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추운 날
지난밤은 지독하게 추웠다. 살이 에일 만큼 춥다는 말은 아마 그런 날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칼바람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사이를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바닥에 깐 몇 겹의 라면박스도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하통로 위에서 찬 공기는 계단을 타고 계속 밀려 내려왔다. 나는 라면박스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너무 추워서 밤새 내내 나는, 자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가수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러한, 꿈과 생시를 오가며 시소하고 있는 나를 들볶아 의식이 온전하게 돌아오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였다. 셔터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지하통로를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지면 그것은 첫차가 들어 올 시각이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그때쯤이었다.
밤새도록 사시나무 떨 듯 벌벌거리다 잠에서 깨어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따듯한 물 한잔과 바닥에서 올라오는 따끈한 온기였다. 새벽 첫차가 들어오는 시간, 입안에 넣을 수 있는 따듯한 것을 구할 데라고는 지하철역 승강장에 있는 커피자판기 밖에 없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본다.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손에 잡힌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얼어 죽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라면박스를 들추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위장을 따듯하게 만들어 줄 커피자판기를 찾아 나는 승강장으로 내려간다. 먼저 승강장에 내려온 사람들은 모두 전동차가 들어올 곳을 주시하며 서 있다. 나는 자판기를 찾아 휘적휘적 승강장의 중앙 쪽으로 걸어간다.
전동차가 들어올 어두운 터널 속을 주시하던 승객들 중 일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해 버리고 자판기 앞에 선다. 동전을 넣자 선택할 수 있는 모든 스위치에 불이 들어온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스위치는 세 가지 종류의 커피와 율무차가 표시된 스위치였다. 쓴맛과 단맛이 적절히 어우러진 따듯한 커피를 마시려다 나는 율무차에 잠시 마음이 흔들린다. 두 종류 모두 가격은 삼백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두 가지 다 뽑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신중해 진다. 두 가지 모두 마시기 위해 새벽 첫차를 타야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구걸을 할 만큼 나는 염치가 없는 놈은 아니다. 나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온기뿐 아니라 약간의 허기까지 덜 수 있는 율무를 선택한다. 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컵에 내용물이 담기는 소리가 맛있게 들려온다. 나는 율무와 거스름돈 이백 원을 들고 자판기 앞을 떠난다.
나는 율무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며 승강장의 중앙 쪽으로 간다. 율무 반 컵은 나에게는 아침이다. 나는 그 율무를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다. 첫 전동차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컵을 찢어가며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핥아먹는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승객들이 승강장 가장자리로 다가선다. 나는 그 전동차에 몸을 싣는다. 그때쯤 전동차의 좌석은 언 몸을 눕히기에 좋을 만큼 알맞게 데워져 있다. 열차의 중앙쯤에 타고 있으므로 승무원이 시비를 걸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노약자석을 독차지 하며 그 자리에 누워버린다. 따듯한 기운이 등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내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내 주위의 승객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그렇게 전동차에 몸을 싣고 종점까지 갔다 오면 러시아워 시간이 된다. 그 시각까지 전동차에 있다가는 전동차 뿐 아니라 아예 역 밖으로 쫓겨나기 십상이다. 나는 봉변을 당하기 전에 전동차를 내려 역 밖으로 나간다. 공짜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시각까지는 아직도 너 댓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내가 그 희한한 광경을 목격한 것은 러시아워 시간을 길에서 어슬렁거리며 때우고 다시 전동차로 돌아왔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노약자석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한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몸을 비스듬히 세우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 옆에는 그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같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가 여기에 선 이유는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 고아로 자랐고 남들처럼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릴 형편이 못되어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그들이 저쪽 끝에 서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옆에 서 있는 여자는 감정이 북받친 듯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죄송하지만 여기 계신 어르신 중에 저희를 위해 주례를 봐 주실 분, 계신가요?”
전동차 안에 승객은 많지 않았다. 주례를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선뜻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자, 신랑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그냥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몸을 곧추 세우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신랑과 신부를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저희는 평생 행복하게 살 것을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창하듯 동시에 말했고 말이 끝나자, 남자는 반지를 여자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그때서야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내리면서 신랑의 등을 두드려 주었고 누군가는 그 광경을 휴대폰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동차가 서자 그들은 내렸고 전동차안은 다시 평온해 졌다.
‘우라질 놈덜, 그 소동을 피우고 박수를 받았으면 하다못해 빵이라도 한 조각씩 돌려야하는 거 아닌가.’
다시 자리에 누우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끝)
첫댓글 날씨가 추워지면 더 어려워질 사람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군요. 그 사람들에게 마음의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하 그 전동차결혼식... 그 현장에 풀잎님이 함께 하셨군요. 가짜 결혼식이었다고 나중에 밝혔지요... 아마 그래서 빵 한 조각 안 돌렸을 테지요. 오랜만에 보는 풀잎님의 꽁트... 따뜻합니다. 계절은 자꾸 추워지는데...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리고 갑니다 글이 안올라 와서 신경이 쓰이시는군요 가끔씩 재미있는 글 좀 보여주세요 열심히 읽을께요
그려요 난 나!님하고 숨소리 좀 내고 사입시데이. 고마와요 풀잎님.
제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꾸벅.
저도 있었어요. 풀잎 님^ ^
저도 읽었습니다.
오늘밤은 지하도가 무지 추울 것 같습니다. 요즘은 그나마 머리를 써서 큰 박스로 관 모양을한 네모상자를 만들어 얼굴부분만 숨구멍을내고 누워서 잠을 자든데 얼마나 추울지...그 상황까지가 밉고 답답합디다만 다 제뜻대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