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로 물러가라
마가복음 8:31-34 2023/10/22 성령강림 후 제21주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8: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가복음 8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울울한 심정을 드러내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옵니다. 자신을 기대했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실망으로부터 오는 울울한 심정이었습니다.
첫 번째 울울한 심정을 안겨 준 주인공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율법 특히 안식일 법에 있어서, 구별된 참된 사람들이 되거나 참된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늘 613개의 계명, 율법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나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매우 폐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폐쇄적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바로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설교때문이었습니다.
막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사두개인과 달리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지식이 거의 없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설교한 예수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그 현장에 바리새인들이 꼭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찾아야 예수님께 천국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바로 하늘에서부터 오는 천국의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막8: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8: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8: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8: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8: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8: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 나라 천국 복음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 온 것이지요. 그런데 바리새인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이 실망스러운 일들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 때와 달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렵게 모인 사천 명을 예수님이 흩어 보내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 나라와 전혀 상관없는 변두리 지방 달마누다 곧 막달라로 자신의 몸을 피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8: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시비를 걸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그러니 예수님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답답하고 울울했지요.
그래서 복음서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울울한 심정을 이렇게 적었던 것입니다.
막8: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복음을 제쳐놓고
하늘에서부터 오는 표적만은 구하는 어리석은 바리새인에 대한 실망감
그 예수님의 울울한 심정이 느껴지시는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바이블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를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심장으로부터 곧장 솟구쳐나오는 한숨을 내쉬셨다’
(a sigh that came straight from the heart)
그래서였을까요?
복음이 아닌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막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하지만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 두 번째 실망이었습니다.
막8: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예수님의 말뜻은
진리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폐쇄적인(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굳은 마음을 경계하라고 하신 말씀이엇습니다.
하지만 그 뜻을 알아듣는 제자가 단 한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이렇게 오해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점심에 먹을)떡(빵)이 없음이로다’
속 터질 일이지요.
모든 문제를 오직 ‘먹고 사는 것’으로만 해석하고 바라보는 제자들.
그러니 울울할 일이지요.
그러자 우리 주님이 속이 터지는 울울한 심정을 뒤로하고 친절하게 다시 설명을 해 주십니다.
막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8: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8: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그런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는 일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울울하게 한 주인공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였습니다.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여기에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 하나가 등장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
그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인자, incarnation 성육신하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는다.
둘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이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
셋째 사흘 만에 살아난다.
여러분은 어떤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까?
‘많은 고난을 받고’입니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입니까?
‘사흘 만에 살아나야’ 입니까?
‘사흘 만에 살아나야’에 우리에 눈이 꽂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믿는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사흘 만에 살아나야’에 우리의 눈이 번쩍 뜨여져야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런 믿음의 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앞서나가지요.
그것이 사탄의 일인지도 모르고 앞서 나갑니다.
막8: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말이 항변이지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33) 지금 예수님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뭐라고 꾸짖었을까요?
마가는 그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는 그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이시면서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를 꾸짖어 줍니다.
막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에 보면, 앞서 나가는 베드로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호칭이 아주 놀랍습니다.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사탄아’
그러면 예수님은 왜 자신의 제자를 사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탄처럼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비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울울한 심정을 뒤로 하고, 베드로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 ‘내 뒤로 물러가라’였습니다. 다시 33절입니다.
막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내 뒤로 물러가라
바로 ‘예수님의 뒤’ 그 자리가 오늘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라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는 오늘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가 바로 ‘예수님 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역사가 나타나는가?
찬송가 449장 1절입니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①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②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③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말씀을 마칩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아주 멋진 신앙 고백 속에서도 우리가 종종 실수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 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처럼 앞서 생각하고, 앞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일 우리 주님을 한숨짓게 하고, 속 터지게 하는, 울울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우리의 앞선 생각이, 주님을 위한다는 우리의 앞선 행동이, 오히려 주님의 길을 막고,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탄의 생각, 사탄의 행실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예수님 뒤에 서십시오.
그리고 뒤로 물러나서, 참된 제자의 길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