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 影幀(영정)
Uldolmok(울돌목) 뜰채 숭어잡이 珍風景(진풍경)
#右水營(우수영) [어영차바다야]~~~!!!!!!!!
명량해협(鳴梁海峽) 또는 Uldolmok(울돌목)은 全羅南道(전라남도) 海南郡(해남군) 門內面(문내면)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의 있는 海峽(해협)이다. 길이 約(약) 1.5km이며, 幅(폭)이 가장 짧은 곳은 約(약) 300m 정도가 된다. 밀물 때에는 넓은 南海(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鳴梁海峽(명량해협)을 通過(통과)하여 西海(서해)로 빠져 나가 潮流(조류)가 5m/s 이상으로 매우 빠르다. 이를 利用(이용)하여 丁酉再亂(정유재란) 當時(당시) 鳴梁海戰(명량해전)에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이끄는 朝鮮軍(조선군)이 勝利(승리)하였다. 물길이 暗礁(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하여 Uldolmok(울돌목)이라고도 불린다. 流速(유속)은 約(약) 10노트(10knot, 時速(시속) 20km 정도)라고 한다.
1984年(년) 完工(완공)된 鳴梁(명량)을 가로지르는 길이 484m, 너비 11.7m의 珍島大橋(진도대교)가 建設(건설)되어 珍島(진도)와 海南郡(해남군)이 連結(연결)되어 있다. 2005年(년) 12月(월) 15日(일) 第(제)2珍島大橋(진도대교)가 開通(개통)되었고, 2008年(년) 부터, 빠른 潮流(조류)를 이용한 潮流(조류)發電所(발전소)의 建設(건설)이 進行(진행)되고 있다.
Uldolmok(울돌목)은 西海(서해)의 길목으로 幅(폭)은 294m로, 물살이 세다. 1597年(년) 丁酉再亂(정유재란)때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은 Uldolmok(울돌목)으로 들어가는 入口(입구)인 임하도(林下島)에서 當時(당시) 航海路(항해로)였던 좁은목을 막고 林下島(임하도)의 地形(지형)과 물살을 利用(이용)해 배 13隻(척)으로 10倍(배) 以上(이상)의 敵艦(적함) 130餘隻(여척) 以上(이상)을 크게 擊破(격파)하였다.
壬辰倭亂(임진왜란) 主要(주요) 海戰(해전)의 背景(배경)
Uldolmok(울돌목)의 槪要(개요)
Uldolmok(울돌목)은 우리말로써 鳴梁(명량)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Uldolmok(울돌목)의 ‘울 ’은 ‘운다 ’의 뜻이고 ‘돌 ’은 ‘돌다 ’의 뜻이다 . 卽(즉) 물길이 휘돌아 나가는 바다가 마치 우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려 붙은 이름이다 . 『여지도서 』에서는 명양 (鳴羊 ), 『海東輿地圖(해동여지도) 』에서는 莞島(완도) 땅에 명량선참(鳴梁船站 ), 『東與圖(동여도)』에서는 명량(鳴梁),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에서는 명량항 (鳴梁項)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 . 이를 보면 鳴陽(명양)과 鳴梁(명량)으로 混用(혼용)되어 稱(칭)하였음을 알수 있다.
Uldolmok(울돌목), 卽(즉) 鳴梁(명량)은 現在(현재) 全羅南道(전라남도) 珍島郡(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海南郡(해남군) 門內面(문내면) 학동리 사이의 海峽(해협)으로 이 海峽(해협)의 가장 좁은 幅(폭)은 293m 이며 , 潮流(조류)는 사리 때의 流速(유속)이 11.5 note(노트)이고, 水深(수심)은 19m 이다 . 南海(남해)에서 들어온 바다는 鳴梁(명량)을 지나며 初速(초속) 6m가 넘는 매우 빠른 속도의 潮流(조류)로 突變(돌변)한다 . 여느 바다에 比(비)해 4倍(배)나 빠른 속도로써 하루 4 차례 밀물과 썰물이 反復(반복)된다 . 더구나 不規則(불규칙)한 水中(수중) 巖盤(암반) 때문에 물이 솟구치거나 回轉(회전)하는 회오리 現像(현상)이 일어난다.
『輿地島嶼(여지도서)』에서는 右水營(우수영)과 珍島(진도) 사이에 있다 . 병 주둥이처럼 생겼는데 , 큰 물결과 커다란 파도가 좁은 夾谷(협곡)을 만나 방망이를 찧는 듯한 격렬한 소리를 내며 운다 . 배가 지나갈 때면 , 위로 솟구쳤다가 바다 속으로 빠지는 듯하다라고 記錄(기록)하고 있다 . 이러한 地形(지형)의 特性(특성)을 利用(이용)해 丁酉再亂(정유재란) 때인 1597年(년) 9月(월) 16 日(일) 鳴梁(명량)에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이끄는 朝鮮(조선)水軍(수군)이 日本(일본)의 水軍(수군)을 大破(대파)한다.
2008年(년) 5月(월)에는 Uldolmok(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利用(이용)한 1000KW급 試驗潮流發電所(시험조류발전소)가 設置(설치)되었다. 海峽(해협) 위로는 海南(해남)과 珍島(진도)를 잇는 우리나라 最初(최초)의 사장교인[斜張橋:橋脚(교각)이 없이 양쪽에 높이 세운 버팀기둥위에서 비스듬히 늘어뜨린 cable(케이블)로 다리 위의 도리를 지탱하는 구조의 다리] 珍島大橋(진도대교)가 架設(가설)되어 있다. 珍島大橋(진도대교)는 1984年(년)에 第(제) 1 珍島大橋(진도대교)가, 2005年(년)에 第(제) 2 珍島大橋(진도대교)가 開通(개통)되어 只今(지금)의 雙㪳(쌍둥)이 다리를 完成(완성)했다.
Uldolmok(울돌목) 周邊(주변)으로는 Jindo Tower珍島(진도타워) 忠武公戰捷碑(충무공전첩비), 祿眞(녹진)觀光地(관광지) 等(등)이 있다 . 그 中(중) Jindo Tower珍島(진도타워)는 Uldolmok(울돌목)의 land mark(랜드마크)로 불리며 地上(지상) 7層(층) 規模(규모)로 1層(층)엔 珍島弘報觀(홍보진도관), 2層(층)엔 珍島歷史觀(진도역사관)과 鳴梁大捷(명량대첩) 勝戰觀(승전관)이 位置(위치)해있다.
2. 鳴梁大捷(명량대첩)
鳴梁大捷(명량대첩)은 1597年(년) 9月(월) 16日(일) 丁酉再亂(정유재란)때 鳴梁(명량)에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이끄는 朝鮮水軍(조선수군)이 日本水軍(일본수군)을 大破(대파)하여 朝鮮水軍(조선수군)은 다시 戰列(전열)을 가다듬어 海上權(해상권)을 回復(회복)하게 되는 戰鬪(전투)이다.
1597年(년) 丁酉再亂(정유재란)이 일어나자 元均(원균)이 이끌던 朝鮮水軍(조선수군)은 大部分(대부분) 敗(패)하고 이에 그 해 7月(월)에 李舜臣(이순신)이 다시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로 任命(임명)되어 軍事(군사)들의 戰列(전열)을 再整備(재정비)하였다. 當時(당시) 남아 있던 쓸만한 戰船(전선)은 겨우 12隻(척)에 百姓(백성)들이 가져온 1隻(척)이 더해져 13隻(척)이었다.
이때 日本水軍(일본수군)은 閑山島(한산도)를 지나 南海岸(남해안) 一帶(일대)를 侵犯(침범)하면서, 陸軍(육군)의 陸上(육상) 進出(진출)과 同時(동시)에 西海(서해)로 進出(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은 西海(서해) 進出(진출)의 물목이 되는 鳴梁(명량)을 지키기 위해 利津(이진) 於蘭浦(어란포) 等地(등지)를 거쳐 8月(월) 29日(일) 碧波津(벽파진)으로 移動(이동)하였고 그 後(후) 敵(적)의 情勢(정세)를 探知(탐지)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은 鳴梁(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判斷(판단)하여 9月(월) 15日(일) 水軍(수군)을 全羅右水營(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다음날인 16日(일) 日本水軍(일본수군)이 鳴梁(명량)으로 進入(진입)하자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은 最先頭(최선두)에 서서 鳴梁(명량)으로 向(향)하였다. 그 때 鳴梁(명량)의 潮流(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日本水軍(일본수군)의 戰船(전선)은 133隻(척)이었다.
朝鮮軍(조선군)은 鳴梁(명량)으로 들어서면서 一字陣(일자진)을 形成(형성)해 日本軍(일본군)의 通過(통과)를 沮止(저지)하려 했고 一大(일대) 混戰(혼전)이 展開(전개)되었다. 그리고 潮流(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바꾸어 흐르기 始作(시작)했으며, 日本軍(일본군)이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타고 있는 戰船(전선)을 包圍(포위)하려 하자 뒤에 처져 있던 巨濟縣令(거제현령) 安衛(안위)와 中軍(중군) 金應諴(김응함) 等(등)에게 敵陣(적진)으로 突進(돌진)하게 하자, 戰鬪(전투)는 絶頂(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方向(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始作(시작)한 潮流(조류)는 少數(소수)의 戰船(전선)이 活動(활동)하는 朝鮮軍(조선군)에 比(비)해 많은 戰船(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倭軍(왜군)에게 相對的(상대적)으로 불리하였고 峽水路(협수로)에서의 不規則(불규칙)한 潮流(조류) 分布(분포)로 因(인)해 서로의 陣形(진형)과 隊伍(대오)가 崩壞(붕괴)되고 있었다.
激戰中(격전중) 日本(일본)의 水軍(수군)將帥(장수) シングル島(구루시마)의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日本水軍(일본수군)은 士氣(사기)가 極度(극도)로 低下(저하)되었고 이에 戰鬪(전투)의 氣勢(기세)를 잡은 朝鮮軍(조선군)은 玄字銃筒(현자총통)과 各種(각종) 火戰(화전)을 쏘면서 猛烈(맹렬)하게 攻擊(공격)하였다. 조선 戍軍(수군)의 여러 將帥(장수)와 兵士(병사)들이 敵船(적선) 31隻(척)을 擊退(격퇴)시키자 日本水軍(일본수군)은 물러나 逃走(도주)하고 말았다.
이 海戰(해전)의 勝利(승리)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指揮(지휘)하는 朝鮮水軍(조선수군)이 日本水軍(일본수군)의 西海進出(서해진출)을 遮斷(차단)함으로써 丁酉再亂(정유재란)의 大勢(대세)를 朝鮮軍(조선군)에게 有利(유리)하게 展開(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첫댓글 이승철~금 2021-05-21 오전 2:58 ~ 처음 보는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