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의 양면처럼
서정길
질녀가 대학원 졸업 논문의 서문을 영어로 옮겨 준 일이 있었다. 환경 관련 전문 용어가 많은 글이었다. 그녀는 내가 의도한 내용이 제대로 번역되었는지 자신이 없다며, 그 영문을 다시 한글로 되 옮겨 보라고 권했다. 언어마다 담긴 무게가 같지 않으니 옮기는 일에도 마땅히 어려움이 따랐으리라. 지금도 질녀는 번역만큼 다양성이 깊이 스민 장르가 없다고 말한다. 한 문장을 사이에 두고 두 언어가 서로를 온전히 끌어안지 못한 채 어긋나는 지점에 번역가의 고뇌가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전문 영역의 글뿐만이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네 일상도 상대의 말을 수없이 번역하는 과정에 있다. 같은 말이라도 어감이나 톤에 따라 전혀 다르게 새기는 습관이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건너오는 목소리가 “지금 난 무척 바빠”라고 할 때,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진짜 손이 모자란다는 것인지, 아니면 만나기가 껄끄럽다는 완곡한 사양인지를 헤아리게 된다. 말에 실린 감정의 결을 되짚어 진위를 가늠해 본다. 이렇듯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 끊임없이 번역하여, 기어이 내 잣대로 재단하려 한다. 귀는 열려 있으나 마음은 이미 제 나름의 사전을 펼쳐 든 셈이다.
문학에서의 번역은 한층 고난도의 예술 행위다. 번역가는 원작자의 경험과 감정을 다른 문자라는 그릇에 담아내고, 독자는 그 문장을 녹여내 자신의 체험과 지식 속으로 끌어들인다. 똑같은 문장에서 누군가는 희망과 위로를 길어 올리지만, 어떤 이는 실망과 상처의 통증을 다시 떠올리기도 한다. 문장은 하나인데 그 문장이 닿는 마음은 저마다여서, 결국 읽는 이의 수만큼 서로 다른 글이 태어나는 셈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 『채식주의자』를 옮긴 데버라 스미스 역시,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려던 그 미묘한 감정을 붙들기 위해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되풀이했을 것이다. 원문의 숨결과 번역어의 결 사이에서 그녀가 감당했을 아득함을 생각하면, 번역의 세상이 얼마나 넓고 또 깊은지 새삼 헤아려진다.
문학 번역이 이러할진대 일상에서 주고받는 언어는 또 어떨까. ‘너를 사랑해’라는 말조차 과연 온전한 감정 언어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톤으로 발음하느냐에 따라 그 좋음이 얼마만 한 크기인지, 농도가 짙은지 옅은지조차 가늠할 수 어렵다면, 그것은 어떤 말로도 끝내 옮겨 담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이란 원래 언어의 그릇에 다 담기지 않고 자꾸만 넘쳐흐르는 물과 같은 속성을 지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새는 그릇을 들고 상대에게로 걸어가는 셈이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도 단순히 듣고 이해하기 전에, 실은 번역이 먼저 소리 없이 진행된다. 아무리 진심을 눌러 담은 말이라 해도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내 흐트러지고 만다. 그 틈에 돋아난 오해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어,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을 옥죄기도 한다.
오래전, 그런 매듭에 매인 적이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고초를 겪던 벗이 변호사 선임에 애를 먹는다는 소식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의 부인을 찾아가 조그만 성의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부디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건만, 그 성의가 도리어 딱한 처지를 넘겨짚은 동정으로 읽혔던 모양이다. 부인이 내 뜻을 달리 새기고 있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진위를 애써 설명하는 일이 도리어 구차한 변명처럼 비칠까 봐 한동안 간격을 둔 채 말을 아꼈다. 번역이란 결코 사전 속 뜻풀이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음을, 오랜 기다림 중에 뼈저리게 느꼈다.
번역은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질녀의 말처럼, A는 곧 B라는 깔끔한 등식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우리네 삶은 번역 없이는 단 하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한 몸이면서도 끝내 서로를 마주 볼 수 없는 동전의 양면처럼, 진심과 오해는 늘 등을 맞댄 채 함께 굴러간다. 앞면만으로도, 뒷면만으로도 동전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해의 가능성을 품지 않은 진심이란 어쩌면 애초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의 언어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서려면, 설령 번역이 서툴고 더러 오해가 끼어든다 해도 그 걸음을 멈춰서는 안 될 일이다. 완벽한 번역이 없다 하여 침묵을 택한다면, 끝내 저마다의 섬에 갇히고 만다. 완벽하게 이해받지 못해도 다시 손을 내미는 용기야말로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지 않을까. 나 역시 누군가의 말을 번역하고, 또 누군가에게 번역될 것이다. 그 서툰 번역을 마다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가는 내 몫이리라.
첫댓글 그게 그렇지예 회장님!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읽고 싶은대로 읽고, 해석 또한 자기중심으로 하니 안타깝지요. 특히 카톡은 하도 쏟아지니 후다닥 읽다 보면 해독이 본래 뜻과 영 다르게도됩디더. 전 고요한 시간 다시 읽곤 하다가 낯이 뜨거울 때가 있습니더. 전두엽 오작동인지
회장님 글 읽고
저도 반성합니다.
타인의 말을 들을 때 '내 나름의 사전'을 펼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오해가 두려워 마음을 전하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깊은 여운을 주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