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연(李采淵, Ye Cha Yun, 1861년 ~ 1900년 8월 15일)은 19세기 조선 시대에 한성전기 회사 사장및 한성부 판윤, 농상공무 협판을 맡았다.
1887년 통역관의 지위를 가지고 미국 워싱턴 D.C.의 조선 공사관으로 발령 받았다. 당시 외교 활동은 물론 1893년 시카고 엑스포의 조선관 구축과 운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귀국하였다.
1896년 한성판윤에 처음으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직책을 맡고 사망하기전까지 한성판윤의 직책을 유지했다. 재임시절 한성 개발에 주력하였으며 독립협회 창립에도 참가하였다. 이후 1898년 한성전기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백석읍 복지리 호명산에 묘소가 있다.
◆ 이채연시 공사관으로 활동하던 시기의 워싱턴 D.C.
당시 미국은 노면 전차가 대세였고 방사형 도시 계획으로 상당한 수준의 도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동시대의 조선의 한성은 외국인들에겐 조롱의 대상이였다.
일국의 수도라고 하기엔 전근대적인 인프라와 불결한 환경이 뚜렷했고 도로는 500년간 지속된 불법 건축물과 노점에 점거되어 사실상 골목화된 상황이였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관 그 이웃 나라들(1897년)
정부는 1896년 아관파천이후 한성을 근대화시키는 작업에 주력하는데 이에 고종은 미국 경험이 있는 이채연을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이채연은 내부령 9호,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을 발표했다.
1. 한성 내 주요 간선 도로의 불법 건축물 철거 및 확장
2. 덕수궁앞(현 서울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간선도로 체계 구축
3. 한성에 전차, 전기, 수도, 가로등 등 인프라 설치
4. 탑골공원, 퍼블릭파크 등 도심 공원 조성
그는 한국 최초로 근대적인 도시 계획을 주도했다.
워싱턴 D.C. 백악관을 기점으로 여러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며 도심 교차로 곳곳에 기념 공원이 있는 구조인데 이채연은 덕수궁을 미래의 궁궐로 여기고 덕수궁 중심의 도로망 체계를 구축하였다.
현재의 서울광장 중심의 거리
당시 소공로, 서대문로를 정비하고 세종대로와 남대문로를 연계시켰으며, 탑골 공원등 사대문 안 공원도 이채연이 주도하여 구축하였다.
이후 난립된 구조물과 환경으로 좁고 구불구불했던 한성은
도로가 넓어지고 가로등으로 밤에도 밝게 거리를 비추며 전차가 다니고 도시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채연의 업적으로는 전차의 도입이며 1898년 알고 지내던 미국인들과 합작으로 한성전기회사를 설립, 주도하여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전차는 1899년에 개통했는데 이는 도쿄(1903년보다 더 빨랐으며 세계 첫 전차 개통이 1881년 이였으니 놀라운 성과이다.
이렇게 도시 계획을 차곡차곡 이어갔던 한성은 당시 너무 발전하여 본연의 특색을 잃어가던 도쿄나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던 베이징보다 훨씬 아름답고 단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897년 봄, 서울 거리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1896년 가을부터 정부가 주도한 도로 정비 사업의 결과 서울의 길은 넓혀지고 깨끗해졌다.
근대적 도시, 개명한 도시의 모습으로바뀌어가고 있었다.
종로와 같은 큰길들은 물론 동네동네의 작은길들도 정비되었다.
구한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좁고 불결한 골목길들도 깨끗해졌다. 서울은 많은 면에서, 특히 남대문과 서대문 근방의 변화때문에 예전과 다르게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도로들은 최소한 17미터의 폭으로 넓혀졌고 그 양쪽에는 돌로 만들어진 깊은 경계가 있으며 그 중앙은 돌의 후판으로 메워졌다.
그 도로들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콜레라가 발생했던 불결한 샛길들이 있던 곳이다. 좁은 오솔길은 넓혀졌고 진흙투성이의 시내는 포장 도로에 의해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중에서
◆ 외교 명가 펠프스 가족 묘역안에 있는 작은 묘비
그러나 이채연의 말로는 비참했다. 그의 미국인 동료였던 샌즈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채연은 40살이 되던 해인 1900년에 확실하지않지만 독살당했다고 전했다.
「이채연이 사망했다. 알렌(Allen) 박사와 이채연이 자신들과 왕실 사이의 유용한 노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미국인 일당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이채연의 이른 죽음에 대해서 유감스러워하지 않는다.
이채연은 오랫동안 서울 시장을 역임하면서 부패로 악명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알렌 박사는 이채연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중략) 만약 이채연이 천국에 있다면 성 베드로는 금으로 포장된 도로를 방심하지않고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 윤치호일기 1900년 12월 14일 중에서
이렇게 이채연은 한성 근대화의 주역이지만 일부의 평가처럼 물욕에 빠진 사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