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무렵부터 성모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하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하늘 나라의 잔치에는 누구나 초대를 받지만
초대받은 손님은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야 한다.
초대받은 손님이 갖추어야 할 예복은
믿음과 겸손과 의로움과 같은 것들이다(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그런 곳에는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초대받은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별 이유 없이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 다시 오라고 했지만 역시 거절합니다.
심지어는 심부름꾼을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임금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른 체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임금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없애고 고을을 불살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에 불림을 받았지만 충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이 ‘하늘 나라의 초대’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임금이 베푸는 잔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는 기쁨입니다.
신랑 신부가 새 출발하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임금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됩니다.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혼인식에 참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삶’이 잔치에 참석하는 이가 입어야 할 ‘예복’이었습니다.
모르기에 대충 살아갑니다.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르심에 대한 진정한 응답입니다.
요즈음은 결혼식에는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인 신랑과 신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축의금의 내역이 주역으로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초대받은 사람이 잔치에 참석하여
신랑과 신부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는 참석도 하지 않으면서 축의금만 전달하는
요즘의 풍속도를 보면 참으로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 진정한 하객들은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축의금이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조건이자 목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서 베푸시는 혼인 잔치에
아무런 조건 없이 초대하십니다.
그분의 초대에 응하려면, 현실의 유혹과 어려움과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분께 믿음을 두는 사람만이 그분께서 초대하시는 잔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여기 들어왔나?”
(마태22,12)
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가
혼인 예복을 갖춘 이라네.
악한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사랑의 옷을
단정히 차려 입고
흐트러짐 없이
주님의 초대에
응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이가
혼인 예복을 갖춘 이라네.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