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71
12월13일[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대림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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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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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1s1Qdy5Cyw
[성 바오로수도회 이창항 세바스티아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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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거룩하고 흠 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신명나게 해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리를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공감해주고, 호응해 주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분위기는 정말이지 사람 살맛나게 하고 기를 한껏 살려줍니다.
어딘가 강의를 갔는데, 다들 소 닭 보듯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는 분위기, 마치 민방위 교육장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강사로서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이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도 그런 냉랭한 대우를 참 많이 받으셨습니다. 특히 당대 나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노골적으로 노골적으로 그분을 거부하고 무시했습니다.
아무리 목청을 높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끝끝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길을 향해 걸어가는 유다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프셨을까, 하는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가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또다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극진히, 각별히 사랑하시는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냥 거기 계셔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연민의 정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 세상으로 하향하셨습니다. 육화강생하신 것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하향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우리 인간 측의 호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분을 기쁜 마음으로 환대하고 우리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에 앞서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머무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판공성사를 통해 내면을 잘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나 말 잔치, 불평불만, 과도한 욕심, 미워하는 감정 다 한번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작은 교회인 우리 각자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교회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성모님을 바라보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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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8SRZjllz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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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란 생명의 원천을 알아보는 눈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꿈쩍도 하지 않는 세대를 비판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왜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까요?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에 묶여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무엇에 묶일까요? 자신을 생존하게 해 줄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기에 묶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선택은 다 자기 생존을 위함입니다.
저는 정치 이야기는 최소한만 하려고 하지만, 워낙 지금의 이슈가 이것이기에 그 상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여당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 밤에 계엄령 무효화를 위해 회의를 개최했을 때 그들은 국회로 모이려고 했다고 금방 말을 바꿔서 당사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이 말은 회의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국민의 대다수는 계엄선포가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민의 뜻보다는 당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지혜는 그들이 옳지 않았음을 드러내었습니다. 대통령 탄핵과 영부인 특검도 안철수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표결을 거부하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들을 뽑아준 국민 중 많은 수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중에 어떤 여당 의원은 1년이면 또 자신들을 뽑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동료 의원에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서서히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여당의 씨가 마를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속 자신들은 탄핵에 찬성하겠다고 하는 여당 의원이 늘어납니다. 왜 그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사람들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시야가 좁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욕망은 우리 시야를 좁힙니다. 그러나 지혜가 드러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결과를 미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가 이룬 일”은 결과를 나타냅니다.
과정만 봐서는 어떤 선택이 진리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지혜가 없기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하고 아드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했습니다. 과정만 가지고 말하면 헛갈립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전두환 씨가 쿠테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결정을 한 사람임에도 과정만 보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어떤 벌을 받았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를 알아볼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다 어딘가에는 속해야 합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힘이 없으면 죽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선택이 다 생존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대통령이나 당의 사람들이 그 힘의 원천이라 믿으면 시력을 잃게 됩니다. 지혜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국민의 눈치를 보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어린이들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생명의 원천이 어머니임을 압니다. 그래서 어머니 말에 웃고 울고 춤을 춥니다. 저도 어렸을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국민교육 헌장을 외우며 머리를 갸우뚱했던 적이 있습니다. ‘뭔 소리야. 나라가 나를 만들었나? 쳇!’
나라와 어머니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요? 당연히 나에게 생명을 준 이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이제 생명의 원천이 자기 자신이 됩니다. 자신이 돈을 벌고 아기를 낳고 명예를 얻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관련되고 그렇게 원천을 잊으니 그것들이 나오는 회사나 정당, 모임 등에 소속하게 되고 그 뜻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정치인들이나 우리 모두 성 토마스 모어를 본받았습니다. 좋겠습니다. 그는 헨리 8세에게 신임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재혼하기 위해 교황청을 저버리자 헨리 8세에게 더는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생명을 주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단두대에 끌려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자유로웠습니다. 생명의 원천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춤출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번 계엄에도 일부 군인들은 시민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해서 명령에 따르지 않기도 했습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생기고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느님뿐임을 아는 신앙인들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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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죽음 교육에서 ‘버킷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를 목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용어는 “죽는다”를 의미하는 영어 표현 “kick the bucket”에서 유래했습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해 개인적으로 소중한 일을 기록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버킷 리스트라는 개념의 근간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단순한 욕망의 목록이 아니라, 개인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성찰하는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통해 스스로 열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나중에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줄어듭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버킷 리스트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실천하고 싶은 덕목이나 영적 목표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여행, 배움, 관계, 봉사, 영성 등 다양한 영역에서 리스트를 작성하도록 권유함으로써 더 풍성한 삶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도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2007)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두 노인이 병원에서 만나 서로의 버킷 리스트를 공유하며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함께 스카이다이빙, 세계 여행 등 다양한 버킷 리스트 항목을 실천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고,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 월터가 자신만의 상상 속 모험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세계를 여행하며 꿈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1985)는 한 여성의 아프리카에서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녀가 꿈꾸었던 삶의 모험과 성취를 담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버킷 리스트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경험과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버킷 리스트의 철학적 측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우 이즈 굿(Now Is Good, 2012)은 암에 걸린 소녀가 죽음을 앞두고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녀의 여정을 통해 사랑과 가족,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버킷 리스트를 만들면 어떨까요? 동방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해서 먼 길을 떠났습니다.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동방박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별을 보며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 한나와 시메온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예수님께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당에서도 성탄을 기다리며 몇 가지 버킷 리스트를 마련했습니다. 하나는 ‘고린토 전서’를 필사하는 겁니다. 지난 사순시기에는 로마서를 필사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대림 특강’입니다. 올해는 오클라호마 박락군 신부님이 ‘구약과 신약에서 드러나는 성탄의 의미’를 강의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거창한 것일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큰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버킷 리스트는 일상의 삶에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큰 영감을 주는 고전을 읽는 것도, 가슴을 울리는 음악을 듣는 것도, 대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버킷 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이 지녀야 할 버킷 리스트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킨다면, 우리는 이미 버킷 리스트를 살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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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였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17절),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17절)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준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다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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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 때문에 자신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신앙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바뀌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실천하기 어렵거나 힘든 말씀은 외면하고 위로와 감동을 주는 말씀만 들으려고 합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 변화가 없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획과 그분의 말씀 앞에서 늘 못마땅해하기만 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나 자신이 변화하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색하던 사람이 이웃에게 자선을 실천하고, 바쁘다며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던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상처받고 끊임없이 험담만 하던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고해소로 향합니다. 주일 미사 말고는 결코 성당에 갈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 평일 미사에 날마다 참례합니다. 모두 하느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그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일들입니다.
변화가 없고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난만 할 뿐 정작 본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결실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춤추지 않고, ……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11,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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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 자체가 끊임없이 회개하는 생활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6-19)
1) 여기서 ‘이 세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이 세대’ 사람들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로 비유하셨을까?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같다.”는 “철없는 아이들과 같다.”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는데도 듣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2)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는 세례자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의 생활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는 “저자는 미쳤다. 정상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한 자들은, “우리가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세례자 요한이 미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라고 핑계를 댔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시는 것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예수는 죄인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자들은, “예수는 죄인이니까 그의 말은 듣지 않겠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다는 것은”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이나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모두 ‘인간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구원받음으로써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뜻입니다.
3) 사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보면, 표현이 똑같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 표현은 같은데, 요한의 선포는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예수님의 선포는 하늘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어떻든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선포를 거부한 자들은, ‘복음을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이고, 그렇게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 즉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4) 신앙인들은 회개 선포와 복음 선포를 이미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회개와 신앙생활은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히, 그리고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끝까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입니다. 만일에 이미 신앙인이 되었다는 생각만 하고서 자만하고 방심한다면, 위험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2,43-45)
5)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는 말은, 똑같은 죄를 지어도 신앙인이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똑같은 벌을 받아도 신앙인이 더 비참한 상태가 될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은총 안에서’ 잠깐이라도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행복과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은총 밖으로’ 쫓겨났을 때, 은총 안에서의 행복과 기쁨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 밖으로 쫓겨났을 때 더 비참하고 더 고통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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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기다리다 보면 오는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는 기다림이 더 의미 있고, 이 기다림을 통하여 구원의 문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긴 세월을 기다려 아들을 얻었고, 욕심 많던 야곱도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 형과 화해하여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다 거짓 교사들의 출현에 현혹된 신자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기다림의 보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희망을 전제로 하고, 이 희망은 바로 대림 시기의 중심 주제입니다. 기다림을 통한 성취는 오늘 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길로 돌아간다면 그들의 평화가 강물처럼, 그들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기다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들에게 무엇이 궁극적인 선인지를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만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지금이야말로 기다림의 지혜를 청해야 할 때입니다. 이 지혜를 오늘 화답송 시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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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10장의 파견 설교 이후, 11-12장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부정적 반응과 함께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다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활동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평가(11,2-6 참조)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긍정적 평가(11,7-15 참조)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부정적 반응을 비유적 표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견주십니다. 여기서 “세대”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적대자를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장 17절의 비유는 두 가지 상황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는 혼인 예식이고, 다른 하나는 장례 예식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금욕주의적 삶은 그를 장례 놀이와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반대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회개하기보다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비금욕주의적 삶은 혼인 놀이로 확인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적대자들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기보다 날 선 시선으로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반대자들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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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팔짱을 낀 완고한 자세로 당신 말씀을 꼬투리 잡아 비판하기만 하면서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 이들을 장터에 앉아 놀이를 하는 미성숙한 아이들의 모습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그 아이들이 ‘미성숙’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즉 그 아이들은 남들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따라주기만을 바랄 뿐, 정작 자신은 남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그들이 원하는대로 따라줄 의지도 없기에,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에 미성숙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며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겠지만, 현실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된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외톨이’일 뿐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유다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회개와 엄격한 고행을 강조하는 요한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를 ‘마귀 들린 사람’ 취급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만들었지요. 또한 세리나 창녀들처럼 당시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배척받던 ‘죄인’들, 그리고 함께 해봐야 이득될 게 없는 힘 없고 가난한 이들과는 같이 어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는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 취급하며 그분처럼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만들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분들 때문에 자기 삶이 변화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을 올바른 것, 중요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삶 속에서 실천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들이 세속적인 이익을 더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야 될까봐, 하기 싫고 귀찮은 ‘의무’와 ‘책임’을 떠맡게 될까봐 두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그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과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함입니다.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돌리는 회개는 구원받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잘 가꾸어 완성시켜 나가야 할 참된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철없는 아이 같은 사람들은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내놓으라고, 멸망을 피할 방법이나 세상에서 성공할 방법 같은 걸 알려달라고 고집을 부리며 떼를 쓰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과 행동으로,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시는 삶으로 당신이 전하시는 메시지가 옳다는 것을, 그 메시지가 당신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그분의 뜻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입을 삐쭉거리며 군소리하거나 핑계거리를 찾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명으로 따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춰 주시고 우리가 곡을 하면 함께 울어주시는데, 왜 우리는 그분을 위해 그렇게 해드리지 못하고 자꾸만 핑계를 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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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들처럼만 하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 따라 하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남과의 비교가 생겨나고, 또 따라갈 수 없음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남 따라 하는 것이 편하고 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자기의 삶이 될까요? 남이 알아주든 말든 진정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잘해 나가는 삶이 진짜 자기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이 편하고 쉬운 삶을 살겠다고 어린이처럼 놀면 잘못입니다. 신부인 제가 편하고 쉬운 삶을 살겠다고 미사를 안 하면 어떨까요? 큰 잘못입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평범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무시하면 게으른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 성녀는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고(물론 다른 사람은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자기 일상으로 만들어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셨던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 봉사하시는 분의 고충을 많이 듣습니다. 열심히 봉사한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일 때, 봉사의 힘을 잃게 된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때 ‘자기 역할’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봉사가 원래 해야 할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한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눈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눈으로 봐야 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나의 역할에 집중할 때 평범한 삶으로 당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면서 놉니다. 그러면 함께하는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이 춤추며 놀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장례 놀이를 합니다. 그때 춤추고 있다면 장례 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장례 놀이를 할 때에는 가슴을 치면서 곡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기 역할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외쳤을 때 진심으로 참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지만,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역할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역할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사랑의 역할을 주셨는데, 어렵고 힘든 이런 특별한 삶을 어떻게 따를 수 있냐면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랑의 역할은 우리의 고유한 역할로 지극히 평범한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전해주신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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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마태오 11,16-19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함께>
살리려는 함께
베풀려는 함께
돌보려는 함께
깃들려는 함께
품으려는 함께
깨치려는 함께
바르려는 함께
돋우려는 함께
나가려는 함께
빛나려는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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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즈음 소위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 마음에 드실까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는 이들이 참으로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요즘 나라의 혼돈상태를 보십시오. 서로 남 탓만 하고 있잖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여전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새겨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굳건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참 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주장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확신은 오류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가 무엇을 바랄 것인지 알게 해 주시길 빕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 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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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찢기어지고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에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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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무디어 진 제 마음이 빛보다 어둠에 치우친 까닭입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실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완고함의 벽을 헐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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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나의 빛>
-루멘채치스(Lumen Caecis; 맹인에게 빛을)-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며, 주님은 의로운 이를 사랑하시도다.”(시편 146,8)
오늘 화답송 시편중 한구절이 깊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두 말씀도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사유는 눈빛으로 담기고, 세월은 주름으로 새겨진다. 얼굴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얼굴로 드러나는 것이다.”<다산>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내 눈빛은, 내 얼굴 주름은 어떤지요? 날로 깊어지는 눈빛이요 날로 뚜렷해 지는 세월의 얼굴 주름이요, 세월의 나이테인지요?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사람의 생김새가 그 사람의 성격, 생활상 등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대개 익힌 것이 오랠수록 성품도 이에 따라 변한다. 속으로 마음을 쏟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 얼굴도 변하는 것이다.”<다산의 여유당전서>
이래서 좋은 덕목의 선택, 훈련, 습관을 통해 주님을 닮아갈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단한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삶이, 영성이 그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성녀 루치아(283-304) 동정 순교자 기념일로 지내지만, 우리 “선교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에 속한 수도원들은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오딜리아(660-720) 동정 대축일”로 지냅니다. 늘 자명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그 누구든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생몰生沒연대를 볼 때 마다 생각하게 되는 나의 죽음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떠나지 않습니다.
성녀 루치아는 로마 박해 시대에 순교한 동정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납니다. 순교 연대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기간 도중입니다. 성녀는 신심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았고 후에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청년과 약혼합니다만 어머니께 이미 자신이 동정서원을 한 사실을 고백했고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냅니다.
루치아는 약혼한 몸이었지만 결혼 준비로 장만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결혼하지 않습니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약혼자는 루치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집정관 파스카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루치아는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받으며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받았으나 끝내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성녀의 이름 루치아는 ‘광명’, 또는 ‘빛’이라는 뜻의 라틴어 룩스(Lux)에서 유래합니다. 이름 뜻대로 끝까지 주님의 빛으로서 살다가 순교한 동정녀 루치아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오딜리아 동정녀는 7세기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지방의 귀족집안에서 맏딸로 태어납니다. 오딜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고, 잔인한 성격의 아버지는 앞도 못보는 딸로 태어난 오딜리아를 하인을 시켜 죽이려 합니다. 오딜리아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에 맡겨집니다.
오딜리아는 앞을 보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밝고 착하게 자랐고, 마침내 673년경 레겐스부르크의 성 에르하르두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중 바른 성유가 그녀의 눈에 닿자마자 눈이 열려 시력이 온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후에 아버지와의 화해도 이뤄지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을 세우고 원장이 됩니다. 수녀원에는 신자들을 위한 병원도 함께 지어졌고, 여기서 성녀 오딜리아는 아버지의 변화에 기뻐하며 남은 생은 기도와 봉사로 지내다가 720년 선종해 몽생트오딜 수녀원에 묻힙니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프랑스를 넘어 독일까지 퍼져나갔고, 9세기부터 여러 지역의 교회의 성인 호칭기도에 성녀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성녀가 묻힌 무덤은 신자들, 특히 앞을 못 보는 이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가 됩니다.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알자스 지방과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과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져 왔고, 1807년 교황 비오 7세는 공식적으로 성녀 오딜리아를 알자스 지방과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세례은총을 통해 눈이 열려 시력을 회복한 오딜리아, 말 그대로 “주님은 나의 빛”이라는 말씀이 이뤄진 것입니다. 루멘채치스, 맹인에게 빛을 이란 오딜리아 연합회의 모토도 여기 근거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예나 이제나 영적으로, 무지에 눈먼이들로, 역설적으로 온통 눈뜬 맹인들로 온 세상은 차고 넘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녀 루치아,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녀 오딜리아는 물론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빛으로, 열린 눈으로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빛입니다. 맹인에게 빛을, 루멘채치스! 눈먼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제대로 보게 하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니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개안의 여정입니다. 빛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밝아지는 우리의 눈입니다. 주님이 발광체라면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로 참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첫째,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의 빛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날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깨끗한 마음이요 하느님을 만납니다. 분명한 사실은 발광체는 주님이요 우리는 반사체라는 엄중한 사실이요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주님의 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할수록 주님의 영광을 잘 반사합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않을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
참으로 사랑으로 밝고 맑은 눈을 지님으로 주님의 반사체가 될 때 마음은 물론 온몸도 환한 빛이 됩니다.
저절로 심신의 치유요 구원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온전히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찬미하는 삶입니다. 찬미의 빛,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찬미와 더불어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사야 말씀이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성탄의 기쁨을 앞당겨 대림의 기쁨,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마라. 보라, 너희 하느님을!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라,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이런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사랑으로, 찬미의 빛으로 살 때 참으로 날로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초연한 삶입니다. 초연의 빛입니다. 무욕의, 무집착의 텅빈 충만의 초연한 삶이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날로 겸손과 비움의 여정에 충실한 자아초월의 삶과 더불어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초연한 삶의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지납니다. 모두가 떠납니다. 세상 것들의 무시가 아니라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집착의 늪에, 탐욕의 수렁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날로 이런 초연한 사랑이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억지로의 이탈이나 초연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저절로 이탈의 초연한 삶에, 주님 반사체로서의 빛나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빛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요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입니다. 루멘채치스!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때 눈먼 이들에게 주님의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답은 셋입니다. “사랑하라, 찬미하라, 초연하라”입니다. 한결같이 이렇게 살 때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 8,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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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 장단에 맞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세례자 요한을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는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제는 당시 권력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폭행을 가한 것을 말씀하셨고, 오늘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하십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이 있기에 폭력을 행사하고, 군중은 힘이 없기에 폭력 행사는 하지 않지만 평가로 작은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평점 테러를 집단으로 하는 겁니다.
그들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세례자 요한을 못마땅해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좋게 얘기해야 하는데 먹고 마신다고 못마땅해합니다.
자기 외에는 다 부정적으로 보는 자기중심입니다. 남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이 너무도 없는 것이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선이 너무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선이 없겠습니까? 하느님이 그들을 악으로 만드셨겠습니까? 하느님은 악을 만드실 수 없는 분입니다.
작은 선을 무시하는 교만, 작은 악을 확대하는 교만, 이 교만이 자기부터 부정하게 만든 것이고, 자기 안에 형성된 부정으로 남도 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뜯어 보면 남을 부정함으로 자기를 긍정하고,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나를 높이려는 교만한 자기중심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자기중심 곧 미성숙한 자기중심도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자기 장단에 남들이 춤추기를 바라는 자기중심 말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내가 성숙하다면 남의 장단에 내가 춤추지 말아야 하지만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그리고 성숙하다면 너의 장단도 나의 장단도 아닌 하느님 장단뿐이고, 진정 우리가 춤춰야 할 장단은 하느님 장단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장단에 맞춰
어떤 때는 단식을 하고,
어떤 때는 회식을 하고,
어떤 때는 슬픔을 나누고,
어떤 때는 기쁨을 나눕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같이 단식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같이 회식하고 기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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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마태11,16ㄱ)
<하느님 중심의 삶!>
오늘 복음(마태11,16-19)은 어제 복음인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세례자 요한의 말도 예수님의 말도 듣지 않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
'하느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 중심이 아닌 하느님을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회개'는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이사 48,17-19)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쏟아지는 은총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이사 48,18-19)
오늘은 '동정과 순교의 두 빨마를 간직하신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소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끝까지 살아낸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를 본받아, 우리도 나 중심의 삶을 벗어버리고, '하느님 중심의 삶, 너 중심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은총도 많이 받고, 이 은총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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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 19)
하느님의
지혜가
참으로
옳았습니다.
한꺼번에
모두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빛으로
다시 읽어가는
빛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답하시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삶을 일으키는
삶이 있듯이
삶을 일으키는
빛의 삶입니다.
다시금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성녀 루치아의
삶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지혜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회개의 빛이
필요한
간절한
시간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빛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모든 시간이
빛의
시간이었습니다.
빛을 추구하여
빛을 닮아갑니다.
빛이 세상의
문을 엽니다.
빛은 빛을
찾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빛의 삶이
깨어있는
삶이며
양심의
삶이며
공감어린
삶입니다.
모든 순간이
빛을 향해야 할
소중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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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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