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
-강영구신부-
누가 우리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를 죽은 나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느티나무 가지에는 메마른 갈색 잎들이 힘겹게 매달려있습니다.
소슬 바람에도 낙엽은 눈발처럼 흩날리고 느티나무는 나목(裸木)이 되어갑니다
삭정이 같은 가지들을 펼쳐들고 죽은 듯이 겨울맞이를 하지만 저 나무는 싱싱하게 살아있습니다. 대지(大地)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편, 사시사철 푸르고 싱싱한 나무가 있습니다.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고 가을이 와도 열매 맺지 않고 자라거나 시들지도 않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가보니 흡사(恰似)하게 만들어진 인조나무입니다.
아무도 그 싱싱한 나무를 살아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지요.
옛날 사람들은 수혼제(嫂婚制)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려했습니다.
여성의 인격과 인권이 무자비하게 짓밟힌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인 방법입니다.
현대인들은 인공수정(人工受精)이나 난자매매(卵子賣買), 대리모(代理母) 혹은 배아복제(胚芽複製) 따위의 방법으로 혈통을 잇거나 수명을 연장시키려 합니다.
여성을 상품화 혹은 도구화하는 비윤리적인 방법일 뿐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하늘의 법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혈통을 잇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래 산다고 과연 그 생명이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까?
하루를 살더라도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생명이 정말 살아있는 생명이 아닐까요.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부활(復活)은 소생(甦生)과 다르다.
-박상대신부-
예수님의 그리 길지 않을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복음에 아주 드물게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등장하고,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부활에 관하여 논쟁을 벌인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항자로서 잘 알려진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록된 율법, 즉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여 모세율법의 자구(字句)를 고집하였으므로, 바리사이들이 중시하는 구전(口傳)의 법(法)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의적(敎義的)으로는 영혼의 불멸이나 육체의 부활 및 천사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마르 12,18; 루가 20,17; 사도 23,18), 오직 부유한 평안만을 추구하였다. 실제로 사제(司祭)들을 포함한 부유층과 귀족계급들이 이에 속하였고(사도 4,1; 5,17), 로마인의 지배까지도 평화와 복지를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환영하였다. 따라서 예수에 대하여는 바리사이들보다 더 격한 증오를 표시하여 예수를 단죄하고 처형, 사도들을 박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실로 극단적인 예를 들어 예수를 곤욕에 빠뜨리려 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아들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의 아내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대를 잇게 하는 수혼법(嫂婚法)이다.(신명 25,5-10; 창세 38,8) 그러나 사두가이파들의 맹점은 내세(來世)를 현세의 연장으로 생각한 데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활(復活)을 소생(甦生)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선 죽은 후에 맞이할 새 세상이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실제로 일어날 일은 우리의 상상 밖이다. 내세란 현세의 모든 생명질서가 무너지고, 죽음 자체가 완전히 극복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내세의 부활은 이승의 차원이나, 죽었다가 소행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현세의 질서, 철저한 시간과 공간, 즉 물리(物理)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우리가 부활의 차원의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이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로 나누어져 있으나 하느님에게는 오직 현재의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한다. 이를 일컬어 ‘순수현재’(純粹現在, pura praesentia)라고 한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다면 과거가 있는 것이고, 끝이 있다면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요, 하느님 또한 그들의 하느님이시며,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출애 3,6) 그래서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즉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섬길 수 없으며, 오직 산 사람만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살아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살아 있더라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사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