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철 버드나무 아래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바둑을 두는 그림(그 옆에는 강아지가 심심해 죽겠다는
듯이 졸고 있고)이나 백발을 휘날리며 구름에 뒤덮인 산 정상에서 신선끼리 바둑을 두는 그림(그 옆에
는 나무를 찍다가 만 도끼의 자루가 썩고 있고)--아마 이것이 바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이 아닐
까 한다.
첫째 그림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우선 아버지는 일하
는 사람이다. 시간이 없다. 또한 현실에 너무 얽매여 있다가 보니까 아들을 가르치려고 하면 욕심이
앞서서 손부터 올라간다. 가르치더라도 돈이나 권력과 관계된 내용 곧 현실적인 내용을 가르치려고 한
다. 여기서 바둑은 우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먹고사는 데에 얽매이지 않거나 적
어도 때때로는 넉넉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다. '노는' 게 제일 큰 일과다. 바둑은 딱 알맞은 놀이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놀 수 있는 경기이다.
육체적인 힘도 별로 필요 없다. 머리는 육체와 달리 늙어도 별로 퇴화되지 않는다.
그런데 노는 건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일정한 목적 없이 그냥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막노는 것이
다. 이를 영어로 play라고 한다. 체계가 없는 이런 놀이 끝에 애들은 반복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숨
바꼭질, 구슬치기, 고무줄 넘기 등 일정한 규칙을 정하여 그 안에서 서로 경쟁하며 논다. 이것을 영어
로 game이라고 한다(데스몬드 모리스-인간 동물원). 바둑은 이 중에서 동양을 대표하는 정적인 게임이
다. 지극히 단순한 규칙으로 시작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복잡한,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한 게임이다.
서양에서 발달한 동적인 게임인 스포츠와 구별된다. 서양에도 장기가 있지만, 그것은 바둑에 비하면
경우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어서 벌써 컴퓨터 딥 블루에게 부동의 서양장기 세계 챔피언 카스파로프가
졌다. 6년 후인 2003년 2월에 설욕에 나섰지만, 그는 딥 블루의 동생 딥 주니어와 3:3으로 비겼다.
평생을 연구해도 못다 하여 신선이 되어 '죽을 걱정 없이' 계속 연구하며 두어도 끝이 없는 게 바둑
이다. 신선이 바둑을 둔다는 것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바둑을 두다가 100년쯤 후에 둘 다 호호백발이
되어 그만 '죽는 것도 깜박 잊고' 너무 재미있어서 '검은 돌 흰 돌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뜻으로 읽
을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따분하기 짝이 없는 사회다. 매일 놀고 먹
고(아니, 영혼이니까 먹지는 않겠지) 노래하고 춤추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입으로는 아름다운 말만 하
고 손발로는 착한 일만 하는데, 가만 생각하면 이건 술도 없고 섹스도 없고, 도대체가 그건 천국이 아
니고 지옥이다. 사흘만 그렇게 살면 다들 돌아 버릴 것이다. 천국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실지로는 아
는 게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상상이란 것도 별 게 아니다. 어느 선 이상은 절대 넘지 못한다.
그런데 신선이 바둑을 둔다? 이건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천국에 가서도 바둑은 '인기짱'이란 말
이다. 바둑은 그만큼 재미있다는 말이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동양의 무릉도
원 이야기나 서양의 립 반 윙클 이야기에서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듯이 행복은 시간을 모른다.
1,000년이 1초처럼 지나간다. 이렇게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바둑이라는 말이
다.
두 그림 모두 상대가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재미라는 것은 최소한 두 사람은 있어야 '짜릿짜릿하
다'는 말이다. 혼자 있어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놀 수 있지만, 그건 '짜릿짜릿함'이 동원되지 않는 '밋
밋한' 재미이다. 상대가 있어야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겨룰 맛이 난다. 아니면 어
머니가 아들딸을 위하는 것처럼 상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갖은 머리를 다 쓰게 된다. 할아버지와
손자도 좋고 신선과 신선도 좋다. 하여튼 상대가 있어야 한다. 이 두 쌍은 치열한 경쟁이 없는 사이
다. 한쪽은 할아버지와 손자라서 서로 경쟁 상대가 안 되고(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경쟁 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높고 형제나 친구 사이라면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경쟁이 벌어진다.), 한쪽은 탈속한 신선과
신선 사이라서 기어코 이겨서 상대방을 굴복시킬 생각을 않는다. 그러면 무슨 재미로? 아니다. 그런
경쟁심을 떠나서 놀이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그만큼 바둑은 재미있다는 말이다. 또한 지나친 승부욕
이나 경쟁심은 도리어 바둑을 망친다는 의미도 된다. 무념무상, 물아일체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말
이다.
읽어낼 코드가 한참 남았지만(여름철, 버드나무, 강아지, 구름, 산 정상, 도끼 자루), 이쯤하고; 할
아버지와 손자가 각각 상징하는 것을 대충 꼽아 보면: 할아버지는 '경험과 인격과 지혜'를 나타내고
손자는 '순수함과 호기심과 창의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둘은 서로 실력도 비슷할 수 있다.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 여기에서 바둑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 할아버지의 장점과 손자의 장점을 다 갖춘 사람
이 바둑의 고수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볼 때 바둑은 사춘기부터 시작해서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절정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판전(사카다)은 마흔 '온갖 유혹에 덤덤한 시절'에 접어들어서야
절정기에 달했지만, 이창호는 열 다섯 '온갖 유혹에 모든 말초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여드름 시절'부
터 절정기에 달했다. 열 다섯부터 쉰--할아버지와 손자의 중간 나이가 절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창호는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나이 열 다섯에 그 속에 할아버지의 '경험과 인격과 지혜' 그리고 손자
의 '순수함과 호기심과 창의력'이 한데 융합되었던 것이다.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나라가 통일된 후 바다를 건너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지만 별 재미를 못 본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 후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 덕천 막부가 들어서면서 마침내 기나긴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온다. 막부와 대명(영주)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전쟁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
다. 이미 이웃 나라를 쳐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전쟁은 누
구나 두려워하게 된다. 이제는 인생을 즐기는 일이 남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즐길 일로는 기생을 택했고 아랫것들을 시켜 '전쟁'을 대신하게 하여 보고 즐
길 것으로는 여러 '유희'를 발달시킨다. 검도, 유도, 다도, 참선 등이 일종의 전쟁 대용품 '유희'였
다. 그래서 이들 '유희'는 누가 1등이냐, 2등이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다도와 참선은 일상의
인간 세계를 벗어나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해졌다. 다도의 1인자,
참선의 1인자가 언제나 존재했다. 물론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등도 본격적으로 발달시킨다. 이런 여
러 문화 중에 바둑이 있다. 막부와 대명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치열한 '바둑 전투'가 벌어진 것이
다. 대리 전쟁이었다. 무려 300년! 과히 바둑의 춘추전국 시대였다. 도책, 수책 등 전설적인 바둑 고
수 대여섯 명이 짧은 '의사(擬似)' 통일 천하를 이룬 고수라 할 수 있다. 맹상군, 춘신군 등 전국(戰
國) 4군(君)에 해당할 고수였다. 그러나 진시황에 해당하는 초절정 고수는 아무도 없었다.
산업화와 더불어 마침내 현대 바둑의 시대가 활짝 열린다. 한국과 중국에 비해 산업화에 100년 앞선
일본이, 물질적 풍요 덕에 바둑만 두고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수용할 여건이 된 일본이
이전의 300년 바둑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세계 바둑계에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으
로 비롯된 동양 3국의 국제화와 더불어 중국계와 한국계의 바둑 기재들도 소수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다. 놀랍게도 이들이 일본을 휘어잡는다. 오청원, 임해봉, 조치훈! 조훈현은 일본에서 배울 만큼 배우
고 한국에 되돌아와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한국도 눈부신 경제성장과 더불어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사는 사람을 아무도 탓하지 않고 기꺼이 거기에 돈을 댈 사람이 우르르 생겨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었다. 중국도 개혁개방과 더불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스타가 곳곳에 필요하게 된다. 영화와 연속극
과 경극과 스포츠와 바둑이 단연 인기였다. 중일슈퍼대전과 더불어 80년대 이후 바둑은 폭발적인 인기
를 누린다. 그 이전은 먹고살기에 너무 고달파 중국은 바둑 따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일본의 들
러리서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런 게 있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동양 3국이 함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바둑에도 인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바둑
이 국제화된 것이다. 이 때 최고의 바둑 고수들은 전혀 엉뚱하게도! 인구도 제일 적고 국부도 제일 작
고 근대 바둑도 제일 늦게 시작하고 제일 침착하지 못한, 국민성이 무념무상과는 제일 거리가 먼 것
같은, 축구나 각종 제품에서도 잘 드러나듯 마무리가 영 시원찮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그 이름이 바
로 이창호와 조훈현이다. 이 두 사람이 단연 돋보였다. 국제 대회 우승: 이창호 20회, 조훈현 9회!
두 사제가 국제기전의 절반을 쓸어 담았다! 그 둘 중에서도 이창호는 압도적 1위로 바둑이 국제화된
후 10년을 지지 않는 태양으로 군림했다. 중일은 기껏해야 한 사람의 최고 우승 횟수가 3번. 과히 비
교도 안 된다. 개인전만 아니라 단체전에서도 2002년까지 이창호를 주장으로 내세워 불패의 신화를 이
루었다.
인생의 경험과 지혜와 인격이 농익는 중년 이후에야 비로소 바둑의 현묘한 길을 안다고 했는데, 일본
에서는 조치훈이 한국에서는 이창호가 최연소 기록을 무더기로 세우며 기존의 상식을 하나하나 깨어
버렸다. 바둑은 곧 도라는, 바둑판은 곧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수천 년 면면히 이어 오던 고정관념을
이들은 여지없이 깨어 버렸다. 과연 바둑은 무엇인가?
*여기까지가 1부입니다. 2부에서 끝낼 생각인데, 혹시 더 길어질지 모르겠습니다. 바둑을 둘 줄도 모
르는 제가<저의 기재(?)를 알아보고 친구들이 나도 나도 가르치려고 들었지만, 일단 시작하면 너무 빠
질 것 같아 기어코 안 배웠답니다.> 시건방지게 만든, 다음 바둑의 함수에서 그 기호가 각각 무엇을
뜻할까요? 뭔지 몰라도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 다음 공식은 제가 바둑용으로 만들었지만 바둑뿐만
아니라, 스포츠, 전쟁, 경영 등에도 얼마든지 확대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 바둑의 함수를 적용하
면 왜 이창호가 그렇게도 강한지, 왜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압도하는지 일목요연하게 드러납니다.
바둑의 함수: B=PC(E + S²)
(200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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