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96]사랑이 있으니 살아진다?
이제껏(20여년간?) 무슨 책이든 읽고나면 ‘기록이니까’하며 서평도 아니고 북리뷰도 아닌 독후감 비슷한 졸문을 스스로 버릇처럼 남겨왔다*. 그런데, 엊그제 ‘이 시대의 현인’(‘지식소매상’대신 이렇게 지칭하겠다) 유시민이 인터뷰하여 글을 쓰고, 작가 김세라가 기록한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4·9통일평화재단 엮음, 은빛출판 3월 31일 2쇄 발간)라는 ‘강순희 할머니 자서전’을 통독한 후 가슴이 멍멍하고 당최 ‘힘이 빠져’ 졸문조차 쓸 수가 없었다.
억지로 힘을 내본다. 무슨 까닭인가? 엄혹한 박정희정권 시절 고문 조작으로 점철된 1964년 인혁당사건(1차)을 최소한 60대 이상은 들어보셨으리라. 그것만 해도 분통이 터질 노릇인데, 중앙정보부는 1975년 인혁당 재건위사건(2차 인혁당사건)을 발표한 후, 4월 8일 대법원(민복기 대법원장)은 8명에게 줄줄이 사형을 선고했다. 물론 100% 고문 조작. 확정 판결 후 18시간만인 다음날 새벽 30분 단위로 도예종 등 8명의 사형 집행은, 아무리 양보해도 있을 수 없는 일. 국제법학자협회는 ‘세계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다. 정부는 왜, 무엇 때문에 이런 폭거를 저질렀는가? 민청학련의 유신 반대운동이 거세지자 그 배후에 이 조직이 있다고 조작한 것. 어떠한 사법절차도 무시한 채 오로지 혹독한 고문만으로 이뤄진 이 사건에 대해 아시는가? 막 석방된 시인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이들의 고문수사 조작을 폭로한 글을 썼다는 ‘죄’로 곧장 재수감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 강순희(93. 1933년생)는 인혁당 1,2차 사건의 주역(?) 우홍선의 아내였다. ‘아 그렇구나’라고 치부하면 안되는 까닭은 그녀가 겪어낸 참담한 그 세월의 깊이가 곧바 로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한 투쟁사는 눈물겹다못해 억장이 무너진다. 왜 아니겠는가? 멀쩡한 국민으로 죄를 뒤집어씌운 위정자들은 들어야 했다. 그 결과, 2007년 노무현정부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규명을 거쳐, 무려 32년만에 재심에서 8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것을 정의 회복, 인간 승리, 역사 승리라고 해야 할까?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전대미문’의 사건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 투쟁의 한가운데, 남편의 옥바라지를 갈 때도 기가 전혀 죽지 않고 “남편 무죄” “사건 조작”을 외치며 선글라스에 양장을 빼입고 나섰던 강심장의 여인이 있었다. 사랑으로 만나 행복한 ‘남북통일가족’(강순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하얼삔과 박천을 거쳐 평양에서 살면서 평양고녀를 다녔다. 남편 우홍선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군인장교였다)을 이룬지 13년만에 찾아온 최고-최대의 비극 앞에서도 꿋꿋이, 당당하게 2녀2남의 총생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어디에서 그런 강단이 나오는 것일까? 누가 이 할머니를 연약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나? 그녀는 “이제 와 돌이켜보니 사랑이 있었기에 살아졌다”고 담담히 술회한다. 그렇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친정아버지는 ‘큰딸 바보’였다고 한다. 남녀차별이 없었던 것은 북조선의 문화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남편의 사랑이 있어 그 모진 세월을 이겨냈다고, 이제 아흔을 넘어 회고하고 있다. 할머니가 말씀한 것은 모두 다 ‘삶의 어록(語錄)’이었다. 오죽하면 작가가 “나도 아흔 세 살까지 산다면 ‘아흔 세 살의 강순희’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을까.
1974년 민족지(?) 동아일보에는 백지광고 시절이 있었다. 맨 처음 쪽지광고를 낸 사람이 김대중 전대통령이었다던가. 그 가운데 강순희 여사가 낸 쪽지글을 보시라. “여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변함없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들이 당한 인권유린과 억울함, 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과 육신의 고통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나갑시다. 안정과 평안이 보장된 내일을 고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오늘을 불만없이 누리며 살아갑시다. 東亞를 비롯하여 온겨레가 겪는 고난이기에…. 건강과 인내 아름다운 꿈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저의 삶의 전부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1975년 2월 8일 세칭 人革黨關係로 死刑宣告를 받은 禹洪善 被告人의 아내 康順姬 올림”
보시라. 얼마나 씩씩하고 침착하신가? 비교할 사람이 없다. 그런 여장부께서도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몇 달을 앓아누웠다고 한다. 그때 쓴 사부곡(思夫曲) 몇 편을 읽으며 끝내 길게 흐느끼고 말았다. 고스란히 진정(眞情)이 담긴 글은 무학자가 쓴대도 명문(名文)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하물며 할머니는 지식인이었다. 논리정연하게 쓴 탄원서는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아무 소용이 없다니, 누가 강심장인가. 이제는 아무 여한이 없으신단다. 오늘밤에 죽는다해도 괜찮다고 한다. 남편 일로 좀 힘들었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자기한테 주어진 것을 극복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행복했다, 불행했다는 식으로 당신의 인생을 말하고 싶지 않다, 주어진 운명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며 살았다는 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아아-, 할머니는 이미 작가가 명명한 것같이 ‘인생 철학자’가 다 된 것이다. 아아-, 나의 어머니도 아흔이 되자 죽을 때가 됐으니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떼를 부리더니, 모든 약을 끊고 12일 동안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다. <인간극장>에서 고백했듯 “원도 한도 아무 후회도 없어. 빨리 가는 게 젤 좋아. 저그 아버지허고 한날 한시에 가면 그것이 젤 좋아”라고 하셨다. 나는,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부기1: 지난해 6월, 생각지도 않게 졸저가 나왔다. 10여년간 내 졸문의 애독자였던 어느 출판사 여자대표가 그동안 내가 쓴 독후감 비스므레한 글 70편을 엮어 『 찬샘별곡 』 을 펴냈으니 감격, 감동 그리고 영광이었다. 살다보니 그런 일도 있다고 프롤로그만 썼을 따름이었으니.
*부기2: '제주올레'하면 누가 맨먼저 떠오르는가. 올레재단 이사장 서명숙. 그녀는 삶 자체가 ‘투쟁’이었다. 학교 다닐 때에는 민주투사로, 기자일 때는 기사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고향 제주에 ‘올레’(마을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내야겠다고 결심, 두 동생을 앞장세워 올레길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몇 년 전 일본 관광때 ‘쿠슈올레길’에서 ‘간새’를 발견하고, 올레가 수출된 것을 처음 알고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삼가 그녀의 명복을 빈다. 제주도 방언 “살암시민 다 살아진다”는‘살아있으면 다 살아진다’는 뜻이나, 사랑이 없다면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