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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세계 스크랩 작가초대석 이난영
산책시간 추천 0 조회 66 06.05.16 02: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69년 한 시민의 성금으로 유달산에 세워진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탄생된 노래비였다. 귀에 감기듯 애절한 콧소리로 민족의 울분을 노래했던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은 고(故) 이난영. 그녀의 노래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대변하는 한의 가락이었다. 그래서 대중가수로는 드물게 민족가수로까지 추앙을 받았다.

그녀는 또 작곡가인 남편 김해송과 함께 한국 최초의 뮤지컬 악단 ‘KPK악단’을 창립, 우리 땅에 새로운 음악을 수혈한 개척자였다. 해외에서 명성을 날렸던 최초의 보컬 그룹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를 키워낸 억척스런 어머니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이난영은 불행했다. 남편은 납북돼 생이별을 했고 홀로 남은 자신을 보살펴준 가수 남인수는 병으로 떠나보냈다. 비련의 여인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잊을 수 없는 ‘트로트 명곡’으로 불려진다.

이난영(본명 이옥례)은 1916년 전남 목포 육전거리의 허름한 초가집에서 1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자무식에 소문난 술주정꾼. 농사철이면 품앗이로 연명해야 하는 가난한 집이었다.

그래도 예술적인 ‘끼’와 ‘능력’은 타고 났는지 두 살 위인 오빠 봉룡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작곡가로 컸다. 그는 보통학교를 거쳐 2년제 심상고등과를 마친 뒤 목화공장의 직공으로 가계를 도왔고 이난영은 목포 공립보통학교를 4년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어려서부터 노래 잘 부르는 꼬마 가수로 소문났던 그녀는 유성기 소리를 듣기 위해 일본인 집에 보모를 자청해 들어갔다. 매일 유성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녀의 노래 재질을 알아본 일본인 주인은 순회 극단의 공연무대에 막간 출연을 주선해 주었다.

16살이 되던 1932년 어느 날, ‘태양극단’의 목포 공연 때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정식 가수는 아니고 막간 가수였다. 박승희 단장은 그녀의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극단의 일원이 되었다. 박 단장은 ‘이름이 촌스럽다’며 난영이란 예명을 지어 주었다. 태양극단의 막내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8개월 간 전국을 돌던 중 일본 오사카로 공연을 떠났는데, 갑자기 일본에서 극단이 해산돼 버렸다.

갈 곳 없는 이난영은 변두리 극장 분장실에 기숙해야 했다. 돌아갈 차비도 없어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때 구세주가 된 사람은 오케이 레코드 사장 이철씨. 일본의 조선 레코드 특약점 주인이 이난영이라는 가수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자 귀가 번쩍 뜨인 이철은 수소문 끝에 떠돌고 있던 그녀를 찾아냈다. 직접 노래실력을 테스트한 후 1933년 오케이 레코드의 전속 가수로 그녀를 스카웃했다.

데뷔 SP 음반은 1933년 10월 발표된 ‘향수’다. 그녀의 노래가 처음 수록된 음반은 그 해 8월 태평레코드에서 발매한 창극 춘향전전집 SP음반(총 5장)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첫 육성노래 ‘시들은 청춘’이 담겨 있다.

33년 11월 발표한 ‘불사조’는 이난영의 첫 히트곡. ‘불사조’에 이어 이듬해 2월 발표한 ‘봄맞이’가 또 다시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단숨에 촉망 받는 신인가수로 떠올랐다. 그 해 가을 도쿄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한국인 가수로는 혼자 출전했는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4년 조선일보에서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가’가사 모집을 했다. 3,000여 편의 응모작품 중 목포 출신 문일석이 응모한 ‘목포의 눈물’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이 철 사장은 때 마침 멜로디가 마음에 들었던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에 이 가사를 얹어 이난영에게 취입시켰다. ‘갈매기의 항구’는 원래 남자 가수 고복수를 위해 만든 곡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뀐 ‘목포의 눈물’은 35년 이난영을 ‘가요계의 샛별’로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 만장이 날개 돋힌 듯 팔렸다고 한다. 지금에야 100만장 판매를 우습게 이야기 하지만 유성기 시대에 수 만장은 대박 중의 대박이었다.

‘목포의 눈물’은 대 히트와 함께 목포 사람들의 자존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한 민족에게는 설움을 달래주는 민족 가요로 널리 불렸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이난영은 36년 ‘오카란코’란 일본 예명으로 일본 가요계에 진출해 데이지쿠 레코드에서 ‘이별의 뱃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 일본어 버전이다.

이난영은 37년 11월, 21살의 나이에 김해송과 결혼을 했다. 부부는 9남매를 낳았는데 두 자녀는 일찍 세상을 등졌고 맏딸 영자, 영조, 숙자, 영일, 상호, 태성 등 7남매는 후에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라는 걸출한 대중음악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1940년까지 왕성한 음반 발표를 한 이난영에게 그 해 7월에 발표한 오빠 이봉룡의 곡 ‘목포는 항구다’가 마지막 히트곡이었다.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생필품조차 부족한 현실 때문에 음반 제작보다는 무대공연 위주로 활동을 했다.

당시 그녀가 소속된 조선악극단은 오케이 레코드 직속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공연단체였다. 그녀는 가요사상 처음으로 여성보컬그룹 ‘저고리씨스터즈’를 결성, ‘조선악극단 무대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난영은 해방이후 7남매를 키우느라 가수 활동을 한동안 접어야 했다.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후반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과 함께 KPK악단을 결성하면서 부터이다. 그녀는 최대규모의 악단으로 군림한 KPK악단에서 의상, 소품까지 손수 제작하는 억척스러움과 능력을 발휘하며 대모로 불리어졌다.

'진정한 한국의 뮤지컬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KPK악단은 1950년 4월 명동 시공관 '로미오와 쥴리엣'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되었다. 한국전쟁 때 단장이었던 김해송이 납북 되었기 때문이다.

홀로된 이난영은 1.4후퇴 때 7남매를 거느리고 오빠 이봉룡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곳에서 오빠와 함께 남편의 땀과 정신이 담겨 있는 KPK악단의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허사였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오빠 이봉룡이 'LKA 음반사'를 창설했다. 이난영과 이봉룡은 생계를 위해 음악 재능이 뛰어났던 숙자, 애자, 그리고 오빠의 딸 민자를 묶어 'KPK 쇼단'을 구성했다. 바로 여성트리오 '김씨스터즈'가 공식 출범 한 것이다. 이들은 수도극장등 민간 무대를 포함, 주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 말 뮤지컬 영화 '청춘쌍곡선'에 간호사 역할을 맡아 영화에도 진출했을 만큼 김씨스터즈의 인기는 높았다. 미8군 무대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씨스터즈는 1959년 미국인 흥행사 '톰 볼'의 주선으로 꿈의 무대인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다. 최초의 해외진출 여성 보컬 팀 탄생이었다.

자식들을 이역만리로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이난영은 외로움을 술로 달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녀의 쓸쓸한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던 사람은 동료가수 남인수. 전쟁 후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 마저 타국으로 떠나보낸 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녀에게 최고의 인기 가수 남인수는 경제적인 도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남인수는 자신보다 2살 연하였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차츰 사랑으로 변해갔다. 예나 지금이나 말 많고 탈 많은 연예계에 두 사람의 로맨스는 참새들의 입 방아에 단골메뉴로 올랐다. 하지만 외로운 처지의 두 정상의 남녀가수는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을 키워나갔다.

남인수와의 사랑으로 꿈꾸듯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이난영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애인 남인수가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폐결핵이었다.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던 그녀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남인수는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1962년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또 다시 혼자가 된 이난영은 견디기 힘든 외로움에 절망했다. 성공한 자식들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생활을 시도해 보았지만 적응하기가 힘들어 1963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 당시 김씨스터즈의 미국 활동장면이 담겨있는 필름을 가져온 이난영은 KBS TV에 이 필름을 건네주어 전국에 방영되었다. 화려한 김씨스터즈의 활약을 지켜본 대중에게 김씨스터즈는 단숨에 세계적인 보컬그룹으로 인식이 되었다. 이후 오빠 이봉룡이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리자 이난영 역시 이민을 떠났다.

1950년대 말부터 SP음반과 더불어 10인치 LP음반이 탄생되며 새로운 음반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난영의 모든 노래들은 LKL레코드에서 10인치 LP와 12인치 LP로 복각이 되어 쏟아졌다.

특히 '목포의 눈물'이 수록된 음반은 재판 삼판을 찍을 만큼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미국으로 떠난 이난영은 지독한 향수병을 겪었다. 그녀는 납북으로 생이별한 남편 김해송과 연인이었던 서정가요의 제왕 남인수가 잠들어 있는 고국 땅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이난영은 결국 단신으로 서울로 돌아와 큰 아들 집에 머물렀다.

인생의 허무함에 몸서리쳤던 이난영의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1965년 9월 11일 새벽 이난영은 알코올 중독으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한 많은 생을 살아온 이난영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김씨스터즈 세 자매는 망연자실했지만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는 불효의 한을 남겼다

그녀의 장례식은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3년 뒤인 1968년 6월23일 오전 11시 '목포의 눈물'이라는 민족가요를 남긴 고 이난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목포 중앙극장(지금의 하나 백화점 자리)에서 제1회 난영가요제가 개최되었다.

어느 덧 '목포의 눈물'이 민족가요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자 목포시 대안동에서 악기점을 운영했던 박오주씨가 당시로선 거금인 600만원의 기념 노래비 건립금을 기탁해 왔다. 1969년 6월10일 목포 유달산에 건립된 이난영의 '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국내 대중가요사상 최초의 노래비로 탄생했다. 이 노래비는 목포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목포시민들의 자존심이 되었다.

김씨스터즈 세 자매는 1967년 초 줄줄이 국제결혼으로 가정을 이뤄 안정을 찾자 1970년 5월 고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귀국해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 오열했다. 시민회관에서 열린 4일간의 귀국공연에서 어머니의 히트곡 '목포를 눈물'을 흐느끼며 부르자 공연장 전체가 울음 바다로 변했다.

1974년 11월 오아시스레코드는 '흘러간 가요계의 여왕 이난영'이라는 추모 LP를 발매하기도 했다. 이후 1979년 일본 매일TV에서는 <봉선화 필 때>라는 한국가요사 다큐멘터리 프로에 이 노래비를 비중 있게 다루기도 했다. 이후 목포의 문화 행사 때는 자연스럽게 '목포의 눈물'이 빠지지 않고 불리어지고 있다.

 

 

 

 

울분과 저항이 담긴 "목포의 눈물" - 이난영

 

'목포의 눈물' 가사지

엘레지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울분과 저항이 감추어진 노래로서 당싱 22세인 손목인의작곡으로 19세의 이난영이 노래하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목포의 눈물 1절>

호남 곡창에서 나온 기름진 쌀과 풍요로운 목화는 목포항구에서 일본으로 실려가고 부모 남편 형제들은 헐벗고 굶주리면서 항구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만 하였다. 일제시대의 항구는 눈물의 장소이며 눈물은 곧 항구였다.

삼백년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닲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목포의 눈물2절>

한때는 일본경찰이 작가를 연행하여서 가사 내용이 불온한 냄새가 있다며 추궁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삼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게된 저간의 사정 속에서 삼백년 원한을 삼백년 원안풍으로 말꼬리를 돌리고, 님자취는 이순신장군의 넋과 정신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으며 유달산 바람은 민족의 정기를 가르키는 것이 작사가의 숨은 의도임을 이 노래 속에서 느껴볼 수 있다.

유달산 '노적봉'의 모습

노적봉은 유달산 입구에 있는 해발 60m 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장군의 전략으로 봉우리에 짚가리를 덮어서 왜군이 보기에는 산더미같은 군량미로 오인하여 후퇴하게 된 사정이 있다. 영산강에는 횟가루를 방류하여 마치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수많은 군사들이 주둔한 줄 안 왜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고 전하여 진다.

작사를 한 문일석은 본명이 윤재희로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청년이었으며, OK레코드에서 현상모집한 "향토찬가 현상모집"에 '목포의 노래'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어 이것이 '목포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노래가 만들어졌다. 문일석은 26세에 요절하였다고 하는데 목포 북교동 157번지에서 윤경하(1972년 사망)의 1남 2녀중 장남이라는 것이 목포의 연로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난영, 박향림

태양극장의 막간가수 출신인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이다.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하여 어머니는 극장주인 일본사람의 집에 일하러 제주도로 가고 없었다. 어머니가 그립기도 한 이난영은 목포 공립 보통학교(현 목포 북교 초등학교) 4학년때 제주도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게 되었다.

당시 극장에는 태양극장의 연극공연이 있었는데 노래에 소질이 있는 이난영을 극장주인 일본사람이 소개하여 태양극장에 입단을 하였다. 태양극장은 1923년 박승희등이 설립한 토월회의 후신으로 토월회가 경영난으로 해산한 후 박승희 단독으로 1932년에 설립한 흥행위주의 연극단체였다.

태양극장의 연기인들은 토월회의 연기자들을 대부분 흡수하였는데 강석연, 양백명(탈렌트 양택조의 부친), 이동호, 석금성, 강석재등 당시 일류 배우들이 많았다.

이난영이란 이름은 태양극장의 박승희가 지어준것으로 1933년 일본 주요도시 순회공연에서 처음으로 막간무대에 등장하여 '아리랑' '도라지타령'을 난영이란 예명으로 노래하였다.

"일본 교포의 초청으로 대판에 가서 '춘향전' 음반 12매로 취입할 때에 이난영이 처음으로 취입하여 ---"<사상계 1963.8 박승희 회고'

이난영이 처음으로 취입한 곡은 '지나간 옛꿈', '시드는 청춘'으로 1933년 8월에 태평레코드의 취입광고로 나와있다.

"16세때 세상물정을 아나요 대판에서 혼자 변두리 극장 분장실에 기숙하며 --- 어느 흥행사에게 사기도 당했어요. 그때 OK레코드 사장 이철이 레코드 기획일로 대판에 왔어요. 레코드 특약점 주인이 나를 추천했어요"
<모던일본(마해송 주관):1940. 3 좌담회기사)

오케레코드사 스튜디오 모습

태양극장에서 배우들의 잔심부름과 빨래를 해주며 고생하던 16세의 소녀 이난영은 이철에 의해 OK레코드 전속가수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OK레코드의 데뷔곡으로 1933년 9월 '향수', 10월에는 '고적', 그리고 '불사조'가 11월 신보 명칭으로 광고가 나오면서 (10월 20일부터 발매) 인기를 끌어 가수 이난영이 알려지게 되었다. 1934년 동요작가 윤석중의 가사로 된 '봄맞이'가 계속 힛트하고 1935년 8월에년 대표곡 '목포의 눈물'이 대힛트하여 고복수와 함께 OK레코드의 간판스타가수가 되었다.

유달산

고복수가 '갈매기의 항구'를 취입하기 위해 노래 연습중이었는데 현상모집에 당선된 '목포의 노래'에 마땅한 곡이 없자 '갈매기의 항구' 음악곡에 '목포의 노래' 가사를 입혀 '목포의 눈물'로 바꿔서 이난영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1936년대 이난영은 일본의 데이치구레코드에 7월 신보로 '이별의 뱃노래' '아리랑 노래'를 취입하였다. '이별의 뱃노래'는 '목포의 눈물'을 일본어로 번안한 가요이며 일본노래로 '바다의 고향', '석파의 노래' 등과 1938년에는 '백장미처녀'등 외 '봄마지'가 나왔는데 '봄마지'는 일본어로 번안 취입되었다.

1937년에는 '해조곡', 1939년에는 '다방의 푸른꿈'이 계속 힛트가 되었다. '다방의 푸른꿈'은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블루스 음악으로 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정확한 블루노트(BLUE NOTE)에 의한 작곡기법으로 구성되었다. <가요 평론가 황문평>

이난영, 이봉룡 남매

1942년에는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가 힛트가 되면서 인기의 열정이 식지않고 계속되었다.

8.15 해방이 되자 남편 김해송이 설립한 KPK악극단에서 뮤직컬쇼에 참여하면서 무대의상을 손수 만들면서 악극단의 뒷바라지까지 하는 얌전한 여성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6.25 전쟁의 비극은 김해송의 납북으로 엘레지 여왕 이난영을 엘레지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7남매를 데리고 피난지 부산의 판자집에서 회초리를 들어 피나게 노래공부를 시켰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미군부대에서 노래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김시스터와 김보이스가 이난영의 아들딸로서 미국흥행사에 의하여 1959년 김시스터스는 라스베가스에서 명성을 떨쳤었다.

김시스터즈

김시스터스는 숙자, 애자, 민자로 민자는 이난영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며 1970년에 귀국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공연을 가졌다.

인기가수 이난영은 외로운 한송이 들국화 같은 여인으로서 항상 고독에 살아온 외로운 인생이었다. 어릴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온 외로운 마음의 기둥인 남편 김해송과의 이별은 화려한 인기도 이난영의 마음을 메꾸지 못하였었다.

"이난영은 어릴때부터 얌전하고 눈물이 많았어요. 목포의 눈물이 나오기전이었지요. 극장 '단성사'에서 신무대의 공연시에 이난영이 특별출연하여 '봄맞이'와 '도라지타령'을 불렀어요. 너무 순진하고 화장도 못하여 내가 가르쳐 주었어요"<신카나리아 증언>

인기가수보다는 단란하게 살아가는 여인이 되고픈 소망이 염원이었을지도 모르는 이난영은 1965년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머리맡에는 양주 한병이 딩굴고 있었는데 한잔의 술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눈을 감은 것이다. 장례식은 예총앞마당에서 연예협회주관으로 치루어졌다.

삼학도는 60년대 개발로 매립되어 산천은 변하고 사람도 가고 없지만 유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난영 기념비가 지나온 세월의 역사를 이야기하여 주고 있다.

 

목포의 눈물(1935년 OK레코드,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 노래비(유달산)

1.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히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2. 삼벽연 원안풍은 노적봉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다방의 푸른꿈(1939년 OK레코드,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면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느나 부르느나
흘러간 꿈을 찾을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흐미한 옛추억이 풀린다.

2. 저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밤이 새롭다.
조그만 찻집에서 만나던 그날밤
목메어 부른다
그리운 그밤을 부르느나 부르느나
소리 실은 장미화러냐
시들은 사랑 뚫어진 그날밤
그대는 가고 나혼자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저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밤이 새롭다

흘겨본 과거몽(1940년 OK레코드.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

1.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들창을 두들기는 낙엽은 추억이냐
정든땅 정든님을 천리밖에 내버리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왔던가

2.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천장에 섞여있는 연기는 꿈이려냐
정든 산천 정든 지붕 10년 넘어 밀쳐내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3. 가슴에 손을 언고 과거사를 흘겨보니
거울에 사모치는 얼굴은 탄식이냐
정든길 정든하늘 타향길에 뿌리치고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나혼자 왜 왔던가

 

이 근 태 (가요114 기획위원, 가요사 연구가)

 

출처 : 추억의 음악감상실 가요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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