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권 24호](통권 174호)(2009년 7월 20일)
대구의 명소 3.1 운동길
김 재 식
옛날 동산 돌담고갯길을 추억으로 더듬어 본다. 1950년경 필자가 대신동에서 대봉동에 있는 10리 길 K중학교(6년제)에 다닐 때 지름길로 이용했던 이 돌담길이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물어 보니 3.1운동 길이라고 한다. 내가 이 길을 다녔다니 야릇한 감회에 잠긴다. 이 담길은 정말 묘하다. 하나의 샛길인데 계산동에서 현재의 제일교회와 동산병원 남쪽 옛 동산병원 선교사주택지의 사이를 통과하는 들여다보이지 않는 비교적 높은 양쪽의 돌이 섞인 지붕이 있는 토석담 길이었다. 담 사이에 있는 언덕골목이다. 그러니까 바로 동산을 넘는 고갯길이다. 양쪽이 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통로이다. 골목 치고는 좀 넓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던 조용한 골목이었다. 조용하나 명절이 가까우면 토정비결을 보는 사주쟁이가 자리를 깔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을 끌었다. 중학교와 대신동의 우리 집 사이의 지름길이다 보니 이곳에만 오면 집에 다 와 간다고 위로를 받았던 곳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드물어서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길을 이용하는 S여중학교 여학생도 간혹 있고 해서 싫지가 않았던 길이다. 즐거웠다. 중학교가 3년제가 되면서 계속 오래는 다니지 않았으나 6.25동란으로 중3 후반은 신천동 신천변의 기왓골에서 공부를 하다 곧 새로운 고등학교제도로 바뀌자 종로 인근의 K고등학교(상서여고 자리)에 다니게 되면서 이 골목길은 동네친구들과 동산과 계성고등학교에 공을 차고 농구하러 갈 때 한 번씩 다녔다. 조용한 통로가 돼서 골목에서도 공놀이를 해도 안전하였다.
동산이라고 하면 이웃이었고 지금의 동산병원자리가 중심이기 때문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시절에 동산병원 마당과 계성학교 마당에서 잘 놀았다. 오랜 옛날이라 오늘날 같이 복잡하지 않고 평화로운 조용한 쉼터처럼 놀던 곳이 동산이라 마치 에덴동산 같은 기분을 느껴 본다.
지금도 동산은 나의 이웃동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너무 익숙한 곳이다. 계명의대가 그 때 있었더라면 이 대학에 오지 않았겠나 싶다. 좁게 말하면 아직도 옛날 같이 한 동네다. 최전방 육군 제7이동외과병원에서 군의관 생활을 할 때 이웃 5군단 미군사고문단 의무실장으로 온 미국군의관 ‘라이스돌푸‘ 대위와 친하게 되어 그의 짚차로 대구까지 와서 집에서 같이 자는데 키가 너무 커서 화장실은 동산병원에 데리고 가서 볼 일을 보게 했다. 미국사람이 세운 동산병원이라 구조도 미국식이고 좌변기가 있었기 때문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잠 잘 때 소변은 요강(mobile toilet)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지금도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당시의 한국식 화장실은 키 큰 미국인에게는 절단이었다.
작년 5월 동산병원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우연히 대한의사학회에서 숙제발표를 하여 대구경북지역에서 근대서양의학의 도입은 단연코 동산병원이 1899년이라는 연도를 비롯 과학적인 진단술을 가장 먼저 사용한 의료기관임을 발표하고 나는 큰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정말 감개가 무량했었다. 나의 전설적인 이웃 동산이 한국의학의 선구자적 역할하게 된 유서 깊은 곳이라 너무 자랑스러웠다. 우리 집 바로 뒤 서편에는 대구 피(避)병원이 있었다. 1950년대 전염병환자 특히 콜레라 만연으로 대구가 혼란에 빠졌을 때 이 피병원은 부지기수의 죽은 환자가 실려 나오는 그 때의 참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 때 대구는 아수라장이 되었었다. 이 피병원이 대구시립병원이 되었다가 오늘의 대구의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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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전 이곳에 3.1운동 길이 생긴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이곳을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동산병원 산부인과의 Y교수의 안내로 의료선교사 주택들이 역사박물관으로 변한 동산과 지금 한창 공사를 하고 있는, 아쉽게 담을 헐은 3.1운동길을 찾았다. 며칠 뒤 다시 이곳을 혼자서 다시 답습을 하고 이 글을 쓰게 되어 무한 감격한다. 여기서 3.1만세운동을 한 3.1운동길이라는 것을 오늘 비로소 알게 되어 너무 부끄럽기도 하다. 내가 지름길로 애용했던 그 길이 독립운동의 길이라니 나에게는 의미가 크다. 그 때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와 대구고보(지금의 경북고)의 학생들이 민간인 복장(한복)으로 변장하고 제일교회교인, 시민 등과 서문시장 장꾼들이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여 함께 이 길을 따라 서문시장 주변을 돌면서 독립을 외치며 3.1운동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 얼마나 고귀한 독립운동인고! 그 동안 너무 오래 방치 하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드니 가슴이 아프다. 안중근선생이 왜놈대장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만주 하얼빈 역에서 권총으로 쓰러뜨리고 유관순지사는 사지가 일본군의 총칼에 찢기면서도 결사 항거하며 항복을 하지 않은 서리같은 절개가 생각킨다. ‘대한민국만세! 대한민국만세!’의 그 함성은 오늘도 들린다. 정말 세계가 감동하고 감격한다. 그들은 위대했다. 그 결과로 1945년 8월 15일, 8.l5해방과 광복이 왔던 것이다. 국권을 회복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인가?
나는 만시지탄의 한(恨)을 안고 오늘 불도저 소리가 요란한 3.1운동길 공사장을 누구보다도 유심히 돌아보았다. 이 감격스런 대구의 3.1운동길은 대구시의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어 무척이나 통쾌하다. 이 공사장을 끝에서 끝까지 추적을 하였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난 길이고 대신 1길에서 계산동 90계단 사이이다. 90계단을 헤아리면서 숨이 차도록까지 왕복을 하면서 옛 발자취를 더듬는 고행을 체험을 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가슴 벅찬 감격이었다.
이 기와지붕 토석담 동산골목길 중간에 구름다리가 하나 있었다. 현장에서 지금 추측을 해보니 현재의 제일교회 쪽의 ‘램니스’ 선교사 주택(지금의 의료선교박물관)과 ‘부레이어’ 선교사 주택(지금의 선교박물관) 사이로 서로 구름다리로 내왕을 한 것이 틀림없다. 당장 아쉬운 것 하나가 이 구름다리 부분은 그대로 보존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도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은 그 자그마한 독도를 저희 영토라고 우기니 억장이 막힌다. 게다가 일본이 최근에 한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역사교과서도 왜곡검정통과를 했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만일 이런대도 이에 동조하는 한국사람이 있다고 하면 친일파를 넘어서 역적이리라. 이런 가운데 K대학교가 대학병원역사를 왜곡한 파렴치한도 있다. 역사는 사실대로이어야 하고 누가 무어라고 해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2009. 5. 13.)
(경북의대 명예교수, 경북 다산, 경북의대 교수 및 학장 역임, 2001. 2. 정년,
동서노화기전연구소, 경북대동서의학연구회, 수필집: 사랑과 낭만과 자유)
부부란 무엇인가?
강 병 조
부부 관계를 이야기 하기란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자기 부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필자도 자신이 없다. 그런데 오늘 부부관계를 갑자기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는 필자가 아는 사람의 최근 부부문제 때문이다.
필자가 아는 사람은 몇 달 전에 결혼을 했다. 중매로 만났으나 사귈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결혼 후부터 자주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다. 부부싸움이라기보다는 부인의 일방적인 요구를 신랑이 따라가기 힘들어서 다투게 된 것이다. "목욕을 자주해라. 2일에 한 번씩 집안 청소를 해라. 은행통장은 모두 부인에게 맡기고 매일 용돈을 타서 쓰라. 퇴근 시간이 늦으면 어디 갔다 왔는지 행선지를 밝혀라. 시어머니 집과 많이 떨어진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 아랫배가 부르니 매일 30분 이상 헬스를 해라. 담배를 못 끊는 것은 의지력이 약한 탓이다. 여덟 팔자로 걷지 말고 11자로 걸어라. 술은 한 잔만 먹지 두 잔 이상은 먹지 말라. 성관계도 다른 신혼부부처럼 매일 하자 등등"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필자의 결혼 초 시절과 자식들의 결혼 생활이 떠오르면서 후회와 반성을 하게 되었다. 혹시라도 젊은 부부에게 참고 될까 감히 용기를 내어 이글을 쓴다.
결혼 생활, 부부 생활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서로의 욕심의 충돌이다. 남편이 자기의 욕심에 차지 않으니 뜯어 고쳐서 욕심에 차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부인의 욕심이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뜯어고치듯이 사람도 새롭게 고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사람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성격이란 타고난 요소가 많기 때문에 고치기가 정말 어렵다. 내가 상대에게 적응하기보다는 상대를 나에게 맞도록 고치려하다 보면 싸우게 된다. 게으른 성격도 타고나고, 여덟 팔자 걸음도 타고난다. 고쳐지기 어려운 것을 고치려들면 싸움밖에 안 된다.
몇 해 전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에 갔더니, 시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일러주는 덕담이 필자의 가슴에 와 닿았다. "상대방의 성격을 뜯어고쳐 나에게 맞추도록 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고쳐지지는 않고 싸움만 되니 서로가 변해서 상대방에게 맞추도록 노력하여라." 이 시아버지는 교육자로 정년퇴임하신 분이었다.
신부는 결혼 전에, 시집에서 할 예절, 음식 만드는 법 등은 배워서 간다. 그러나 부부간에 싸우는 이유, 남녀의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차이점과 공통점, 시부모님에게서 사랑받는 방법 등은 배우지도 못 한 채 결혼을 한다. 기껏해야 결혼식장에서 주례님으로부터 들은 간단한 주례사가 전부인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흑인들)에서는 신부는 결혼 전에 어머니 친구로부터 성 생활을 포함한 부부생활 전반에 걸친 교육을 일대 일로 받고서 결혼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들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훌륭한 아프리카 전통은 수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부부관계는 사랑의 관계라고 한다. 사랑하면 에로틱한 사랑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넓은 의미의 더 큰 사랑이 있다. 유명한 20세기 정신과 의사였던 허리스택 설리반(Harry Stack Sullivan, 1892- 1949)은 <사랑이란 이해심 Love is Under-standing>이라고 정의하였다. 이해심이란 상대방보다 한 계단 밑에 서는 것이다. 나의 생각보다 상대방의 심정을 미리 헤아리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것이다.
결혼 전에 산 시간보다 결혼 후에 함께 산 세월이 더 많은 부부들은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배우자가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래도 간혹 충돌이 있다. 과거의 레파토리를 들고 상대방을 자주 공격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감정적으로 내뱉을 때는 참을성도 폭발해버린다.
하루살이 날파리도 부부가 있는가? 우리 인생 100년도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짧은 인생을 부부가 화목하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없는가?
필자가 전공의 시절 선배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욕심만 줄이면 누구와 살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퇴계 선생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부인이 못 생겨 불만이 많았다. 퇴계선생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하였다. 퇴계선생님은 다음날 자기 집에 와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말했다. 다음날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퇴계선생님의 사모님을 보고는 이 제자가 깜짝 놀랐다. 사모님이 너무나 못났기 때문이었다. 제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밥을 잘 먹고는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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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09년 8월 모임
1木 모임 -- 2009년 8월 6일 (목) 7 시
3木 모임 -- 2009년 8월 20일 (목) 7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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