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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원문보기 글쓴이: 강남
율은 김저 (최영장군 생질)선생 전시관 개관
栗隱 金佇 (崔瑩將軍 生姪)先生 展示館 開館
김저(金佇, 1304. 11. 4 - 1389)
시중 최영(崔瑩)의 생질이다.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최영을 따라 오랫동안 군사 활동을 하였다. 최영이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죽은 이듬해인 1389년 최영의 측근인 전부령(前副令)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여주에 가서 폐위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李成桂)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와서 곽충보(郭忠輔)와 모의하여 팔관일(八關日)에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곽충보가 이를 이성계에게 밀고하여 이성계가 팔관회에 참석하지 않고 집에 있자,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의 집으로 잠입하여 암살을 실행하려다가 경계하던 문객에게 잡혀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이로써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의 옥사’가 일어나 대간의 문책에 따라 변안열(邊安烈) · 이림(李琳) · 우현보(禹玄寶) · 우인열(禹仁烈) · 왕안덕(王安德) · 우홍수(禹洪壽) 등과 공모하여 우왕을 복위하기로 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 다시 창왕(昌王)도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다. 그해 11월 옥에서 죽으므로 그 시체를 저자에서 베었다. 그리고 그의 모의에 가담한 문하평리 정지(鄭地) 등 27인은 유배되었다.
율은(김 저)전시관 개관 및 세덕비 제막식
최영장군 후손(최시원)이 율은 김저 선생 후손(김시우)에게 최영장군 영정 전달
율은 김저 선생의 종손과 함께
동주최씨 대종회장(최창호) 화환 증정
동주최씨대종회 전 회장 최시원과 부회장 최기선
대호군 김저(1304 - 1389)는 김해인으로 호는 율은 시호는 풍성군(豊成君)으로 대호군참지정사의 요직을 거치면서 시중 최영의 생질로서 수행하면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특히 고려를 지키려고 이성계를 살해 음모하였다가 잡혀서 옥사하였다.김저옥사(金佇獄事)
고려말 순절 구충신(高麗末 殉節 九忠臣)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標榜錄)
崔瑩(최영). 金 佇(김저). 邊安烈(변안열). 曺敏修(조민수). 李 琳(이림). 廉興邦(염흥방).
尹 彛. 李 初. 王安德(왕안덕)
율은 김저(최영장군 생질) 선생 전시관 개관
2013년 4월 12일 5시 15분 문산역에서 전철을 타고 출발하여 서울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2호선 전철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하여 김씨네 종친들과 반갑게 만났습니다. 7시에 버스가 출발하여 최기선 부회장과 만나 한좌석에 동석하여 예천군 보문면 사무소 앞 율은공 표절사에 10시에 도착하였습니다.
표절사에서 율은 김저 선생의 춘향제를 지내기 위해서 김씨 집안 종친들께서 제복을 입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김시우 이사장을 반갑게 만나 저를 김씨종친들께 일일이 인사소개를 하면서 "율은공의 외삼촌인 동주최씨 무민공 최영 장군의 후손인 우리 집안에 가장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고 소개를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영장군과 율은공(김 저)이 헤어지신지 약 625년 만에 우리 양대 후손들이 만나게 되어 정말로 생질간에 만난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이순간이야 말로 숨겨졌던 역사의 진실이 밣여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집안 족보에도 안동김씨로 잘못되어 있었기에 진실로 김해김씨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어서 감회가 깊었습니다.춘향제를 엄숙하고 절제있게 진행하고, 율은 전시관 개관 행사를 전국
유명한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성대하게 개최하였습니다. 행사 중에 저(시원)와 기선 부회장을 율은 김저선생의 외숙인 동주최씨 무민공 최영 장군의 후손으로 소개를 하고 나서 최영 장군의 영정을 전달하면서 참석자 전원의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고 전시관에 유물을 견학하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여기에서 제례를 올리는 것이 너무나 엄격하고 절제있게 진행하는 것을 보고 저 자신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의 인물로 보면 우리 무민공 최영 장군이 율은공 김저보다 월등한 인물임에도 우리는 사저 하나 없고 행사 진행에도 여러가지로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김씨 종친들 모두가 그 유명한 외삼촌(최영 장군)댁에서 오셨다고 우리를 극진하게 대하여 주어 제가 최영 장군 된 기분을 느꼈습니다. 86세 넘으신 김씨 종친께서 76세인 저에게 "외삼촌"이라고 부르기에 저도 "생질"이라고 불러 나이가 많은 율은 김저와 나이가 적은 무민공 최영 장군과의 관계와 동일하게 느꼈습니다.
제가 김씨 종친 뿐만 아니라 여러 타 성씨들에게 존경받고 우대받는 것은 무민공 최영 장군을 비롯하여 선조님들의 은덕과 청백리 정신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대종회장 당시(2008) 사단법인 최영장군 기념사업회를 종무회에서 법인화 추진과 묘역성역화 또는 대동보(인터넷 족보)를 결의하고도 율은
김저 기념사업회는 2009년에 법인화 추진하여 전시관 개관을 성사되었으나 아직 우리는 추진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제종들이여 ! 앞으로 더욱 단합해서 선조들의 선양사업에 힘써야
하겠으며, 우리 후손들의 번창과 충효정신을 전파하여야 하겠습니다.
2013. 4. 14
동주최씨대종회 전회장 (31세손) 최 시 원
최 영 장군의 생질 김 저(金 佇) = 김해인과 안동인
최 영 장군의 생질 김 저(金 佇) 김해인으로 밝혀진 바 있으나 안동인으로도 확인된 바 있어 비교 검토 하였다.
김해인(김해김씨)인 경우
고려말 최 영 장군(1316-1388)과 김 저(1304 - 1389)는 전투에 같이 참여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최영장군의 참형당한 후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순절한 충신이다. 동주최씨 족보에는 최영장군 생질 안남인(安南人) 김 저 호군으로 기록 되어 있고, 부친 등 자손록에 대한 기록은 없다. 최 영 장군과 전투에 참여 하였고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순절한(김저 옥사사건) 九 충신에 포함되어 있다는 승국명류표방록에 기록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최 영 장군의 생질로 판단된다.
김 저는 김해인으로 자는 충국(忠國) 호는 율은(栗隱) 시호는 풍성군(豊城君)이다. 이조시대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표절사를 건립하였다.
안동인(안동김씨)인 경우
동주최씨 족보에는 김 저(호군)의 부친이 김 윤명(允明)이고 판관 안동인 부 좌윤 구용(判官安東人 左尹 九容)으로 기록되고 김 저의 자 김 중달(仲達). 손자는 김 종손(終孫)으로 기록 되어 있다. 잘못된 기록이다.
안동 김씨 족보에는 김 저(생원) 부친이 김 명윤(明允) 좌승지 조는 三司右尹 九容(文溫公) 자는 仲達. 손은 終孫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 가의 족보상으로는 부친의 明자와 允자 만 바뀐것으로 되어 있으나 조 九容의 출생 연도가 1338년이기에 최 영 장군의 출생(1316) 보다 늦은점이 의심이 되고, 고려말 김구용(김저의 조부)과 정 몽주. 이색 등 과 같은 시대 충신인 것으로 보아 김구용의 손자 김 저는 이조시대 생원의 인물로 보아 최 영 장군의 생질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김해김씨 (金海金氏) 계통도
김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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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직 김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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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성 김관管(삼현파-파조) (1/4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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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국 김문숙(文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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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경 김목경 김익경 김항(沆) 김저(佇-최영장군 외조카) (3/5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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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 김저 , 김수 김란, 김시 김서(序) 김위(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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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문 김달문 김현문 김진문 김극일(克一) 김태일(兌一)
│ │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 3분이 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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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 김건(健) 김맹(孟) 김용(勇) 김순(順) 김인(靭 ) 김현(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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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원 김준손(駿孫) 김기손(驥孫) 김일손(馹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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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서 김대유(大有) 김대장(出) 김대축 김대아 김대장(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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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김성(成) 김생(鉎) 김술 김갱 김장 김굉 김용 김영
철원최씨(동주 최씨) 東州 崔氏 계통도
동주 최씨(東州 崔氏)의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 太師)가 되었다. 최준옹의 증손자 최석(崔奭)은 고려의 최고 중앙정치기관인 좌습유(左拾遺)를 시작으로 1075년 형부시랑(刑部侍郞), 전중감(殿中監), 지어사대사(知御史臺史)가 되었고 그 후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한 후 고려 선종 3년(1086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1087년(고려 선종 4)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최유선ㆍ이정공 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동주(東州)에 퇴거하여 후손들이 세거한 데서 관향이 연유한다고 한다.
최준옹(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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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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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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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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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청(문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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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증(예부상서) 최후(합문지후) 최인 최당(평장사) 최강 최선 최양 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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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윤 최종준(문하시중) 최종자(우복야) 최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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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징(한립학사) 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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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 최원직(사헌부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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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 최영(1316~1388 장군)
ㅣ ㅣ(김저 외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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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맹손 최담 영비최씨(配우왕-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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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염 딸(配맹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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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오복 맹귀미(사헌부감찰) 맹득미(이시애난 때 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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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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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문
첫댓글 이런 귀중한 자료를 만들고 보관하고 연구하시는 보배같은 일가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중앙종친회나 도 종친회에서 일하고 계신분은 바로 이런 마인드를 갖고 일해야됩니다. 집안에 대한 애착과 융성 화합을 기원합니다.
금년에 김기재 중앙종친회장님이 취임하시고 중구 필동 중앙종친회 회관 건물 매입으로 이제 길을 찾은듯 싶습니다.
최영장군과 율은공(김 저)이 헤어지신지 약 625년 만에 그 후손들이 만나 외삼촌 생질을 부르는 그모습이 바로 양가의 자존을 더 높이고 화합하는 아름다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30년도 더 지난 그 옛날에 사동서원 제사에 다녀오신 아버님의 모습이 그리워집니다.이것이 종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