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뮤니케이션 '不通' : 말 안 통해 서로를 경쟁자로만 간주… 임원회의 후엔 한국인끼리 또 회의
● 문화적 토대 없이 사람만 덜렁 : "원칙만 강조" "경영 ABC도 몰라"상대 알려는 노력은 않고 불만만
● 실험은 계속돼야 : "공급망 혁신으로 현금흐름 개선 등 긍정적 변화도 적지않다" 평가도
지난 2007년 초 LG전자의 새 CEO로 부임한 남용 부회장은 회사의 대대적 변신을 선언했다. "앞으로 LG전자를 글로벌 마케팅 컴퍼니(Global Marketing Company)로 만들겠다"는 비전이었다. 당시 사업 부진에 시달리던 LG전자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마케팅과 브랜드력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그에 걸맞은 글로벌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른바 'C레벨(C level)'로 불리는 회사의 최고 보직 임원(부사장급)에 전원 외국인을 스카우트했다. 2007년 말부터 2009년 7월까지 맥킨지·존슨앤드존슨·IBM 등 해외 기업에서 일했던 5명의 인물들이 차례로 영입됐다. CMO(최고마케팅책임자), CHO(최고인사책임자) 등 하나같이 경영지원부서 최고 중책들이었다.〈표 참조〉하지만 그로부터 3년 뒤인 이달 초 LG전자는 재직 중이거나 계약 만료 예정인 5명에 대해 계약 해지나 계약 불연장 통보를 했다. LG전자의 실험은 국내 다른 기업은 물론, 타임(TIME)지에서 '아시아계에서는 드물게 다양성을 갖춘 기업'으로 언급하는 등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실험이 왜 중단됐을까?
■문화적 토대 없이 사람만 데려와
LG전자는 "외국인 임원 제도가 필요한 만큼 성과를 냈고 이젠 우리 스스로도 그만한(외국인 못지않은) 역량을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외부의 시각은 다르다. 외국인 임원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면 어렵게 데려온 그들을 한 번에 모조리 내보낼 리는 없다는 것이다.
- ▲ 일러스트= 김의균 기자 egkim@chosun.com
외국인 임원제의 실패와 관련해 LG 안팎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원인은 '소통의 부재'이다. 한국인 직원과 외국인 임원들 간에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과 외국인 임원들이 거리감을 둔 채 '저쪽은 원래 그러려니'하며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적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조직·문화적 토대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만 데려왔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양측은 정서적·문화적으로 너무 달랐다. 생산·영업 현장에서 십수 년씩 일해온 국내 직원들은 원칙만 강조하는 외국인 최고 임원들이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LG전자의 한 중간 간부는 "그들은 실상과 거리가 먼 원론적 이야기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가령 시장 급변으로 새로운 제품 개발이 필요한데 외국인 임원들이 브랜드나 마케팅만을 강조하는 바람에 시장 대응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외국인 임원들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경영의 ABC를 안 지킨다"는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소통의 부재
외국인의 전폭적 영입으로 LG 공채 출신의 상대적 박탈감이 생긴 것도 원인이었다. LG 계열사의 한 부장은 "적어도 20년 가까이 임원 승진만 바라보며 일해온 LG전자 고참 직원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됐다"고 했다. 외국인 임원들을 함께 일할 파트너가 아니라 나의 자리를 빼앗아가는 경쟁자로 여긴 것이다. 남용 부회장이 외국인들에게만 귀를 기울인다는 말도 나왔다. 남 부회장이 보고 중인 한국인 간부의 말을 자르고, 그 밑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들에게 다가가 의견을 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둘째, 언어도 생각 이상으로 큰 장애 요인이었다. LG전자의 한국인 임원과 외국인 최고 임원을 모두 만나봤다는 모 대학 A교수는 "임원 회의를 한 뒤에 내용 확인을 위해 한국인 임원끼리 따로 회의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전했다.
양측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데, 회사 차원의 개선 노력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외국인 임원들은 내부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자 함께 일할 부하 직원을 외부에서 데려오곤 했다. 이는 양측 간 소통의 부재를 더욱 심화시켰다.
LG전자의 한 부장급 직원은 "비용 지출과 투자, 인사 같은 회사의 젖줄을 쥐고 있는 외국인 최고 임원과, 필드에서 뛰는 직원들 간에 거리감이 커지면서 LG전자의 강점 중 하나였던 유기적 시너지가 점점 약해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직원들 사이에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외국인 최고 임원들은 갈수록 고립됐고, 자신들을 데려온 CEO만 바라보게 됐다. 남용 부회장은 시종 '낭비 제거''비용 절감'을 강조했고, 외국인 임원들은 이를 금과옥조로 여겼다. LG전자의 한 팀장급 간부는 "우리가 외국인 임원에게 기대한 것 중 하나가 한국식 문화에선 힘든 합리적 제도나 개선 건의였는데, 실제는 어떤 제안이든 간에 비용이 발생하는 문제면 묵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는 '한국 사람과 다른 게 뭐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실험은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외국인 임원들이 LG전자에 와서 일으킨 긍정적 변화도 적지 않다. 최고마케팅책임자 더모트 보든 부사장의 경우 이전까지 제각각이던 LG전자 광고 이미지를 일관된 콘셉트로 정리했다. 최고인사책임자 피터 스티클러 부사장은 전 세계 지사별로 달랐던 직원 평가 기준을 글로벌 기준에 맞게 단일화했다. 최고공급망관리책임자 디디에 셰네브 부사장은 공급망관리 혁신으로 현금흐름을 직간접적으로 수억달러 개선했고, 최고구매책임자 토머스 린튼 부사장은 구매 관련 프로세스와 시스템에 진전을 이뤄내 전사 구매력을 크게 높였다는 평이다.
우리 기업의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은 세계의 인재들이 자신의 장래를 맡길 만하다고 느끼고 몰려들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매출의 85%를 해외에서 올리고 있는 LG전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면에서 이번 LG전자 외국인 임원들의 일괄 퇴진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많다. 실적 부진으로 인해 다양성의 실험이 미처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좌초했다는 것이다.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은 "LG전자 구본준 부회장이 CEO 남용이 남긴 절반의 실패를 치유하면서 동시에 그가 선구적으로 실천한 다양성의 시도는 보전하고 발전시켜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