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사는 아름다움 (3) : 쉽게 시 쓰기
이집트의 파라오가 자기 앞에 선 이스라엘 난민인 야곱에게 네 나이가 얼마냐 묻자,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으로 조상의 연조(年條)에 미치지는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라고 했다.
이 땅에서 그만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을까. 생각해 보면 역사상 거의 모든 인류는 험한 세월을 살았고 지금도 그러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처럼 모두가 살기 힘든 험한 세상에 저 혼자서 한가히 시를 쓴다는 건, 그것도 쉽게 쓴 시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윤동주는 그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노래했다. 그러고 보면 별 고민 없이 너무 쉽게 시를 쓰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런 지혜가 있다면 그는 서산에 지는 해를 보아도 그냥 낯설지 않은 일상으로 여길 것이다. 세상을 관조하는 여유란 느림에서 오므로, 되도록 느린 눈으로 사물을 보며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으며 생각해 보면 될 것이므로, 시란 굳이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순환하고 영원히 회귀하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시를 쓰려고 한다. 그게 오히려 그에게는 느리게 사는 아름다움이며, 나아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이유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가끔 빈곤한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
1. 가을비
지난여름의 폭염(暴炎)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해서인지, 뒤늦게 하늘은 가을 날씨가 실종될 정도로 비를 쏟아 보낸다. 그리 반갑지 않은 처사이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잎은 보기에도 좋지만 연이어 내리는 빗방울에는 견디기가 힘들어 보인다. 그들도 짧은 가을 햇살에 맺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때를 따라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늘 감사의 대상이었다.
‘가을비’
때늦은 무더위 달래듯
10월의 검은 하늘이
연이어 비를 내리자
쏟아지는 빗줄기에
들녘의 코스모스는
힘겹게 서 있다.
가을비란 조금만
내려도 좋은 것을
비구름은 잊었나 보다.
가을 짧은 햇살에
꽃들은 언제쯤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2. 아다지오처럼
일몰 전의 저녁 햇살은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창 사이로 스며들어 서가(書架) 주변을 한 뼘쯤 비추며 잠시 머물다 간다.
그는 방금 뜰앞에 가을 색깔로 물든 왕벚꽃 나무 잎새를 빠른 걸음으로 스치어 왔다. 모두에게 저녁 인사를 손짓으로 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창문을 닫을 시간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이럴 때 어울리는 악기는 첼로이고, 아다지오를 연주하면 더욱 좋은 그림이 된다. 가을 애가는 천천히 느리게 우리 내부로 흐른다.
‘아다지오처럼’
저녁노을에 비껴가듯
창(窓) 사이로 스며든 그는
한 뼘 크기 공간으로
서가에서 잠시 머물렀어.
조금 전 그는
뜰앞 가을로 물든 잎새를
스쳐서 왔지.
하루가 저무는 전조야
이럴 땐 첼로가 들려주는
아다지오가 어울려.
이제
슬픈 음악처럼
천천히
느리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창문을 닫아야지.
3. 오래 피는 꽃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아닐손 바위뿐인가 하노라.”라는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중 바위를 찬양하는 시조가 있다.
꽃은 쉬이 지니 아름다운 것이 된다. 시들은 꽃잎은 처연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전혀 시들지 않고 오래 피는 꽃들이 있다. 초여름부터 늦가을 서리가 내릴 때까지 피는 무궁화와 호박꽃이다. 계절의 꽃들이 모두 진 후에도 연이어 피는 이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느리게 사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오래 피는 꽃’
꽃은 순간이 지고(至高)이고
절정일 때가 지선(至善)이야.
청춘의 시간이 그러하듯
짧은 것이 늘 아름다움이었어
그런데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연이어 피고 지어 오래 피는
꽃이 있지. 우리의 운명 같은
샤론의 장미 무궁화야
그다음은 밭두렁이나 둑길
어디서나 줄기를 뻗어 피는
꽃이 있어. 서리가 내릴 때까지
피어나는 풍요로운 꽃이야.
느리고 천천히 아무 말 없이
커다란 열매를 밭두렁에
몰래 산출하는 노란 꽃이지
무리 지어 핀 호박꽃이야.
4. 유모차
매일 아침 산책길에서 만나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외손녀를 등교시키고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분을 만나게 된다. 아무런 표정이 없이 두 손으로 유모차를 밀며 매우 느린 걸음을 한 발씩 떼신다.
유모차란 걷지 못하는 어린 아기를 태우는 도구이다. 아마 그 할머니도 아이였을 시절엔 유모차 안에, 어머니였을 때는 자녀를 태운 유모차를 미셨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타지 않은 빈 유모차를 밀고 가는 쓸쓸한 시간이 되었다.
스핑크스(Sphinx)의 수수께끼가 있다.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 다리, 두 다리, 세 다리로 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이를 오이디푸스(Oedipus)는 풀었다. 그리스 신화에 전하는 어둡고 슬픈 운명을 짊어진 오이디푸스(Oedipus)왕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인간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노인으로, 모습을 바꾼다. 결국, 아이에서 아이로 술래잡기와 같이 순환하고 회귀하며 끝없는 변용을 보인다. 혹 생로병사에서 늙음과 병은 빠져도 되지 않을까? 그냥 살다가 가는 생명처럼.
‘유모차’
아주 오래전
그 품 안은 포근했지.
세월이 흘러 그 공간은
아이들의 몫이 되었어.
이제 그 아늑함을
매우 느리게 천천히
밀고 가, 슬픈 노래처럼
이를 순환이고, 회귀라고 해
아이는 어른으로, 노인으로,
또다시 어린아이로 바뀌는
술래잡기를, 끝없는 변용을.
이 계절이 올 때마다 자연은 우리에게 뭔가 낌새를 보여준다. 마치 생로병사의 순환 원리를 다시 일깨워 주듯 우리에게 겨울을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런 후 여름 강가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둔 수금을 꺼내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황급히 겨울로 떠나라고 한다. 이제 느리게 천천히 떠남을 준비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