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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날새에서 주일에 드리는 하늘빵의 제목은 '푸른 뱀의 해는 없다'입니다.
올해가 '푸른 뱀의 해'라면서 설을 기하여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푸른뱀의 해'이든 '붉은 뱀의 해'이든 '뱀의 해'는 없습니다. '뱀이 뭐 그렇게 좋다'고 뱀의 해라 칭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뱀을 한번 해부해 보려고 합니다.
낚시꾼들이 물고기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사용하리라는 것은 낚시에 문외한 이라도 알 만한 상식입니다. 사탄도 에덴동산의 첫 주민이었던 하와를 꾀 일때, 하와가 가장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을 미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지혜로웠습니다. 사탄이 이 점을 이용하여 뱀을 타락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사탄의 예측대로 하와는 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타락시킴으로써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이기려고 독살풀이를 하였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탄의 계획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사탄을 이기신 승리의 대표적 물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올해를 '뱀의 해'라 말합니다. 그것도 '푸른 뱀의 해'라면서 좋아들 합니다. 이것 역시 사탄의 계략입니다. 뱀의 해는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해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사탄은 이 사실을 무너뜨리려고, 뱀띠니 용띠니 원숭이띠니 하는 것을 만들어, 사람들의 주인을 하나님이 아닌, 뱀이나, 용이나, 쥐같은 하찮은 것으로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찮은 짐승들로 하여금 운세를 보게합니다. 그것이 띠별 운세를 보는 것입니다. 결혼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인데, 띠별 궁합이라 하여금 부부되는 것까지도 하찮은 짐승들을 통해 결혼도 하고 파혼도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나는 무슨 띠다"라는 것을 믿지도 말것이며, 이런 말을 입에 오르내리는 것 조차도 껄끄럽게 생각합시다. 우리에게 '띠'가 있다면 '복음의 띠' 밖에는 없습니다. 언제인가 방송 설교에서 유명한 목사님 한분이 신년 설교를 하시면서 "올해는 뱀의 해입니다. 뱀처럼 지혜롭게 새해를 시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올해든 내년이든 뱀의 해는 없습니다. 그 해 그 해마다, 그 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매 년이 하나님의 해입니다.
다시 말씀을 뱀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지금부터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뱀을 철저하게 해부해 보려 합니다. 뱀을 해부하고 분석하는 가운데 뱀에게서 사탄의 형상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뱀은 기본적인 자세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짐승들은 서거나 눕거나 잠자거나 행동할 때마다 취하는 일정한 자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뱀은 그저 '띠'처럼 길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구부러지거나 몇 바퀴 또아리를 틀고서도 오히려 머리와 꼬리는 맞대고 있습니다.
깡충깡충 뛰는 것도 아니고 성큼성큼 걷는 것도 아니고 엉금엉금 기는 것도 아니라 누가 당겨주거나 끌려가듯, 아니면 미끄러지듯 소리없이 전진하고 유턴하는 모양은 한 마디로 기상천외합니다. 사탄의 모습도 이와 유사합니다.
사탄 역시 한두 가지 고정된 모습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물질과 명예로, 어떤 경우에는 성공과 출세로, 혹은 아름다움으로 찾아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문학, 영화, 음악, 사진, 미술, 과학, 종교,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바꿔 가면서 미혹합니다. 심지어 운동이나 건강의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요가, 단학, 기, 명상과 선 등이 오래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현대인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면서 우리들에게 파고 들었습니다. 육체건강과 정신건강에 더할나위 없이 좋다는데 누가 감히 반대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런 것들의 대부분이 이방종교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누드 사진이나 누드화 등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예술이라는데 누가 감히 무식하게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들은 요주의 대상이며 경계 대상입니다.
둘째, 뱀의 눈을 보십시오.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편의 눈을 통해 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으며 그가 취할 행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뱀의 눈은 표정이 항상 똑같습니다. 박제표본의 유리알 눈처럼 움직임도 껌뻑거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는 것인지 깬 것인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무표정하고 얼음장 같은 눈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허점을 보이는 순간 닥치는 대로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 주사를 놓듯이 독을 주입하여 쓰러뜨립니다.
사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어느 틈엔가 독화살을 쏘아 심령 깊이 독화살이 파고들게해버립니다. 이 독화살을 빼내려면 주님이 독화살을 빼내 주시도록 주님 앞에 나가야만 합니다.
사탄의 표정이 어느 때는 천사처럼 온화하지만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사탄은 음흉하기 때문에 자기 표정을 쉽게 노출하지 않습니다. 본심을 항상 숨기고 접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도와 주시며, 악에게지지 않도록 믿음의 능력을 주시도록 깨어 기도 할 것 밖에는 사탄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셋째, 뱀의 혀를 보십시오.
주둥이를 굳게 다물고 혀를 내밀수 있는 동물이 뱀 외에 또 있습니까? 꼭 다문 주둥이라 하여 점잖은 놈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뱀의 혀는 쉴틈 없이 날름거리며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사탄 역시 쉬지 않고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닙니다.
사탄은 '반역자'란 뜻이며 마귀는 사탄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이간자'란 뜻입니다. 뱀은 두 갈래의 혀를 날름거리며 기회를 엿보듯 마귀 역시 두 가지 말을 하도록 우리를 충동질합니다. 여기서는 이 말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을 하도록 우리를 충동질합니다. 마귀는 두 말을 하게 만들어 이간시키는 이간질의 전문가입니다.
넷째, 뱀은 허물을 벗음으로 크게 됩니다.
뱀의 비늘은 표피의 변형물이 되어서 생장을 막기 때문에 허물을 벗지 않으면 뱀은 죽고 맙니다. 그래서 뱀은 일년에 서넛 차례 이상 허물을 벗습니다. 허물을 한번 벗을때마다 뱀은 크게 자랍니다. 사탄 역시 장구한 세월 동안, 사상, 정의, 자유, 예술, 운동, 음악, 과학, 철학, 고고학, 학문, 영화, 종교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탈바꿈하면서 거대하게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죄는 자라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영원한 종말은 목전에 와 있을 뿐입니다.
다섯째, 뱀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있습니다.
독사는 위턱 안쪽에 독액을 저장하는 독샘이 있습니다. 물체를 꽉 물게되면 주사 바늘과 같은 독 이빨을 통해서 독이 흘러나와 물린 자에게 치명타를 안겨 줍니다. 뱀의 이빨은 독주사 바늘입니다.
뱀의 독에는 물리면 한 시간 이내에 황소라도 쓰러뜨리는 맹독에서부터 큰 통증을 주면서 피를 흘리게하는 출혈성 독도 있으며 통증은 없으나 전신을 마비시키는 마비성 독도 있습니다.
살모사는 출혈성 독을 내는 뱀으로 0.1g의 독으로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으며 1g으로 토끼를 천 마리, 비둘기를 삼천 마리나 죽일수 있습니다.
사탄의 독성 역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죄의 독성은 사람의 영혼을 죽게 합니다. 죄의 독성으로 지옥불에 삼켜진 자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탄에 물리면 양심이 마비되어 사람이 짐승처럼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영혼도 파멸에 여지 없이 빠져 버립니다.
여섯째, 뱀은 대식가입니다.
뱀의 머리가 크다 싶으면 어른 주먹만하고 몸은 밧줄같이 가늘고 깁니다. 그 정도의 체구로 먹으면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싶지만 뱀의 식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뱀의 아래턱은 좌우가 떨어져 있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주둥이가 아래 위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도 벌어집니다. 그래서 자기 몸집보다 더 큰 것도 아주 쉽게 통째로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켜 버립니다. 토끼를 한 번에 세 마리를 삼킬 수 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뱀은 어떤 동물이건 털을 뽑거나 뼈를 추리지 않고 통째로 삼켜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뱀은 대식가입니다.
사탄 역시 대식가입니다. 롯의 가족을 제외한 소돔성을 통째로 모두 삼킬 수 있는 것이 사탄입니다. 노아 여덟 식구를 제외한 그 당시 세계 사람들을 몽땅 죄 속에 가둔 것도 사탄입니다.
사울 왕의 범죄를 보십시오. 사탄은 왕이라도 삼킬 수가 있습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사탄은 힘센 장사라도 삼킬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결심이 대단한 사람도 일순간이지만 삼킵니다.
사탄은 대식가입니다. 밑 빠진 항아리처럼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습니다. 이런 사탄을 이기는 비결은 말씀의 검으로 그 입을 치는 것입니다.
일곱째, 뱀은 괴상합니다.
뱀은 아무리 살펴봐도 '괴상하다'는 말로 밖에는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발도 손도 없는데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요, 천장에 거꾸로 붙어가기도 합니다. 물에서는 어떻습니까? 수영에도 뱀은 프로급입니다. 뱀은 보통 난태생이지만 새끼를 낳는 것도 있습니다. 알을 낳는 뱀의 경우 어미뱀은 알만 낳고 사라집니다. 새끼뱀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 스스로 살아가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뱀은 위급하다 싶으면 자기 꼬리를 자기가 자르고 도망갈 정도로 생명력이 질깁니다. 뱀은 생김새부터 살아가는 형태까지 괴상합니다.
사탄 역시 괴상합니다. 손도 발도 없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죄를 범하게 만듭니다. 뱀이 생명력이 강하듯 사탄도 쉽사리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탄은 스프린터가 아니라 마라토너 입니다. 사탄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까지도 넘어지게 하려고 지속적으로 따라 붙었습니다. 어떤때는 먹는 문제로, 어떤 때는 사랑하는 제자를 앞세워 시험하였습니다. 사탄의 그 놀라운 집요함과 집착성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뱀이 괴상한 놈이지만 뱀은 사람의 발 아래 기어다닐뿐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폐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은 사탄을 쥐포나 마른 명태 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뱀의 머리를 박살내신 주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합니다. 사탄의 위협은 쇠사슬에 묶여서 포효하는 사자의 울음 같을 뿐입니다. 마귀에게 지레 겁먹지 말고, 우리는 '나사렛 예수 이름' 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승리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여덟째, 뱀은 지혜롭습니다. 다른 말로는 교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때에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 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면 뱀처럼 지혜로울 것과 비둘기 처럼 순결할 것과 그리고 사람을 삼갈 것..., 즉 사람을 조심할것..., 이 세가지입니다. 여기서는 "뱀 처럼 지혜롭게..,'라고 하신 이 말씀에서 우리는 뱀의 지혜가 무엇인가를 살펴 보려 합니다.
우리가 겨울철 빼고, 산이나 들에 나가게 되면 가장 겁나는 것이 뱀입니다. 뱀이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사람을 주둥이로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 치고 상아 같은 이빨로 물어뜯기 때문에 우리가 뱀을 무서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보면, 뱀만큼 힘없는 것도 없습니다. 작은 막대기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뱀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군화 발로 뱀의 머리를 밟게 되면 뱀의 머리가 유리 그릇 깨어지듯이 박살 납니다.
알고보면, 뱀은 보잘 것 없습니다. 뱀은 다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토끼처럼 뛰지도 못합니다. 뱀은 씹어 먹거나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이 전혀 없습니다. 사슴은 약하지만 튼튼한 발굽이 있어서 높은 바위 산도 뛰어다니지만 뱀은 발톱도 손톱도 없습니다. 개구리는 폴짝 뛰기라도 하지만 뱀은 전혀 뛰지못합니다.
뱀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코 자기를 들어내놓고 다니지 않습니다. 뱀은 최대한 자기 몸을 낮추어 풀숲이나, 흙 속이나 돌더미 속에 자신을 감추거나 숨어 삽니다. 뱀은 자기가 들어내지 않으려고 보호색을 띠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뱀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뱀은 이빨이나 발톱이 없기 때문에, 물어뜯어서 싸우려 하지 않고, 뱀은 철저하게 때를 기다립니다. 개구리나 쥐가 자기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서두르지 않습니다. 쥐가 사정권 안에 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번개 처럼 공격하여 한 번에 삼켜 버립니다.
뱀은 기다렸다가 공격도 하지만, 안되겠다 쉽으면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칩니다. 상대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좁은 구멍 속이나 담을 넘어가버리거나, 수풀 속으로 몸을 감추어 버립니다. 뱀은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자신에게 무기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대처하는 지혜로운 짐승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토끼들이 모여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합기도나 권투를 배워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이나 병거를 의지 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은 뱀 처럼 지혜로와야 합니다. 그 지혜가 바로 우리는 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 양인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야 목자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게되고 의지하게 됩니다.
양으로 이리 가운데서 예수님의 제자의 본분을 다하면서 살아가려면 뱀이 자기의 약함을 알듯이, 그래서 땅 바닥까지 몸을 낮추듯이, 우리 성도들도 낮추는 것이 이리 가운데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 숨어버려야 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감춰집니다.
뱀은 자기를 감추려고 보호색을 띔니다. 뱀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는 몸을 낮추어서 주변에 나무나 풀이나 돌들로 자기를 감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색과 같은 몸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보호색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이 가장 좋은 보호색을 띄게되는 것입니다. 양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광신자처럼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는 약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는 서슴없이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시험에 들것 같으면 천금을 준다 해도 그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요셉은 종으로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살아갈 때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요셉은 때를 기다렸습니다. 내가 뛰고 내가 달려들어서 종의 신분을 벗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을 붙잡고 유혹할 때 요셉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 종의 신분을 벗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뱀이 도망가듯이,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요셉은 여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감옥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곳에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뱀이 지독하게 싫지만 양이기에 이리 가운데 들어가려면 뱀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거듭말하지만 뱀은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뱀은 자기 몸을 낮추고 숨기고 살아갑니다. 보호색으로 자기를 감추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때를 기다릴줄 아는 지혜로운 짐승입니다. 그런가 하면 도망가야 할때는 모든 것 다 버리고 숨을 곳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듯 도망갑니다.
이것을 이리 가운데 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지혜입니다.
뱀을 해부해 본다고 해부해 보았습니다.
사탄이 도구로 삼았던 뱀을 우리는 잘 알아야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쳐 이길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탄의 궤계..., 즉 간사하게 꾀이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음으로 날마다 이기고 살아가는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읽어볼 성경: 창3:15.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