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72
12월14일[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대림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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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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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CtsSzLMAvM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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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1542~1591)이 살았던 중세 시대는 수도 생활의 부흥기를 지나 쇠락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에게 있어 완덕에 대한 열망이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타성에 빠진 수도자들의 얼굴은 냉랭했고, 게을러빠진 수도자들은 자꾸만 회칙을 완화시켰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실하고 올곧은 가르멜 수도자 요한은 원칙대로! 를 강조하며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오 수사를 비롯한 마음이 맞는 수도자 몇 명과 더불어 엄격한 금욕과 극기,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안락하고 쾌적한 대 수도원 건물을 뒤로하고 다리를 뻗기도 힘들고 서 있기도 힘든 작은 방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여기저기 비가 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외출을 할때는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러한 쇄신된 삶을 살아가면서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동료 수도자들을 회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자연스레 얼굴과 뱃속에 기름이 가득한 게을러빠진 동료 수도자들에게 미운털이 깊이 박혔습니다. 자신들의 비행이나 과오는 덮어둔 채, 갖은 방법으로 요한 사제를 괴롭혔습니다.
총회가 개최되자 요한 사제를 오해한 총장은 그를 톨레도 수도원의 깊은 지하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그가 총회에 나타나서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몰라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제는 갖은 학대와 모욕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사악하고 매정한 동료 수도자들을 향해 일언반구도 항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바꾸었습니다. 부족한 내게 겸손의 덕을 쌓게 하는 은인!
이토록 탁월한 성덕은 오래가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머지않아 요한 사제의 결백과 인품이 알려졌고, 비오 5세 교황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그의 이상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특수한 가르멜회를 정식으로 인준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요한은 항상 초긍정 마인드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으며, 십자가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은혜롭고 신비스러운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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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azCu6Ev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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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당연히 지금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에게 용서를 받게 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그러나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이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는데 친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다고 한번 오라고 초대장이 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그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런데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과 기자들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백 명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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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유력 정치인이며,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가장 높은 야당 대표에게 범죄 혐의가 있다고 기소되어서 재판받고 있습니다. 2024년 6월 12일 기준으로, 총 7개의 사건에서 11개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주요 혐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위증교사 혐의가 있습니다. 2018년 자신의 재판에서 증인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검찰은 징역 3년을 구형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2002년이니 22년 전의 사건입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있습니다. 2024년 11월 1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전직 대통령 후보였고, 현직 대통령과 근사한 표 차이로 낙선했습니다. 낙선한 후보에 대해서 공직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미 패했기 때문입니다.
제삼자 뇌물 혐의가 있습니다. 쌍방울 그룹의 대북 송금 과정에서 제삼자 뇌물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배임 혐의가 있습니다. 대장동 개발사업 과정에서 약 4,895억 원의 배임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백현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 성남FC 후원금 의혹 등 여러 사건으로 기소 되어 재판받고 있습니다. 대부분 혐의는 10년 가까이 된 일들입니다. 야당에서는 유력 정치인에 대한 무리한 기소와 탄압이라고 합니다. 여당에서는 그런 사람은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검찰이 무능하거나, 유력 정치인에 대한 탄압이라고 여당의 정치인이 이야기했습니다. 300번 넘게 압수수색 했으면 결과를 가지고 빨리 결론 내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재판을 끌어오니 탄압이란 명분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2019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정치도 민생과 국가를 위해 여당과 야당이 협치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이번 비상 계엄 파동도 잘 마무리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걸었던 ‘엘리야’를 칭송합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결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 수가 많았지만 패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 청하여 비가 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봉헌을 칭찬하며 하느님께 청하여 가뭄이 끝날 때까지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보는 중에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삶은, 엘리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돌아온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헤로데는 많은 정보와 권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지만,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율법과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눈이 멀어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없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왔던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하였습니다. 가난한 목동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들판을 달려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메온과 한나도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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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방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선물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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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 48,10)라는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그가 구세주 예수님을 준비시키고자 왔다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 또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다루어질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분께 돌아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도, 그분의 말씀과 기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나도,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26,3-4) 정작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던 사람들’, ‘하느님과 아주 가까워 보이는 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늘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성체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삶,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안에서 믿음은 자라고 커 나갑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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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왜 믿는가?”부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1)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마태 17,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체험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의문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믿지만, 엘리야 예언자가 메시아보다 먼저 온다는 예언은 실현되었는가? 실현되었다면 누가 엘리야 예언자인가?” 예수님의 답변은 “엘리야는 이미 왔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엘리야라는 것을 믿지 않고 그를 죽였다. 엘리야 예언자를 죽인 자들은 메시아도 죽일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 예언자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는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더 굳게 확신하게 되었다.”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예수님이 메시아(구세주)라는 사도들의 증언은, 무슨 공부를 통해서 얻은 지식도 아니고,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사도들 자신들이 직접 체험하고 믿은 일에 대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직접 보았다. 그래서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도 같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3) 그렇지만 사도들이 믿었으니 우리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다시 표현하면, “우리가 찾는 메시아가 예수님이라고, 또 우리가 원하는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사도들이 알려 주었다.”입니다.
신앙이란, 강제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믿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억지로 믿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만난 일과 믿게 된 일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요한 1,35-41)
안드레아 사도가 베드로 사도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한 것을 근거로 해서, 제자들은 원래 메시아 강생을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고,메시아께서 주실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시다.” 라고 알려 주었고, 그들은 그 말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는 “예수님의 삶을 보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입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또 구원이 아닌 다른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면, 세례자 요한의 말을 흘려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만일에 하느님 나라, 구원, 생명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세속의 부귀영화나 출세나 성공 같은 것만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고, 종교나 신앙을 가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얻기만을 희망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신앙이 아닙니다. 대림 시기는, “나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를 다시 반성하고 점검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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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마태 17,1-9 참조)의 후속 보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십니다. 앞서 마태오 복음 16장 21절에서 예고된 예수님의 운명은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 이어서 오늘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예고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오늘 복음의 중심을 이룹니다. 먼저, 제자들이 엘리야와 그의 역할을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말라키 예언서 3장 23절에 따르면, 엘리야는 오기로 약속된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입니다.(마태 11,14 참조) 마태오 복음 17장 2-3절에서 예수님과 모세뿐 아니라 엘리야의 발현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의 나타남이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한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는 메시아의 오심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를 같은 인물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마태오 복음 17장 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보다 강한 어조로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척받고 고난받은 엘리야의 예언자적 모습에서 세례자 요한을 보셨고, 세례자 요한의 고난은 다가올 예수님 당신의 고난을 미리 보여 준다고 이해하셨습니다.
이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런 예언자적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예언자적 활동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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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집회서의 후반부로서, 모든 유다인들이 존경하며 기다리는 대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룩한 주요 업적들을 언급한 후, ‘정해진 때’ 즉 하느님께서 정하신 종말의 날에 그가 다시 이 세상에 내려와 수행하게 될 소명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소명은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는 것이지요. 즉 종말의 날에 엘리야 예언자가 나타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멸망을 예고하는 두렵고 무서운 표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시어 참된 행복의 나라로 데려가신다는 구원의 약속이자 기쁨의 표징인 겁니다. 그와 비슷한 메시지가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키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그렇기에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를 먼저 보내시는 것은 당신 백성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니 엘리야 예언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보았다면 종말의 날이 임박했음을 떠올리며 지금 즉시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히 대사제나 율법학자 같은 종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층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적힌 예언에 따라 메시아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함을 강조하면서, 아직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메시아도 오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 수많은 군중들이 추종하는 예수라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이미 세례자 요한이라는 대예언자가 나타나 종말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려주고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준비시키는 소명을 다 하고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엘리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가 헤로데에게 붙잡혀 참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짜 엘리야라면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화해시키고 무너진 국가의 재건하는 소명을 완수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죽어버렸으니 그런 무능하고 약한 이가 엘리야 예언자일 리가 없다는 논리이지요. 즉 아직 이 땅에 엘리야가 재림하지 않았으니 메시아도 안오셨다고, 그렇기에 예수라는 자는 절대 메시아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시고자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지요. 즉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왔지만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진 유다인들은 그가 전한 회개와 극기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헤로데를 필두로 한 권력자들이 그를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눈엣가시로 여겨 제거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마저 자기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며 핍박할 거라고 예고하시지요. 우리도 얼마든지 그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분 뜻을 따르기보다 내 뜻을 앞세운다면, 그분께서 말씀하신 계명과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탐욕과 집착에 휘둘려 산다면, 다시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을 제멋대로 다룰 생각 말고 그분 뜻에 순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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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의 대작을 남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작을 남긴 이유를 들으셨습니까? 다름 아닌 빚 때문이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많은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또 ‘고리오 영감’을 쓴 프랑스 작가 오노레 데 발자크도 도박 빚에 쫓겨서 억지로 글을 썼고 그 글로 엄청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대작은 때로 이렇게 조급하고 불안할 때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위기라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가올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님을 당신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 꾸준함으로 뉴스 기사의 한쪽을 채우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쉰 살이 넘어 사이클 마니아가 되었다는 이야기, 예순 중반에 머슬 마니아 대회에 참석하신 분, 일흔이 넘어 대학교에 입학하신 분 등등 정말로 많습니다. 이분들이 탁월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탁월함보다 꾸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시계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20대에는 취업하고, 30대에는 결혼하고, 40대에는 내 집 마련 같은 과업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6~70대에는 은퇴와 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나의 시계와 사회적 시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함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이미 왔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으며, 이제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받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왜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으로 온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세상의 눈으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꾸준함을 가지고 하느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그들은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례자 요한도 또 예수님도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처럼 보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은 더 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꾸준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우리의 구원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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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다만 끝까지>
마태오 17,10-13 (엘리야의 재림)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오직 다만 끝까지>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17,12)
오직 믿음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믿기 때문에
불신이 비난할지라도
끝까지 믿을 수 있기를
오직 희망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희망하기 때문에
체념이 붙잡을지라도
끝까지 희망할 수 있기를
오직 사랑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사랑하기 때문에
무관심이 유혹할지라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오직 진실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진실하기 때문에
거짓이 가릴지라도
끝까지 진실할 수 있기를
오직 정의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정의롭기 때문에
불의가 더럽힐지라도
끝까지 정의로울 수 있기를
오직 자유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자유이기 때문에
억압이 짓밟을지라도
끝까지 자유일 수 있기를
오직 평화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평화이기 때문에
폭력이 할퀼지라도
끝까지 평화일 수 있기를
오직 품음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품기 때문에
내침이 거부할지라도
끝까지 품을 수 있기를
오직 돌봄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돌보기 때문에
버림이 팽개칠지라도
끝까지 돌볼 수 있기를
오직 베풂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베풀기 때문에
탐욕이 움켜쥘지라도
끝까지 베풀 수 있기를
오직 섬김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섬기기 때문에
폭정이 삼킬지라도
끝까지 섬길 수 있기를
오직 살림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살리기 때문에
죽임이 덤빌지라도
끝까지 살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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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를 보면“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고 적혀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고,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6-17)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 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주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 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깨우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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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오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며,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베드로 1서 4,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피서 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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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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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엘리야의 재림>
-나는 누구의 재림일까?-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어 주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작금의 위기의 시대, 저절로 시편 화답송 후렴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참으로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또 배웁니다. 이 또한 전화위복이 기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견해가 극단적으로 갈리니 참 잘 분별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래서 현재를 알기위해 역사 공부는 필수입니다. 역사를 통해 오늘을 잘 드려다 보고 분별하여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만세칠창중,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기도는 절박하고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새벽 언뜻 눈에 들어온 성구가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다. 그분 안에는 어둠이 없다”(God is light, and in Him, there is no darkness)
괄호 안에 영어로 써놓고 다시 확인해 봅니다. 참으로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 하느님의 빛입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진리의 연인’이 되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와 더불어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현자의 지혜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반듯해지고, 군주는 간諫하는 말을 들으면 거룩해진다.”<서경>
“막막한 바다와 같은 삶을 헤매지 않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자신만의 별자리를 마련하라.”<다산>
길잡이의 스승과 주변의 의견에 경청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의 좌표가 되는 자신만의 별자리 같은 영적스승을 영적도반을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저의 별자리가 되는 분들은 교회내의 별같은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는 중세기 스페인의 아빌라의 대 데레사와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역시 제 별자리가 되는 분입니다.
1563년 21세 되던 해, 가르멜회에 입회해 1567년 사제가 된 후, 여성 가르멜회 개혁에 성공한 아빌라의 데레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맨발 가르멜회’를 창립하여 개혁을 시도하나 거부되어, 1577년 가르멜회 수사들에 의해 톨레도의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9개월후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 뒤 1581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맨발 가르멜회가 공인되지만, 1591년 마르리드에서 개최된 수도회 총회에서 비판을 받아 은자가 되었고, 그해 우베다의 한 수도원에서 쓸쓸히 향년 49세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평생 고통과 수난의 삶이었지만 성인의 영적체험과 주옥같은 시편들은 그 누구의 추종도 불허합니다. 십자고상의 예수님과 대화의 신비체험도 유명합니다.
“요한아, 너의 이 모든 수고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고 경멸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깊고 멋진 주님과 사랑의 만남인지요! 이런 영적 환시 체험이 연속된 고난을 이겨낸 힘이 되었음을 봅니다.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을 때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님, 당신만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을 제외한 어떤 것도 원치않습니다.”라는 고백도 연상됩니다. 두분 다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삶의 전부였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성인의 영성고전에 속하는 대표 작품으로는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가 있습니다. 1726년 교황 베네딕도 교황 13세에 의해 시성되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현재의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엘리야의 재림을 알아채는 예수님의 혜안이 놀랍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영광스러운 변모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대화를 나눈후 일어난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새삼 시공을 초월하여 빛이신 하느님 안에서 옛 성인들과 깊은 내적 통교를 나눴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를 스승으로 삼았던, 또 ‘진리의 협조자’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교황 베네딕도 16세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물음에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뿌리에 닿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뤘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망각의 병이 문제입니다. 망각의 무지로 인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이고 인류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알았고, 세례자 요한의 고난에서 자신의 고난을 예견하는 예수님입니다.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이라면 대림시기를 맞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재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가 누굽니까? 구약에서 에녹과 모세와 더불어 승천한 분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 오늘 제1독서가 잘 보여줍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통쾌한 집회서의 말씀 안에 얼마나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은 엘리야인지 그 진면목이 잘 드럽납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정해진 때가 되자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의 재림이 되어,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어른들의 마음을 젊은 이들에게 되돌리며 공동체내의 안정과 평화를 구축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후반부 말씀도 참 좋은 힘이 됩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만나는 참 좋은 성인들이고, 우리를 떠났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주님 안에서 잠든 행복한 분들이요, 우리도 반드시 살아나 만날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림시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함께 우리 모두 재림한 세례자 요한이 되어 주님의 길을 마련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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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2의 엘리야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그)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존중하는가? 나는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인가?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엘리야가 와서 지금처럼 어지러운 우리나라를 바로잡아준다면,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들을 정신 차리게 해준다면 환영하겠지요.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만일 환영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도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바로잡는 그분이 내게 온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환영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환영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맞이할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가 남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좋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싫고, 또 내 잘못을 내가 바로잡는 것은 좋지만 남이 내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싫고 환영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바로잡느냐, 바로잡을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내가 나를 바로잡는다면 주님도 엘리야도 오실 필요가 없고, 오시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살아온 대로 살려는 관성이 대단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바로잡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바로잡는 것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으로 심하게 굽은 척주를 교정할 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바로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인이 아니기에 이처럼 바로잡는 예언자를 환영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억지로라도 맞이하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엘리야가 되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2의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처럼 바로잡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래도 엘리야처럼 하라고 파견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엘리야처럼 불같이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면 그 파견을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잡아주려고 할 때 ‘어서 바로잡아주세요.’ ‘고맙습니다.’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죽임당하지는 않더라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던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온갖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다시 오는 엘리야가 되려면 자기 잘못을 고치는 데 급급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잘못을 같이 바로잡아가려는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열정이 고통을 무릅쓰고 더 나아가 삼켜버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정, Passion.
엘리야의 열정,
세례자 요한의 열정,
그리스도의 수난의 열정(Passion of Christ)을
이 대림절에 다시 생각하는 오늘 우리이고 제2의 엘리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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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17,12ㄱ)
<십자가라는 문!>
오늘 복음(마태17,10-13)은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엘리야가 재림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고,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처럼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온전히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한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이 쓴 '영적 찬가'(성무일도서 제2독서)에서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보화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는 문은 십자가라는 문입니다. 그 문은 좁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들어가고 싶어하는 이들은 적지만, 그것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많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이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희망인 '영원한 행복(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 안에 머문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선물)'입니다.
오늘은 '사회교리주간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해 보았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던져보게 됩니다.
정말 내가 하느님을 믿고 있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있는 참신자인지? 아니면 무늬신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머리로만, 생각과 말로만 영원한 행복을 바라지 말고, 그것을 얻기 위해 진실되게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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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지닌 것을
떨구어
내어야만
확연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있는 만큼
부자유로운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있음은
있다고
착각하는
없음으로
깨달음의
빛이 됩니다.
헛된 자아가
없어지면
하느님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
계시는
하느님의
실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제멋대로
다루어도
사랑을
빼앗기지 않는
십자가 성 요한의
자유입니다.
원래부터
존재하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입니다.
있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없음으로
다시
정화됩니다.
끝없는
하느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한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입니다.
아무도
그 자유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를
깨닫는
참된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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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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