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의 얼굴
근래에 코로나 이전까지는 매년마다 초음파 무료 진료로 농촌교회와 마을 주민들을 섬겨 주셨던 연세유엔의원 원장님의 섬김으로 몸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한 할머니 교우 분이 계셨습니다.
따님이 사는 수원의 빈센트 병원에 입원하셔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하기에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춘천에서 수원으로 가는 직행 버스편을 이용하여 수원 터미널에 내렸습니다.
낯선 동네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택시로 이동할 수밖에 없기에 승차했습니다.
어느 곳의 사거리에서 택시가 멈추었는데, 마침 길 옆에 펼침막이 있었습니다.
“내 이웃의 얼굴”이라는 큰 글씨와 제 6회 사람 展이라는 작은 글씨의 현수막이었습니다.
”내 이웃의 얼굴“이라는 주제가 개인적으로 실감나게 가슴에 닿았습니다.
경기 민족 미술인 협회가 주최하는 사람 전의 주제였습니다.
다음은 언론에 공개된 사람 전 정기 기획전의 취지입니다.
<사람전은 모든 문제의 근원적 출발은 인간이라는 사람중심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해보고자 기획된 경기민족미술인협회의 정기 기획전으로 올해가 6년차인 이번 전시는”내 이웃의 얼굴“을 통해 우리 시대를 성찰해 보는 특별한 전시가 될 것이다.
이웃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사고의 전환이 불러 일으키는 작가적 상상력은 인간 문제에 다양한 메시지를 새롭고 신선하게 전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더 뉴스 라이트 8월 8일자 기사 일부 인용)
미술에 대한 기본적 조예가 없는 문외한 이기에 사실 전시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펼침막의 주제 구호는 이 단체의 의도와는 별도로,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익히 알듯이 ”얼굴이라는 말은 얼과 꼴이 합쳐진 말“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이가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을 담아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 점을 전제로 해 놓고 보면 노년에 남겨야 할 얼굴이 어떠해야 할지는 언급하지 않아도 공감할 것입니다.
택시안에서 스쳐 지나듯이 보았던”내 이웃의 얼굴“이라는 현수막 구호를 보며
들에서 아우 아벨을 쳐 죽인 가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물음과 연결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세기 4;9>
흥미로운 사실은 “아벨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철면피처럼 대답하는 가인의 자세와 답변입니다.
특별히 지키는 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인 샤마르 (shamar)입니다.
소금 성경에 의하면 샤마르의 뜻은 <파수하다, 지키다 , 주의하다, 준수하다, 보존하다, 감시하다, 돌보다, 보호하다.>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돌보고 보호해야 할 입장이었음에도 오히려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끝내는 미움의 마음으로 살인까지 행하는 인두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가인의 모습은 심중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악한 행동이 어디까지인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갈수록 내 코가 석 자인 시대 속에서,“내 이웃이 어디 있느냐?(창4:9)” 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10;36下)라 물으셨던 존재론적인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자리에서 자문(自問)해야 할 물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