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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에
보릿길(박정애)
어릴 때 명절날이 무척 기다려졌다.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어머니의 바쁜 손길이 기다림으로 다가온다. 일년 의 두 번 쯤 해주시는 꼬까옷과 새신을 사주시면 며칠 동안을 아껴 두었다가 설과 추석날 친구들께 보여 준다. 설날 아침에 차려입고 어른분들께 세배하면 세뱃돈을 한 장씩 받고 무척 좋아했던 그 설이 기억에 남는다.
이 기쁜 설이 한편으로는 쓸쓸했다. 친구들 집에는 멀리 사는 삼촌, 사촌들이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설을 보내고 떠날 때는 선물을 얻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버지 혼자뿐인 우리 집에는 찾아올 삼촌도 고모도 없었다. 그래도 설날은 종갓 댁인 큰댁 제사를 지내고 차례로 대소가댁 지낸 후 우리 집은 고조부께서 막내라 맨 나중에 지내고 나면 점심 떡국을 우리 집에서 먹게된다.
삼촌 고모가 없어도 며칠 동안은 할아버지 할머님이 계셔서 세배 오시는 분들이 많아 우리집도 손님들로 분볐다. 명절 지난 며칠 후면 촌수가 가장 가까운 결혼한 두 분의 종고모 내외가 친정에 오면 하룻밤 주무시는 손님이라 나는 그 고모 두분이 무조건 좋았다.
130호가 넘게 사는 박씨 성으로 이루어진 큰 동네기에 정월 보름까지 서원과 강정, 두 군데 제실에서 명절 모임이 시작된다. 제일 윗 어르신분들인 할아버지 할머님들로 시작이 된다. 할아버지 모임은 서원에서 모여셔서 후손들도 웬만하면 이때는 오신다. 할머님들을 비롯한 아녀자들은 강정에서 모여 놀기 시작하면 맨 나중에는 새댁들의 모임으로 명절 마지막 모임은 끝이다. 음력 2월 초하루 영동할머니가 내려오시는 날 쑥떡을 해 먹는 날 일꾼들과 새댁들이 정지문 기둥을 붙들고 운다는 농절기를 맞게 된다. 이런 나의 친정 곳이기에 동네 나가면 이웃이 다 대소가라 어려운 일이 다치면 서로 상부상조하고 살았다.
나는 맏며느리 되기를 희망했다. 손님이 오고 명절이면 북적대는 그런 가정이 좋았다. 시댁 역시 한 동네에 대소가가 모여 살았다. 아버님께서 6남매 아들로서 막내시고 남편도 8남매 일곱째 제사는 없었지만 명절에 큰 댁에 가면 5 동서 비롯한 아이들 사촌끼리만 모여도 방방이 꽉 찼다. 시 백부님 제일 맏 집에 제사를 지내려가면 종형제 종질들 모두 모이면 오랜만에 보는 종질들은 얼굴도 잘 모를 정도다. 곳곳에서 모인 제관들로 방 마루 건너방까지도 모자라 툇마루에 서서 지낸다. 어린 우리 아이들까지 합치면 제관이 4~50명이 훌쩍 넘어 대식구 음식장만하는 일도 예사일이 아님을 알게된다.
그저 만나는 게 좋아서 업고 걸리고 큰 댁 가는 길이 힘들지가 않았다. 큰 형님께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장만해 놓으시고 남자형제분들과 어머님이 한방을 차지하고 동서들끼리도 한방을 차지하고 아이들 사촌끼리 한방, 방방이 끼리끼리 모여 놀면 셋째 시숙께서 우리 노는 방을 들여다보고 “형수님들 제수씨들 우리 흉 많이 보십시오”라고 하시면 욕하는 줄 아는 갑다하고“하면서 우리는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30 여년 전 어머님이 계실 때 까지 북적대던 시골 큰댁, 90세가 넘으신 맏시숙께서도 아들 따라 부산에 계신다. 대소가 아랫 대들도 모두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고 시골에는 지금 아무도 살지 않는다. 큰 행사가 없으면 만나지를 못해 집안 대소가들 정들과 시골정취를 잊고 산지 오래다.
명절 제사 때는 아들 둘이만 큰댁에 가고 아버님 어머님 제사때는 모두 출근하는 관계로 먼 곳에 계시는 연로한 시숙들은 못 가시고 가깝게 사는 우리들만 간다. 우리 집만 해도 점점 제사문화가 잊어지는 듯하다.
요번 설에는 두 며느리가 모두 안 왔다. 우연찮게 두 아들이 다 딸만 있는 집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두 집 다 제사를 모셨다. 친정이 제주도로 이사를 간 큰며느리는 바깥 사돈이 신장, 폐에 이상이 있어 자주 입원을 하신다. 요번에도 폐에 물을 2리터 쯤 뽑아냈다는 연락이 와서 급히 제주도로 간다는 전화가 왔다. 딸 둘인 큰 며느리는 동생은 외국에 있어 친정에 자주 들리지를 못한다. 그러니 명절에 친정에 자주 보낸다. 작은 며느리는 막내가 아파서 입원을 해서 병원에 있기에 못 온다는 통보가 왔다. 요즈음 시부모들은 그 통보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작년이 구시대 라고 할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세시풍속도 해마다 바뀌는 듯하다. 더구나 40년 전 나의 새댁시절 때를 고집하는 자체가 구세대다.
새댁 시절 아버님 소상 때, 국정감사를 받게 된 사무실은 초 비상이였다. 70년 대 초 교통수단도 지금 같지 않았고 남편은 울릉도서 근무하고 어머님께 전화해서 오후 시간에 과장님께 말씀을 드려 조퇴해서 가겠다고 했더니 불호령이 떨어져셨다. 내 사정을 자세히 듣고 시골 노인분이 시어른 탈상에 참석 못하는 며느리가 용서 안된다고 하시니 모두가 분담을 하고 시댁에 보내자는 과장님과 동료들의 배려가 나를 제사의 참여토록 만들어줌은 지금까지도 잊지못하는 고마움으로 남는다. 아이를 업고 걸리고 음력 칠월 초 이튿날 더운 여름날 큰댁에 당도하니 3시쯤 되었다.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함격해 서울중앙부서에 과장으로 근무했던 시동생이 나보다 조금 앞에 도착해서 어머님께 말씀을 듣고 “아지매 어머님 명령이 대통령령보다 무섭지요 오느라 수고했습니다.”라고 하시고는 어머님께 한마디 던져셨다. 내 부하가 감사때 할 일을 팽개치고 아지매처럼 제사에 가면 나는 그 부하 안 볼겁니다. 우리집에 일을 할 여자가 없어서 아지매가 꼭 와야 됩니까? 내 사정을 알아주는 시동생이 있었어 힘들었지만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생활이 힘듦을 어머님은 아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젊은 시절을 생각해 직장과 가정을 지키려는 며느리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핵가족이 주는 부부중심 가정이다. 아들이 대를 잇는다는 고집도 얼마 안 있어 허물어 질 것이 눈에 보인다. 제사를 모시지 않는 시댁보다 제사를 모시는 친정 쪽이 더 신경이 쓰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시부모님께 은연중 그 당연함을 허락해 주기를 암시 한다. 그 이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도 세월이 가르쳐 준다. 두 아들과 두 손녀가 모여 며느리들이 없는 쓸쓸한 설날을 보냈다.
아들은 부모가 살아온 세월을 훤히 알고 있다. 또 핵가족 시대가 돌아가는 세월도 듣고 보고 또 행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는 아들들은 옛날의 큰댁에서 북적거렸던 세월을 그리워한다. 그렇게 북적거렸던 모임도 혼례나 장례가 아니면 극히 만날 수 없어 사촌들도 자주 볼 수 없는 세월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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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릴적 설날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글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음식을 만들고 나눌 수 있는 것이 행복이고 자랑이었는데 지금은 그걸 명절증후군이라 한다지요.
세상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고향의 옛날 설날을 생각하며 잘 읽었습니다.
그 옛날 설명절과 생활상이 한편의 드라마 같은 글 잘읽었읍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던 그시절이 그리운 것을보면 아이러니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릴 적 설날이 떠오르며 조부모님 삼촌 모두 몹시 그립습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 는 속담이 사실로 증명되는 시대. 우리 손자 손녀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명절은 어떻게 변해갈까요?
대가족의 설날 풍경이 그려집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친척들을 두루 찾아뵈었는데 요즈음은 가족들만 모입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거기에 맞추어 나가야 하겠지요!
북적되었던 옛날 대가족시대 행사 얘기부터 차 세대 얘기 까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사람은 추억속에 산다고 했으니 어린 시절 경험이 주옥처럼 아름답겠지요. 두 며느리의 사정을 이해 하면서도 친척들로 그득했던 어린 날의 추억을 못 잊어하는 심경을 잘 묘사했습니다. 그 정경을 알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우리집안도 명절 차례때 종가집부터 오후까지 차례를 지낸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시절이 좋은때 인것 같습니다. 며느님들 차례때 친정 가는것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조금은 쓸쓸한 설날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40년 전 선생님의 새댁 시절과 많이도 달라져 버린 세시풍속이지만 아드님과 며느님들의 상황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는 넓으신 마음이 느껴집니다. 자주 가족 모임도 하십시오 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