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래 시 장
배 금 일
1964년 봄 대학 초년생이 되었다. 부모님께서 그동안 간판도 없이 장사를 하셨는데 작은 점포지만 항상 오늘의 뜻으로 금일상회(今日商會) 라는 간판을 손수 만들어 걸었다,
점포앞을 남북으로 지나는 36번 국도는 자갈과 모래로 다져진 비포장이었다. 이따금 지나는 군용트럭이 일으키는 흙먼지는 얼굴에 쌓여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버적소리가 들린다.
소가 끄는 달구지는 주인에 이끌리어 덜커덩 소리 내며 지나간다. 자전거 탈 때도 주먹 만한 돌에 걸려 중심을 잃고 뒤뚱거리기가 일상이다.
평일에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한가롭다. 내수 장날은 오일장이다. 장이 열리는 날에는 골목골목 난전(亂廛)이 펼쳐지고 물건 팔고 사는 흥정이 요즈음 선거 토론장 모습처럼 몹시도 북적였다.
사려는 물건을 터무니없는 비싼 값을 요구하는 장사꾼이 있는가 하면, 값을 턱 없이 깍는 소비자가 있으니 바가지 씌우는 상인이 있는 것이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모른다, 이런 상거래가 늘상 이루어져 쌍방이 불편할 수 밖에 없다
당시 마진률이 40%ㅡ50% 인 것을 20%이하로 정하고 내나름 대로 정찰제 시행을 했다,
막무가내로 깍는 손님을 그냥 보내면 배가 부른가 비아냥 해도 못 들은 걸로 했다
몇 개월 지나고 나서는 많은 손님들이 이해를 하고, 매상고를 올려주어 나만의 정찰제를 성공 시켰다.
육십년대 농촌은 새참 나갈 때 바가지를 밥그릇으로 쓰고, 젓가락은 나뭇가지를 꺽어 사용하던 시절이였다, 장날 돈이 될 만한 것으로 갖고 오는 물건은 삭다리 나무 한짐, 산나물, 짚으로싼 계란 한두줄, 장닭 한 마리,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은 쌀 한말이나 콩이나 팥 두어되였다.
우(牛)시장 한편에는 이제 막 젖을 뗀 송아지들이 어미 소를 찿느라 목이 쉬도록 울어대고 있다. 똥과 오줌이 범벅된 우시장은 큰돈이 오고 가는데 가슴에 매단 전대를 조심하느라 막걸리 한잔 하고 싶어도 꾹 참는 것이 보통인데 하루는 아내가 난리법석을 한다. 가게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발견한 것이다. 소 판돈은 그냥 놓고 차례 지낼 물건만 챙겨 집에가는 할머니를 찿아 전해 주었다. 할머니는 정말 고맙다며 두손을 꼬옥 잡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후로는 장날만 되면 손수 지은 농산물을 답레로 가져오시곤 했다.
60년대는 물물교환을 겨우 면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더러는 필요에 의해 물건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렇치 않으면 외상거래를 많이 했다. 가을걷이를 해야만 돈이 생기는 농촌의 현실은 어쩔 수가 없다. 봄부터 초가을까지 외상거래이다. 공책에는 외상값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외상이 늘어날수록 밑전이 모자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아내는 이집 저집으로돈을 빌리러 다녔다. 당시 금융조합은 있었으나 그림의 떡이었다. 장리쌀 얻어 고리를 주고야 돈을 빌리는 시절이었다. 달덩이 같이 환한 얼굴에 서글 서글한 모습의 아내는 신용을 철저하게 지켜 돈을 빌리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은행이 가까워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언덕이 없으면 언덕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은행에 1년적금 계약으로 언덕을 만들었다.
설 대목까지는 외상값을 갚아야 새해에 재수가 있고 마음도 맑아진다는 시골 인심이었다. 수금이 않된 외상값이 아직도 기억되는 것이 있다. 눈깔사탕 하나에 일원이었다. 귀여운 자식사랑에 외상을 하는 것은 좋은데 만날 때마다 외상값 얘기를 해도 주질 않는다. 그 아들이 이제 이순이 되었다.
초복이 얼마남지 않은 장날이었다. 한참 바쁜 중에 중년 남자가 장닭 한마리를 들고 와서 맏기고는 장닭을 찿으러올 때 계산하겠다고 물건을 싸달라고 한다. 그런데 저녘때가 되어도 찿으러 오지않는데 아ㅁ침부터 점포밖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할머니가 울상이 되어 들어온다. 장닭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 팔아서 줄테니 기다리라”고 하고는 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어이가없고 기가막힌다. 하는 수없이 할머니에게 장닭을 돌려주고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선술집에서 왕소금을 안주로 막걸리를 한잔하며 마음을 달랬다.
북적이는 5일 장날이 되면 사기꾼, 소매치기, 건달, 술주정뱅이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와중에도 아끼고 아낀 쌈지돈으로 꽁치 몇 마리 ㅜ사들고 집으로 향하는 정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자주본다. 장터 난전에서는 아버지는 탁배기 한잔을 아들은 돼지국밥을 앞에 놓고 정담을 나누며 인자하게 웃는 주름진 얼굴을 보니 내마음도 저절로 웃음 지어진다.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상가 중심에 새도읍 가꾸기 사업을 성공리에 마친 후에 승강장 장소를 물색 중인데 청소 문제, 사람들이 모여들면 시끄러워진다는 명목으로 서로 미루고 있다. 나는 그럼 우리 가게 앞에 세워 달라며 솔선수범하였다.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사람이 많이 찿아들어 오히려 장사가 잘되었다. 초정약수와 미원 사이에는 새티 재와 이티 재가 있다. 늦게까지 장사를 하다 보니 살인 사건이 있던 새티 재를 밤중에 넘어가기 무서워 가끔 우리 집에서 잠을 자곤 했다. 친숙해지다 보니 누가 주인이고 객인지 모를 정도로 가까워졌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주인은 나 자신이다’ 라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신나는일, 즐거운일, 어려운일들을 겪으며 지나온 산수(傘壽)의 세월, 어느새 미수 (米壽)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