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경 67 /남악회양선사 2 /소를 때리랴 수레를 때리랴
師가 因馬祖가 多習坐禪하야 一日에 將甎하야 於菴前磨하시니 祖가 問 磨甎作甚麽오 師曰磨作鏡이니라 祖曰磨甎에 豈得作鏡이닛고 師曰磨甎에 旣不成鏡이면 坐禪에 豈得成佛이리오 祖曰如何卽是닛고 師曰比牛駕車에 車若不行이면 打牛卽是아 打車卽是아
남악회양스님이 제자 마조(馬祖)가 좌선만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하루는 기왓장을 가지고 가서 좌선을 하고 있는 암자 앞에서 갈고 있었다. 마조가 물었다.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남악스님이 대답하였다.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네.”
“기왓장을 간들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컨대 소가 수레를 끌 때 수레가 만약 가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해설 ; 남악회양스님이 큰 제자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스님을 깨우치는 장면이다. 마조스님은 성은 마(馬)씨다. 강서지방에서 교화를 많이 펼쳤기 때문에 강서(江西)라고도 부른다. 용모가 기이하여 소와 같이 걸으면서 호랑이처럼 돌아다본다고 하여 우행호시(牛行虎視)로 그의 특징을 표현하기도 한다. 어려서 세속의 온갖 학문들을 모두 연구하고 나서 근처의 나한사 자주처적(資州處寂)스님에게 출가하였다. 뒤에 남악에서 육조스님의 제자 회양(懷讓)화상이 수도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나아가서 좌선을 익히게 되었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 천보원년(742) 건양 불적암에서 처음 법을 전파하기 시작하여 대력4년(769)에는 강서성 종릉 개원사에 머물면서 종풍을 선양하였다. 만년에는 석문산 보봉사에 머물다가 정원 4년 2월에 입적하였다. 세수는 80세였다. 마조스님의 가풍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즉심시불(卽心是佛)'로써 표방할 수 있는데 곧 인불사상(人佛思想)이다. 역대 선지식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하여 “말 망아지가 천하 사람들을 다 밟아 죽였다.”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직지심경>에 소개한 이 대화는 매우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전등록>에서는 위에 소개한 대화의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있다.
“마조스님이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으니 남악스님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앉아있는 부처를 배우는가? 만일 좌선을 배운다면 좌선은 앉는데 있지 않다. 만일 앉아있는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는 일정한 형상이 아니다. 머무를 곳이 없는 법에 대하여 취하고 버리는 생각을 내지 말라. 그대가 만일 앉아있는 부처가 된다면 그는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앉는 일에 집착한다면 참다운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마조스님이 가르침을 받고는 마치 제호(醍醐)를 마신 것과 같아서 기뻐하여 절을 하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부합하겠습니까?’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듣는 것은 종자를 땅에 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하늘에서 비를 뿌리는 것과 같으니, 그대의 인연이 맞았으므로 도를 보게 될 것이다.’
‘도는 빛이나 형상이 아니거늘 어떻게 보겠습니까?’
‘심지법문을 보는 눈이라야 도를 보나니 무상삼매의 경우도 그러하니라.’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습니까?’
‘만일 이루어지고 무너지고 모이고 흩어짐으로 도를 본다면 도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게송을 들어라.’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 마음의 땅이 모든 종자를 머금어
우택실개맹(遇澤悉皆萌) 촉촉한 비를 만나면 모두 다 싹을 틔운다.
삼매화무상(三昧花無相) 삼매의 꽃은 모습이 없는데
하괴부하성(何壞復何成)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이루어지랴.’
마조스님이 깨우쳐줌을 받고는 마음이 활연히 열렸다. 그때부터 시봉하여 십년에 이르니 그의 경지가 점점 더 심오하여졌다.”라고 하였다.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뜻은 매우 평범하다. 그러나 대단히 유명한 말씀이다. 평범한 진리가 위대하다는 뜻이다. 차가 멈췄을 때 차를 매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운전수에게 차를 몰기를 부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가장 현명하고 지혜롭게 산다는 수행자들은 그 간단한 문제를 놓치고 근본이 아닌 지엽적인 일에 마음을 쓰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마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지엽인지를 몰라서 이리라. 또는 알면서도 가치관에 아직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리라.
일에 있어서 선과 후를 알면 거의 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마차를 말 앞에 두지 말라는 말도 있다. 당연히 말이 마차 앞에서 끌어야 한다. 그런데도 몸을 조복(調伏) 받는다는 말을 선가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곧잘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찾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찾는다.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