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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년 10월 28일 - 1992년 4월 28일)
본명 : 프랜시스 베이컨
출생 : 1909년 10월 28일 (출생지 : 아일랜드 더블린)
사망 : 1992년 4월 28일 (사망장소 : 스페인 마드리드)
국적 : 영국
사망 1년 전인 1991년 촬영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모습
목차
1. 개요
2. 생애
3. 작품 세계
4. 연인들
1. 개요
영국계 아일랜드 화가(1909년 10월 28일 - 1992년 4월 28일)로 16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배다른 형인 니컬러스 베이컨의 후손이다.
특유의 강렬하고 원초적인 화풍으로 인간의 내면을 극단적인 암울함으로 표현하였다.
2. 생애
프랜시스 베이컨은 꽤나 부유한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깨달았으나[여자와의 성관계는 어릴 적 호기심으로 맺은 이후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엄격한 정통주의적 농장 주인인 아버지는 매번 하인을 시켜 그에게 채찍질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마조히즘을 자극하게 되었다. 경험주의 베이컨은 하인들과 마부들과도 지속적인 성관계를 맺었고, 열여섯 살때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있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삼촌의 집으로 쫓겨났다.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베를린은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 성향의 인파들이 넘쳐났으며, 그런 분위기는 베이컨에게 있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베이컨은 베를린에서 많은 독일 젊은이들을 만나 그들과도 관계를 가졌다.
이후 런던으로 돌아간 베이컨은 사우스켄징턴에 정착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으나, 1933년 인테리어 디자인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에 앞서 첼시로 이사한다.
스스로 늦깎이라 부른 베이컨은 1930년대에 처음 그룹전에 참가했고 개인전도 기획했다. 일부 긍정적인 반응도 기록되어 있고 수집가 마이클 새들러가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하기도 했지만,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에 시달렸다. '유치한 구도'와 '캔버스와 종이 위의 배설에 불과'등 거센 반발과 혹평으로 인해 깊은 좌절을 겪었고, 늘 자기 비판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그림 대부분을 파기했다. 이로 인해 1929년에서 1944년 사이에 그린 작품은 약 15점만 남아 있다.
하지만 1944년, 베이컨이 화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지던 때에 그린 작품인 세폭화 <십자가 아래 인물들을 위한 세 습작:Three Studies for Figures at Base of Crucifixion>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처음 전시되었을 때는 상당한 비난을 받았지만, 베이컨은 이제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더 많은 그룹전이 이어졌고 1946년에는 런던의 하노버 갤러리에서 일하던 에리카 브라우센의 관심을 끌었다. 훗날 그녀는 베이컨의 금전적 후원자이자 대리인이 되어 그를 한결같이 지지했다. 에리카는 베이컨과 한 살 차이였으며, 그가 사망한 지 단 8개월 만인 1992년 12월에 사망하였다.
1954년에 베이컨은 루치안 프로이트, 벤 니컬슨과 함께 영국을 대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고 평단의 호평을 받는다. 알랭 주프르와는 베이컨에 대해 파리의《아트》지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인간 본성의 어두운 미래를 묘사한 이 작품은, 의심할 나위 없이 비엔날레를 통틀어 단 하나의 진정한 발견이다."
베이컨은 성공을 거듭했으나, 외로움에 곧 시달렸다. 연인들은 모두 죽고,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오래 전에 절교했던 연인과도 화해하려 했지만, 그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했다. 신장을 제거한 뒤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작업에 한계가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림을 계속 그렸다.
1992년 4월, 마드리드에서 머무는 동안 베이컨은 폐렴과 심각한 천식 발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6일 후인 4월 8일, 심장마비로 82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3. 작품 세계
그의 출세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Base of Crucifixion
1945년 4월, 런던 르페브르(Lefevre) 갤러리. 많은 관람객들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그림에 발길을 멈추고 마음을 울리는 끔찍한 이미지에 모두 침묵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미지는 그리스도교의 고난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고통과 비극의 한 단면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세 여신 에우메니데스Eumenides(또는 Erinyes, 머리칼은 뱀이고 날개가 있음)를 이용한다.
각각의 그림은, 여신들의 복수와 분노 때문에 두려움에 고통받고 절규하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문화의 고난 이미지, 그리스문화의 운명에 절규하는 인간상, 뭉크의 절규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러시아 혁명 영화 전함 포템킨의 총 맞은 여인의 고통스런 절규로 클로즈업된 얼굴이 혼합되어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서양문화의 2대 양대 축인 그리스-로마 문화, 그리스도교 문화에 뭉크,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 및 문화가 한 그림에 녹아, 보편적인 인간상의 한 단면을 표현한 천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출발한 습작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953)
벨라스케스의 원본과 비교하면 기괴함이 더 확실히 느껴진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고전 무성 영화 <전함 포템킨> 중 죽어가는 유모의 확대 스틸컷은 베이컨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었고, 훗날 그의 작품들의 아주 결정적인 모델이 되었다
"나는 언제나 입 모양, 입과 치아의 형태에 몹시 감동받았다. 사람들은 이것들이 온갖 종류의 성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입에서 나오는 빛과 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베이컨에 영향을 준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나 《전함 포템킨》은 고통받는 얼굴 이미지가 강조되어 있는데 베이컨은 얼굴 이미지에 비해 입을 강조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인간생활 대부분은 입(Mouth)을 통해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Anger)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악물게 하고, 공포와 끔찍한 고통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게 한다. 그림 속 무섭고 끔찍하게 절규하고 있는 입은 공포(Horror)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과 이를 아름답게 승화시키려는 것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고 베이컨이 바라는 대로 진정으로 '공포보다 더 무서운 절규'를 표현해냈다. 베이컨은 이 공포의 카타르시스를 표현하기 위해 모네가 '일출'을 그리듯이, 자신도 항상 '입'을 그릴 수 있기를 원했다.
영화 배트맨에서 극중 조커(잭 니콜슨 분)가 미술관에 독가스를 뿌려 여주인공 비키를 뺀 사람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고 미술관에 있는 드가나 렘브란트, 르누아르 등등 유명 화가의 그림이나 조각들을 찢고 페인트를 뿌려 낙서하고 부숴버리는데, 딱 하나 이 참상을 모면하는 그림이 바로 베이컨이 그린 "고기와 남자 형상 (Figure with Meat)"이다. 부하 하나가 칼로 찢으려고 했지만 조커가 지팡이로 막고는 "이 그림은 마음에 드는 걸, 놔 둬."라고 해서 넘어간다. 이를 두고 조커 이미지랑 맞기에 베이컨이 그린 그림을 놔뒀다는 분석이 있다. 그냥 영화 제작 시점에서 살아 있는 화가의 작품이라 어른의 사정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2008년에 다크 나이트를 찍었던 크리스토퍼 놀란이 인터뷰에서 밝히길, 베이컨의 그림들이 조커(히스 레저 분)의 찢어진 입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조커는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짓는 캐릭터이고 베이컨의 그림은 고통을 입으로 형상화했으니, 둘 다 "입"과 "감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어울리는 듯하다.
4. 연인들
처음 기록된 베이컨의 첫 연인이자, 오랜 동무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에릭 홀이었다. 1929년에 만난 홀은 베이컨의 작품에 반해 크게 열광했고, 그에게 용기를 불어주고 금전적으로 많은 후원을 지불했다. 베이컨이 가난하게 살 때, 홀은 언제나 베이컨을 도와주었고, 집세를 내주었으며, 고급 레스토랑과 와인의 세계를 접하게 해주어 그를 미식가로 만들었다. 베이컨은 에릭 홀에 대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홀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적인 신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홀과 베이컨이 왜 헤어졌는 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1952년 베이컨은 홀과 이별한 후, 전직 전투기 조종사 피터 레이시를 만나 이내 정열적인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멋 부리기를 좋아했고, 세련된 매너에 좋은 술을 음미했던 보수파 영국인 레이시는 드러내고 동성애를 하진 않았다. 베이컨은 새로운 애인의 초상화도 여러 점 그렸다. 하지만 레이시는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신사적 품격에도 술에 취하면 난폭해지는 악명 높은 술꾼이라는 습관적 사실을 감추진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술에 취해 베이컨의 작품들을 부수거나 훼손시켰고, 베이컨 몰래 다른 남성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떨어져 지낼 때면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으며 꽤 오랫동안 깊은 애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레이시는 무서울 만큼 육체적 건강이 악화되면서부터 연락은 끊기기 시작했다. 그는 1962년, 베이컨의 첫 번째 회고전이 열리기 전날 사망했다.
베이컨은 레이시가 죽은 지 약 2년 후, 런던 빈민가인 이스트엔드 출신의 좀도둑 조지 다이어를 만나게 된다. 다이어는 잘생긴 외모에 터프한 남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의 내면은 수줍음이 많고 쉽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열적인 관계가 일부였던 그 둘은 육체적 폭력과 갈등은 숨기지 못했다. 베이컨은 인물화 중, 다이어를 통해 그린 그림들이 가장 많았다. 둘의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면서 베이컨이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우자, 다이어는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다이어는 평소 베이컨이 자신을 경멸하고 깔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더 이상 베이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절망했다. 다이어는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변기에 앉은 채로 자살했다. 끔찍한 상황이였지만, 베이컨은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1973년, 베이컨은 소호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다가 존 에드워즈를 만나게 된다. 에드워즈도 다이어처럼 이스트엔드 출신의 사내였다. 둘은 친구가 되었고 데이트를 했으며, 금세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을 정도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젊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에드워즈는 베이컨의 지적인 매력에 반했고, 베이컨은 반대로 에드워즈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매력에 반했다. 베이컨은 새 연인에게 리스 뮤스 근처에 살 곳을 마련해 주었고, 그때부터 에드워즈는 말과 행동으로 베이컨을 응원했다. 둘의 관계가 사랑 이야기로 시작될 순 있지만, 그건 아니었다.[에드워즈는 훗날 둘 사이에 성관계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내 깊은 우정과 신뢰가 가득한 아버지와 아들같은 관계가 되었다. 에드워즈는 심지어 베이컨이 작업하는 동안 계속 곁을 지킬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에드워즈는 30점이 넘는 베이컨 그림의 모델이었고, 베이컨의 생활과 주변을 사진으로 남긴 기록자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할 때처럼 끝날 때도 열렬하진 않았지만, 에드워즈는 다른 남자와 몇 년 동안 꾸준히 사귀었다. 베이컨은 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았고, 베이컨이 죽은 뒤부터 2008년 8월에 방콕에서 폐암으로 죽을 때까지 상속받은 재산을 관리했다.
또한 베이컨은 말년에 호세라는 젊은 스페인 사업가와 마지막으로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베이컨이 애인을 만나러 스페인에 자주 갔기 때문에 런던에서 이 사람을 본 이가 거의 없었던 이유였다.
좀도둑을 사랑한 거장, 끔찍한 초상화 그린 이유는 [슬기로운 미술여행]
김슬기 기자 sblake@mk.co.kr
매일경제 기사 입력 : 2025-01-01 13:00:00 수정 : 2025-01-05 09:17:51
[슬기로운 미술여행 - 4] 국립 초상화 미술관 ‘프랜시스 베이컨’ 회고전
런던에서 가을부터 열고 있는 전시를 막이 내리기 전에 부랴부랴 소개해봅니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지 않는 끔직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이야기입니다. 10월 프리즈 위크의 전시 중 일부는 천천히 다루고 싶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개막 주간의 분주한 시기보다는 부지런한 팬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한가해진 시기에 전시를 보는 것을 훨씬 좋아하거든요.
21세기의 뮤즈가 된 프랜시스 베이컨
프리즈 위크의 간판 전시 중 하나였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Francis Bacon: Human Presence>(2025년 1월 19일까지)는 이제 폐막을 3주 남겨두고 있습니다. 미술관에는 관광객이 아님을 누가봐도 알 수 있는 진지한 표정의 런던 시민들이 많았습니다. 인기리에 순항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21세기 작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작가는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국적을 막론하고 많은 젊은 작가들이 인간의 육체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초상화와는 달리, 순수한 인간의 육체 자체를 말이죠. 이 모든 작가들의 원조는 프랜시스 베이컨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주는 폭력적인 묘사는 그야말로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줍니다. 그는 고기덩이처럼 해체된 육체를 거침없이 묘사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작품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많은 영향력을 주는 것은 우리의 21세기가 인간의 육체를 숭배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전시는 주제처럼 인간의 현존을 탐구합니다. 어둡고 음울한 ‘얼굴들’을 통해서 말이죠. 1940년대 이후에 그린 50여점의 그림을 통해 프란시스 베이컨이 초상화란 장르에 얼마나 혁명적으로 도전했는지 증언합니다. 자화상을 비롯해 친구였던 루시안 프로이트, 이사벨 로스트혼, 연인 피터 레이시와 조지 다이어, 존 에드워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떠나버린 연인, 친구들을 그린 초상화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일그러진, 내밀하고 친밀한 초상
자화상으로 유명한 화가들은 많습니다.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를 비롯해 알브레히트 뒤러,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 데이비드 호크니가 떠오르네요. 20세기를 대표하는 자화상을 그린 작가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명성을 능가할 이가 없을 겁니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의 부유한 집안에서 동성애를 저주하며 아들을 채찍질까지 했던 아버지의 핍박 아래 자랐습니다. 성인이 되자마자 베를린과 런던으로 차례로 떠나 자유와 사랑을 찾았죠.
런던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1930년대 초반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초기 그의 작품에는 끔찍한 악평만 따라다닙니다. 비평가들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초기 그림을 대부분 파기해 1944년 이전 그림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1944)을 발표하면서 그는 화가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와 성경의 상징이 모두 녹아있는, 고통에 절규하는 인간을 그린 걸작으로 훗날 평가받게 됩니다.
1. 벨라스케스와 반 고흐
“사진을 계속 찍었다. 정말 그것이 내 첫번째 주제였던 것 같다.”
전시의 첫 번째 방에서는 베이컨에게 큰 영향을 준 두 거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초상화란 장르에 매료된 계기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이노첸시아 10세 초상>을 접한 것이었습니다. 1948년 엘라자베스 뒤 게 트라피에가 쓴 벨라스케스 전기에서 우연히 이 이미지를 만난 후 수십년에 걸쳐 이 도상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베이컨의 초기작에는 비명을 지르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을 묘사하는 방법을 탐구하면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권력자 교황조차 불안한 내면을 감출 수 없고, 감옥에 갇힌 것처럼 창살 속에 갇혀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특징은 그의 초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베이컨은 로마에 갔을 때조차 자유로운 표현을 방해받을까봐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1960년에는 <반 고흐를 위한 오마주>를 그렸습니다. 베이컨은 반 고흐에 대한 관심으로 어둡고 단색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색채를 도입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작품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 재창조’하고자 했던 반 고흐의 열망은 ‘현실에 대한 더 깊은 감각’을 이미지로 표현하려 한 베이컨의 야망과 공명했습니다.
2. 자화상
“나는 정말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정말로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파리처럼 죽어가고 있었고, 나 자신 외에는 그림을 그릴 사람이 없었다.”
이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1987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찢어진 얼굴로 묘사된 1949년의 자화상에 비해 무척 온화해진 작품입니다. 베이컨의 평생의 탐구의 대상은 자신이었습니다. 모델을 구할 수 없었던 전쟁 전후를 통과한 이후에도, 그는 모델을 쓰지 않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스튜디오에서 피사체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대신 사진과 기억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 베이컨은 그림을 ‘왜곡’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렸고, 그림을 통해 가할 수 있는 ‘상처’로부터 피사체를 보호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렘브란트의 <베레모를 쓴 자화상>도 함께 전시됩니다. 베이컨은 렘브란트의 붓터치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평생 자화상을 즐겨 그렸고 50점 이상을 남겼습니다.
3. 친구와 연인들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을 그릴 수 없었다. 그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외형을 보고, 그들의 행동을 보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리는 시도는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친구와 연인들의 초상화입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자 베이컨은 비명을 지르는 인물과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타인의 삶에서 그림의 소재를 얻기로 결정합니다. 후원자인 로버트와 리사 세인즈버리, 그리고 동료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1969년작 삼면화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가지 연구(Three Studies of Lucian Freud)>는 2013년 11월 12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240만 달러에 낙찰되어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을 세운 작품입니다. 베이컨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죠.
그의 연인 피터 레이시, 조지 다이어, 존 에드워즈, 친구 헨리에타 모라에스, 콜로니 클럽의 창립자 뮤리엘 벨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인 루시안 프로이트와 이사벨 로스트혼 등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그린 초상화는 그의 가장 친밀하고 내밀한 그림입니다. 여자의 초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던 베이컨이 19점의 초상을 그린 인물이 이사벨이었습니다.
피터 레이시가 죽은 지 약 2년 후, 런던 빈민가 출신의 좀도둑 조지 다이어를 만나게 됩니다. 만난 첫 날, 훔친 롤렉스 시계를 선물했다고 알려진 잘 생기고 질투심이 많은 남자였죠. 육체적 폭력과 갈등을 겪은 관계였지만 베이컨은 그의 초상화를 가장 많이 그렸습니다. 다이어는 결국 베이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절망해 파리의 호텔에서 변기에 앉은 채로 자살합니다.
베이컨은 1년이 지난 1973년 자신의 생각을 지배했던 다이어의 죽음을 삼면화로 그립니다. 다이어의 참혹한 모습은 그의 슬픔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연인을 잃고 비탄에 빠져 그린 어둡고 슬픈 삼면화로 전시가 막을 내리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미완성 유작이 그린 얼굴
이번 전시가 아니었으면 만나기 힘든 작품이 있었습니다. 전시의 동선 끝자락에 위치한 그의 생애 말기에 그린 유작입니다. 이 작품은 사후에 그의 스튜디오 이젤에 미완성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베이컨은 투병을 하던 80대에도 대형 캔버스와 사투하고 있었습니다. 자화상이란 이름이 붙은 이 그림이 실제로 누구를 그렸는지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인물의 형태만으로는 베이컨 만큼이나 베이컨이 그렸던 남성 중 일부와도 닮아있다는 분석이 있죠. 그의 많은 다른 그림들처럼, 어쩌면 그의 남성 모델들의 모습을 혼합해 만든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베이컨은 성공을 거듭했으나, 외로움에 늘 시달렸습니다. 연인들은 모두 죽었고,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죠. 오래 전에 절교했던 연인과도 화해하려 했지만, 그의 마지막 시도는 늘 실패했습니다. 신장 제거 수술을 받은 뒤 쇠약해진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그의 손이 그리고자 했던 건 누구였을까요. 누구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일겁니다.
김슬기
런던에 살면서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를 찾아가 미술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슬기로운 미술여행]을 ‘구독’하시면 지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출생 1909년
사망 1992년
종교화의 양식인 삼면화와 유럽의 고전 회화를 재해석해 인간의 모습을 기괴하게 뒤틀린 형상으로 묘사한 그림이 특징이다. 원초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줌으로써 현대 인간의 폭력성, 불안감, 공포 등을 표현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추상적인 모습을 띠며 유리나 철제 구조물 안에 갇혀 있는 형태로 묘사된다. 그는 대상을 혐오스럽게 묘사하여 활동 초기에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세계 대전 이후 피폐해진 인간성을 효과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영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1909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으로 전쟁의 후유증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어린 시절 베이컨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폭력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다. 열여섯 살 때 동성애자임이 알려지자 아버지는 집에서 그를 쫓아냈고, 학교도 그만두게 했다. 그 이후로 베이컨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런던과 베를린, 파리 등을 떠돌며 지냈다. 베이컨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폭력 혹은 고립감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20년대 후반 런던에 정착했고, 인테리어 설계, 가구 디자인을 하며 지냈다. 이때 알게 된 호주 출신의 무명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는 베이컨의 재능을 알아보고, 작품 활동을 하도록 권유했고, 피카소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33년에 베이컨은 신체의 왜곡된 표현, 고통, 두려움 등을 표현한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을 선보였다. 베이컨은 이미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미술계는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낙담한 베이컨은 그림에 흥미를 잃었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1944년까지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1943년에는 스스로 대부분의 작품을 파괴해 버려서 현재 1944년 이전에 그린 작품 중 남아 있는 작품은 15점 밖에 되지 않는다. 천식을 앓고 있어 후방에서 근무했던 베이컨은 전생의 참상에서 느낀 공포감과 고통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45년 전시회에서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삼부작 습작〉을 선보였다. 기다란 목, 튀어나온 입, 공포감과 고통에 사로잡힌 뒤틀린 몸을 본 사람들은 그 노골적인 표현에 경악했지만, 세계 대전 이후 파괴된 인간성과 전쟁에 대한 공포 등을 예리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주목을 끌었다.
이후 여러 전시회에서 연달아 호평을 받았고 1949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여기서 베이컨은 두 가지 중요한 테마를 선보였다. 첫 번째는 ‘머리’시리즈로 머리를 관통당한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베이컨은 기존에 표현했던 공포심을 발전시켜 밀실 공포증을 표현했다.
두 번째는 고전을 현대적이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것이다. 스페인의 궁정 화가로 활약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재해석해서 위엄 있고 기품 있는 교황의 모습 대신 인간적 고뇌로 가득 찬 교황으로 묘사했다. 이후 고전의 재해석은 베이컨의 주요 테마가 되었으며, 〈이노센트 10세 습작〉도 그중 하나이다.
1940년대 후반 런던의 ‘더 콜로니 클럽’이라는 영국 화가들의 사교 모임에 나가면서 루치안 프로이트, 프랑크 아우어바흐, 패트릭 스위프트, 마이클 앤드류스 등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베이컨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고 그들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루치안 프로이트 초상 습작 삼부작〉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말년까지 주변 사람들을 모티브로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1964년 이전까지 베이컨은 주관이 뚜렷한 나이든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강렬한 느낌의 작품을 그렸는데, 조지 다이어를 만나면서 작품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의 동성 애인이었다.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베이컨을 만나게 됐고 이후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당시 쉰네 살이던 베이컨은 다이어의 섬세한 성격과 스물아홉 살의 다이어에게서 느껴지는 활력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그렸다. 〈조지 다이어의 초상〉를 보면 뒤틀린 형상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보이는 요소이지만, 육체적인 면을 강조하고, 전체적인 붉은 톤으로 온화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에서 다르다. 1971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이어는 죽은 이후에까지 베이컨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71년 다이어가 죽은 후 베이컨은 큰 충격을 받았다. 1973년 영국 현대 화가로는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정도로 성공했으나, 1977년까지 다이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았다. 다이어가 죽은 뒤 그의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삼부작〉과 같이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을 준다. 1974년 술집 매니저였던 존 에드워즈를 만나면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존 에드워즈 초상 습작 삼부작〉에서 보이듯이 어두운 색을 사용하는 대신 밝은 톤으로 따스한 느낌의 작품을 그렸다. 이런 변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92년 마드리드에서 여든한 살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베이컨의 작품에는 아버지로부터 느낀 폭력성,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겪었던 핍박과 전쟁의 과정에서 본 인간의 야만성, 현대인의 공포와 혼란 등의 다양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동물의 사체를 조각내서 유리 상장에 넣고 전시하는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선보인 데이미언 허스트와 같은 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에 든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2014년 기준)
• 3위. 〈루치안 프로이트 초상 습작 삼부작〉
• 17위. 〈삼부작〉
• 20위. 〈존 에드워즈 초상 습작 삼부작〉
• 40위.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
• 57위. 〈이노센트 10세 습작〉
• 58위. 〈삼부작〉
• 73위. 〈투우 습작 1번 두 번째 버전〉
• 77위. 〈거울에 비친 글 쓰는 형상〉
• 85위. 〈자화상〉
두뇌는 비관적, 신경은 낙관주의자 - 프란시스 베이컨
그림 읽어주는 신안
2013. 1. 17. 10:24
프란시스 베이컨과 루시안 프로이트
<생애>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태어난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영국)은 1차대전때 영국 육군성에 들어간 부친을 따라 고향과 런던으로의 빈번한 이주와 선천적인 천식질환 탓에 주로 개인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25년 가족과 독립한 그는 2년 뒤 파리 폴 로젠버그 화랑에서 열린 피카소 개인전을 보았다. 전통회화의 서술적 인물화가 인체 자체의 본성보다 사회. 직업적 조건이나 상태 표현에 중점을 둔 것에 반해, 피카소는 추상회화의 선을 넘어가지 않고 그림 속 형상들이 와해되기 직전의 지점에서 인체를 왜곡시키는 방법에 접근해 있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해 인체의 독특하고 근본적인 생동감에 관심이 쏠려있던 베이컨은 피카소를 통해 직감적으로 자신이 개척해 나갈 세계를 보았다.
그는 사람. 동물들의 연속사진, 예술. 문학적 전통속의 비극적 성격의 신화, 사물 내면의 은밀한 폭력성, 원초적 절규, 의학서적 컬러 도판에 실린 처참한 질병과 흉측한 상처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결과 같은 화면에 동적인 순간과 정지된 순간을 복합시킨 특이한 회화를 창조해나갔다.
베이컨은 인체란 화가의 통찰력에 의해 분해되어 화면 위에 재구성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의 과감하고 즉각적인 손놀림은 화면 속에서 상처받아 몸부림치고 격렬하게 투쟁하며 두려움과 고독 속에 절규하는 모습으로 섬뜩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독재자, 고깃덩어리, 친구의 얼굴, 자화상 등으로 표현되는 왜곡 된 인체와 냉정하고 무심하게 에워싼 배경 공간은 생명체의 생생한 현장감을 극적으로 고조시킨다.
1953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세계적 화가로 이름을 얻게 된 베이컨은 1940~50년대 넘치던 추상미술의 바다에서 뛰어나고 힘 있는 자기 목소리를 지닌 독특한 구상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모든 예술 가운데 회화만이 ‘히스테리컬하게’ 자기 자신의 대재난을 통합한다. 화가는 직접 대재난을 통과하며 혼란을 껴안고 그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한다. 화가들의 그것이 서로 다른 이유는 이 혼란을 껴안는 방식과, 질서와 혼돈의 관계를 평가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현대 회화에는 세 개의 길이 있다. 기하학적 추상은 심연, 혹은 혼돈과 손의 존재를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는 길이다. 그것은 일종의 금욕주의와 정신적인 구원을 제안한다. 그것은 형태적인 대비들에 따라 상징적인 코드를 만들어 낸다. 코드란 두뇌적이어서 감각이나 추락의 본질적인 현실이 결여되어 있다.
두 번째 길은 흔히 추상표현주의 또는 앵포르멜이라고 하는 심연 혹은 혼돈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다. 이 경우, 무한을 나타내는 것은 내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화폭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전면을 덮는 확장된 손의 힘이다. 이 방법은 낭만적으로 대재난의 광경을 그려 보여주는 대신 회화 그 자체를 가지고 미증유의 대재난을 만들어 낸다.
베이컨은 기하학적 추상의 시각적인 길도 아니고, 액션 페인팅의 손의 극대화도 아닌 제3의 길을 따른다. 지적·개념적·추상적 코드와 혼란을 동시에 피한다. 베이컨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 즉 격렬한 감각을 유발시킨 일차적 형상을 제거하기를 원한다. 격렬한 수단들은 고삐가 풀리지 말아야 하며 필수적인 대재난은 전체를 다 삼키지 말아야 한다. 돌발 흔적은 사실의 가능성이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형상은 돌발 흔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하고 감각을 명확함과 엄밀함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베이컨이 바라는 회화는 언뜻 보기와는 달리 ‘내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미지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그가 여러 대담에서 항상 ‘감각의 범주들’, ‘감각의 층위들’, ‘감각의 영역들’ 또는 ‘움직이는 일련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방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감각은 일시적이고 혼돈스럽다. 감각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명쾌하지도 않다. 하지만 뼈대는 더욱더 불충분하다. 뼈대는 추상적이다. 기하학을 구체적으로 혹은 느껴지는 것으로 만들고 동시에 감각에 지속과 명확함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회화는 자신의 심층에 머무르며 독자적인 방법으로 순수한 논리의 문제를 발견한다. 순수한 논리란 사실의 가능성으로부터 사실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림은 회화적 사실이라고 부를 아주 특이한 어떤 사실을 현재로 만들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감각이란 쉬운 것, 이미 되어진 것, 상투적인 것의 반대일 뿐 아니라 ‘피상적으로 감각적인 것’이나 자발적인 것과도 반대이다. 화가는 감각들의 원초적 통일성을 보여주고 복수(複數) 감각을 가진 형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내야 한다.
베이컨이 자신을 두뇌적으로는 비관주의자이지만 신경적으로는 낙관주의자라고 선언할 때, 다시 말해 생명만을 믿는 낙관주의자라고 선언할 때 합리적이거나 두뇌적이 아닌 세잔이 말했던 ‘감각의 논리’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1.들어라, 고기의 괴담을!
살의 외침(I)- 베이컨론
신체의 고통·혐오 형상화한 순수 형상들… 마음이 깃들인 감각적인 생명체 질료 묘사
전통 회화에서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무엇인가를 대신했다. 초상화는 어떤 사람을, 풍경화는 어떤 특정한 지역을 대신했으며, 문학적·역사적 배경이 있는 그림들은 어떤 사건을 대신했다. 현대 회화가 걸어온 길은 재현으로서의 회화 개념을 버리고, 회화의 ‘자기지시성’을 즉 자체의 ‘존재’를 확보해온 길이었다(‘자기지시성’이란 무엇인가를 지시하기보다는 자기자신을 지시함을 뜻한다). 풍경은 광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근법이 파기되고 화면은 납작해졌다. 피카소의 초상화는 인물과 별로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회화의 자기지시성이 자기폐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회화가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초상화라는 장르 자체가 소멸되어야 하리라. 회화가 세계와 맺는 복잡한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현대 회화론의 주요 과제다.
본질적 규정을 솎아낸 감각적 표면
회화가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기호가 아니라 자기지시적인 존재라는 것은 곧 회화의 내용물은 리오타르적인 의미에서의 ‘형상(形狀)=figure’임을 뜻한다. 형상이란 감각적 존재다. 이 점에서 형상(形狀)은 형상(形相)과 대조적이다. ‘形相’은 한 사물에서 물질성을 뺀 순수 규정성들이지만, ‘形狀’은 한 사물에서 모든 비감각적 규정성들을 뺀 존재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회화가 ‘形相’을 그리려고 했다면, 현대 회화는 ‘形狀’을 그리려고 한다. <모나리자>는 지오콘다 부인의 ‘形相’을, 그 ‘본질’을 그렸다. 베이컨의 그림들은 ‘形狀’을 그린다.
형상을 그리려는 시도는 두 가지 길로 나뉘었다. 한편으로 추상 회화는 플라톤적 실재를 찾아 나섰으며, 칸딘스키의 상응론적 추상을 거쳐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의 절대 추상으로까지 나아갔다. 절대 추상에 다다른 회화는 이제 기하학적 형상(形狀) 자체만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다른 한길에서 폴록은 구조가 아닌 힘을 그리고자 했다. 같은 추상이지만 플라톤적 구조를 그려나간 길과 역동적 힘을 그려나간 길은 감성적으로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베이컨은 추상의 길을 통해서 사물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사물의 심층을 표층으로 불러내 오는 길을 걸어갔다. 추상 회화는 사물들의 표면을 제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적 지각에 드러난 사물대신 그 사물의 심층적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다. 베이컨의 그림은 추상 회화보다 비교적 사물들의 표면을 보여준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초상화 또는 움직이는 신체들이다. 우리는 그림의 제목과 그림을 어느 정도 맞춰볼 수 있다. 베이컨은 추상 회화와 달리 훨씬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럼에도 베이컨이 그리려고 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형상(形狀)이다. 즉 사물에 들어 있는 정보를 모두 솎아냈을 때 드러나는 그 순수 형상들이 베이컨의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형상들이란 어떤 것들인가.
사물이 아니라 형상… 뒤집힌 표면과 심층
베이컨 그림의 기본적인 대상은 인간의 신체다. 그러나 그가 그린 신체들은 전통 회화에 등장하는 신체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가장 적나라한 그림들 가운데 하나는 1946년에 그린 <회화>다. 제목이 그림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두 판들 가운데 첫 번째 판은 우산을 쓴 한 사람, 그러나 거의 괴물과도 같은 사람을 보여준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고기가 매달려 있다. 두 번째 판은 좀 더 베이컨적인 터치를 보여주며, 역시 우산을 쓴 남자 뒤에 거대한 고기가 매달려 있다.
베이컨에게서 신체는 고전적인 그림에서처럼 우람하고 아름답지 않다. 그의 그림에서 인간은 괴물에 가깝다. 그것은 인간 “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놓여 있다. 베이컨은 신체가 느끼는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경험에 유난히 민감했다고 한다. 성교·구토·배설 등은 모두 이런 고통과 혐오를 동반한다. 그 극한은 한편으로 어떤 작은 구멍을 통해서 우리 신체가 녹아내리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 신체의 표면과 심층이 뒤집어져 속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 특히 통째로 매달린 고기는 우리에게 미묘한 파토스를 가져다준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백정을 폄하한 것은 편견이지만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고기는 생명체와 물질 사이에 있다. 고기는 해체된 생명체지만 물질과 완전히 가공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갈비뼈와 그에 묻어 있는 피, 잘린 살 등을 드러내며, 이런 “속이 뒤집어지는” 형상들은 말 그대로 신체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신체는 물질이 아니라 살로 되어 있다. 물질은 물리적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살은 마음과 함께 존재한다. 그것은 아픔을 느끼고 달콤함을 느낀다. 생명체의 질료는 살이지 물질이 아니다. 베이컨의 그림은 살이 겪는 고통과 혐오를 극한의 강도(强度)를 가지고서 나타내고 있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우리는 살의 외침을 듣는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1953)는 교황의 거대한 외침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교황의 외침은 그의 크게 벌린 입에서보다는 오히려 수직으로 그린 노란 줄들에서 느껴진다. 모든 살이 쭈뼛 올라가는 그런 외침이 들린다.
고통의 언어 극한에서 그를 만난다
20세기 서구 회화는 고통의 언어를 말한다. 에곤 실레의 추한 몸에서 베이컨의 고기 같은 몸에 이르기까지 서구 회화는 신체의 고통을 형상화해왔다. 왜 20세기 회화는 이토록 고통스러운 신체의 형상화에 몰두했을까?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맞닥뜨린 인간의 극한에 놓인 추한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맞닥뜨린 불안과 공포 때문일까? 역사적 맥락이든 형이상학적 맥락이든 서구 회화는 고통의 언어를 말해왔으며, 그 극한에서 우리는 베이컨의 그림을 볼 수 있다.
2. 살떨림의 세기를 즐겼노라
살의 외침(II)-베이컨론
아르토적 잔혹함 깃들인 감각의 회화… 추상적 힘에 의한 기의 광란 드러내
현대회화는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회화(=구상회화)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추상회화는 감각과 역사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플라톤적 실재를 추구했으며, 그것은 구조를 향해 간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의 추상과 힘을 향해 간 폴락 등의 추상으로 갈라졌다. 추상회화는 힘겨운 현실을 초월하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적지 않은 추상화가들이 그노시스파를 비롯한 초월적 사상들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면 의미의 산종(散種)을 꾀한 마그리트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은 실재의 다면성과 의미의 불확정성 등을 추구함으로써 추상회화와는 달리 실재 개념을 다원론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세계의 복잡함을 초월하기보다는 그 복잡함을 복잡함 자체로서 포착하고자 했다.
살의 외침을 추구한 사유/회화 계열은 또 다른 방식으로 현대를 맞았다. 에곤 실레에서 베이컨, 신디 셔먼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화가들은 지적인 회화가 아니라 감성의 회화를, 그러나 일상적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아르토적 잔혹함이 깃들인 ‘감각’의 회화를 추구했다. 극작가 아르토는 어떤 재현이나 구상도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감각, 순수한 외침에 대해 ‘잔혹’이라는 말을 썼다. 때문에 그의 극을 ‘잔혹극’이라고 한다. 이 말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잔인함’과는 구별된다.
감정이 아닌 감각을, 마음이 아닌 신경
살의 외침을 그리려고 한 이런 회화들은 분명 20세기라는 잔인한 시대를 통과하면서 생겨났다. 전례 없이 힘겨웠던 20세기라는 시대가 현대인의 감성을 짓이겨놓았다. 이 단말마의 고통을 이미지화한 방식은 화가들마다 달랐다.
베이컨 역시 유럽인으로서 전쟁의 참상을 겪었으며, 영국인으로서는 아일랜드의 폭력을 경험했다. 그의 그림에는 그러한 폭력, 인간의 신체를 ‘고기’로 만드는 잔인함이 배어 있다. 그는 그런 공포와 잔인함을 십자가형 등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베이컨 그림의 핵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잔인함보다는 아르토적인 의미에서의 잔혹함에 있다고 해야 하리라. 그가 목표한 것은 전쟁의 참상이나 삶의 공포를 고발하거나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공포 그 자체, 감각적 잔혹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 이 점에서 그의 그림은 존재론적이다. 베이컨에게서 역사와 존재론의 융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융합을 요구하는 것은 한 사람의 화가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베이컨에게서 우리는 살·고기·공포·피…. 이 모든 것들이 감각으로서, 오로지 감각으로서만 표현되고 있음을 본다. 베이컨은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마음이 아니라 신경(神經)을 그리고자 했다.
생생한 감각은 살로 표현된다. 베이컨의 그림은 지적인 뼈가 아니라 감각적인 살을 그린다. 십자가형을 통해서 살은 밑으로 축 처진다. 추락하는 살이다. 운동을 통해서 살은 이완하기도 하고 수축하기도 한다. 베이컨에게서 살이란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살은 아니다. 그의 살은 메를로-퐁티적인 살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그림은 현상학 너머로 나아간다. 그는 조직화된, (잠재적으로) 의미가 구성되어 있는 현상학적인 신체가 아니라 그 이전의 신체, 아직 신체라고 하기에도 뭣한 신체를 그린다. 그렇다고 그가 폴락처럼 모든 것이 해체되고 힘과 선들만이 남아 있는 추상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기의 흐름
베이컨은 폴락적인 운동과 유기화된 현실 사이를 그린다. 즉 ‘기관 없는 신체’와 유기적인 신체 사이를 그린다. 그래서 그의 기관들은 미처 완성되지 못한 채 그려지기도 하고, 마구 뒤섞이기도 하고, 때로 해체된 모습 그대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되기’(devenir)의 세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A와 B 두 개체보다는 그 ‘사이’를 또는 그 둘을 모두 포함하는 장을 사유하고자 했다. 이럴 때 A, B 같은 개체들은 그 장의 한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A, B와 같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유동적인 되기, ‘becoming’을 사유하게 된다.
베이컨의 세계는 얼핏 기(氣)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온전하게 조직되기 이전의 기, 취산(聚散) 과정 중에 있는 기. 그러나 그의 기는 동북아의 사유가 추구해온 조화롭게 잘 흐르는 기가 아니라 뒤틀린 기, ‘잘 못’ 길을 든 기,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기를 그린다. 그의 그림은 기와 현실 사이를, 기괴한 사이를 그린다. 베이컨은 유기체가 아니라 생명을 그린다. 유기체는 생명을 가둔 감옥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유기체라는 감옥을 부수고 격렬하게 솟아나오는 생명을 본다. 그러나 그 생명에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기보다는 잔혹함과 어중간함을 본다. 그것이 바로 20세기의 생명, 아우슈비츠 유대인들의 생명, 마루타들의 생명인 것일까.
어떤 재현도, 어떤 의미도, 어떤 구상도 거부하는 감각의 잔혹성, 현존(presence) 그 자체. 그것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유기적 재현과 철저하게 대립한다. 베이컨의 그림은 잘 계획된 질서가 아니라 우발점(偶發点)들의 유통(流通)과 기의 광란을 보여준다.
베이컨은 힘을 그리고자 했다. 살의 외침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그린 힘은 폴록적인 힘은 아니다. 왜인가? 베이컨에게 힘은 철저하게 신체의 힘이기 때문이다. 폴록의 힘은 베이컨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전적으로 추상적인 힘이다. 거기에서 얼핏 미시물리학이 제공하는 이미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두뇌는 비관적이어도 신경은 낙관적
베이컨 회화의 지평은 단적으로 신체이다. 신체를 전제하지 않는 힘은 베이컨적인 힘이 아니다. 베이컨에게서 힘은 파동이고 떨림이며 신경의 놀람이다. 그 힘은 시각·청각 등보다 앞선다. 베이컨이 그리려고 한 것은 그 살떨림, 피의 파동인 것이다.
베이컨은 자신을 가리켜 두뇌에서는 비관적이지만 신경에서는 낙관적이라고 했다. 분명 그는 두뇌로 20세기의 비극을 느꼈을 것이고 누구나 그렇듯이 비관적이겠지만, 잔인함과 공포에서 잔혹함과 감각으로 이행함으로써 감각적 현존을 그 자체로서 즐겼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삶의 근저에 육박하는 것, 삶의 원초적 현실을 응시하고 만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출처] [화가]두뇌는 비관적, 신경은 낙관주의자_프란시스 베이컨 |작성자 1004island
실존의 비극을 형상화한 예술가 프랜시스 베이컨
아트인사이트 글 입력 2023.11.21 14:28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고 잘 그렸다고 칭찬하고,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한다.
그렇다면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어떤가? 그의 유명하다는 그림을 볼 때도 선뜻 그런 마음이 드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유미적인 것을 추구하는 다른 많은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대표작 <회화 1946>를 함께 보자. 괴물의 형상을 한 어떤 존재는 비웃는 듯이 입을 벌려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검은 우산을 쓴 괴물의 형상 뒤로는 해부된 채 뼈와 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축이 드리워져 있다. 앞으로는 흰색 펜스가 둘리어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은 공포감을 준다.
베이컨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불편한 마음이 든다. 직접적으로 폭력적인 모습을 담아내지는 않지만, 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죽이 벗겨진 소, 동물도 인간도 아닌 어떤 존재, 그리고 이들이 뒤틀리고 포효하는 듯한 모습은 이를 둘러싼 폐쇄된 공간 안에서 괴롭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그림 중 아래의 그림 <루치안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개의 습작>은 2013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했다. 당시 한화 1,500억 원 대의 가격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아름답지도 않고, 부정적인 감정만을 불러오는 베이컨의 그림이 이토록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랜시스 베이컨의 삶과 그림
그의 그림은 직접적으로 폭력적인 장면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모르게 잔인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베이컨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현실이 잔인하기 때문이다.
그는 부유하지만,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10대의 어린 나이에 가출하여 베를린, 파리 등 유럽의 대도시를 떠돌며 살아갔다. 세계대전이 끝난 대도시의 거리는 처참했다. 그는 소수자의 시각에서 직접 목도한 전쟁의 잔혹함, 폐허를 그림으로 그려냈다.
이렇듯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실존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폭력과 불안, 욕망, 절망, 사랑의 갈구, 인간 내부의 동물적 비천함 등을 마주하게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세계
프랜시스 베이컨은 어떠한 미술사 사조에도 속하지 않는 작가이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동기술법을 거부했으며, 구상도 추상도 아닌 표현을 추구했다. 우연성에 기대지만 완전히 우연적이지만은 않길 원했으며, 그만의 철학과 기법으로 이미지를 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회화에서 사용하는 색감은 매우 아름답다. 강렬한 색채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폭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그는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스토리를 떠올리게 하는 삼면화를 자주 사용하고, 일정한 크기의 캔버스를 이용하고, 그림을 액자에 넣지 않는 등의 그만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작품 활동을 했다.
베이컨은 정식적인 예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36세가 되던 해에 처음 그림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러나 독보적인 그만의 작품세계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 나는 나 자신이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이미지는 회화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내 생각으로는 여기 있는 이미지들은 우연히 나에게 전달된 것 같다.··· 나는 항상 내가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수용력이 있는 예민한 사람일 뿐이다.···”
모든 예술은 번역이다. 어떠한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그러나 의도한 것을 완벽히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철학자 들뢰즈는 베이컨이 일부러 대상의 형태를 와해시킴으로써 강렬한 힘을 촉발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는 것을 통해 오히려 더욱 풍부한 감각을 끌어내는 것이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 순간을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이끌림을 느꼈다. 훌륭한 예술은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하는 어떤 것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림에서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음에도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겪는 아픔, 비극, 욕망과 같은 것을 그림으로 드러냄으로써 현대인들에게 감동을 넘어선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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