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호손산부(樹倒猢猻散賦)
송(宋) 나라 조영(曹咏)은 진회(秦檜)에게 붙어 관직이 시랑(侍郎 )까지 이르러 한때 권세를 떨쳤는데,
그에게 붙는 사람이 심히 많았다. 오직 그의 처형 여덕사(厲德斯)만은 그러지 않았다.
조영이 모든 수단을 다해 위협하였으나 덕자는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진회가 죽자 덕사(德斯)는 사람을 보내 서신을 조영에게 주었는데, 개봉을 해 보니 〈수도호손산부(樹倒猢猻散賦)〉였다.
(宋曹咏依附秦檜, 官至侍郎, 顯赫一時. 依附者甚衆, 獨其妻兄厲德斯不以爲然. 咏百端威脇, 德斯卒不屈. 及秦檜死,
德斯遣人致書於曹咏, 啓封, 乃樹倒猢猻散賦一篇.)」(방원영(龐元英) 《설 수(說藪) 〈조영처(曹咏妻)〉》)
(송 조영의부 진회, 관지시랑, 현혁 일시. 의부자 심중, 독기처형여덕사불이위연, 영백단위협, 덕사졸불굴. 급진회사.
덕사유인치서어조영, 계봉, 내수도호손산산부일편)
송 나라 고종(高宗) 때 조영 은 간신 진회의 환심을 사서 시랑까지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친교를 맺으려고 하였으므로 조영 은 매우 득의양양하였다.
그런데 조영의 손위 처남인 여덕상 만은 그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덕사는 조영이 재능과 학식에 의하지 않고 진회에게 아부하여 고위 관직에 오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말이 좋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같이 어울리지 않은 것이다.
조영은 이정(里丁, 촌장, 향장)이란 미미한 벼슬에 불과한 여덕사가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데 앙심을 품고
당지(當地)의 현관을 시켜 압박을 가하고 그의 잘못을 들추어내려고 하였으나, 처신이 깨끗한 여덕사를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그 후 진회가 죽자 그를 추종하던 무리는 모두 실각(失脚)하였고, 조영도 신주(新州)로 좌천되었다.
여덕사는 〈수도호손산부〉를 지어 조영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진회를 큰 나무에 비유하고 조영과 같은 무리를 그 나무에 사는 원숭이들에 비유하여,
그들이 권세를 믿고 백성을 괴롭혀 온 악행을 폭로한 후, 큰 나무가 쓰러져서 원숭이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으니
온 나라가 기뻐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받은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