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중세 고딕성당과 영화 '밀양'의 빛
빛은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형상인가?
“저 많은 건물 중 내 께 하나도 없다니”
서울의 화려한 야경을 보던 중년 남들의 클리셰(cliche) - 상투적 대사다.
그 반짝이는 불빛들 속, 예전과 다른 식으로 세상과 작별한 이들이 늘고있다. 2023년, 한국은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고독사’란 ‘주변 이들과 단절된 채 고립상태로 생활하던 사람이 자살,병사 등으로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죽음’ 을 말한다. 웰 다잉(Well-dying)이란 신조어의 반대편엔 고독사가 있다.
외롭게 떠난 이들의 흔적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고독사의 원인은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며 젊은 층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갈 곳 없고, 만날 이 없는 사람이 택하는 세상과의 이별.
한국의 자랑인 인천공항에 들어서면 환한 채광과 사람들의 갈 곳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전광판은 수많은 행선지들로 반짝거린다. 그 중 유럽은 언제나 인기있는 장소다.
처음 간 유럽에서 우연히 들린 성당의 아름다움을 경탄하며 사진에 담다 금새 지친 적이 있다. 가는 곳 마다 마주치는 성당들의 향연에 식상한 탓이다. “조상들 잘 만난 덕에 후손들이 덕보네”
연실 플래시를 터뜨리던 관광객들의 또 다른 클리셰, 관광수입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는 나라들을 향한 부러움이다. 이 멋진 성당을 만들고 드나들었을 중세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중세 사회에는 세 가지 계급이 있었다. 귀족은 인구의 약 3%, 성직자는 5~10% 정도, 나머지 약 90%는 평민이었다. 고단하고 피곤했을 대부분 중세인들에게 종교는 절대적 구속이자 위안이었다.
모든 종교는 우리의 남루한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위로와 평안을 준다. 인간만이 종교를 갖고, 카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한 이유다.
서 로마가 멸망한 후 유럽은 중세시대(476~1500)로 접어든다. 중세예술의 주제는 인간보단 신과 종교에 집중하고 예술적 성취는 성당, 수도원, 교회의 건축으로 집약된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대표되는 중세예술은 신을 찬양하고 문맹자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로마네스크의 특징인 작은 창문과 두꺼운 벽에서 해방된 고딕 양식의 높은 탑은 신에게 더 다가가려는 인간의 열망을 가속화했다. 유럽 각지에선 지위와 힘을 과시하기 위해 더 높은 고딕형 성당을 쌓는 경쟁을 벌였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 모두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운 빛으로 성서의 장면과 식물등을 표현해 풍부하고 상징적인 요소를 더했다.
생드니 대성당 (1135)/ reddit
빛은 시각적 감각에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감정을 만들어내는 빛의 아름다움은 성당의 건축에 매우 중요했다.
신학자 알쿠인 (Alcuin, 735-804) 은 신을 직접 사랑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쉽다 했고 중세인들은 빛의 아름다움을 신의 사랑을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여겨 성당 안에 가능한 한 많은 빛을 통합하려했다.
하지만 로마네스크 시기에는 자연광이 성당 안으로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벽은 무거운 돌로 되어 있었고 작은 창문들은 넓게 떨어져 있었고 내부의 커다란 기둥은 빛을 더욱 차단했다.
그러나 파리의 생드니 대성당 (Basilica Cathedral of Saint Denis, 1135)에서 시작된 고딕 양식부터 성당에는 본격적으로 빛이 차오른다. 성당의 수도원장 쉬제르 (Suger,1081~1151)는 공간을 과감히 개방하고 천장을 높여 빛이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게 했다.
나아가 파리의 샤르트르 대성당(Chartres Cathedral,1252)은 예배의 정서적 향상을 위해 자연광과 인공 조명을 함께 사용했다. 이후 대성당들은 빛을 반사하고 확장하도록 설계된 금, 은, 구리 장식을 곳곳에 배치한다.
금속 표면에 반사된 양초와 햇불의 빛들은 성당 내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며 기쁨과 즐거움, 경외심과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중세인들은 이 '가상 천국'의 아름다운 빛 가운데 신을 만나고 현실의 시름을 잊었다.
북단 장미 창,샤르트르 대성당 (1235)/ 위키피디아
<밀양密陽 > 은 한국 경상남도의 소도시이자 이창동 감독의 2007년 동명의 영화다. 영문 타이틀은 , '비밀의 햇살'이다.
밀양으로 ‘신애(전도연 분)’ 라는 여인이 아들과 이사를 온다. 자동차 고장으로 만난 '종찬(송강호 분)'은 신애에게 호감을 느끼고 영화 내내 그녀 주변을 맴돈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버리고 남편이 사별하는 불행을 겪은 신애는 밀양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 하나 아들이 유괴되어 죽는 비극을 겪는다.
범인은 믿었던 아들의 웅변학원 원장. 비통한 심정의 신애는 교회에 나가며 신에게 귀의하고 용서를 결심한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대면한 평안한 얼굴의 유괴범은 이미 신의 용서를 받았다 고백한다.
충격을 받은 신애의 실망과 고통은 나날이 극심해진다. 신에 대한 원망에 몸부림치다 결국 자해를 한 신애는 거리로 뛰쳐나가 쓰러지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시간이 흐른후 퇴원한 신애는 종찬과 함께 살던 동네로 돌아온다.
미용실에 들려 머리를 정리하려던 신애는 미용사인 유괴범의 딸을 우연히 만난다. 머리를 자르던 도중 미용실을 나와 하늘을 노려보는 신애. 집으로 돌아온 신애는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종찬은 거울을 들어준다.
잘린 머리카락은 햇빛 속에서 날아간다. 햇살이 마당에 고인 초라한 물 웅덩이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중세인이 만났던 아름다운 빛은 과연 어디 숨어있었을까. 신애는 그 빛을 만났을까.
밀양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고통, 용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구도 속시원히 신애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신과 사랑에 대해 묻는다. 영화의 시작은 밀양의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작해 땅을 클로즈업하며 끝난다. 빛은 꽉 차 있는 동시에 숨어있다. 밀양은 곧 우리의 세상을 상징하는 은유적 공간이다.
밀양 (2007)/ 네이버영화
신애는 신에게 반항하고, 질문하고, 도발한다.
“만약 하나님 사랑이 크시다면 왜 우리 준이가 처참하게 죽도록 내버려뒀어요?" / "세상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거를 아셔야 돼요. 저기 저 햇빛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숨어 있다고요." (선교사) / "여기 뭐가 있어요? 햇빛이예요, 햇빛. 아무 것도 없어요.”
영화 속 신애는 대부분의 인간들처럼, 신을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어디에 있을까. 감독은 말한다.
‘우리 삶의 의미와 희망이 하늘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속에 있다는 생각을 담고 싶었다’. 여기서 삶의 의미와 희망이 곧 감독에겐 비밀의 ‘빛’이요 ‘신’일 것이다.
"내가 들어드려도 되겠지예?" 마지막 장면에서 종찬이 거울을 들며 하는 말이다.
중세의 성당은 하늘 멀리 신을 빛의 예술로 구현해 인간을 구원하려 했고, <밀양>은 영화라는 매체로 땅의 빛으로 숨은 신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중세 유럽은 종교의 신성과 정치경제의 세속적 욕망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었기에, 종교개혁을 거쳐 맞이한 르네상스 시대는 다시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눈을 돌린다.
먼 훗날 이창동 감독의 예술적 기반이 되는 ‘리얼리즘 Realism’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하며 현실에 대한 새로운 미학과 예술의 가치를 선보인다.
중세인들과 영화 속 신애처럼, 21세기 ‘고독사’란 이름으로 떠나가려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빛이 찾아드는 상상을 해본다.
그 빛이 당신의 현실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일깨워주는 성스러운 천상의 아름다운 빛이던, 어설프고 누추하게 땅 위 어딘가 숨어있는 빛이던, 종종 그 어두운 방을 찾아 환히 비춰주면 좋겠다. 현란하게 번쩍이는 파사드 전광판의 빛 보다, 마음을 챙겨주는 빛이 스며들어 그 이의 힘을 북돋아 주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외로워하면서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이 시대에, 그런 빛이 고루 널리 퍼져 종찬의 마지막 대사가 또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으면 좋겠다.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