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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6월24일 토요일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수도회] 사랑의 길을 닦는 사랑의 예언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9,1-6
○ 제2독서 사도 13,22-26
† 복음 루카 1,57-66.80
◈ 오늘의 묵상
구약과 신약의 중간 시대를 살면서 두 시대를 연결한 요한은 말을
못하게 된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이를 못 낳던 어머니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납니다. 이로써 그의 탄생은 새로 다가올 메시아의 시대가
메마름이 풍요로움으로 바뀌고, 말을 못하는 이가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는 시대라는 것을 선포해 줍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지어 준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또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전해야
할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자비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그에게 ‘세례자’라는 명칭을 줍니다. 종전의 히브리 세례
예식에서는 세례자가 혼자서 물에 들어가던 것을, 이제는 세례를 주는
이의 손으로부터 정화수를 받는 새로운 정화 예식으로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요한은 사람이 혼자서 정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거룩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은 구약이 의미했던 진정한
예언자이고, 자신이 예언한 분을 직접 손으로 가리킬 수 있었던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선포하는 이가 아니고,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매순간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는 새 시대를 향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자 우리에게 매번
새로운 도전이며, 새로운 초대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행복의 씨앗
2017년 가해 6월24일 토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6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22-26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80
행복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불행’일까요? 누군가는 행복의 반대말이
‘권태’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죽은
삶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행복의 정반대말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주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행복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을까요?
이분에게 직접 그 이유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삶이 재미없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반대말이 ‘권태’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이 권태가 찾아와서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삶이 재미없고 의미 없다고 생각될 때,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삶은 내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유한하고 물질적인 것들 안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지속성이 없기 때문에 금세 실망하게 되고 때로는
절망으로 나를 이끌게 됩니다. 따라서 무한하고 영적인 것들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분명히 어떤 힘듦과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의
씨앗을 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보냅니다. 세례자 요한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이분께서는 주로 광야에서 생활하셨지요.
호화롭고 안정된 삶이 아닌, 척박한 땅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서 나를 광야로 내몰고 낙타털로
만든 옷 한 벌을 주고는 알아서 지내라고 하면 어떨까요? 마치 감옥에
갇힌 느낌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곳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았습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힘듦과 어려움이 가득한 곳으로 보이지만, 이
안에서 주님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지금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의미를 찾고 또 부여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게 준비하는 행복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발견은 세상의 발견보다 중요하다(찰스 핸디).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신 곳.
긍정을 부르는 말(최종희, ‘열공 우리말’ 중에서)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를 나왔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들이 발간하는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다. 당시 그가 해낸 일 중
동료들이 가장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모든 부정어를 긍정어로 바꿔
게재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자유가 없는 나라’라는 표현을 ‘자유를
향한 꿈이 있는 나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신이 직접 연설문을 수없이 수정했고, 퇴임 후 언론으로부터
긍정적인 명문을 가장 많이 남긴 대통령으로 인정받았다.
우리말에서도 부정과 긍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대게 ‘없다’와
‘있다’를 쓴다. 그런데 ‘있다’가 붙은 말은 터무니없이 적다. 흔히 쓰는
것은 ‘재미있다. 맛있다. 멋있다, 상관있다’ 정도로, 드물게 쓰이는
것까지 합해도 20여 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없다’가 들어간 말은 ‘힘없다, 볼품없다’ 등 어림잡아 140여 개나
된다. 우리가 부정적인 쪽에 치우쳐 살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긍정적으로 살기, 그 출발은 어쩌면 쉬울지도 모른다. ‘있다’가 들어간
말은 되도록 많이 사용해 보자. 우선 ‘멋있다, 맛있다, 뜻있다,
재미있다’ 네 가지 말만이라도 자주 쓰는 것이다. 그리고 ‘없다’는
‘있다’로 바꾸어 보자. 이를테면 ‘반칙 없는 사회’를 ‘원칙 있는
사회’로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라도 ‘있이’ 살면 좋겠다. 없이 사는
것보다 백 배 낫고, 말은 돈도 들지 않는다.
긍정을 부르는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지금의 상황 때문이라는 불평불만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길을 닦는 사랑의 예언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6월24일 토.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 49,1-6; 사도 13,22-26; 루카 1,57-66. 80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루카 1,63)
사랑의 길을 닦는 사랑의 예언자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다음과 같이 예고합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루카 1,13-16)
그러나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됩니다(1,20).
요한은 말 못하는 즈카르야와 아이 못 낳는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그렇게 모두 주님의 섭리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
(마태 11,11)이었습니다. “요한은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고 신약을 예고합니다. 요한은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시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드러났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설교 293,1-3)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의 아들에게 ‘즈카르야’가 아니라
‘요한’이란 이름을 줍니다. 당시의 인간적인 관습에 따른다면,
‘주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의 ‘즈카르야’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호의를 베푸셨다’라는 뜻의
‘요한’이란 이름을 준 것입니다. 곧 태어날 아기는 이스라엘의 옛
계약을 잘 지키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리라는 것이지요. 그는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파견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랑이 오시는 길을 닦기 위해 사랑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구약을 완성할 신약의 메시아께서 오심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를 율법에서
사랑으로 인도하는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오시는 사랑 앞에서
사랑의 변화를 알아차렸을 뿐 아니라 사랑을 위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사랑의 도구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명망을 얻었지만 오시는 사랑 앞에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작아지고 낮춤으로써 영원한 사랑,
하느님의 참 사랑이 드러남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오심을 전하고 있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요한 1,20.23) 요한은 자신의 말이 창조 이전부터
계신 ‘말씀’이 아니라 ‘소리’에 지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의 간계로 순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도록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정의의 도구가 된 것이지요.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한 것입니다(감사송).
오늘 이 사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사랑의 완성을 위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사랑으로 그 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처럼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작아져 하느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 사랑이 드러나고
사랑의 길이 뚫려, 모든 이에게 사랑이 전파되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 6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6월24일 토.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 63)"
이름과 사람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이름이 소중한 것은 그의 이름을 통해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안으로 성 요한 세례자가 탄생합니다.
자식을 낳지 못했던 한 여인, 엘리사벳에게서
한 생명, 요한이 탄생합니다.
탄생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에게 에리사벳에게 즈카르야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새로운 역사를 사람들안에서 써내려 가십니다.
역사의 새로움이란 우리의 삶또한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탄생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기쁨은 이렇듯 생명의 탄생에서 시작합니다.
생명의 탄생은 가치있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가치있는 삶이란 하느님 사랑으로 채워지는 삶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을 통해 우리의 신앙또한
새로워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드러낼 수 없으며 작아지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 뜻에 순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에게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또한 성 요한 세례자같이 사람의 아름다움을
되찾아 주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모든 사람은 아름다우며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거기에 세례가 있고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거룩한 분노
2017년 가해 6월24일 토.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거룩한 분노
교회 전례력 안에서 성인(聖人)들의 축일은 주로 돌아가신 날 한번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수난 축일 뿐만 아니라 탄생
대축일도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그를 각별히
존경하고, 그의 탁월한 신앙 앞에 최고의 예우를 갖추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마지막 대예언자’,
‘메시아의 선구자’, ‘구약과 신약의 가교(架橋)’,
‘진리의 증언자’...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에 대해 공개적으로 인정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 11장 11절)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죽음, 생애와 가치관, 신앙여정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가 보인 삶의
방식은 여러모로 독특했습니다.
탄생 때부터 유별났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그의 양친은 공기 좋은
요양원에서 마지막 삶을 정리하고 있을 나이의 호호백발
노부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통해
당신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이 없음을 만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식이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철이 들자마자
따뜻한 부모의 품을 지체 없이 떠났습니다. 그는 혈혈단신의 홀몸으로
깊은 유다 광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다 광야에 가보니 참으로
척박하더군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청명한
하늘과 황량한 땅 밖에 없더군요.
그런 제한된 여건 속에서 세례자 요한이 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강도 높은 영적생활에 투자했습니다. 눈뜨면 기도했고
눈 감아도 기도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기도하고 땅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20대 청춘의 끓어오르는 젊은 혈기와 강렬한 에너지
전부를 엉뚱한 데 쓰지 않고, 오로지 오실 주님을 극진히 환대하는
준비 작업에 사용했습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틈만 나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완벽하게 예수님의 선구자로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것인가? 시뮬레이션 작업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런 세례자
요한의 도움과 희생에 힘입어 마침내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지상과제, 인류구원사업을 100%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극도의 청빈생활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광야로 들어갈 때 그가 지닌 것이라고는 겨우 몸을 가릴
정도의 낙타털옷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었습니다. 척박한 유다 광야에서 얻을 음식물이라고는 메뚜기와
석청 정도였으니 거의 초근목피의 생활이라고 보면 정답입니다.
무일푼이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주님
섭리의 손길에 자신의 생애 전체를 맡길 수 있었습니다. 자존심 강한
그는 철저하게도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고 부자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금전 문제에 있어 언제나 투명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세례자 요한의 삶은 참으로 강직했고 당당했습니다.
그는 불의 앞에서 절대로 참지 못했습니다. 그의 내면은 ‘거룩한 분노’
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런 태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특히 유다
왕실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직하고 당당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헤로데 왕의 불륜 앞에서
용감하게 신랄하고 날선 질책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코 복음 6장 18절)
오늘 우리 앞에 헤로데 못지않게 불의한 자들, 구려 터진 이들이
사사건건 나라의 발목을 붙잡고 있습니다. 행동 하나 하나 살펴보니
인류 역사 이래 저런 뻔뻔스럽고 후안무치한 정당(政黨)이 다시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리 저속한 막말들을,
그 어떤 필터링도 거치지 않고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단체로 똘똘 뭉쳐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끝까지 국민들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고, 저리도 비열하게 꼼수를 부리고 있습니다. 저
사악한 자들을 향한 우리 국민들의 ‘거룩한 분노’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17년 가해 6월24일 토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 1,57-66.80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도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우리 하느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니,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데서 우리를 찾아 오셨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중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없다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물과 성령을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 나는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을 준비하는 인도자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묶을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동창 신부님들 중에 4명이 세례자요한입니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장애인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지내는 동창, 병원이라는 큰 조직에서 사목을 하는 동창,
꾸르실료 전담 사목을 하는 동창, 본당 사목을 하는 동창이 있습니다.
모두들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로 돌리고 있습니다.
15년 이상을 장애인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봉사자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무엇보다 서울과 떨어진
곳에서 지내기에 때로는 많이 외로울 것 같습니다. 몇 번 찾아가서
피정을 하기는 했지만 저는 동창신부님처럼 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병원은 아픈 사람들이 찾는 곳입니다. 고통을 보아야 하고, 때로 죽음도
보아야 하는 곳입니다. 병원은 하나의 기업입니다. 조직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셈이 빠르지 않은 제게는 벅찬 일일
것 같습니다.
꾸르실료 전담을 하는 동창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합니다.
문도 열고, 밥도 해 먹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한다고 합니다. 워낙
부지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 지냈던 세례자
요한처럼 꾸르실료 회관을 찾아오는 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행동이 빠르지 못한 제게는 벅찬 일일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처음 본당 사목을 하는 동창은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분들을 위한 사목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목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복음화 학교를 찾아왔고, 본당에서
복음화 학교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당 사목에서도 많은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동창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기도합니다.
어르신들께서 ‘이름 값’을 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함께하는 공동체와 조직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름값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때로 ‘갑’질을 해서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국정농단이라는 사태의 본질은 이름값을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지닌 천사입니다. 성모님께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요셉 성인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저의 세례명이 가진 뜻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며 저의
이름값을 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매일 복음 묵상도 계속 전하고, 제게
주어진 직무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려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영광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을 공경하는 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이와 같은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영광은 하느님께 드릴 줄 알아야합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6월24일 토.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카 1,57-66.80)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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