이 없을 때는 직접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는 교장은, 앉아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짚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디 해 봐.”
하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이제 겁 같은 건 없어졌고, 교장이 하라는 대로 작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짚어 나갔습니다. 몇 번을 되풀이하자 교장이 말했습니다.
“아주 잘 했어. 이제 날도 저물었으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튿날 아침 조회 시간이 되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간 교장이 갑자기 맹꽁이의 이름을 부르더니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어제는 용서하는 것 같더니 오늘 많은 아이들 앞에서 벌을 주려는구나.)
하고 생각한 맹꽁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걸음으로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리 올라와!”
교장은 단상으로 올라 오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가 단상으로 올라가자 교장이 오른손으로 맹꽁이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습니다.
“우리 학교에 천재가 나타났다. 얘가 공부 잘하는 건 내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얘는 음악의 천재다. 이 아이에게는 내가 오르간 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다른 어느 누구도 오르간에 손만 대면, 이제부터는 1주일이 아니라 10일간 정학을 시키겠다. 알았나?”
“하이!(예)”
아이들은 큰 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 시간이 마지막 시간에 있는 반은, 반드시 오르간을 교무실로 옮겨 놓고 청소 검사를 받도록. 알았나?”
“하이!”
그리고 교장은 맹꽁이에게
“너는 아무 때고 교무실에 들어와 오르간 연습을 하여라. 그리고 음악 선생은 맹꽁이에게 오르간을 지도해 주도록...”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맹꽁이는 낮에는 학교에서 오르간을 연습하고, 밤에는 집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맹꽁이가 찬송가 작곡가가 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피도 조선 뼈도 조선
맹꽁이네 아리실교회에서는 성탄절이 되면 두 달 전부터 준비를 하여 대대적으로 경축 행사를 벌였습니다. 침략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남자들은 징병(徵兵)이니 징용(徵용이니 보국대(報國隊)니 하여 다 잡아가고, 처녀들은 정신대(挺身隊)로 잡아다가 일본군 노리개로 삼던 시절, 아리실교회는 성탄절이면 노래와 무용과 연극을 준비하였는데, 연극은 주로 「출애굽기」나 「에스더서(書)」에서 하여 애국심과 신앙심을 고취(鼓吹)시켰고, 노래들도 당시 금지 곡인 애국 노래만을 골라서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 같이 단결해 있었기 때문에 동구 밖 멀리 보초를 세워 놓으면 걱정이 없었습니다.
당시 왜놈들은 주로 군가(軍歌)를 보급하였는데, 「군함(軍艦) 마치(march)」란 노래가 간 데마다 불릴 때였습니다. 그 노래 가사를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수비(守備)도 공격(攻擊)도 무쇠로 만든
떠 있는 저 배는 든든하구나.
떠 있는 저 배는 일본 나라 것
우리 나라 동서 사방 지킬지어다.
강철로 된 저 배는 일본의 것
원수들의 나라를 쳐부수리라.
이 노래를 강제 동원이 있을 때마다 가르쳐 주고 억지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맹꽁이네 교회에서는 경쾌한 그 「군함 마치」 곡에다가 다음과 같은 가사를 붙여 성탄절 날 온 교우들이 불렀습니다.
1.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뼈 이 피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이라.
한 사람이 불러도 조선 노래요,
만 곳에서 나와도 조선 노랠세.
에헤야 데헤야 조선 민족아!
만세 만만세! 조선 만만세.
2.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뼈 이 피는
살아 주님, 죽어 주님, 주님 것이라.
한 사람이 살아도 복음 전도요,
만곳에서 나와도 찬양 노랠세.
에헤야 데헤야 주님 나셨다.
할렐루야! 주님께 찬양 드리자.
이 노래를 부를 적이면 어린 맹꽁이도 피가 끓는 것 같았습니다.
책에 미친 아이
1943년 어느 날, 맹꽁이 매형은 서울 집에 다녀오면서 박계주(朴啓周)가 쓴 「순애보」라는 소설책을 사다가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맹꽁이는 누님이 읽다 놔 둔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읽는 소설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맹꽁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소설 따위 책은 못 읽게 했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인간이 만든 이야기책을 읽을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새 사위가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야기’라며 순애보 줄거리를 간단히 얘기하자 허락하였습니다.
맹꽁이는 누님이 안 읽는 시간인 조반 지을 때, 저녁 지을 때만을 골라서 소설을 읽다가 책에 깊이 빠져 벼렸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여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읽어서 누님이 다 읽기도 전에 먼저 다 읽었습니다.
맹꽁이는 소설의 재미를 알았습니다. 책이 귀하던 그 시절, 마을에 있는 무슨 책이든 빌려다가 밤을 새워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을에 있는 소설이라는 소설은 다 읽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물어 물어, 친구네 동네에 있는 책까지 빌려다가 밤을 새워 읽었습니다. 하루에 500 페이지 읽기는 누워서 떡 먹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사는 4촌 석근(奭根) 형이, 몇 달 병 피접 차 와 있을 때는, 그가 읽는 탐정 소설 「루팡 全集」도 다 읽었습니다. 학교 공부는 3학년 때 5학년 것을 다 뗀 상태였으므로 걱정 없었습니다. 맹꽁이는 학교 갈 적에 아예 소설책을 책보에 싸 가지고 가서 수업 시간에도 읽었습니다. 맹꽁이를 사랑하며 그의 수업 진도를 아는 담임 선생님은, 그런 맹꽁이를 묵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름날 오후 같은 때 노곤하면, 맹꽁이보고 나와서 자습을 시키라며 교무실에 가 쉬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은 맹꽁이에게 배운다는 것이 아니꼽다고 떠들기도 했는데, 맹꽁이는 친구들의 진도에 맞춰서 차근차근 복습을 시켜주는 바람에, 나중에는 아이들이 자진하여
“선생님, 피곤하실 텐데 맹꽁이보고 자습시키라고 하시고 가서 좀 쉬세요.”
하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4학년이 된 어느 날입니다. 그 시간은 담임 선생이 상을 당하여, 강사 선생님이 지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칠판 가득히 조선 지도를 그려 놓았는데, 산맥과 강, 그리고 수도와 도청 소재지를 그려 놓고, 그것을 베끼라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봄-가을로 하는 학급 미화 작업 때 여러 선생님을 도와 그런 지도를 많이 그려보았기 때문에, 혼자서 김내성의 탐정 소설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사 선생님이 왔다 갔다 하다가 맹꽁이의 손에서 소설책을 뺏으며
“이런 건방진 놈이 있나. 너 나와서 내가 그렸던 것 고대로 칠판에 그려 봐.”
하면서 칠판의 것을 다 지워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제대로 못 그리면, 너 매맞을 각오 해.
맹꽁이는 앞으로 나가, 칠판에 먼저 지도의 윤곽을 흰 분필로 그리고는, 산맥은 붉은 색, 강은 파란 색, 서울은 이중 동그라미로, 도청 소재지는 그냥 동그라미로 그려 놓았습니다.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습니다. 강사 선생님도 한참 멍하니 보고 있더니
“사실 말이지, 나도 안 보고는 이만치 못 그려.”
그러고는 소설책을 도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읽을 거리가 없어지자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다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읽는 성경 주석 책은 너무 어렵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희전문 영문과를 나온 사촌, 완근(完根) 형이 배재학당에서 배우던 중학교 교과서들이 몇 권 남아 있었습니다. 영어는 3학년, 지리는 1학년, 수학은 「삼각(三角)」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맹꽁이는 우선 「삼각」이란 책을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해하고 나니 세상이 다 제것 같았습니다. 잠도 안 자며 「삼각」에 열중하다 보니 삼각 함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동네에 있는 몇 백년 된 느티나무의 높이를 재겠다고 나섰습니다.
우선 분도기(分度器) 중심점에 구멍을 내고 실을 꿴 다음, 추를 매달아, 이것으로 느티나무 꼭대기의 각도를 잽니다. 그리고는 거기까지의 거리를 재어, 직삼각형을 그려서 삼각함수에 의해 느티나무 높이를 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이 일에 아주 미쳐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외사촌 동생 길원(吉源)이를 조수로 하여 100 미터짜리 새끼줄까지 준비해 가지고, 교회의 높이를 재기도 하고, 앞산의 높이도 재보겠다며 낑낑거리고 계산을 하곤 하였습니다.
아, 목동아!
집에서는 바이올린을, 학교에서는 오르간을 연습하는 동안, 음악의 신비함에 눈을 뜬 맹꽁이는 장차 자기도 작곡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자 맹꽁이는 오르간이 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로 갔습니다. 일직(日直)을 하던 선생님은 맹꽁이를 반겼습니다. 심심한데 말동무도 하고 심부름도 시킬 수 있으니까 아주 반겼습니다. 맹꽁이는 교무실에서 오르간을 치면서 놀았습니다.
서랍 정리를 하던 선생님이 책 한 보따리를 주며 갖다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책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맹꽁이는 그 책들을 뒤적여 보았습니다. 앞뒤 장이 떨어진 소설책도 있고 음악 교과서도 있었습니다. 하모니카 교본도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 참조)
이 책은 <하모니카 교본>인데 맹꽁이는 이 책에서 [숫자 악보 기보법]을 배워 작곡을 하였다.
“선생님, 이 책, 제가 가져도 돼요?”
“응, 버리는 책인데 가져라. 그런데 그건 뭣에 쓰려고?”
“이 음악 책 가지고 공부하려고요.”
그리고 맹꽁이는 책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음악 책은 국민학교 교사용으로서 간단한 음악 이론이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홍난파 선생이 편찬한 프린트로 된 「세계 명곡집」이란 책은, 뒷장이 많이 뜯겨져 있었으나 세계 명곡을 모은 악보였습니다.
맹꽁이는 그 중에서 ‘아, 목동아’라는 제목이 멋진 것을 골라 가사를 읽어보았습니다.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 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가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아, 목동아, 내 사랑아.
맹꽁이는 오르간에 앉아 멜로디 연습을 하였습니다. 샵(#)이 두 개나 붙어 있었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그 가락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졌습니다.
“이제 그만 하고 내일 다시 와서 놀아라.”
“예, 조금만 더 하고요...”
“난 가서 저녁 먹고 올 테니 갈 때는 문 잘 닫고 가거라.”
선생님이 그러며 교무실을 나가셨지만, 맹꽁이는 이제는 오르간을 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고운 꽃은 떨어져서 죽고, 나 또한 죽어 땅에 묻히면,
나 자는 곳을 돌아보아 주며, 거룩하다고 불러 주어요.
네 고운 목소리를 들으면은, 내 묻힌 무덤 따뜻하리라.
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네가 올 때까지 내가 잘 자리라.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도 있을까? 이런 곡조로 찬송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맹꽁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어두워져서 건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르간을 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중에 맹꽁이가 찬송가위원회 전문 위원이 되어 찬송가를 편집할 때에, 이 곡조가 미국․영국․동남아․각국 찬송가 곡조로 채택된 것을 보고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즉각 자기가 번역하여 청소년 찬송가에 넣었습니다.
“아니. 얘가 아직도 안 가고 있네. 너 캄캄한데 어떻게 먼길을 가려고 그러니. 어서 가거라.”
저녁을 먹고 돌아온 선생님의 말에 맹꽁이는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어느덧 컴컴하였습니다.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오는 맹꽁이는 겁이 나서 간이 콩알만해졌습니다. 집까지는 6킬로나 되는데, 아리실 동네로 들어가는 산 어귀에 공동묘지가 있어서, 아이들은 늦은 저녁에는 1킬로나 돌아서 아랫마을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맹꽁이는 용기를 내어 공동묘지가 있는 그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비가 오려는지 날은 캄캄하였습니다. 별빛 하나 보이지를 않습니다. 맹꽁이는 ‘주여, 주여!’ 라고 주님을 찾으며 앞이 안 보이는 길을 짐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의 경험을 맹꽁이는, 어른이 되어 어린이 찬송가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별 없는 깊은 밤에 나 혼자서
호젓한 산 속 길을 걸어갈 때도
예수님 나와 함께 계셔 주시면
조금도, 조금도 무섭잖아요.
맹꽁이가 주님을 찾으며 더듬더듬 가고 있는데, 멀리서 맹꽁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맹꽁이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소리치며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랫마을로 가는 갈림길에 자전거를 뻗쳐 놓고 맹꽁이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니?”
“네, 오르간 치다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어서 뒤에 타거라. 얼마나 배고프냐.”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집에 돌아온 맹꽁이는 아버지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 머리에서 피가 나요.”
“아니, 저런! 어쩌다가 이렇게 다치셨수?”
어머니가 놀라서 소독약과 탈지면을 가지고 왔습니다. 맹꽁이네 집에서는 매약상(賣藥商)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약은 다 있었습니다.
“맹꽁이가 어느 길로 올지 몰라서 갈림길에 자전거를 뻗쳐 놓고, 그 위에 올라가 맹꽁이를 부르는데, 갑자기 자전거가 미끄러져 나가지 뭐야?”
“저런! 그래도 그만 한 게 다행이유. 하마터면 큰일 날 번 하셨수”
“하나님이 지켜 주신 거지. 돌에 뒤통수를 짓찧었는데 이만하니..., 우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시다.”
그러며 맹꽁이 아버지 오 장로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매맞은 맹꽁이
맹꽁이가 4학년 때 동생 영근(榮根)이가 국민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어린 영근이는 시오리나 되는 먼길을 저희들끼리 가기가 무서워서, 형인 맹꽁이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아리실로 들어가는 산모퉁이에는 늑대가 나타나기도 했기 때문에 어린아이 한 두 명이 집으로 가기는 위험했습니다.
오전 4교시 수업이 끝나자 맹꽁이의 동생 영근이는 형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형 언제 집에 가?”
동생이 우리말로 물었습니다.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고 하면서 일본어를 안 쓰고 우리말을 쓰면 무서운 벌을 받던 시절입니다. 맹꽁이는 순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우리말로 대답했습니다.
“응, 점심 시간 지나고 두 시간 더 있어야 돼. 벤또 먹고 여기서 놀면서 기다려.”
점심 시간이 지나 맹꽁이는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담임 선생은 일본인 장교 출신의 교장이었습니다.
“오이, 도요또미 싱꽁 데데고이!”(야, 도요또미 싱공 나와!)
담임은 맹꽁이의 일본 이름인 도요또미 싱꽁(豊臣信根)을 부르며 화가 난 목소리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왜놈들은 조선을 영원히 자기 나라로 만들려고, 학교나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만을 쓰게 하는 한편, 조선 사람들도 일본 성(姓)으로 창씨(創氏) 개명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맹꽁이 아버지는 일본 성에 「오나라 오(吳) 자」를 쓰는 「구레(吳)」라는 성이 있으니까, 그냥 오(吳)란 성을 일본식으로 ‘구레’라고 읽겠다고 주장했으나 왜놈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화가 난 오 장로는 임진왜란(壬辰倭難) 때 조선을 침략한,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그의 성을 따서 도요또미(豊臣)이라고 창씨(創氏)를 했던 것입니다.
맹꽁이는 앞으로 나갔습니다. 교장인 담임 선생은 긴 목검(木劒)을 차고 교실에 들어오곤 했는데, 그 시간에도 목검을 차고 있었습니다.
“너 임마, 왜 ‘죠셍고(朝鮮語)’를 썼어?”
순간 맹꽁이는 어떤 스파이가 벌써 일러 바쳤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왜놈들은 교내에 학생 스파이를 두어 교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론, 마을에서 일어난 일까지 다 밀고하게 했던 것입니다.
“네, 제 동생이 1학년에 들어왔는데, 아직 고꾸고(國語=일본어)를 모릅니다. 그래서 조선말로 말해 주었습니다.”
“코노야로!(この 野郞!)”(이 망할 자식!)
교장은 목검을 뽑아 맹꽁이의 머리를 쳤습니다.
단 위에 있는 키가 1미터 80이나 되는 교장이, 단 아래에 있는 4학년 짜리 아이를 위에서 내리치자, 그 목검은 맹꽁이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맹꽁이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아이들이 데리고 교무실로 가서 소독을 하고 처매주었습니다.
교실로 되돌아간 맹꽁이는 다시 제 이름을 부르는 교장의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오이, 도요또미! 가께루 이쓰쓰, 스구 쓰께로!(おい、豊臣、かけるいつつ、すぐつけろ。) (야, 도요또미, 가위표 다섯 개! 즉시 적어 넣어!)
일본어를 아는 청취자도 이 말의 뜻은 얼른 알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치가와(市川)라는 이 일본 퇴역 장교는, 교육만은 제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3학년 때부터 죽 맹꽁이네 반 담임을 해 왔는데 매 학년 초만 되면, 교과서 만한 빳빳한 종이를 반으로 접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맨 앞에는 「일일 일선(一日一善)」이라는 제목이 있고, 접은 것을 펴면 왼쪽에는 ‘착한 일’, 오른 쪽에는 ‘잘못한 일’이라 적혀 있고, 맨 뒷장에는 아이들 이름을 적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에게 칭찬을 받으면 ‘착한 일’ 난에다가 동그라미를 치고, 꾸중을 들었을 적에는 ‘잘못 한 일’ 난에다가 가위표, 일본말로 ‘가께루’를 표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교실이나 어디서든지 수시로 동그라미와 가위표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꺼번에 동그라미 두 개나 세 개를 줄 때에는 2중 원, 3중 원으로 그리게 하여, 한 번에 받았음을 알게 하였습니다.
1학년 때부터 전교에서 1등만 하고 모범생인 맹꽁이는, 왼쪽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로 2중 3중의 동그라미가 많았지만, 오른 쪽의 가위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생은 가위표를 다섯 개나 주면서 ‘스구 쓰께로’(빨리 적어 넣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맹꽁이는 매 맺을 때보다 더 섧게 울면서, 교장이 보는 앞에서 가위표를 다섯 개나 그렸습니다.
맹꽁이가 집에 돌아오자 부모님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연유를 들은 아버지는
“아니, 세상에! 남의 자식 교육시켜 달라고 보냈더니, 이 왜놈들이 생사람 잡겠구나. 도저히 용서 못한다. 내일 가서 단단히 따져야겠다.”
그러며 아버지는 상처를 풀고 다시 정성껏 소독을 하고 처매 주었습니다.
분이 가라앉자 오 장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왜인들의 때가 아직 멀었나이까? 이 민족을 굽어살피소서. 저의 마음에 일고 있는 분노를 삭이게 하옵소서.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신 주님, 침략자 일본인들이 원수이지만, 제가 그들을 미워함으로써 살인죄를 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그 날 밤 맹꽁이는 찢어진 머리가 아파서 엎드려 자느라 잠을 설쳤습니다.
7중(重) 동그라미 받는 맹꽁이
다음 날 점심 시간에 맹꽁이는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학교 교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버지가 교장에게 따지면 난 또 가께루 다섯을 받을 텐데 이를 어쩌나...)
아니나 다를까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에 들어가는데 얼굴이 뻘개진 교장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이, 도요또미!”
교장의 말에 맹꽁이는 ‘하이’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너 학교에서 된 일을 일일이 집에 가서 일러바치다니 아주 나쁜 놈이구나.”
“일러바친 게 아니라 머리에서 피가 났기 때문에...”
“임마, 그래두 적당히 둘러대야지.”
“우리 아버지는 절대루 거짓말을 못하게 하십니다.”
“어쨌거나 일러바친 건 잘못이니, 가께루 이쓰쓰, 스구 쓰께로!”
맹꽁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가위표를 다섯이나 그렸습니다.
맹꽁이가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학교에서 별 일 없었니?”
“녜.”
맹꽁이는 가위 표 받은 이야기는 숨겼습니다.
“이상하다. 내가 조목조목 따지니까 대답을 못하고 있던데...”
“당신은 일본어를 모르시는데, 왜놈 교장이 당신 말을 알 수가 있어요?”
어머니가 옆에서 웃으며 말했습니다.
“통역을 시켰는데 못 듣긴 왜 못 들어요.”
“어느 선생이 통역을 해줍디까? 감히 교장한테 따지는 말을...”
“모두들 통역을 안 하려 드는데 해주 오씨, 구레(吳) 선생 있잖아, 그 선생은 애국자고 진짜 교육자거든. 그 선생이 내 말을 듣고 나서 ‘이건 어디까지나 교장이 잘못 했다’며 통역을 하니까, 교장은 내 말에 말 한 마디 못하고 있다가 종을 치자 교실로 가 버리더군.”
이런 일이 있은 후 한 동안 맹꽁이는 학교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태가 180도 뒤집히는 일이 생겼습니다.
모내기철이 되자 학교에서는 「집안 일 돕기 기간」으로 정하여, 한 주간 임시 휴교를 하였습니다. 나이 많은 아이들은 모내기를 돕고, 어린 학생들은 집에서 동생을 돌봐주도록 하고, 선생들은 조를 짜서 마을로 시찰을 다니었습니다.
그 날, 맹꽁이는 아버지를 도와 마을 입구에 있는 논에서 모를 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교장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오오이, 도요또미, 간신다나! 오마루 밋쓰!(おおい、豊臣、感心だな。おまるみつつ!)” (야, 맹꽁아, 기특하구나. 동그라미 세 개!)
교장은 그러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손을 멈추고 교장 일행 세 사람을 마을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여보, 학교 선생님들이 시찰 나왔소. 빨리 점심 준비를 하시오.”
맹꽁이 아버지는 이렇게 말을 하고는 손님들이 마을 농장을 둘러보는 동안 급히 닭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맹꽁이 아버지는 손님 대접하는 것을 아주 즐겨했습니다. 지나가는 거지가 밥 한 술 달래도, 그냥 주지 않고 반드시 밥상에 차려 주고, 교회 손님은 모두 자기 집에서 자비(自費)로 대접하고, 겨울철 추운 때면, 군불을 뜨끈히 땔 뿐만 아니라, 밤중에 한 번, 새벽에 한 번, 자다 일어나서 불을 때어, 손님이 편히 쉬도록 하였기 때문에, 노회의 목사 장로들은 맹꽁이 아버지 오장로를 아주 좋아하였습니다.
맹꽁이 아버지가 자주 인용하는 성경 말씀은 히브리 13장 2절이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 말씀을 늘 자식들에게 들려주면서, 모든 손님이나 나그네를 천사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때의 경험을 맹꽁이는 어린이 찬송가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손님대접 잘하는 롯이란 사람은
천사를 대접하고 구원받았네.
우리도 소돔성의 롯과 같이
손님 대접 잘해 보세, 잘 하여 보세.
동네 농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가는 길에 맹꽁이네 집에 들른 이치가와 교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넓은 대청 마루에 음식상을 차려 놓고 맹꽁이 아버지 오장로가 문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부족하지만 정성껏 차렸습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올라와 드세요.”
“아닙니다. 민폐를 끼치면 안 됩니다.”
함께 온 오 선생이 사양을 하자, 맹꽁이 아버지는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소돔 성의 롯이 사양하는 천사의 손을 잡아 끈 것 같이 사양하는 사람을 강권하는 게 오 장로의 습관이었습니다.
늦은 점심을 잘 먹고 난 이치가와 교장은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야, 맹꽁아, 네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로구나. 5중 동그라미, 바로 적어!”
봉사 기간이 끝나고 학교에 간 맹꽁이는 첫 시간에 교장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내가 엿새 동안 다른 선생님들과 땀을 흘리며 너희들의 마을을 시찰하였지만, 어느 마을 어느 누구도 물 한 모금 대접하지 않았다. 오직 도요또미네 집뿐이었다. 오이, 도요또미, 고쥬마루, 스구 쓰께로.”
이치가와 교장은 맹꽁이네 집에서 차려 준 음식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더군다나 닭까지 잡아서 자기 자식 가르치느라 수고하는 선생님들을 대접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손님 대접을 잘 해야 하느니라.”
훈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된 맹꽁이
맹꽁이가 열 네 살 되던 1944년 초, 맹꽁이 아버지 오 장로는 맹꽁이를 조용히 사랑방으로 불렀습니다.
“네 작은누나가 얼마 안 있어 결혼한다는 거 너도 알지?”
“녜, 4월 12일에 한다지요?”
“그래서 말인데, 주일학교 작은누나가 맡았던 반을 맡을 사람이 없구나. 모두들 군인 나가고, 보국대(報國隊)에 나가고 나니, 아이들은 많은데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구나.”
아버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맹꽁이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아무래두 네가 그 반을 맡아서 가르쳐야겠다.”
“녜? 제가요?”
“왜? 어렵겠니? 성경 말씀 가르치는 건데, 성경이야 너만큼 잘 아는 애들이 어디 있니? 그리고 초등반 아이들은 다 네 동생들이요 조카들인데 어떠냐?”
“이제 제가 겨우 사범반(師範班)에 올라갔는데 너무 빠르지 않겠어요?”
맹꽁이는 사양을 했습니다. 개구쟁이 동생들을 가르친다는 게 영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살살 달랬습니다.
“사범반은 네 막내 외삼촌에게 맡기고, 고등반(高等班)은 네 이종(姨從) 형 병한(炳漢)이에게 맡기고, 네게는 초등반(初等班)을 맡기려고 하니까 기도하면서 준비하여라.”
그러며 나가 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열 네 살 짜리가 열 세 살 짜리까지 있는 초등반을 가르친다? 물론 학교에서 저보다 네 살이나 더 먹은 자기 반 친구들을 가르쳐 보았으니까, 가르친다는 게 그리 어렵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교과서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주시는 교과서는 어른 용 만국통일주일공과(萬國統一主日工課)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정성껏 읽어보아도 통 재미가 없는데, 그걸 가지고 어떻게 가르치느냐 이 말입니다.
맹꽁이는 집안의 책이란 책은 다 꺼내어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앞 뒷장이 다 떨어진 책이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읽어보니까,
제3과 ‘어부들을 부르신 예수님’이란 제목 아래 ‘교수 목적’이 있고, ‘요절’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활동’이 있고, ‘묻는 말’이 있는데, 이야기가 모두 선생이 어린이에게 하는 말 그대로인 대화체(對話體)로 되어 있어서, 그 책대로만 가르친다면 재미있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맹꽁이는 그 밤으로 그 책을 몇 번이고 다 읽어, 머리에 내용을 외웠습니다.
주일날이 되었습니다. 막내 외삼촌이 맹꽁이를 데리고 초등반으로 갔습니다.
“얘들아, 새로 오신 맹꽁이 선생님이다. 잘들 배워라.”
“뭐예요? 어빠가 우리 선생님이예요? 아이, 좋아라.”
맹꽁이를 따르는 6촌 여동생 영숙(榮淑)이는 좋아하는데,
“말두 안 돼. 맹꽁이 어빠가 무슨 선생이야. 선생 좋아하네.”
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외사촌 동생 인봉(仁奉)이도 있고,
“형, 일찍 출세했수. 열 네 살에 주일학교 선생이라니...”
어느 동생이 그러자 아이들은 깔깔 웃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좀 멋쩍기는 했지만, 이미 각오한 바라 그런 소리 다 무시하고
“자, 공부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자.”
하고서 기도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떠들던 아이들도 기도하는데 떠들었다가는 깐깐하기로 유명한 맹꽁이 오빠에게 혼날 줄 알았는지, 조용히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맹꽁이는 달달 외우는 교과서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아이들은 장난기를 가지고 듣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재미있으면 깔깔거리며 손뼉을 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책에 있는 것을 외우는 게 아니라 제 말을 섞어서, 요새 말로 구연동화를 하 듯이 이야기를 하니까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을 모르며, 잘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맹꽁이가 교재로 사용한 책은 감리교에서 처음으로 낸 <아동부 계단 공과>였습니다. 맹꽁이가 기독교교육 집필자가 되어 계단공과를 집필하면서 그 때 그 공과책을 보았을 때는 정말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다음 주일, 그 날 공부할 과목은 ‘예수를 만난 삭개오’였습니다. 맹꽁이는 삭개오 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날 공과에 맞는 삭개오 노래를 창호지(窓戶紙)에 붓글씨로 적어 가지고 갔습니다.
그 노래는 이러했습니다.
1) 예수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보고 싶으나 키가 작도다.
생각다 못하여 삭개오는
엉금엉금 기어서 뽕나무 위에.
2) 뽕나무 위에서 삭개오는
나무 잎새 사이로 내려다보네.
‘너 빨리 내리라, 삭개오야!’
바로 나무 아래서 나는 소리라.
3) 사랑이 넘치는 한 마디 소리
삭개오는 나무로 뛰어 내려서
예수를 집으로 함께 뫼시고
자기 정성 다하여 대접하였네.
이런 노래도 가르치며 손 유희까지 곁들이니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옆의 사범반 아이들도 이쪽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자 막내 외삼촌은 화가 나서
“그렇게 그 쪽이 재미있거든 맹꽁이한테 가서 다 배워라.”
하고 횅하니 나가 버렸습니다. 사범반 아이들은 좋아라고 맹꽁이 반으로 와서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 기독교교육 집필자가 된 맹꽁이는 우연찮게도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란 과목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노래를 그대로 쓰려고 보니 맘에 안 드는 데가 많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작사․작곡을 했습니다.
1)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예수님 얼굴
그렇지만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아.
삭개오는 엉금엉금 올라갔어요.
뽕나무 꼭대기로 올라갔어요.
2) 잘 보인다 잘 보인다 예수님 얼굴
사랑 많은 그 얼굴이 잘도 보인다.
삭개오는 살금살금 보고 있어요.
뽕나무 가지 새로 보고 있어요.
3) ‘내려와요! 내려와요! 착한 삭개오’
예수님이 아래에서 부르셨어요.
삭개오는 부리나케 내려왔어요.
예수님을 제집으로 모시었어요.
지서에 끌려 간 맹꽁이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맹꽁이는 낮이면 학교에 가서 풍금을 치고, 밤이면 자기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아이들은 노래를 익히는 것입니다. 윤극영 선생이 작사․작곡한 ‘반달’도 부르고, 박태준 선생이 작곡한 ‘오빠 생각’이란 노래도 부릅니다. 맹꽁이는 많은 동요를 알고 있었습니다. 누나들이 해마다 서울에서 열리는 하기 성경학교에 가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정신여고, 경신학교 등의 미션 스쿨 음악 선생에게서 새 노래를 배워 오고, 또 가끔 미국 여선교사가 와서 사경회(査經會)를 할 때는 영어 노래도 배워, ‘예수 사랑하심은’은 발음이 엉터리지만 영어로도 부를 줄 알았습니다.
맹꽁이는 동요 가운데서도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이 지은 ‘형제 별’을 특히 좋아하였습니다.
<형제 별>
날 저물은 하늘에 별이 삼 형제
빤짝빤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 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리네.
이 노래는 언뜻 보면 그냥 별을 노래한 것 같지만, 실은 이중가(二重歌)로서 그 이면(裏面)의 뜻은 민족의 비극을 담은 노래였습니다.
처음에 맹꽁이는 이 노래의 숨은 뜻을 모르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는 맹꽁이를 집안으로 불러서 조용히 일러주었습니다.
“너 그 노래 뜻이 무언지 알고 부르는 거냐?”
“노래 뜻이요? 별 삼 형제가 있었는데, 별 하나가 구름에 가리자 다른 두 형제 별이 눈물을 흘린다, 이런 뜻 아니예요?”
“물론 겉으로 나타난 뜻은 그렇지. 그런데 그 별 삼 형제가 삼천만 조선 민족을 가리킨단다. 왜놈 등쌀에 땅을 빼앗긴 수백만의 동포가 북간도(北間道)로 간 것을 슬퍼하는 우리 이천만 민족의 노래란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2절이 있어야겠네요.”
맹꽁이는 그러며 즉석에서 2절을 만들어 불렀습니다.
바람 불자 막내 별 다시 나타나
언니 별과 반갑게 다시 만났네.
삼 형제 별 ‘다시는 헤지지 말자!’
손가락을 걸고서 약속을 하네.
그러자 아버지는 맹꽁이의 입을 막으며 좌우를 둘러보았습니다.
“너 큰일 내겠구나. 그런 노래 불렀다가는 당장 순사에게 잡혀 가.”
그러나 맹꽁이는 태연했습니다.
“왜놈들이 알긴 무얼 알아요? 일본 군가를 부르는 시간에 가사를 바꾼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뼈 이 피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이라’하고 조용히 불러도, 지네 나라 군가 부르는 줄 알고 가만 있는 걸요.”
“그래도 조심하여라. 왜놈들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새 세상 되거든 맘껏 불러라.”
하고 신신 당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간 맹꽁이는 첫 시간에 지서(支署) 순경이 자기 반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도요또미가 누구냐?”
“예, 제가 도요또미입니다.”
담임 선생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순사는 ‘물어 볼게 있으니 잠깐 데리고 오라’는 지서장의 명령이라며, 지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지서장은 책상에 군화를 걸치고 비스듬히 앉아서 들어오는 맹꽁이를 날카롭게 쏘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너 밤마다 아이들 모아 놓고 조선 노래를 부른다는데 사실이냐?”
지서장이 일본말로 물었습니다. 맹꽁이는 큰 소리로
“녜, 사실입니다.”
“그 노래들이 어떤 내용인지 말해 봐.”
“녜, 조선 동요들입니다. ‘오빠 생각’이란 동요는 서울 간 오빠를 그리워하는 누이동생의 노래이고, ‘반달’이란 노래는 밤하늘에 흘러가는 반달을 노래한 것이고...”
그러는데 걱정이 된 담임 선생이 따라 와 맹꽁이를 변명해 주었습니다.
맹꽁이는 전교 우등생이고, 이치가와 교장도 믿는 모범생인데, 음악의 천재이기 때문에 방학 동안 밤하늘을 보며 노래를 부른 것일 게라고 적극 변명해 주었습니다.
“이치가와 대위(大尉)가 믿는 애란 말이지요?”
이치가와 교장과 지서장은 제대 군인으로서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녜, 믿을 뿐만 아니라 끔찍이 사랑해서 얘에게는 오르간도 치도록 허락해 주었다니까요. 이치가와 교장과 통화를 하시겠습니까?”
담임이 그러며 전화기를 집으려 하자 지서장은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아니, 됐습니다.”
그리고는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음! 그런 걸 모르고 무식한 정보원이 잘못 고자질을 했군.)
그리고는 맹꽁이에게
“너 노래를 잘 부르는가본데 여기서 노래 한 곡 뽑아 보아라. 그럼 용서해 주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노래를 부를까요?”
맹꽁이도 웃으며 물었습니다.
“너 일본의 세계작인 명곡 ‘고오죠노 쯔끼(荒城の月)’ 아니?”
“녜, 3절까지 다 외웁니다.”
“호! 그래? 그러나 시간이 없으니까 1절만 불러봐라.”
맹꽁이는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맹꽁이는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왜놈 지서장과 다른 순사들은 손바닥이 찢어져라 하고 박수를 하였습니다.
담임 선생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너 겁도 안 났니? 순사들 앞에서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다니...”
“죄 지은 게 없는데 왜 겁이 나요?”
그러자 담임이 맹꽁이의 귀 가까이 입을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엔 ‘죄 없는 죄인’도 많단다. 아무튼 한 시름 놨다. 앞으론 조심하여라.”
맹꽁이의 첫 작곡
성탄절이 가까워 오자 맹꽁이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막내 외삼촌이 금년 성탄절 축하 행사 준비는 맹꽁이더러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연극만 준비할 테니 노래와 무용, 장치 등 일체를 모두 맹꽁이더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가 문제였습니다. 맹꽁이가 아는 노래는 해마다 불러 온 노래들뿐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새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노래책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체부가 신문을 배달해 주었습니다. 기독신보라는 타블로이드 판 4면 짜리로서 아버지가 보는 기독교 신문이었습니다. 대충 훑어보던 맹꽁이의 눈이 빛났습니다. ‘토끼의 성탄절’이라는 시(詩)가 있는 것입니다. 그 시는 이러했습니다.
<토끼의 성탄절>
쿵 쿵 쿵 쿵 월세계(月世界) 토끼 님
함박눈이 내리는 이 밤에
떡을 찧어요. 떡을 찧어요.
쿵 쿵 쿵 쿵 월세계 토끼 님
예수님이 탄생한 이 밤에
떡을 찧어요. 떡을 찧어요.
그런데 가사만 있지 곡조가 없는 것입니다. 맹꽁이는 곧 바로 신문사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 시의 곡조를 보내 달라는 편지였습니다.
며칠 후 답장이 왔습니다. 엽서에 간단히 쓴 답장은
‘그 시는 성탄 동시로 발표한 것인데, 작곡은 안 된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실망했습니다.
(이 동시에 내가 곡조를 붙여 볼까?)
그리고 바이올린을 들고 기타처럼 퉁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활은 이미 다 망가졌는데, 전시(戰時)라서 구할 수가 없었고, 바이올린의 줄도 1번 선과 4번 선은 끊겨서 2번 선과 3 번 선 두 줄만 남아 있는데, 바이올린을 켜고 싶을 때면 맹꽁이는 기타 치듯 줄을 퉁기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작곡을 하여 마침내 완성을 했습니다. 맹꽁이는 곧 창호지에다가 가사를 붓으로 써 가지고 교회로 갔습니다. 새 노래를 가르쳐 준다는 맹꽁이의 말에 아이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노래를 하려니까 곡조가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바이올린을 퉁길 때는 잘 되었는데 바이올린 없이 직접 노래를 부르려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더니 우하하하하 하고 웃어대는 것입니다.
“형, 엉터리구나.”
“어빠, 뭐이 그래? 빨리 가르쳐 줘!”
그러자 아이들이 박장 대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창피를 톡톡히 당하고, 다른 노래 몇 곡을 가르쳐 주고 그 날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맹꽁이는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습니다. 퉁퉁 퉁퉁 아까 작곡한 곡조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진작 바이올린을 가지고 갈걸 그랬구나.)
맹꽁이는 그리고 그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음 날 저녁에는 아예 바이올린을 가지고 가서 기타처럼 퉁기면서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은
“아니, 내 생전에 바이올린으로 키타를 치는 사람은 처음 보네.”
“그러니까 천재 아니야. 천재!”
아이들은 이런 말로 떠들었지만, 맹꽁이가 이를 묵살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부르자, 어느 새 아이들은 따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흥겹게 절구질 흉내까지 내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거다!)
맹꽁이의 머리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성탄절 날 밤이 되었습니다. 노래 순서가 되자 임시로 만든 무대 한가운데에 커다란 절구를 갖다 놓고 막이 열였습니다.
사회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런 말로 그 프로그램 소개를 했습니다.
“오늘 천재 소년 작곡가 맹꽁이의 첫 작품, <토끼의 성탄절>을 공연하겠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격려해 주십시오.”
우레 같은 박수 속에, 토끼 탈을 쓴 남녀 아이들이 절구 공이를 들고 양편에서 들어와, 중앙에 있는 절구에서 쿵 쿵 쿵 쿵 하고 절구질을 합니다. 이어서 천사 날개를 단 아이들이 흰옷을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등장하여, 절구질하는 아이들 뒤에 서서 양편으로 몸을 흔들며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쿵 쿵 쿵 쿵 월세계(月世界) 토끼 님
함박눈이 내리는 이 밤에
떡을 찧어요. 떡을 찧어요.
쿵 쿵 쿵 쿵 월세계 토끼 님
예수님이 탄생한 이 밤에
떡을 찧어요. 떡을 찧어요.
노래를 잘 못하는 아이는 절구질을 시켰고, 노래 잘하는 아이들만이 노래를 하는데, 어찌나 멋지게 부르는지, 맹꽁이는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 날 밤 성탄절 공연은 맹꽁이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었습니다.
찬송가 작가가 되리라
1944년 12월, 맹꽁이의 모교회인 아리실 교회에서는 부흥회를 하였습니다. 강사는 일본 고베(神戶)에서 목회를 하던 유재헌(劉載獻) 목사였습니다.
유재헌 목사님
맹꽁이는 이번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앙적인 문제, 애국 애족의 마음, 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소명감 등 아버지에게서 꾸준히 교육을 받았지만, 이렇게 뜨겁게 가슴 깊이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특별히 맹꽁이가 감명을 받은 것은 유재헌 목사가 지은 ‘복음성가’였습니다. 유 목사는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곡조에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는 가사를 써서, 복음성가라는 책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성회 도중 수시로 독창을 하기도 하고, 함께 제창을 하기도 했습니다. 맹꽁이는 등사판으로 프린트한 유재헌 작 복음성가집을 다 외워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어린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쳐 왔습니다.
“그래! 시인이 될까, 음악가가 될까, 목사가 될까 이때까지 망설였지만, 이제야 확정했다. 나는 찬송가를 작사하고, 찬송가를 작곡하는 목사가 되리라.”
그리하여 맹꽁이는 일평생 찬송가를 위해 일하는 좋은 몫을 그 때 택하게 된 것입니다.
맹꽁이의 첫사랑
맹꽁이가 6학년이 되었을 때, 서울에서 5학년에 전학해 온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전교 6학급으로 된 작은 학교인지라, 어느 학년에 누가 전학 왔는지 상을 당했는지 금새 알 수가 있었고, 교무실을 중심으로 1-4 학년과 5-6 학년 교실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여러 차례 마주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새로 전학 온 학생 이름은 ‘이기자’라고 했습니다. 긴 머리에 얼굴이 갸름하고 눈이 노르스름한 게, 동화에 나오는 어느 나라 공주님 같았습니다. 처음 그를 본 맹꽁이는
(참 귀엽게 생긴 아이가 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맹꽁이가 교정에서 소설책을 읽고 있을 때, 누가 뒤에서 자기를 보는 것 같아서 뒤를 돌아다보면, 언제나 그 소녀가 멀찌기서 맹꽁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생그레 웃고는 다른 데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것입니다. 맹꽁이는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 남들이 별로 안 가는 학교 뒤, 창고 근방에 가 있어도, 여전히 그 소녀는 따라 와서 멀찌기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쟤가 나를 좋아하는가 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맹꽁이는 교무실에 가서 5학년 학적부를 뒤져 보았습니다. 그 소녀의 성적은 중간 이하였습니다.
(넌 틀렸다. 난 박사가 된 다음에야 결혼할 건데, 네 그 성적으로는 중학교나․대학교에 못 갈 거고, 그렇게 되면 너는 나를 오래 기다려야 하니까 안 될 거야.)
맹꽁이는 그리고 관심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맹꽁이는 학교가 파한 후에도 오르간을 치거나 선생님 일을 돕거나 하느라고 해 그늘이 운동장에 길게 늘어져야 집으로 향하곤 했는데, 그 소녀가 그 때까지 교문 밖에 혼자 앉아 있다가 맹꽁이를 보기가 무섭게 앞서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거의 매일 있었습니다.
맹꽁이는 이번에도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그 소녀의 뒤를 따라 가다가, 길가 풀밭에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녀도 먼발치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맹꽁이가 일어서면 같이 일어서서 앞서 가는 것입니다.
맹꽁이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그 소녀 앞으로 다가가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며칠을 이 문제로 고민하던 맹꽁이는 그 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기자씨: 기자씨가 나를 좋아하는 거 나는 확인했습니다. 나도 기자씨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어리고, 배울 것도 많습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 우리 결혼합시다. 그 동안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여 인격을 닦읍시다.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기자씨도 예수를 믿어야 나하고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내 편지는 암호 편지로 하겠습니다. 5학년 국어 교과서를 대본으로 하여 암호를 쓰겠습니다. 내가 1+2 라고 쓰면 5학년 국어 교과서 맨 첫째 줄, 앞에서 둘째 글자라는 뜻이고, 10-5 라고 쓰면, 그것은 열째 줄, 뒤에서 다섯 번째 글자를 말합니다. 이제 ‘나는 기자씨를 좋아합니다.’란 말을 이런 암호로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맹꽁이는 태풍이라는 김내성(金來成)의 탐정소설을 읽고 배운 대로 암호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맹꽁이는 1학년 산수 숙제 같은 1+3, 5-2, 15-7 등의 숫자들은 적어 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맹꽁이는 아무도 모르게 그 소녀의 책상 속에 그 편지를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답장이 없는 것입니다. 맹꽁이는 계속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1+5, 3+9 10-8 등 암호를 써서 성구도 적어 보내고, 그 때 애송하던 하이네의 시니 소월(素月)의 시도 적어 보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될 때까지 1주일에 두 통 이상 사랑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암호 뿐인 편지니까 아이들 없을 때, 창가의 그의 자리에 슬쩍 던져 넣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식은 감감했습니다. 맹꽁이는 속이 상했습니다.
(이 아둔한 아가씨가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답장을 안 하나보구나.)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새로 보내는 편지에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답장을 안 하는가본데, 나는 6학년이고, 내가 쓴 붓글씨가 교실 뒤에 붙어 있는데, 그 글의 내용은 ○○○이야.”
이렇게 끝까지 제 이름은 안 밝히고, 쓴 붓글씨 내용만을 적어 보냈습니다.
다음 날, 그 소녀는 6학년 교실을 지나 5학년 교실로 가다가, 고개를 교실로 디밀어 뒤에 붙은 글씨를 유심히 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구, 저런 맹꽁이! 이제야 알게 되는구나.) 맹꽁이는 혀를 찼습니다.
그 날은 1학기 마지막 날이라서 오전 수업만 하고 방학식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모두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도 일찍 집으로 가는 것 같아서 맹꽁이는 그 뒤를 따라 가려고 교실을 나오는데, 5학년 담임 김 돼지 선생이
“야, 맹꽁아 좀 남아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뚱뚱하다고 아이들이 ‘돼지’라고 별명을 붙인 김 선생은 학교 내에서 제일 붓글씨를 잘 썼습니다. 붓글씨 쓰기를 좋아하는 맹꽁이는 그 선생을 좋아했고, 그 선생도 수시로 맹꽁이에게 남아 있으라 하고는 이런 일 저런 일을 시키곤 했기 때문에, 맹꽁이는 아무 생각 없이 교실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 돼지 선생은 맹꽁이를 5학년 교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교실은 책상 위에다 걸상을 포개어서 뒤로 밀어놓아, 그 한쪽 구석에 가 앉으면 얼른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게 되어 있었는데, 김 돼지 선생은 책걸상 몇으로 복도 쪽까지 가리고는 맹꽁이와 단 둘이 앉았습니다.
맹꽁이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크게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런데 마루 바닥에 앉자 마자 김 돼지 선생이
“야, 맹꽁아, 너 장가들여 주랴?”
하면서 맹꽁이의 얼굴을 빠안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맹꽁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자기를 좋아한다며 따라 다니는 김 돼지 선생의 누이동생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기집애가 저 혼자 날 좋아한다고 소문내더니, 이제 지 오빠를 내세우는구나. 허지만 틀렸다!)
맹꽁이는 김 돼지 선생 누이의 별명을 ‘엿’이라고 지었습니다. 본 이름은 ‘봉희’인데 일본어로 ‘호오끼’라고 발음하고, 일본어 ‘호오끼’는 우리말로 청소하는 ‘비’인데, 같은 음인 우리말 ‘비(雨)’는 일본어로 ‘아메’이고 ‘비’라는 일본어 ‘아메’는 또 우리말의 ‘엿’이라는 뜻이니까, 「봉희는 호오끼, 호오끼는 비, 비는 아메, 아메는 엿」이 된다는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친 별명이었습니다. 5학년인 그 애는 아주 활달하여, 노골적으로 맹꽁이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맹꽁이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습니다.
“아직 어린 게 무슨 장가예요? 전 공부 많이 하여 박사가 된 다음에 장가갈 거예요.”
“임마, 그런 놈이 연애 편지는 왜 자꾸 써?”
맹꽁이는 ‘아차!’ 했습니다. 그러나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 녀석이! 안 하던 거짓말까지 해? 네가 쓴 붓글씨가 6학년 교실에 붙어 있는데, 아니라구 잡아 뗄 거야?”
그러며 김 돼지 선생은 맹꽁이의 뺨을 때렸습니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습니다.
(고 계집애가 다 고자질을 했구나!)
맹꽁이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파서 우는 게 아니라 배신감이 분해서 울었습니다.
“많이 아프냐? 내가 괜히 네게 손찌검까지 했구나.”
맹꽁이를 사랑하는 김 돼지 선생은 그러며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럴수록 맹꽁이의 눈에서는 더욱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임마, 그만 울어. 그리구 비밀을 지키려면 끝까지 지켜야지, 붓글씨 얘긴 왜 써 가지구 꼬리가 잡혀!”
그러며 등을 어루만지는 김 돼지 선생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습니다.
“인제 무슨 재미루 사니? 몇 달 동안 네 암호 편지 푸는 재미로 살았는데. 그 시간이 선생님들에게 얼마나 재미 있는 시간이었는지 넌 모를 거야. 선생님들은 네 편지가 오면 그것을 풀며 정말로 즐거웠단다. 요게 분명히 맹꽁이 짓인데, 증거가 있어야지. 그리구 편지 내용도 공부 열심히 하자, 착하게, 바르게 살자는데 누가 뭐라겠어? 교장 선생님도 얼마나 재미있다구 하셨다구. 그런데 임마, 붓글씨 얘긴 왜 써 가지구 내가 안 나설 수 없게 만드냔 말이야. 이젠 다신 편지 안 쓰겠지?”
“미쳤다구 다시 써요?”
맹꽁이는 퉁명스레 다댑했습니다.
“하하하하...너 배신감 때문에 한동안 가슴이 아플 거다. 허지만 좋은 경험 했다. 여자란 못 믿을 존재란다.”
맹꽁이는 더욱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습니다. 김 돼지 선생은 무에 그리 재미있는지 여전히 빙글거리며 또 말을 걸어 왔습니다.
“야, 그런데 너 요즘 무슨 책 읽고 있니?”
맹꽁이는 대답을 안 했습니다.
“지난 번에 보낸 하이네의 시, 참 좋더라. 연애시 치고는 최고였어.”
맹꽁이는 놀림 당하는 기분이라서 입술만 깨물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 이제 가도 돼요?” 맹꽁이의 말에 김 돼지 선생은
“응, 여자 같은 거 다 잊고 열심히 공부하여 큰 인물 되어라. 난 네가 큰 인물 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어. 조심해 가거라.”
집으로 돌아오는 맹꽁이의 마음은 천 길 바닷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여자에게 다시는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맹꽁이는 그 흔한 연애 결혼 따위는 하지 않고, 중매로 결혼해 48년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신사참배 강요
1909년, 왜놈들이 한국을 강제로 합방한 다음에, 경복궁의 궁궐들을 헐고 대궐 앞에다가 총독부 건물을 짓고, 창경궁 중간을 뚝 잘라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길을 내고, 창경궁은 동물원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새문안에 있던 경희궁은 아예 헐어버리고 경성 중학교를 짓고, 덕수궁의 간판인 ‘대안(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달았습니다. ‘대안문’의 뜻은 ‘큰 평안의 문’인데, ‘대한문’의 뜻은 ‘큰놈의 집 문’이란 뜻으로서, 당시 거기 계시던 고종 황제를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간판이 아직도 그대로 달려 있으니, 문화재 관리국이나 정부의 무감각도 이만하면 마비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왜놈들은 또 남산 중턱을 헐고 일본의 개국신(開國神)이라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이란 것을 짓고,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국 각 면마다 ‘신궁’보다 한 급 아래인 ‘신사(神社)’라는 것을 지어 놓고는,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참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 신궁이나 신사는 일본의 국교(國敎)인 신도(神道)의 사당으로서, 조상신을 위하는 곳인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다급해진 왜놈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전국 학생들은 물론, 관공서 직원, 나중에는 교회 성직자와 성도들까지 신사로 데리고 가서 90도 각도로 절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목사 장로들이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투옥되고, 순교하는 처참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맹꽁이는 4학년 때 처음으로 신사참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전 날 일본인 교장이 이렇게 미리 예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일은 우리 면에도 신사가 완공되어, 전교생이 참배를 하는 기쁜 날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신사참배에 임하길 바란다.”
맹꽁이는 이 말을 듣고 걱정이 생겼습니다. 가끔 아리실 교회에 오시는 목사님들과 아버지가, 신사참배로 고생 당하는 다른 목사님․장로님들의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참배를 안 하면 어떤 벌을 받을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맹꽁이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여쭤보았습니다.
“아버지, 우리 학교도 내일 신사참배를 간다는데 저는 어떡하지요?”
아버지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습니다. 당신 자신이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안 하겠지만, 어린 맹꽁이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기에 얼른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버지도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구나. 오늘 밤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르자.”
다음 날 아침, 조반 상 앞에서 아버지가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습니다.
“옛날 아합 왕 때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있었단다. 아합 왕의 처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각 고을마다 만들어 세우고, 온 국민들에게 강제로 절을 하게 하였단다.”
“저두 그건 성경에서 읽어 잘 알고 있어요.”
맹꽁이는 아는 체를 했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정면으로 아합과 이세벨과 싸우고, 마지막에는 갈멜산에서 대 승리를 한 사실을 너도 알고 있겠지?”
“예, 잘 알고 있어요.”
“엘리야는 바알에게 절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뿐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엘리야 외에도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사람이 7천 명이나 더 있다고 말씀하셨거든. 지금 이 나라에도 7천 명 이상의 교역자들이나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충성스런 사람들을 남겨두시어 바른 신앙을 이어 가신단다. 그러나 너는 어리기 때문에 또 학생이기 때문에 거절할 힘이 없다.”
맹꽁이는 힘없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버지는 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더니 무거운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밤새껏 기도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주시더구나.”
“어떤 생각인데요?”
맹꽁이는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어떤 생각인고 하니, 남들이 다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을 때, 너는 고개만 숙이고 우리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라.”
“어떻게요?”
“하나님, 일본이 속히 망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조선이 독립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가 신앙을 잘 지키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세 가지를 기도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맹꽁이는 학생들 틈에 끼어서 학교 뒷산 중턱에 지은 조그만 신사 앞에 줄을 섰습니다. 「간누시(神主)」라는 자는 하얀 옷을 입고, 일본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옛날 사람 의 모자를 쓰고, 옛날 복장을 하고, 제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구령에 따라, 절을 하라고 하면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더러 허리를 펴고, 제사 진행하는 것을 보다가 단속하는 선생들에게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맹꽁이는 아버지가 일러주신 대로 고개만 숙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일본이 속히 망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조선이 독립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가 신앙을 잘 지키게 해 주십시오!”
원자폭탄은 일본을 살렸다
1945년이 밝아오자 일본군은 도처에서 전멸을 당했습니다. 싸이판 섬에서는 항복을 모르는 일본 강경파 군인들이 수십 미터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 내리고, 주저하는 사람들은 다른 강경파 군인이 뒤에서 떠밀어 전멸을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를 ‘교구사이(ぎょくさい、玉碎)’라고 부르고, 불굴의 정신이라며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본토 상륙이 거론되면서, 왜놈들은 대일본제국에 반항하는 세력인 조선 기독교 말살 운동에 나섰습니다. 먼저 미국 선교사들을 모두 본국으로 추방하고, 한국 목사․장로들은 강제로 끌어다가 신사참배를 시키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투옥을 하고, 또 ‘덴노헤이까가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는 유치한 질문을 하여 참 신앙인들을 가려내어 투옥하고, 찬송가에까지도 손을 대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왕’이라 표현한 것은 전부 ‘주’라고 고쳐 시커멓게 도장을 찍고, 손대기 힘든 ‘피난처 있으니’라든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같은 찬송은 아예 전체를 먹칠을 하여 보급을 했습니다. 그때 찬송을 보면, 약 1/3 이상이 새까맣게 먹칠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5년 8월 17일을 기하여 전국에 수감되어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 10여 만 명을 깨스실에 넣어 죽일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이를 가만두시겠습니까?
1945년 8월 6일, 미국은 마침내 히로시마(廣島)에 신형 폭탄인 원자탄을 떨어뜨렸습니다. 원자탄 한 방에 히로시마의 주민 약 26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어서 8월 11일에는 나가사끼(長崎)에도 떨어뜨려 7만 여 명이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안방에 앉아서 즉시 아는 시대지만, 당시 이 엄청난 사건은 비밀에 붙여져 있었기 때문에,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일본 천황 유인(裕仁)이는 무조건 항복의 방송을 하였습니다.
1968년 맹꽁이는 일본 유학을 가서 청산학원(靑山學院) 신학부에서 공부할 때, [아지아노 도모노까이, アジアの友の會, 아시아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유학생 단체의 주선으로 北海島 여행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일행 88명 중 맹꽁이가 가장 나이가 많고 일어를 잘 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대표자로 나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1968년 12월 28일 일본 혹카이도 삽뽀로에 있는 [혹카이도 신문사]에서 환영 리셉션을 열고, 대표자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며, 아시아에서 맹주(盟主)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널리 알리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맹꽁이는 단상에 앉아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질문의 촛점은 유학생들이 일본을 어떻게 보느냐는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묻던 기자들 중, 한 기자가 당시 동경에서 매일 일어나는 대학생 데모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유가 남아나 발광(發狂)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맹꽁이는 겁도 없이 대학생 데모를 매도했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습니다. 사회자가 제지하고 한 사람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지금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주제는 ‘오끼나와 가에세!(おきなわかえせ! 오끼나와 반환하라!)’인데, 내 나라 내 땅 돌려달라는 게 발광이라니, 심하지 않소?”
맹꽁이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왜정 35년간 일인의 횡포와, 3․1운동과 유관순에 대해서도 얘기한 후,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물론 내 땅 도로 내라는 말은 지당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 이후 류큐(琉球) 열도는 미국의 관할에, 지시마(千島) 열도는 쏘련의 점령 하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미국은 류큐 열도에서 오끼나와만을 남기고 일본에 다 반환했지만, 쏘련은 지시마 열도의 천 개나 되는 섬 중 하나도 반환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끼나와 가에세’라 하기 전에, 쏘련을 향하여, ‘지시마렛또 가에세!(千島列島かえせ!)’라고 하는 게 순서인 줄 압니다. 하나도 안 돌려준 쏘련에게는 찍 소리 못하면서, 다 되돌려주고 섬 하나 차지하고 있는 미국에게는 하나 마저 달라고 하는 것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섬나라 근성’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지시마렛또 가에세!’라고 데모한다면 나도 나가서 함께 데모하겠습니다.”
말문이 막힌 기자들이 순간 잠잠해졌습니다. 그러자 한 기자가 일어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원자탄을 떨어뜨려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일은 어떻게 보십니까?”
순간 맹꽁이는 쓰고 있던 베레모를 벗어 들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원자탄에 희생당한 수만의 희생자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베레모를 집어 쓰고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미국이 원자탄을 떨어뜨려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백 번 잘한 일입니다.”
그러자 사방에서 일인 기자들이 단상으로 뛰어 오르려고 하고 주최측은 이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맹꽁이는 맞아 죽을 각오를 한지라 차분히 조용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목숨을 걸고 아픈 역사를 논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원자탄을 안 썼다고 해도 일본은 8월 26일에 항복했을 거라는 글을 여기 와서 읽어보았습니다. 열흘 후 미군의 일본본토 상륙작전 후에 망했더라면, 희생자가 없었을까요? 일본은 8월 17일날,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을 독일처럼 깨스실에서 죽이려고 했는데, 원자탄이 아니었더라면, 일본도 독일인이 유태인 학살한 것과 같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원자탄을 안 떨어뜨려 일본이 8월 26일까지 전쟁을 끌었더라면, 19일에 쏘련이 북해도에 상륙하여 여러분은 지금 동독과 마찬가지로 쏘련의 점령 하에 있을 것입니다. 쏘련이 점령지를 내준 일이 있습니까?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이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200 만 명이나 희생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아직도 분단상태로 대치하고 있질 않습니까. 남북한 200만의 군사비를 경제건설에 투입했다고 생각해볼 때 얼마나 큰 손실입니까. 일본은 군사비 지불 없이 경제성장에만 힘을 모아, 이제 잘 사는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미국의 원자탄 투하는
첫째, 일본의 더 큰 희생을 막는데 성공했고,
둘째, 한국인 성직자들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셋째, 일본이 가스로 한국인 성직자들을 죽였다는 영원한 오명을 면케 해 주었고,
넷째, 일본이 분단 국가가 되는 것을 막아 주었고,
다섯째, 일본이 이데올로기 전쟁마당이 되는 것을 막아 주었고,
여섯째, 통일된 일본이 다시 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의 원자탄 투하는 일본을 위해서나 한국의 성직자들을 위해서나, 세계 평화를 위해서나 백 번 잘 한 일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질문 있습니까?”
장내는 숙연해지고 아무도 질문을 못했습니다. 이 날 북해도 신문에는
‘아지아노 도모노까이의 한국인 유학생, 미국의 원자탄 투하는 일본과 세계 평화를 위해 잘 한 일이라고 강변’이라는 몇 줄의 기사가 났습니다.
맹꽁이네게 한글을 배우는 선생님들
해방의 기쁨은 잠간이요,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왔습니다. 도처에서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이 일어나고, 마을마다 ‘치안대(治安隊)’라는 것이 조직되어 친일파를 징계한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학교는 9월 들어서 개학을 했지만, 모든 교과서가 일본어이기 때문에, 수업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간 맹꽁이는 친구들을 만나 인사를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일본어가 나왔습니다.
(아니지. 이젠 우리말을 써야지.)
맹꽁이는 의식적으로 일본어는 피했지만, 선생님을 만나자 다시 일본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센세이, 오하요고자이마스”(先生おはようこざいます。)
그러자 ‘기무라(木村) 선생은 허허 하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인제 일본말은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내 성도 ‘기무라’가 아니라 이(李)가란다. 너도 ‘도요또미싱꽁(豊臣信根)’이 아니라, ‘오신근(吳信根)’이란다. 오신근, 어디 ‘이 선생님!’하고 날 불러봐.”
맹꽁이를 사랑하는 이 선생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 선생님!”
“요시!(좋아!)”
이 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일본어로 칭찬하고는 다시 껄껄 웃으며
“이거 일본말 안 쓰기 운동을 철저히 해야겠구나. 그런데...참 너 언문(諺文)을 알고 있다지?”
“예, 교회에서 배워서 다 압니다.”
“그럼 네게 부탁해야겠구나. 정말 창피하게도 우리 선생님들 가운데 언문을 아는 선생님이 하나도 없구나. 학교는 아직 교재가 안 나왔기 때문에 아이들이 와도 수업을 할 수가 없으니 임시 휴교를 하고, 교재가 나온 다음에 개학을 해야겠다. 그리고 그 동안 네가 우리 학교 선생님들에게 언문을 가르쳐 주어야겠다.”
일본인 교장이 쫓겨나고 수석 교사인 이 선생이 교장 직무대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녜? 제가 어떻게 선생님들을 가르쳐요?”
“그 대신 이건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맹꽁이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습니다. 10 여명이나 되는 선생님들에게 기역, 니은, 디귿, 리을...하고 언문을 가르칠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기만 했습니다.
“내 곧 아이들을 다 집에 보낸 다음, 선생님들을 6학년 교실에 모아 놓을 테니, 너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다오. 너라면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며 이 선생님은 교무실로 가서 종을 쳤습니다.
아이들이 다 간 다음, 선생님들은 6학년 교실로 모여와 웃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바뀌니까 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선생인 우리가 맹꽁이에게 언문을 배우다니...”
“모르면 누구에게나 배워야지. 아는 사람이 선생이지 나이가 무슨 소용이야.”
“하여간 맹꽁이란 녀석 대단한 놈이야. 언제 언문은 배워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게 되었느냔 말이야.”
“걔 아버지가 그 유명한 오 장로야. 맹꽁이 동생이 1학년 때, 맹꽁이가 일본말을 모르는 동생에게 조선말을 썼다가, 이찌가와(市川) 교장한테 목검으로 머리를 맞아 뒤통수가 깨진 일이 있는데, 그 때 학교에 찾아와 교장을 닦아세우고 사과를 받아낸 대단한 분이야.”
작년에 부임한 젊은 선생에게 선배 선생이 설명을 했습니다.
“아, 용인 경찰서에 불려 가서 ‘덴노헤이까가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하는 고등계(高等係) 형사 질문에, 일본의 개국여신(開國女神)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照大神)도 하나님이 만드신 여자’라고 당당히 말했다는 그 분 아들이예요?”
“맞아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고도 오 장로라는 그이, 어떻게 무사할 수가 있었나, 저는 그게 궁금해요.”
“통역을 한 일본인 형사가 기독교인이었는데, 오 장로를 존경하는 사람이었대. 그 형사가 오 장로의 말을 거꾸로 통역했기 때문에 무사했다는 거야.”
맹꽁이는 이런 얘기들을 귓전으로 들으며 칠판 가득히 가르칠 교재를 썼습니다.
오른쪽에는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열개 모음을 붉은 색 분필로 쓰고, 꼭대기에는 왼쪽을 향해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열 네 개의 자음을 역시 붉은 색 분필로 썼습니다.
해방 전 한글 가르칠 때 쓰던 <반절표>
그리고는 각 자음 아래에, 세로로 쓴 모음에 맞추어서 흰 분필로,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 등을 ㅎ 줄까지 다 썼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들을 향해 90도 각도로 절을 하고는,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들 앞에서 우리 글을 가르치게 되어, 죄송하고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하하하...내 생전에 선생이 교단에서 학생에게 ‘사이께이레이(最敬禮, 90도 각도의 일본 식 경례)’를 하는 건 처음 보네.”
“와하하하하...”
웃음소리가 교실을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교장 직무대리 이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아오야마 선생, ‘사이께이레이’가 다 뭡니까? 이제부터는 일본어는 절대 금지입니다. 우리말만 씁시다.”
그러자 ‘아오야마’ 선생이 항의를 했습니다.
“제 성은 백가입니다. 백 선생이라 불러주십시오.”
그 바람에 다시 폭소가 터졌습니다.
“학생들 조용하십시오!”
맹꽁이가 그러자 교실 안은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맹꽁이에게 배운 선생들은 사흘 배우더니 이제 다 깨쳤다고 하며 좋아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리실 교회
맹꽁이의 할아버지 오인선(吳鄰善)은 1854년 9월 4일(음력)에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아리실에서 태어났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이 논 밭 스물 아홉 섬지기였다고 하니, 산골짝 마을 아리실 땅의 대부분이 맹꽁이 할아버지의 소유였고, 종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호방하여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남아 맹꽁이 할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쟁이’로 변하였습니다. 그가 평소에 존경하던 ‘김 선생님’이 서양 여선교사와 함께 찾아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한 것입니다.
때는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를 통하여 입국한 지 3년밖에 안 되는 1888년이었습니다. 여선교사는 이화학당을 창설한 스크랜턴 부인이었습니다. 김 선생이 권하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예수를 영접하고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던 맹꽁이 할아버지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과, 예수님의 유언(遺言)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였음을 깊이 깨닫고, 이를 실천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종들을 모아 놓고 당신이 예수를 믿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니까 너희들도 예수를 믿으라고 명령(?)을 했답니다. 그런데 종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예수 믿으면 조상의 제사를 못 지낸다는데, 그런 종교는 못 믿겠습니다.”
라고 거절을 하더란 것입니다. 맹꽁이 할아버지는 안 믿겠다는 종들을 매로 다스리고는, 김 선생에게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답니다.
그러자 김 선생은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니, 먼저 종들을 속량(贖良)해 주십시오.”
라고 일러주었답니다.
김 선생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맹꽁이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종들을 불러 모아놓고 중대 발표를 했습니다.
“내가 엊그제 너희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너희들이 안 믿었기 때문에 매로 다스린 일이 있는데, 이건 예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는 것을 나는 오늘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에 종을 두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말을 따라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내가 논밭 뙈기를 떼어 주고, 속량을 해 주겠다. 자, 예수 믿을 사람은 이 쪽으로 나오너라.”
그러자 자유를 준다는 바람에 모두가 예수를 믿겠다고 나왔습니다. 맹꽁이 할아버지는 그들을 데리고 김 선생에게로 가서 거나하게 술잔치를 벌였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 교회에서는 술․담배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처소에 들어갈 때는 입구에 놓아둔 커다란 대바구니에 장죽(長竹)을 꽂아 놓고 들어가 예배를 드렸답니다. 나올 때면 자기 장죽 찾느라고 혼란이 와서, 비슷한 장죽끼리는 표시까지 했다고 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초대 교회와 같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는데, 막걸리는 필수 음료였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술․담배를 금지하게 된 것은, 교회가 성장하여 조직 교회가 되고서도 여러 해 지난 후, 제 2회 총회에서 결의한 다음부터인데, 금지이유는 여러 가지였으나, 가장 큰 이유는 속량 받은 종들이 술에 취해, 소위 양반들에게 ‘나도 이젠 자유인이다!’하고 주정을 부리는 일이 많아서 사회 문제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온 맹꽁이 할아버지는, 당신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 준 김 선생이 수원 감영(監營)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원군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던 맹꽁이 할아버지는
“그래?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이다. 선생님 계신 감옥에 나도 함께 갇히련다.”
하고 수원으로 가려 했답니다. 식구들이 말리자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감옥에 갇히는 게 대수란 말이냐? 또 주님이 ‘나를 위해 핍박을 받을 때,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1-12)’고 하셨으니 말리지 말아라.”
하고 수원 감영으로 당신 발로 찾아가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이오. 김 선생님과 한 방에 넣어 주시오.”
하고 자진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답니다.
당시 감영에서는 옥에 갇힌 사람들의 재산을 토색(討索)질해 먹는 게 아주 심하여, 맹꽁이 할아버지는 2년 옥살이에 집안 땅 문서를 다 바치고 나서야 풀려났답니다.
옥에서 풀려난 맹꽁이 할아버지는, 배워둔 기술인 목수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목수 중에서도 대목(大木)이었기 때문에, 옛날 같이 부자는 아니더라도 살만 하였답니다.
그러나 김 선생은 풀려나지를 못해 예배할 처소가 없게 되자, 1895년 9월 17일에 미국 감리회 시크란톤(時蘭敦) 선교사를 모셔다가 「아리실예수교회(牙利實耶穌敎會)」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06년, 「장․감 연합공의회」에서 선교 구역 조정을 하여, 경기 남쪽 지방 중 수원(水原)군, 여주(麗州)군, 이천(利川)군은 감리교 구역으로, 용인(龍仁)군, 안성(安城)군, 평택(平澤)군은 장로교 지역으로 나누는 바람에, 감리교파로 시작하였지만 장로교파에 소속되게 되었습니다.
아리실교회 당회록에 교회창립기사
지금 같이 교단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절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초대 교회의 선교사나 성도들은,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 교파를 초월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조선 예수교장로회 사기(아곡교회 부분)
아버지와 아리실 교회
맹꽁이의 아버지 오연영(吳連泳, 1889-1951)은 오인선(吳鄰善)의 4남중의 셋째로 1889년 12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장형 건영(健泳, 1979-1937), 중형 철영(哲泳, 1882-1920), 동생 기영(基泳, 1896-북한 거주) 4형제 중 서당(書堂)에 가서 한학(漢學)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장남 건영뿐이었습니다. 맹꽁이 할아버지가 자진하여 기독교 박해 때 수원 감영에서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재산이 다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맹꽁이의 큰백부는 1917년에 장로로 장립 받아, 유명한 분이었고, 지금의 전도사 격인 ‘조사(助事)’로 순회 전도를 하며 아리실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그의 장남 완근(完根)은 배재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당시 만인이 부러워하는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다니며, 선교사 로해리(魯解理, Harry Rhodes)의 비서로 있으며 미국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행복에 찬 가정에 사탄은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맹꽁이 백부 오건영 장로는 귀신 쫓는 능력도 받아 많은 인근 사람들의 사귀 병을 고쳐주었는데, 1926년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상처(喪妻)를 하고 외로이 지내던 중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인근 동네에서 어느 집의 첩살이를 하는 여인이 정신병에 걸려 찾아왔습니다. 당시는 ‘정신병’도 ‘귀신 병’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맹꽁이도 나중에 백모의 자리에 앉은 그 여자를 보았는데,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홀아비와 정신병에 걸린 ‘원통한 여인’은 넘어서는 안 될 경계를 넘어버렸고, 오건영 장로는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1928년 늦가을, 멀리 강원도 김화(金化)로 야반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본남편이 찾아와 자기 첩을 내어놓으라고 마구 야료를 부릴 때 그의 아우인 맹꽁이 아버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노회에서 파송된 고언(高彦, R. C. Coen) 당회장은 1932년 4월 20일 준당회에서 오건영 장로 일가(一家)를 아리실교회 교적에서 제적하였습니다.
갑자기 불어닥친 비극에 맹꽁이 아버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중형(仲兄) 철영이 젊은 나이에 3 남매를 남겨 두고 요절하고, 큰형수가 세상을 떠나더니 기둥 같던 형 오 장로가 스캔들로 야반 도주하였으니 교회에 대한 비난과, 집안에 대한 욕설을 참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맹꽁이 아버지는 욥과 같은 인내로 참아내며 더욱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며, 허물어져가는 교회를 일으키기에 전력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34년 11월 19일에 장로로 안수 받게 되었는데, 맹꽁이 아버지는 하나님께 이런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떤 일이 있어도 아리실을 안 떠나고 대대로 주님의 교회를 지키겠습니다.”
그리하여 1951년 7월 5일 죽기까지 아리실 교회를 담임 목회하였습니다.
맹꽁이 아버지 오연영(吳連泳) 장로는 매약상(賣藥商)을 하였습니다. 커다란 트렁크에 가득 약을 담아 자전거 뒤에다 싣고, 마을로 돌아다니며 약을 팔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부채표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제약의 경남지구(京南地區) 총판을 맡아서 장사를 했는데, 신용을 생명으로 아는 그의 상혼에 감동하여 동화제약에서 수원에다 큰 지점을 내어 줄 테니 수원으로 나와 보라고 권했지만, 장로로 안수 받을 때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아리실을 안 떠나며 교회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아리실은 용인, 오산, 안성, 평택 등 소읍들에서도 3, 4십리나 떨어진 궁벽한 곳인데, 맹꽁이 아버지가 서울에 가서 약을 사 오는 날이면, 맹꽁이 4촌 형 문근(文根) 형은 소 두 마리를 끌고 나가 약을 실어 오곤 했습니다. 맹꽁이 아버지는 약을 사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자세히 증세를 묻고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한 후 약을 팝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가 처방하여 지어 준 약은 원근 일대에 약효가 있다고 소문나 있어서 멀리서도 약을 사러 아리실로 오곤 하였습니다.
맹꽁이 아버지 오 장로는, 번 돈을 가지고 당신 아버지가 억울하게 빼앗긴 땅들을 되사보려고 애를 썼지만, 서울 사는 대지주의 손에 넘어간 땅은 단 한 평도 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불모지 산자락을 사서 틈만 나면 따비를 하여 밭도 만들고 논도 풀어 나갔습니다. 직접 따비를 할 시간이 없을 때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농한기에 품을 사서, 밭도 만들고 논도 풀곤 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반품밖에 못 받는 어린아이들도 어른과 똑같이 장정의 품값을 주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대단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가에서 일할 때에는 새참에 막걸리를 주는 게 관례인데, 총회에서 술을 금한 이후 금주를 한 오 장로는, 막걸리 대신에 설탕물에다가 [영신환(靈神丸)]이라는 박하 향이 나는 소화제 약을 타서 주었습니다. 돈으로 따지면 막걸리를 내는 것보다 배나 비쌌지만, 마을 사람들은 술을 못 먹는 게 그리도 서운했던 성싶습니다. 오 장로는 두 딸 결혼식에는 물론, 당신의 회갑에도 술은 한 방울도 못 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 장로가 세상을 떠나자, 술을 좋아하는 맹꽁이 큰외삼촌이 장례에 술을 쓰자고 우겨대는 것입니다.
“평생 술을 안 쓴 아버지 장례인데, 생전에 안 쓰시던 술을 쓰다니 말이 됩니까?”
맹꽁이는 안 된다고 버텼습니다. 그러자 외숙과 마을 어른들이 그럼 장례는 다 치렀다며 다들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맹꽁이는 신학교 1학년이었고, 작은 매형 김학봉(金學奉)은 신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게로 지고 가서 장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술은 못 씁니다.”
두 남매의 다짐에 온 집안 형제들도 동조하였고, 마침내 술을 쓰자고 우기던 동네 주사파(酒使派)도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허허! 맹꽁이는 영락없는 제 애비 고집을 닮았구나.”
“그러게 말이야, 죽은 오 장로가 산 윤덕주(尹德周)를 꺾는구나.”
큰외삼촌의 말이었습니다.
사람도 믿어야 한다
1945년 초가을, 맹꽁이네 집에 수원에서 약국을 하는 사람이 찾아와 많은 양의 약을 사 갔습니다. 왜 서울에 가서 사질 않고 이리 왔느냐고 맹꽁이 아버지가 묻지도 않는데, 이 근처까지 온 김에 장로님 댁에 약이 많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까지 가는 것보다 편하다 싶어 들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간 약은 맹꽁이네 집에 있는 약의 절반 가량이나 되는데, 맹꽁이 아버지는 도매 값에 넘겨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황공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맹꽁이 아버지는
“나는 동화제약에서 공장도 가격으로 가져오니까, 도매 값으로 팔아도 이문이 좀 남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사꾼이 간 다음 맹꽁이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 이상하지 않아요? 수원에서 아리실로 약을 사러 오다니...”
아버지는 별 걸 다 의심한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 지나는 길에 들러 사 가는 거라지 않니?”
“그래도 전 그 사람 어딘가 이상해요. 뭔가 속이는 것 같애요.”
“사람을 의심하는 것도 죄가 되느니라. 속을 때 속더라도 우선은 믿고 살아야 하느니라.”
맹꽁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번에는 평택에서 약방을 하는 사람이 약을 사러 왔습니다. 그 사람도 수원에서 온 사람과 같은 핑계를 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이상한지 몇 마디 물어보고는 달라는 대로 약을 주었습니다.
그 며칠 후 이번에는 오산에서 약을 사러 왔습니다. 아버지도 뭔가 있구나 느끼셨는지,
“그저께는 수원에서 와서 약을 사가더니, 어제는 평택에서 왔고, 오늘은 오산에서 오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서울에 약이 없습니까?”
오산에서 온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구구하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좀 나누어 달라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습니다. 얼마나 드릴까요?”
“가능한 한 많이 주십시오.”
그 사람은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도 팔아야 하니까, 한 보름치만 남겨 놓고 다 드리지요.”
아버지는 선선히 약을 주어 보냈습니다. 사랑방 다락 천장까지 쌓여 있던 약은 바닥이 났습니다.
“아버지, 아무래도 우리가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은데요...”
맹꽁이는 조심스럽게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얘야, 좀 손해를 보면 어떠냐? 그 사람들 내가 보기에는 서울에 약값이 올라서 이리 사러 온 모양인데, 나는 산값에다 약간의 이문을 붙여 팔았으니까, 손해라곤 할 수 없지 않으냐.”
“서울의 약값이 엄청나게 뛰었으면 어떡하지요?”
“그래도 할 수 없지. 장로란 내가 일반 상인과 같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맹꽁이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익만 보고 살려 하지 말아라. 주님께서는 손해보면서 살라고 하셨잖으냐? 오른편 뺨을 치면 외 편까지 돌려 대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신 게 주님의 명령이다.”
“그렇지만 너무 손해를 보면 내년에 저 중학교에 가야 할 텐데, 어렵잖겠어요?”
“내가 언제 너를 중학교에 보낸다고 한 일이 있느냐?”
아버지는 중학교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럼 국민학교만 마치고 시골서 살란 말씀이세요?”
맹꽁이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항의를 했습니다.
“내가 장로 안수 받을 때 하나님께 뭐라고 약속한 줄 아느냐?”
“평생 아리실을 안 떠나고, 교회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신 줄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것만이 아니다. 자손 대대로 이 교회의 장로로서 봉사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중학교 생각은 아예 포기해라. 알았느냐?”
맹꽁이는 아버지가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시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생이 걸린 문제인데, 아버지의 서원(誓願)만 따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장로로서 이 교회를 섬기시겠다고 서원하신 것은 참 잘 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자손 대대로’라는 말은 아버지 권한 밖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각 사람이 자유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섬겨 살길은 제가 선택합니다.”
맹꽁이는 난생 처음으로 자기 입장을 분명히 아버지에게 밝혔습니다.
“허어! 이 녀석이 아직 어린앤 줄 알았더니 생각이 멀쩡하구나.”
맹꽁이는 이 때다 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아버지, 어려우시더라도 내년에 절 꼭 중학교에 보내 주세요. 입학만 시켜 주시면, 공부는 제가 벌어서 하겠습니다.”
“네깐 녀석이 무슨 수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한다는 게냐? 잔말 말고 인제 나가 보아라.”
“아버지이...”
“어서 나가라니깐!”
맹꽁이는 사랑방에서 나오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며칠 후 서울로 약을 사러 올라갔던 아버지는 달랑 가방 하나만 들고 왔습니다.
“참 세상 험하구나. 그래도 나는 설마 했는데, 약값이 열 배도 더 뛰었어. 소 두 바리에 싣고 와야 할 약, 요게 전부다.”
맹꽁이는 속으로 ‘야단 났구나. 중학교는 포기해야 하나?’ 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입시 낙방을 비는 아버지
1946년, 해방이 된 이듬해, 이 해는 맹꽁이에게는 불안한 해였습니다. 국가와 사회 경제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치안은 엉망이었습니다. 맹꽁이네 집안 형편은 크게 기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약삭빠른 사람들에게 속아서, 많은 양의 재고 약품을 모두 싸게 팔아 넘겼는데, 물가는 10배, 20배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모든 국민은 기아선상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모리배들은 혼란을 틈타서, 모든 산의 나무란 나무는 다 벌목(伐木)을 하여 팔아먹는 바람에, 산은 모두 민둥산이 되어버렸습니다. 맹꽁이 아버지가 산자락에 개간한 논들은 나무가 다 없어지자, 샘의 근원이 끊겨버려 천수답(天水畓)이 되어, 모를 심을 수가 없게 되었고, 아리실서 가장 넉넉하게 살던 맹꽁이네는 졸지에 가난한 집안이 된 것이었습니다.
토지개혁(土地改革)을 하여,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눠주었지만, 맹꽁이네는, 소작 땅은 한 평도 없고, 모두 개간한 자작농토(自作農土) 뿐이었기 때문에, 모처럼의 혜택도 받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서도 맹꽁이는 꾸준히 진학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아버지에게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완고했습니다.
맹꽁이는 아버지 허락도 없이 서울에 있는 미션계 중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입학시험을 치르려면 서울로 가야 하는데, 오산(烏山)까지 13 킬로를 걸어 나가, 기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맹꽁이는 시험을 며칠 앞두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저 중학교에 원서를 냈어요.”
그러자 아버지의 안색이 달라졌습니다.
“이 녀석이! 누구 맘대로 원서를 내?”
“아버지, 입학만 시켜주세요. 공부는 제가 벌어서 하겠습니다.”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너는 내 뒤를 이어 아리실 교회의 장로가 되어야 한다.”
“장로가 되더라도 배워야 장로 노릇을 하지요.”
“이 애비를 봐라. 서당에 가 보지도 못한 내가, 독학으로 어엿한 장로가 되어, 재재작년엔 경기 노회에서 총회 총대로 뽑혀, 평양에서 열리는 총회에도 다녀오질 않았느냐.”
“아버지도 제대로 배우셨으면, 그보다 더 큰 일도 하실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아버지...”
“안 된다. 네 사촌 완근(完根)이를 보아라. 배재학당으로, 연희전문으로 우리 나라 최고의 명문 학교를 나왔지만, 어떻게 되었느냐?”
맹꽁이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연희전문 영문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한 사촌 완근형은, 선교사 로해리(Harry A. Rohdes)의 주선으로, 미국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기로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는데, 처가(妻家)에서 하는 제약 회사를 맡은 다음부터 세상으로 빠져, 계동(桂洞) 기생방에서 최고의 한량(閑良)으로 이름났다고, 탄식에 탄식을 거듭하는 아버지의 푸념이 또 시작될 모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 지식만 따르다가는 망하기가 십상이니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보아라. 삼촌 아브라함이 있는 산골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 도시로 나가서, 한 때 잘 사는 듯 싶었지만, 유황불로 소돔이 망할 때, 겨우 목숨을 건졌잖으냐. 그 목숨을 건진 것도 다 삼촌 아브라함의 기도의 덕이니라. 내가 너를 가르치기에 힘이 부쳐서 그러는 게 아니다. 산골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이 애비처럼 인근에 전도를 하며 장로로서 깨끗하게 사는 게, 내가 생각하기엔 가장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허지만 아버지, 이제 우리 나라도 독립을 했으니까, 장로가 목회하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시골 교회도, 조선 사람 목사가 들어와 목회하는 날이 올 겁니다. 저는 아버지 말씀대로, 도시에 나가더라도 믿음을 지키며 살겠습니다. 중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어 아리실로 오면 되지 않습니까.”
맹꽁이의 말에 아버지는 한동안 대답을 않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 끝에 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를 서울로 보낼 수는 없다. 단념해라.”
그 다음 날, 맹꽁이는 아버지께는 말씀도 안 드리고 서울 누님네 집으로 갔습니다.
입학 시험은 아주 쉬웠습니다. 50분 시험 시간인데 맹꽁이는 15분만에 다 써내고 나왔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합격 발표장에 완근형이 와 있었습니다. 오산에 사는 친구 아들이 시험을 보러 왔기 때문에, 교장과 동창인 완근형이 부탁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너 어찌 되었니?”
“네, 합격했습니다.”
다음 날 면접 시험을 보는데,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아버지 직업이 농사라고 적혀 있는데, 학비는 누가 댈 거냐?”
“네, 입학금만 아버지가 대어 주시고, 그 담은 제가 벌어서 공부할 겁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가 일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절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최종 발표에 맹꽁이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당하는 좌절의 충격으로 맹꽁이가 실망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떨어졌지?”
“네. 어떻게 벌써 아세요?”
“내가 너 떨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거든.”
맹꽁이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습니다.
맹꽁이는 교회로 올라가, 마루 바닥에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저의 갈 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하염없는 눈물이 마루를 적셨습니다.
혼자 음악 공부하는 맹꽁이
실의에 빠져 나날을 보내는 맹꽁이를 아버지는 살살 달래며, 농사일을 거들게 했습니다. 타고난 약골(弱骨)인데다가 관절염을 앓은 다음부터는,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은 맹꽁이는, 농사일이 힘에 겨워 식욕마저 잃어버려 빼빼 말랐습니다.
그러나 그냥 허송세월을 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낮에는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이웃마을에 새로 생긴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는, 외사촌 동생 길원(吉源)이의 중학교 교과서를 빌려다 보며, 혼자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학교 과정은 쉬웠습니다. 웬만한 건 한 번 읽어만 보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음악 교과서는 달랐습니다. 모르는 노래들이 너무나 많았고, 그 노래들이 너무나 좋아, 백지에다가 오선지(五線紙)를 그려 가지고는, 거기다 모르는 노래만을 베껴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맹꽁이가 가장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은, 중학교 시험 보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길거리에서 산 [음악사전]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인 여자의 책이었나 봅니다. 책 판권(板權) 아래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고, 도장까지 찍혀 있는 것입니다.
昭和十四年 二月十九日 가와노 스즈꼬(河野鈴子)
맹꽁이는 이 사전을 가지고 음악 형식(形式)이나 용어는 물론, 음악가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까지 혼자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는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강제로 자라고 불을 끄곤 했지만, 맹꽁이는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려 다시 일어나 불빛을 책으로 가리고 공부를 했습니다.
이런 맹꽁이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아는 작은 매형(金學奉)은, 자주 맹꽁이에게 책을 사다 주곤 하였습니다. 작은 매형은 오산(烏山) 사람인데, 용산 역에 사환(使喚)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용산 역 조역(助役)이 되었는데, 해방이 되자 서울 서강(西江) 역 역장 대리로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 잘하는 큰처남이 중학교도 못 가고 좌절해 있는 게, 꼭 자기 어렸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1946년도 성탄절 날, 작은 매형은 세 권의 책을 사다 주었는데, 홍란파 선생이 편집․ 등사한 [세계명곡집]과 조선아동문화협회에서 편집한 [조선동요 100곡선](상권)이라는 책, 그리고 윤석중(尹石重)이 지은 [초생달]이라는 동시집이었습니다. [음악사전]으로 어렵게 음악 공부를 하는 맹꽁이에게 이번에는 [세계명곡집]과 [조선동요 100곡선]이란 책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맹꽁이는, 밤마다 교회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 책의 노래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후에 맹꽁이가 작사․작곡가가 되는데, 이 책들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2년이 지난 지금도 [조선동요 100곡선]은, 맹꽁이의 애장서(愛藏書)에 들어 있습니다.
맹꽁이 나이 열 일곱이 되자 아버지는 맹꽁이의 결혼을 서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몸은 시골에 있지만, 맹꽁이의 마음은 서울에 가 있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결혼을 시켜 눌러 앉힐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목사님들마다 붙들고 맹꽁이의 중매를 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결혼 안 합니다.”
“아니 그럼 독신으로 살겠다는 말이냐?”
“그게 아니구, 공부 많이 하여 미국 유학을 가서 박사가 된 다음, 스물 아홉 살에 결혼할 겁니다.”
“중학교도 떨어진 놈이 박사가 돼?”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여느 때는 끔찍이 맹꽁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도, 공부 얘기만 나오면 이성(理性)을 잃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니까 떨어진 거지, 실력이 없어서 떨어진 줄 아세요?”
맹꽁이도 중학교 문제만 나오면 아버지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습니다.
“하긴 이일녕(李一寧) 교장 님도 그러시더라. ‘맹꽁이는 천잽니다. 그런 아이가 떨어졌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무언가 잘못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천재라구요? 우리 반 60 명 중, 15 명이 붙었는데, 떨어진 놈인 절더러 천재라구요?”
맹꽁이는 심사가 뒤틀려, 아버지에게 이렇게 한 마디 하고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지 며칠 후, 오산 장에 갔던 아버지가 맥이 하나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어디 편찮으시우?”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물었습니다.
“나 세상에 기가 막혀서...”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우? 속 시원히 말씀해 보세요.”
“글쎄 오늘 오산 장엘 갔다가, 완근이의 친구 김 아무개를 만났잖아요?”
“완근이가 친구 아들 입학 부탁하러 서울에 갔다더니, 그 애 아버지 말이유?”
“맞아요. 그 사람이 날 만나자 반색을 하며, ‘아드님 학교에 잘 다니지요?’하고 묻질 않겠소? 그래서 내가 ‘걘 떨어졌는데요’라고 말하니까, 깜작 놀라며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발표하기 전에 완근이와 함께 교장실에서 발표자 명단을 보았는데, 우리 맹꽁이 이름이 분명히 있었다는 거예요.”
하며 아버지는 한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기가 막혀서...”
어머니도 따라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맹꽁이는 뭐가 뭔지 뒤죽박죽인 것 같았습니다.
“진학 같은 거 포기하고, 시골서 농사나 지으며 늙으신 아버지를 도와드려라.”
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던 완근형의 말, 입시에 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 아버지, 그런데 붙었다는 데도 떨어진 자식 때문에 속이 상하는지, 맥이 빠진 아버지 생각을 하니,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다 아버지가 저 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덕택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버지 기도를 들어주셨으니 이제 ‘감사기도’나 드리시지요.”
맹꽁이는 그리고 밖으로 뒤쳐 나갔습니다.
“아니, 저 녀석이! 너 이리 들어오지 못해?”
아버지가 역정을 냈지만, 맹꽁이는 들은 체도 않고 예배당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 저는 공부가 하고 싶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맹꽁이는 울면서 찬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병이 든 맹꽁이
맹꽁이는 낮에는 아버지를 따라 논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밤을 새워 공부하면서 시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몸은 날로 허약해졌고, 웃음도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한낱 즐거움이 있다면, 저녁에 예배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찬송가와 세계 명곡을 가르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리실 교회에는 오르간이 없었고 찬양대도 없었습니다. 맹꽁이는 10대 소년 소녀들로 찬양대를 만들어 매일 밤 찬양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또 세계 명곡을 혼자서 공부하여 익힌 다음 창호지(窓戶紙)에 붓글씨로 써 붙여놓고 가르칩니다. 가르친 명곡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곡들은 물론, 오페라 아리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회상하면 맹꽁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흐릅니다. 웬만한 것은 한 주일 내내 가르치면 아이들이 다 외우는데, 한 곡만은 도저히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곡은 마스카니(Mascagni)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란 오페라의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란 합창입니다. 이 곡은 전문 합창단도 하기 힘든 곡입니다. 두 개의 합창단이 부르게 되어 있는데, 한쪽에서는 4분의 4박자 곡조를 부르고, 또 한 합창단은 4분의 3박자 곡조를 동시에 부르도록 작곡된 세상에도 특이한 곡조였습니다.
그런데 맹꽁이는 이 곡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하여 이 곡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겠다고 덤벼든 것입니다. 그것도 악보를 볼 줄 아는 아이는 하나도 없고, 악보도 없이 창호지에 쓴 가사만을 놓고, 맹꽁이가 ‘아아 아!’하고 노래를 하면 따라 하는 데, 이게 되겠습니까. 아이들은 ‘무슨 노래가 이러냐’,‘ 아무리 유명한 음악가의 작곡이라지만, 재미가 하나도 없다’ 하며 야단들이었습니다. 며칠을 애만 쓰던 맹꽁이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맹꽁이에게서 노래를 배운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교회의 권사가 되고 목사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맹꽁이 생일날 모여와서는 그 때 배운 명곡 덕분에 자식들에게 음악을 잘 아는 유식한 엄마, 할머니가 되었다며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1947년 여름, 시름시름 앓던 맹꽁이가 마침내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계속 설사만 하는데, 아버지가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며 약을 지어 주어도 설사가 멎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맹꽁이네 집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와서 맹꽁이 아버지의 기도로 거의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맹꽁이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의 병을 위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자, 하는 수 없이 서울 병원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맹꽁이의 큰 누님이 서울 북아현동에 살고 있고, 누님네가 나가는 아현성결교회에는 ‘성향사(誠香舍)’라는 병원을 경영하는 이성구(李誠求)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맹꽁이는 성향사 병원에를 매일 다녔지만, 설사는 멎지를 않고, 가끔 기절까지 하는 것입니다. 따라 와서 간병을 하던 아버지는 병이 전혀 차도가 없고, 매일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안 되겠다.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자.”
그러자 큰 누님과 매형이 입을 열었습니다.
“맹꽁이는 공부 병에 걸렸어요. 마음이 병난 거예요.”
“학교 가고 싶은 애를 잡아 놓으시니 왜 병이 안 나겠어요?”
그러자 아버지 안색이 달라졌습니다.
“죽어도 아리실을 떠나게 할 순 없다. 자 가자.”
맹꽁이는 아리실로 돌아왔습니다.
비행기를 만드는 아이
맹꽁이는 지게질이 아주 서툴렀습니다. 나무를 해 가지고 지게에 지고 오다가, 적어도 서너 번은 쉬어야 하는데, 지게를 세우다가 넘어뜨리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가랑잎이나 솔 가래로 된 나무 짐은 다 풀어져, 다시 그것을 긁어 묶다 보면 나뭇짐은 반으로 줄고, 해가 져야만 집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까치 집 만한 나무하는데 하루해가 걸렸단 말이냐? 뒷집 정호(正鎬)를 보아라. 너하구 동갑인데 나뭇짐이 산더미 같고, 그 애 애비는 새파란 나이에 힘든 일 자식에게 맡기고 편히 지내지 않느냐?”
아버지는 맹꽁이가 일을 잘 못 할 적이면, 꼭 친구하고 비교해 말하는 게 싫었습니다. 사람은 각각 다른 재능을 타고나는데, 그 타고난 재능을 살려서 사는 사람은 성공하지만, 자기 재능과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은 실패한다는 걸 맹꽁이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홍란파 선생이 쓴 [세계의 악성(樂聖)]이란 책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헨델이, 음악을 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법학을 공부하다가, 아버지 죽은 다음에 다시 음악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자기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않겠다, 자기 가고 싶은 길로 가겠다고 다짐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툭하면 자기를 뒷집 정호하고 비교하여 무능력자로 깎아 내리기까지 하는 것이 아주 못 마땅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맹꽁이는 이 날도 가랑잎을 긁어서 꼭꼭 묶었습니다.
“이만 하면 정호의 나무 짐보다 못하진 않겠지.”
맹꽁이는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쉬는 자리에서, 그렇게 조심한다고 했는데, 지게가 나뒹굴어버렸습니다. 단단히 묶은 나뭇짐은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 엉구렁텅이에 콱 박혀버렸습니다. 아무리 빼내려 해도 제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빈 지게로 갈 수는 없고, 맹꽁이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산으로 올라가 마른 삭쟁이 가지 얼마를 잘라 정말 까치집 같은 나뭇짐을 지고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이를 보고
“아니, 하루 종일 요걸 나무라고 했단 말이냐?”
하고 화를 냅니다.
“가랑 나무 한 짐 해 가지고 오다가 엉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빈 지게로 올 수 없어서...”
“빠뜨린 데가 어디냐?”
“풀무골 골짜기예요.”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가서 그 나뭇짐을 지고 돌아왔습니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정말로 네 장래가 걱정이다. 세상은 날로 살아가기 힘들어지는데, 나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안 좋고, 약도 없어서 팔 수가 없고, 우리 논은 모두 천수답(天水畓)이 되어버렸는데, 너는 몸이 약해 농사일을 잘 못하니...뒷집 정호만 보면 난 그게 그렇게 부럽구나.”
맹꽁이는 쓸쓸해하는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아버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아녜요? 힘으로 하는 일은 힘이 있어야 하지만, 지혜로 하는 일은 아무리 힘이 세어도 못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그 일을 할 수가 있잖아요. 저는 몸은 비록 약해 정호처럼 힘든 일은 못해도, 머리가 좋지 않아요? 이 머리, 이 지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면 저는 성공하지만, 힘으로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다간, 이모 말대로 빌어먹고 말 거예요.”
“아니, 네 이모가 널더러 빌어먹는다고 했단 말이냐?”
그러자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일전에 혼사 말이 났을 때 얘가 장가 안 든다구 하니까 그 사람이 화가 나서 ‘빌어먹을 자식’이라구 욕을 했지 뭐예요.”
“그러는 데도 당신은 가만있었소?”
“왜 가만있었겠어요? 너무 심한 말이라구 나무랐더니...”
“그랬더니...”
“몸두 약한 놈이 농사짓자면 힘들 거구, 당신 죽으면 빌어먹을 거라구...”
“아니, 그런 소릴 함부루 해? 내 당장 올라가서 그냥...”
아버지는 그래도 당신 자식을 이모가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한 말이 화가 나는 모양입니다. 당장 윗마을로 올라가겠다고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 참으세요. 저는 제 갈 길을 압니다. 정호가 힘으로 하는 일을 잘 한다면 힘을 쓰며 살면 잘 살겠지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명석한 두뇌를 주셨으니 그 머리를 쓰며 살면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세계의 발명가, 위인들 모두 힘이 센 사람인 줄 아세요? 저보다 더 허약한 사람도 수두룩해요.”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아버지도 얼굴의 노기를 풀고 웃으며 맹꽁이의 말에 동조를 했습니다.
“아버지, 정호는, 말하자면, 지금 한양(漢陽)에를 가는데, 짚신 감발을 하고 이미 떠나서 아마 오산(烏山) 쯤 갔을 거예요.”
“그럼 너는?”
맹꽁이는 자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비행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정호가 안양, 시흥, 영등포까지 갔더라도 제가 비행기만 완성하면 금새 서울은 물론 미국, 영국 불란서 세계 어디나 갈 수 있어요.”
“허어! 그 녀석!”
“그러니 아버지 좀 참고 기다리세요. 제가 비행기를 만들도록 도와주세요.”
“말로는 네게 못 당하겠다.”
그러자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말 잘 하는 맹꽁이는 목사가 되면 전도 잘 하겠네요. 하나님의 일도 잘 하고.”
“허허허허...”
아버지는 말은 않고 웃기만 했습니다. 모처럼 기쁨에 찬 웃음이었습니다.
맹꽁이의 가출
1949년 봄, 맹꽁이는 서울 누님 댁에 다녀온다고 어머니에게 졸라서 아버지의 승낙을 받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죄스러웠지만, 자기 갈 길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님네는 북아현동 골짜기, ‘복주물’이라는 약수터 근방에 방 두 개의 단독 주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큰 매형은 사진관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네가 웬 일이냐?”
누님 내외는 반기면서도 의아해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완강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집을 나왔어요. 고학을 해서라두 학교는 꼭 다닐 거예요.”
맹꽁이는 걱정하는 누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아버지 어머니 몰래 나왔단 말이냐?”
매형이 물었습니다.
“부모님께는 누님 댁에 다녀 오겠다구 하고 왔는데, 아버지가 데릴러 오셔도 전 안 갈 거예요.”
맹꽁이의 단호한 말에 매형이 걱정이었습니다.
“그게 그리 쉽진 않을 거다. 아버지 고집이 어디 보통 고집이냐?”
“매형님,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 있지요? 제 고집은 아버지 고집 못지 않아요. 이번엔 단단히 각오하고 나왔으니까, 매형님과 누님이 절 좀 도와주세요. 저도 일자리를 찾아서 밥값은 할게요.”
그리고 누님네 집에 있으면서 아현동의 신문 보급소를 찾아다니며 신문 배달 자리를 구해 보았지만, 너나없이 가난하던 그 시절, 신문 배달 자리도 구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맹꽁이가 매일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나갔다가 힘없이 돌아오는 걸 안쓰럽게 생각한 큰 매형은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일자리 구하러 다니지 말고 우리 사진관에서 일을 해라.”
맹꽁이는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일 자리가 있어요?”
“일 자리가 있다기보다 네가 나와서 도우며 사진 기술도 배우면 좋지 않겠나 해서 그런다. 요즘 사진관도 잘 안 되어서 어느 날은 한 장도 못 찍고 공치는 날도 있지만, 귀한 우리 처남이 딴 데 가서 구박받는 것보단 나을 것 같으니 내일부터라도 사진관에 같이 나가자.”
맹꽁이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습니다.
맹꽁이의 사진관 생활은 즐거웠습니다.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거의 다 가서 왼쪽에 자리잡은 2층에 [영신(永信) 사진관]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층계를 올라서면 사무실이 있고, 사무실 옆에 자그마한 암실(暗室)이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촬영실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 벽에는 푸른 바다와 흰 갈매기, 뭉게 구름이 그려져 있는 배경(背景) 그림이 있습니다.
친 형님에게 사진 기술을 배워 사진관을 낸 큰 매형은, 먼저 사진사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 외부에서 출사(出寫) 요청이 왔을 때 가지고 가야 할 물건 외우기부터 가르쳐주었습니다. 모두가 일본식 발음인데 맹꽁이는 지금도 그 말들을 다 외우고 있습니다.
[렌즈, 샷다, 쟈바라; 암바꼬, 도리바꼬, 상갸꾸, 가부리...]
지금 사진기는 아주 발달해서 간단하지만, 꼭 반세기 전인 1949년도의 사진기는 모두 분리형이어서 이렇게 외우고 챙겨 가야만 실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외우는 맹꽁이의 마음은 하늘을 날 것 같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아들이 돌아오지를 않자, 아버지가 찾아 서울로 왔습니다.
“네 이 놈! 누님네 다녀온다고 해 놓고는 벌서 며칠째냐? 늙은 애비는 시골서 농사짓느라 뼈가 빠지는데, 장남이라는 너는 여기서 빈둥대고 있어? 당장 내려가자.”
맹꽁이도 각오를 한 바라 강경하게, 울면서 말을 했습니다.
“저 안 가겠어요. 제발 여기 서울에서 공부하게 놔두세요.”
“돈도 없는 녀석이 무슨 수로 공부를 한단 말이냐? 네 누이 가뜩이나 어려운데 너까지 와서 개갤 작정이냐? 어서 가자!”
그러며 팔을 끄는데, 매형이 자기 형님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큰사위와 그의 형이 나타나자 아버지는 그들과 인사를 하느라 잡았던 맹꽁이의 손을 놓았습니다. 맹꽁이는 아버지에게서 될 수 있는 대로 멀찍이, 문간 쪽으로 앉아서 여차하면 밖으로 도망칠 차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맹꽁이는 매형의 형님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아현성결교회의 장로 물망에 오른 매형의 형님 박용장(朴容璋)은 맹꽁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맹꽁이는 그 동안 아현성결교회 주일학교 선생으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청년회 헌신 예배 날 맹꽁이의 큰 매형은 맹꽁이더러 포스터를 한 장 그려 달랬습니다. 맹꽁이는 청년들이 나팔 불고 북을 치며 노방 전도하는 그림을 그린 다음 거기다가 ‘아현성결교회 청년회’란 글을 써넣었는데, 그 그림을 단상에 붙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청년회 고문이었던 [성향사 의원]의 이성구 장로는 기도할 때,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그림 보기가 부끄럽다며, 그 자리에서 나팔과 북 살 돈을 헌금하여 그림 그대로 청년회가 나팔 불고 북 치면서 노방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장 어른, 저렇게 애절하게 공부하겠다는데, 놔두시지요. 지금 제 동생네 사진관에서, 사진 기술도 배우고 잔심부름도 하며, 적당한 기회를 찾고 있는데, 힘드시더라도 두고 내려가십시오. 아드님 공부하는 일은 저희 형제가 알아서 잘 돌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어려운 사돈의 말이라 더 이상 고집을 못 부리고 한숨만 쉬고 있더니 아리실로 돌아갔습니다. 맹꽁이는 속으로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꼭 아버지가 원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