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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샤팡마(Shishapangma·8,012m)는 티베트어로 ‘초원 위의 산맥(시샤=산맥, 팡마=초원 위)’이라는 뜻으로, 티베트 원주민들은 시샤·팡마의 빙하가 북쪽 초원과 호수에 얼음물을 대주기 때문에 이 산을 성봉(聖峰)으로 간주한다. 이 산은 인도어(印度語) 고사인탄(Gosainthan)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1912년 영국 산악인 무어헤드 소령과 월레스턴 박사가 히말라야의 미답지역을 측량하던 중, 동쪽에서 시샤팡마의 주봉과 그 옆의 폴라 강첸(몰라멘큉·7,703m)이 안개 속에 솟아올라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 두 사람은 1921년 에베레스트 정찰대에 참가하여, 시샤팡마의 북북동쪽에서 이 산을 측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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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쪽에서 바라본 시샤팡마 주봉(가운데)과 폴라강첸(우측) 7,70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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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중국 대원 10명, 북서벽~북릉 루트로 시샤팡마 초등
시샤팡마를 두 번째로 관찰한 서양인은 오스트리아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아이거 북벽 초등자의 한 사람)와 피터 아우프슈나이더였다. 그들은 1939년 독일 낭가파르바트 원정에 참가했다가 제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인도의 데라 둔(Dehra Dun)의 포로수송소에 억류되는 신세가 되었다. 두 사람은 1944년 12월 25일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야크를 타고 티베트의 수도 라사로 가던 도중에 시샤팡마의 북서쪽에서 이 산을 정찰했다. 1950년 아우프슈나이더는 시샤팡마의 동쪽 10km 지점까지 진출한 후, 이 산의 지도(Les Alpes)를 제작 발표하여 서양인들에게 이 산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은 1950년 티베트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여행금지구역으로 설정했다. 1960년 중·소 국경분쟁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될 때까지 중국과 러시아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 등정을 위해 파미르와 코카서스(카프카스)에서 합동등반을 실행했다.
1960년 5월 24일 중국대는 214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등반대로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 루트에 도전했다. 정상 공격조 류롄만, 왕푸주, 주인화, 티베트인 곤파가 에베레스트 북동릉 상의 최종 캠프를 출발했다. 주인화가 동료의 어깨를 발판으로 세컨드 스텝의 높이 3m 바위절벽을 돌파하고, 그가 내려 준 자일로 동료 대원들이 난코스를 돌파했다. 그들이 세컨트 스텝의 슬랩 돌파에 3시간 이상이 걸려 산소가 떨어졌지만 등반을 속행했다. 류롄만은 서드 스텝 부근에서 탈진으로 등정을 포기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25일 새벽 4시 20분 등정에 성공했다. 그들이 8,700m 부근으로 하산했을 때 날이 밝아지자 주인화가 정상을 향해 몇 장의 사진을 촬영했으나, 서양 산악인들은 중국대의 북동릉 등정을 공산주의 거짓선전으로 의심했다.
중국은 1975년 410명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등반대를 에베레스트의 북릉~북동릉 루트에 다시 투입하여 세계의 최고봉을 측량하려고 했다. 그 해 5월 26일 티베트인 소드남 노르부가 인도하는 제1차 공격조가 세컨드 스텝의 높이 3m 슬랩에 알루미늄 사다리를 설치했고, 다음날 중국인 후센푸와 티베트인 8명으로 구성된 1, 2차 공격조 9명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에베레스트 정상은 길이 12m, 너비 90cm의 설단(雪壇)에 불과했다. 그들은 정상에 측량 삼각대를 설치했다. 등정자 중에는 판토그(당시 37세)라는 티베트 여성도 끼어 있었는데, 그녀는 며칠 차이로 일본의 준코 다베이 다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여성이 되었다. 서양 산악인들은 이 등정도 의심했다. 그러나 1975년 영국 산악인 더그 스코트가 남서벽으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정상에서 중국대의 측량 삼각대를 발견하여 등정이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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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대의 시샤팡마 남서벽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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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 정상에 붉은 깃발을 꽂으시오!”
중국인들은 1961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현지 목동과 사냥꾼을 고용하여 8,000m 봉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미답봉인 시샤팡마를 정찰, 시샤팡마에 강풍과 폭설, 거대한 눈사태가 빈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63년 4월 중국의 대규모 정찰대가 수많은 크레바스를 건너고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며 야부칸갈라(Yabukangala)빙하로 7,160m 지점까지 진출했다.
1964년 3월 23일까지 중국대는 206명의 산악인들, 과학자들, 지원조를 시샤팡마의 북쪽 작은 마을의 베이스캠프(5,000m)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휘날리는 눈보라, 그리고 살을 에는 강추위를 극복하고, 5월 1일 시샤팡마의 북벽 7,700m 지점에 최종 캠프인 제6캠프를 설치했다. 그들이 6,180m 지점에 설치한 대형 확성기에서 응원의 메시지가 들려 왔다.
“동무들, 전쟁의 북소리를 들으시오. 전진하라! 정상에 붉은 깃발(중국 국기)을 꽂으시오.”
정상 공격조 10명은 3개 팀으로 나뉘어 북서벽과 북릉 등반을 진행했는데, 우충유에(Wu Tsung-Yueh)가 3명의 중국인들과 티베트인 소드남(에베레스트 등정자)을, 창춘옌(Chang Chun-yen)이 2명의 티베트인을 인솔했다. 제3조는 에베레스트 등정자인 왕푸주(Wang Fu-chou)가 1명의 중국인과 1명의 티베트인을 인솔했다.
그들이 7,800m 지점의 청색과 은색의 단단한 빙벽을 등반 중에 제3조의 후위를 맡고 있던 왕푸주가 스텝이 무너지며 20m를 추락했는데, 첸산과 욘텐이 재빨리 피켈에 자일을 걸어 확보하며 그의 추락을 저지시켰다. 그들은 새벽이 다가올 때 경사도 45도의 빙벽을 기어서 오르고, 경사도가 완만한 설사면에 도달했다. 설사면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이 덮여 있었다. 그들은 산소장비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 격려하여 전진하고, 버섯 형태의 빙탑을 우회했다.
5월 2일 오전 10시 20분(북경 표준 시간) 6명의 중국인과 4명의 티베트인이 차례로 한 사람씩 삼각형 모양의 정상에 섰다. 그들은 정상 아래쪽 봉우리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파노라마 속의 눈 덮인 봉우리들과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40분간 감상했다. 남동쪽으로 초모랑마(에베레스트)가 솟아 있었다. 왕푸주는 4년 전 자신이 등정한 에베레스트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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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서벽을 등반 중인 박스터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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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봄 영국대, 남벽 신 루트 개척에 앞서 풍파리 등반
독일의 폰 슈테른 바하 남작은 중국대가 정상에서 등정사진을 찍지 않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중국대의 등정 의혹을 독일의 등반전문지 ‘베르그슈타이거(Bergsteiger)’에 제기했다. 영국의 더그 스코트는 1982년 이 산을 등정하고 중국대가 정상사진을 촬영했던 장소가 정상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시사팡마의 정상이 여러 명이 한꺼번에 올라 사진을 촬영할 수 없을 만큼 좁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중국대의 초등을 확신했다.
사실 중국대의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 등정이나 시샤팡마의 등정은 등반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신봉하는 공산주의의 정신적 강인함을 선전하기 위한 인해전술(人海戰術)을 방불케 했다. 1980년 독일 대와 오스트리아 대의 등정, 그리고 1981년 일본의 준코 다베이(1975년 최초의 여성 에베레스트 등정자) 여성 등반대, 라인홀트 메스너와 무취레흐너의 초등루트의 변형 루트 등정이 이어졌다.
1982년 4월 닉 프레스코트 대장이 이끄는 영국 대가 시샤팡마의 남쪽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들은 순수 알파인 스타일로 시샤팡마 남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려 했다. 이 등반대에 참가한 더그 스코트(당시 40세)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초등과 캉첸중가 북서벽 알파인 스타일 등정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주역은 알렉스 매킨타이어(당시 28세)로 그는 폴란드의 유명한 산악인 보이체크 쿠르티카와 가르왈 히말라야의 창가방 남벽과 다울라기리 남동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 ‘알파인 스타일 등반의 달인’이었다. 이밖에 빙벽 클라이머 로저 박스터존스, 에베레스트 남서벽의 록밴드를 돌파한 폴(투트) 브라이스웨이스트, 여성 산악인 엘레인 브루크도 참가했다.
영국 대는 니아낭리봉 밑에 전진캠프를 구축하고, 훈련등반으로 니아낭리 등반에 나섰다.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가 설원을 100m쯤 올라 모레인 지대에 도착했을 때, 건너편에 가우리상카와 멘룽체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닉 프레스코트 대장이 고소적응이 되지 않아 결국 하산했고, 폴 대원도 가슴에 통증이 심하여 하산했다. 박스터존스와 더그 스코트, 매킨타이어와 엘레인이 자일을 묶고 콜(col)까지 진출하여 비박했다. 마른 양말로 갈아 신고 땀으로 젖은 양말을 벗어 잘 마르도록 옷 사이에 넣고 자고 나면 몸에서는 잘 익은 치즈 냄새가 났다.
밤 사이에 30cm 깊이 신설이 내리고 아침에 날이 개었다. 그들은 크램폰을 착용하고 능선의 바위 스텝, 심설지대, 단단한 청빙지대를 돌파했다. 빙벽 등반의 달인 매킨타이어가 엘레인에게 빙벽장비를 서투르게 다룬다고 잔소리를 하자 엘레인은 하산했고, 세 사람은 안개 속에서 등반을 계속했다. 그들이 두 개의 장다름(gendarmes·산등성이의 뾰족한 암탑)을 좌측으로 트래버스하자, 등반이 까다로운 가파른 암릉이 나타났다. 더그 스코트가 루트 상에 위치한 빙탑 안에 돔(dome)형 공간을 발견하여 그 안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암릉의 좌측으로 트래버스를 했는데, 한 시간 뒤 베르크슈룬트가 나타나 그들의 진로를 막았다. 그들이 스노브리지로 그 베르크슈룬트를 건너자, 하나의 빙탑과 크레바스가 다시 그들의 등로를 차단했다. 더그 스코트가 작은 램프로 10m 깊이의 크레바스 속으로 들어가 건너편 빙벽으로 건너갔다. 그때 위쪽에서 가루눈산태가 그를 덮치자, 그는 빙벽에 박은 피켈에 매달려 버틴 후 크레바스를 돌파했다. 그들이 능선 좌측으로 계속 트래버스할 때 선등자 더그 스코트의 자일이 돌사태를 유발하자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가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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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대의 시샤팡마 남서벽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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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에 얼음 알갱이들 날아와 얼굴 강타
날은 저물고 위쪽에 가파른 빙벽이 다시 나타나, 그들은 훈련등반을 포기하고 50m를 내려와 베르크슈룬트 속에서 비박하고 다음날 남동릉으로 하산했다. 그들은 이 훈련 등반을 통해 팀워크를 함양하기는커녕, 대원들 간에 치유불능의 반목만 쌓였다.
폴 대원은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귀국하기로 작정했다. 악천후와 고소에 시달렸던 엘레인도 귀국을 원했다. 더그 스코트의 최대 관심사는 그들이 한 번 실패한 니아낭리를 북쪽으로 완등하는 것이었다. 더그 스코트는 자신이 초대한 폴 대원이 건강악화로 귀국을 원하고 엘레인마저 더 이상의 등반에 흥미를 잃게 되자, 자신도 시샤팡마의 남서벽 등반을 포기할 작정이었다. 특히 그는 무시무시한 남서벽을 바라보고 나서, 아무도 등반한 적이 없는 그 빙벽에서 젊은이들만큼 빠른 속도로 등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극성파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는 단 둘이서라도 남서벽을 오를 작정이었다. 그 날 베이스캠프의 식당 텐트가 날려갈 듯 거대한 폭풍설이 발생하여 사방에서 눈사태의 불길한 굉음이 들려왔으나 저녁 때 날이 개어 푸른 하늘이 다시 드러나고 구름바다 위로 눈부신 설산 시샤팡마가 나타났다. 이 산의 남릉 상에 위치한 숄더인 풍파리(Pungpa Ri·7,445m) 뒤쪽으로 시샤팡마 남서벽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이 훈련등반으로 두 번 비박하며 6,500m 지점까지 진출했던 니아낭리봉도 바라보였다.
매킨타이어, 박스터존스는 더그 스코트를 설득하여, 먼저 풍파리를 등정하려 했다. 그들은 이 산을 오르면서 시샤팡마 남서벽을 자세히 정찰하고, 풍파리봉에 비상식량과 연료 가스를 비축해두고, 남서벽 등정 후 풍파리 쪽으로 하산로를 확보하려 했다.
5월 15일 엘레인은 티베트 여행 차 떠나가고,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 더그 스코트 세 사람은 전진 캠프로 출발했다. 그들은 풍파리를 성(城)이라는 뜻의 ‘캐슬(Castle)’이라 명명하고, 풍파리 밑의 암탑까지 진출하여 2인용 살레와 텐트로 캐슬캠프를 구축했다. 다음날 더그 스코트의 선등으로 매킨타이어, 박스터존스가 풍파리의 남서 쿨와르를 돌파할 때 증기기관차 소리를 내며 쿨와르로 내려치는 강풍에 얼음 알갱이들이 날아와 그들의 얼굴을 강타했다.
쿨와르의 중앙에 거대한 바위 버트레스가 Y자 형으로 갈라져 있었다. 더그 스코트가 그 버트레스의 암벽을 타고 쿨와르 상부 위로 사라졌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암탑 밑의 빙벽을 깎아내고 텐트를 설치했다. 하겐 콜(Hagen's Col) 위로 빛나는 석양이 아름다웠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비박지에 연료인 가스와 식량을 비축해 두고 등반을 속행했다. 그들이 50m 위쪽 콜에 도달했을 때 좌측으로 폴라 강첸이 바라보였다. 박스터존스가 빙암 혼합지대에서 암릉으로 선등하고 남서 능선에 도달하여 확보해 주었다. 박스터존스는 경사도 55도의 가루눈 속으로 허리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며 등반을 계속했다. 그들은 오후 5시가 넘는 시각에 7,000m 가 넘는 지역에 위치한 볼더(boulder, 둥근 돌) 밑에 도달하여 2인용 텐트를 설치하고 3인이 비박했다. 강풍이 심해서 텐트의 문을 열면 세찬 눈보라가 날아들었다.
5월 19일 그들이 능선 상의 어깨죽지인 풍파리로 향할 때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 마나슬루, 피크 29, 히말출리가 바라보였고, 다른 쪽으로는 초오유와 에베레스트가 보였다. 그들은 오후 1시 15분 정상 눈처마 밑에 도달했다. 매킨타이어가 두 팔과 두 다리로 눈 처마 위로 기어올라 앞쪽의 루트를 정찰했다. 위쪽 15m 지점에 팡추리 정상이 보였다. 그들은 팡추리의 정상에서 시샤팡마 남서벽을 자세히 정찰하고, 제2비박지에 가스와 초콜릿을 또다시 비축하고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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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시샤핑마의 초등 루트(북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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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등반 스타일 때문에 갈등 겪어가며 등반
5월 25일 알렉스 매킨타이어는 시샤팡마 남서벽을 등반하기 위해 캐슬캠프에서 20kg의 짐을 짊어지고 남서벽 밑의 제1비박지를 향해 선등했다. 히말라야의 고지대 빙하는 뜨거운 햇살을 받아 복사열로 가마솥 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설원이 곧 끝나고 200m 아래쪽에서 시샤팡마 남서벽 맨 좌측의 암벽 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거운 배낭으로 땀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유도 시합에서 메치기 하듯이 빙탑 위의 부드러운 눈 속에 배낭을 벗어 던지고, 그 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지원조 닉크 대장, 그리고 더그 스코트와 박스터존스는 아래쪽 멀리에서 까만 점이 되어 빙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매킨타이어의 위치에서 위쪽으로 그리고 좌측으로 암탑들과 빙원들, 스노 걸리들, 기나긴 능선들, 빙벽들이 혼란스럽게 얽혀 있었다.
그들의 예정 루트가 가파른 암벽으로 이어져 안개가 낀 듯이 희뿌연 하늘 위로 솟아 있었다. 바로 앞에는 빈약한 암탑들이 세 군데 연속해서 모여 있고, 그 사이에 얼음 아레트들이 끼어 있었다. 그 좌측에 희미한 빛을 발하는 청빙의 빙원이 있었는데, 그곳을 프런트포인팅으로 오르자면 장딴지 근육이 무척 아플 듯싶었다. 등정의 성패는 위쪽의 가파른 암벽 밴드(rock-band) 돌파에 달려 있었다.
태양의 열기를 잔뜩 받은 암벽에서 살인적인 위력을 갖춘 낙석들이 이리저리 튀어 오르며, 불길한 굉음과 함께 계속 낙하하고 있었다. 남서벽의 중앙 부근에서 영국 런던에서 운행하는 2층버스 규모의 커다란 바위가 갑자기 굴러 떨어지며 빙벽에 부딪쳐, 거대한 휙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500m 날아와 떨어져 굉음을 내는 바람에 매킨타이어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박스터존스가 도착하자 매긴타이어는 “시간이 이미 오후 2시가 되었는데, 앞으로 4시간밖에 등반할 시간이 없고, 더구나 낙석의 포화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느린 속도로 등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니, 오늘은 등반을 중단하고 그곳에서 비박하자”고 말했다. 곧 더그 스코트가 도착했다. 스코트도 남서벽 하단에 커다란 낙석이 몇 개 더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 그 날 등반을 중단하는 데 동의했다. 닉 대장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스코트가 언덕으로 50m를 더 올라가 암벽 위에서 새둥지처럼 생긴 멋진 비박장소를 발견해냈다. 닉 대장은 쉬운 하산 루트로 캐슬캠프로 되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남서벽 밑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그 날 밤 제1비박지에서 추위의 고통을 견딜 작정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타이탄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싸웠듯이, 스코트가 커다란 돌멩이를 이용하여 암벽 위에 얼어붙은 돌멩이를 강타하여 말끔히 치운 후 세 개의 비박 색을 넉넉히 깔 만한 크기의 터를 만들었다. 매킨타이어는 짐무게를 줄이기 위해 3명의 대원들이 3일간 먹을 소량의 식량과 4일간 사용할 연료 가스를 포장했다. 그가 4일간의 연료를 준비한 것은 고소에서 눈을 녹여 다량의 음료수를 섭취하지 않으면 고산병에 걸릴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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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파리의 설릉에 선 더그 스코트. 뒤쪽 벽이 시샤팡마의 남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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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 선정 문제로 서로 다투기도
다음날 아침 7시, 세 사람은 돌멩이들이 얼어붙어 있을 시간대에 공포의 남서벽 하단 암탑들의 우측 눈과 빙벽 쪽으로 등반을 시작했고, 닉 대장은 우회로를 이용하여 캐슬캠프로 하산했다. 가파르고 단단한 청빙 지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우측의 빙탑 지대를 통과하느냐, 아니면 좌측의 바위 필라(pillar·기둥)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기로에 섰다. 그들은 좌측으로 전진했다. 후등자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는 암벽등반의 귀재인 선등자 스코트가 등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코트는 바위 필라에 도달한 다음 윤기 나는 회색 얼음 위에 살짝 얼어붙은 얇은 눈 위에서 프런트포인팅을 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더그 스코트는 전날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의 루트, 즉 아이스-스노 쿨와르로 낙석들이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했고, 또한 그 쿨와르 300m 위쪽에서 낙빙의 조짐을 보고 암벽 루트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나긴 빙벽등반은 자전거 타기처럼 일단 배우고 나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멀리 가느냐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과 흡사해 곧 싫증을 느꼈다. 그러나 등반하는 가운데 암벽등반이 끼게 되면 등반의 양상이 확 달라져서, 얼음, 바위 슬랩, 단단한 눈, 바위 버트레스 등이 나타나 등반이 한층 흥미로워진다. 그리하여 그는 암벽등반과 빙벽 등반이 결합된 암벽 쪽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스코트가 바위 레지(ledge·선반)에 도달해 내려다보니 60m 아래쪽 쿨와르에서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가 등반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들 위치에서 등반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발목에 통증이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더그 스코트는 1977년 파키스탄의 오거(바인타브락)를 등정하고 정상 암탑에서 자일하강 중에 양쪽 발목의 골절상을 입고 8일간 기어서 베이스캠프로 생환했다. 그는 철침을 박고 발목의 골절상을 치료한 후, 하루종일 빙벽에서 프런트포인팅 하는 일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는 동료들이 빙벽으로 등반하는 동안 시샤팡마 남서벽의 멋진 버트레스와 아레트를 올랐다. 동료들이 그의 위치와 같은 고도에 도달했을 때, 그는 소리쳤다.
“이쪽으로 건너와. 그 지루한 눈 쿨와르보다 암벽등반이 훨씬 편해.”
빙벽 등반의 달인 매킨타이어가 기분이 언짢아하면서 대답했다.
“설벽을 50m만 더 오르면 약 100m의 빙벽이 나오고, 그 빙벽 끝에 마지막 암탑 뒤에 있는 능선이 나타나요. 그곳에서 록밴드까지는 등반하기 수월해 보여요.”
스코트는 동료들이 기나긴 빙벽등반으로 발목에 무리가 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며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동료들을 원망스러워했다. 쌍방 간에 자기 쪽으로 건너오라고 한참 실랑이가 벌어졌다. 박스터존스가 스코트를 설득하기 위해 얼음 위에 얼어붙은 얇은 눈을 이용하여 스코트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스코트는 가파른 크랙을 레이백(layback) 등반법으로 오르려고 했다. 박스터존스가 스코트를 설득하여 레이백크랙을 오른 후, 우묵한 습곡(fold,·褶曲)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박스터존스와 스코트는 위쪽 레지에서 만났다.
스코트는 가파른 크랙으로 이루어진 시샤팡마 남서벽의 최난 코스를 돌파하고 나서 숨을 헐떡거렸다. 박스터존스가 최고 난이도의 빙벽을 선등하고 위쪽의 스노 아레트에 도달했고, 스코트가 뒤따라 올라왔다. 매킨타이어가 동료들을 기다리며, 등로를 자세히 살펴보니 빙벽에 주먹 크기의 낙석 자국들이 곰보처럼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은 다행히도 그곳에서 낙석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날 처음으로 구름이 나타나자 몸에 한기가 감돌았다. 매킨타이어는 가스 불에 눈을 녹여 차를 끓였다. 그들이 이제 50m만 더 오르면 남서벽의 최난코스인 록밴드 하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곧 박스터존스와 스코트가 도착했다. 박스터존스는 좌측의 걸리(gully)를 통과하여 록밴드의 쿨와르에 도착하기를 원했고, 매킨타이어는 낙석의 위험 때문에, 그리고 스코트는 이 걸리 속이 청색 빙벽이라는 이유로 이 걸리를 피하려 했다. 즉 우측으로 록밴드 밑을 트래버스하고, 베르크슈룬트를 오르려고 했다. 결국 그들은 다수결에 의해 우측으로 등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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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서벽의 마지막 꿀와르를 오르는 박스터존스와 매킨타이어(후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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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그 스코트, 폭풍설 속에서 41번째 생일 맞아
그 베르크슈룬트의 깊은 구멍 위에 나약한 스노브리지가 걸쳐 있었고, 그 위쪽에 가파른 빙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박스터존스가 스노브리지 위를 옆 걸음질로 건너고, 빙벽에 아이스스크루(ice-screw)를 설치한 다음 빙벽 너머로 사라졌다. 아래쪽에서 매킨타이어가 “등로가 있어요?” 하고 고함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박스터존스가 다급하게 “낙석!”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코트가 갑자기 빙벽 밑으로 머리를 숙여 감추었고, 매킨타이어는 그의 엉덩이 속에 머리를 박았다. 박스터존스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 그 낙석이 여기 위쪽 눈 속에 박혔어.”
박스터존스가 그 피치 끝에서 확보를 완료했을 때, 스코트와 매킨타이어가 4m 간격으로 같은 자일을 잡고 뒤따라 올랐다. 후등자 매킨타이어가 빙벽에 설치된 아이스스크루를 회수하려 했는데, 너무 단단히 박혀 잘 빠지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스코트가 위쪽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황소가 가죽끈을 끌듯이 자일을 잡아당기자, 눈과 얼음조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매킨타이어가 울화가 치밀어 소리쳤다.
“제기랄! 스코트, 걸음을 멈춰 서요.”
스코트는 계속 등반하려 했고, 매킨타이어는 아이스스크루를 회수하느라고 힘이 달려 휴식하기를 원했다. 매킨타이어는 베르크슈룬트를 지나자, 자일을 풀고 혼자 등반했다. 박스터존스는 설원 좌측 눈밭에 아이스 액스를 깊이 박고 빌레이(확보)하고 있었는데, 그 움푹 파인 삼각형 모양의 설원이 회색의 암벽지대로 이어져 있었다. 암벽들은 안개 속으로 높이 솟아 영원 속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록밴드의 하단은 보이지 않았고, 스노아레트가 좌측에서 우측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 너머의 지형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스노아레트로 올라가 루트를 정찰하고 우측으로 등반을 속행했다. 스코트가 고도가 7,000m에 가까운 지대의 가파른 빙사면을 가로지르고, 등반이 까다로운 바위날개를 돌파한 후 코너(corner) 너머로 사라지고, 박스터존스와 매킨타이어는 아래쪽에서 자일을 풀어 주었다. 스코트가 암벽지대에서 확보 지점을 찾아내자, 두 사람은 피톤을 회수하며 바위날개를 지나고 빙벽을 거쳐 다시 암벽 지대에 도달해 확보를 하고 있던 스코트의 우측과 좌측까지 각자 진출했다.
남서벽에 저녁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시급하게 비박장소를 찾아내야 했다.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매킨타이어가 고정로프의 피톤에 매달려 와들와들 떨면서 확보를 하고 있었고, 스코트는 선등을 계속했다. 그들은 그 날 300m 이상의 고도를 돌파하여 녹초가 되었는데, 매킨타이어는 잠깐 동안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60여m를 더 올라 바위 레지에 도달했으나 그곳에서도 비박지는 발견할 수 없었다. 어둠이 시작되는 시각에 박스터존스와 스코트가 확보를 하고, 몸무게가 가장 가벼운 매킨타이어가 20여m 길이의 자일 끝에 매달려 작은 코너 속의 지붕 같이 널려 있는 바위 슬랩들 위로 하강했다. 매킨타이어는 튀어나온 암벽을 오르고, 동료들의 고도와 맞먹는 곳에 위치한 작은 레지에 도달하여 피톤을 설치하고 동료들을 그곳까지 인도했다. 그들은 쿨와르의 벽에 도달했고, 매킨타이어는 동료들의 확보를 받으며 크램폰 발로 얼어붙은 바위 위를 긁어 불꽃을 내면서 쿨와르 속으로 하강했다. 그는 작은 오버행을 넘으며 잠깐 동안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크램폰 발이 오버행 아래쪽 눈에 단단히 박히며 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밤 9시, 그들은 길이가 1,100m인 쿨와르를 오르던 중 힘이 장사인 스코트가 빙벽에 비박 색을 설치할 플랫폼을 깎았다. 그들이 아이스스크루와 아이스 액스를 이용하여 비박 색을 확보하고 나서 나란히 누웠을 때, 스코트는 심하게 기침을 시작하여 밤새도록 기침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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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샤팡마 정상으로 향하는 매킨타이어와 더그 스코트(후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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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알파인 스타일로 이룬 놀라운 업적
다음날 아침 그들은 ‘생명의 빛’ 햇볕이 들 때까지 기다리며, 음료수를 마련해 계속 마시며 상실한 수분을 보충했고 음식을 섭취하여 손실된 칼로리를 역시 벌충했다. 그들은 록밴드 지대를 돌파했기 때문에 피톤 2개와 아이스스크루 3개, 자일만 휴대하고 출발했다. 스코트가 계속 기침을 해대며 눈 위에 피가 섞인 가래를 뱉으며 선등했다. 그들의 비박지 위쪽 쿨와르는 매우 좁았고, 암탑 계곡과 암봉들이 늘어선 능선 아래로 뻗어 있었다. 그들은 낙석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쿨와르 벽을 가로질러 등반했다.
햇볕이 점점 뜨겁게 느껴져 그늘을 이용해 등반했는데, 숨막히는 공기 때문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협곡을 오르자 쿨와르가 갑자기 넓어졌다. 그들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눈을 녹여 음료수를 만들어 마셨다.
박스터존스는 히말라야 등반이란 한쪽 발을 다른 발 앞에 계속 옮겨 놓으면서, 그러는 사이에 숨을 헐떡거리며 호흡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산의 어떤 고도에 도달하면, 두 발로 산을 깔아뭉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남서벽 건너편 네팔의 국경선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일은 티베트의 초원을 내려다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중력(重力)과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한 시간 동안 협곡의 레지에서 휴식을 취하면서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람이 일어나 좁은 협곡을 지나면서 메아리쳐 윙윙대자, 멀리서 낙석 소리가 실려와 깜짝 깜짝 놀랐다. 그런데 정말 가까운 곳에서 낙석이 발생했다. 바람이 가르랑거리는 속에서 매킨타이어의 예민해진 귀는 확실한 ‘미사일(낙석) 소리’를 분간해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배낭을 집어 머리를 감쌌다. 그 낙석은 아래쪽의 왼쪽 10m 아래 지점에 부딪쳐 튀어 오른 다음 공중으로 사라졌다. 하늘의 구름 형태가 모루(anvils)처럼 변하면서 악천후를 예고했다.
그들은 크램폰 발톱으로 설벽을 할퀴며, 프랑스 빙벽 등반기술을 구사하여 협곡의 비탈로 올라갔다. 구름이 소용돌이쳤다. 아래쪽 협곡에서 강풍에 몰아치는 안개와 구름이 올라와 그들을 감싸버려, 가까운 거리의 세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시거리가 짧아졌다. 시샤팡마의 남서벽은 회색으로 변모했고, 눈발이 그들의 얼굴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1975년 에베레스트에서 믹 버크 대원을 휩쓸어 내린 폭풍설과 같은 악천후가 닥쳐올까 염려되었다.
어느덧 저녁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설벽에서 바위 슬랩 지대로 들어섰으나 은신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쿨와르를 다시 횡단했다. 박스터존스가 바위 절벽 밑에서 비박지가 될 만한 레지를 찾아냈고, 그 위에 텐트를 설치했다. 스코트는 밤새 기침에 시달렸다.
다음날 아침 날씨는 맑았다. 스코트는 최후의 비박지의 고도가 7,800m쯤 된다고 주장했고,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는 7,500m 지대라고 고집했다. 그들은 다시 좁은 쿨와르로 들어서서 등반을 속행했다. 모진 찬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이 완두콩 꼬투리 모양의 쿨와르를 다 오르자 능선상의 콜이 나타났다. 그들은 드디어 시샤팡마의 남서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돌파했다. 그 너머로 끝없는 티베트의 고원이 내려다보이고 좌측 설릉이 주봉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은 방풍복(wind suits)을 입고, 눈 속에 배낭을 벗어놓고, 자일만 휴대한 채 북쪽 설사면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능선을 다 오르자, 시샤팡마의 정상은 중앙봉(7,996m) 너머 250m 떨어진 돌출부 상에 위치해 있다고 판단되었다. 매킨타이어와 스코트는 앞장서고 박스터존스가 뒤따르며 눈처마가 늘어선 정상 능선으로 나아가 오후 2시에 그들은 시샤팡마의 정상을 밟았다. 놀라운 순수 알파인 스타일로 이룩한 업적이었다.
강풍이 점점 기세를 떨치며 눈보라를 일으켜, 그들의 하산로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배낭을 놔둔 곳까지 내려와, 짐을 챙기고 눈보라 속에서 풍파리 숄더 쪽 남릉으로 하산을 계속했다. 그들의 좌측에는 동벽, 우측이 남서벽이었다. 그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로 하산하다가 암벽이 나타나 좌측으로 트래버스하고 하산했다. 마침내 남릉으로 200m 하산했으나, 스코트의 기침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은 동쪽 설벽의 크레바스 입구로 들어가 플랫폼을 깎고 텐트를 설치하고 비박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돌풍은 그치지 않아 눈보라가 ‘악마의 댄스’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날은 스코트의 41번째 생일이었다. 매킨타이어와 박스터존스는 스코트에게 생일 축하인사를 전하고 눈보라 속에서 하산을 강행하여 콜에 도달했다. 200m 위쪽에 풍파리 정상이 보였다. 그들은 풍파리로 올라간 후, 남서릉으로 제1 비박지까지 무사히 하산했다.
매킨타이어는 5개월 후 프랑스 산악인 르네 길리니와 안나푸르나 남벽의 중앙봉을 향해 등반 중에 7,150m 지점까지 진출하고 장비부족으로 하산하다가 낙석을 맞아 절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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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시샤팡마 남서벽 등반대. 왼쪽부터 로저 박스터 존스, 알렉스 매킨타이어, 엘레인 브루크, 더그 스코트, 폴 브라이스웨이스트, 닉 프레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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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드 앵커, 함께 등반하다 사망한 山친구 알렉스 로우의 아내와 결혼 해 아이들 양육
1983년 봄 후파우에르 대장이 이끄는 독일 대의 세 대원들이 초등루트로 등정했는데 루흐징게르(당시 62세)가 사망하여 시샤팡마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 1987년 9월 18일 폴란드의 유명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 일행이 기나긴 서릉으로 신 루트를 개척하며 시샤팡마를 등정했다.
1989년 슬로베니아의 유명 산악인 슈트렘펠리와 코치예크는 시샤팡마 루트 중에서 최난코스를 개척했다. 두 사람은 IV급, V급 빙암 혼합지대와 경사도 65도의 빙벽을 통과하며 3일 만에 시샤팡마의 두 개의 중앙 걸리 사이에 위치한 버트레스 루트를 올랐다.
1990년 스위스의 유명 산악인 로레탕(2011년 알프스 등반 중에 조난당함)과 장트루아예, 폴란드의 유명 산악인 보이체크 쿠르티카 3인은 초오유를 등정하고 2주 후 시샤팡마의 서봉과 중앙봉 사이의 콜로 이어지는 신 루트를 3일 만에 개척했는데, 이 등로는 8,000m급 봉우리들의 여러 루트 중에서 최단 코스다.
1999년 가을 미국의 유명한 암벽 클라이머 콘라드 앵커는 자신의 친구이자 역시 유명한 암빙벽 클라이머 알렉스 로우, 브리지와 함께 시샤팡마의 북서벽을 등정하고 남벽으로 스키 활강할 계획을 세웠다. 콘라드 앵커는 그 해 봄 말로리-어빈 수색대에 참가하여 75년간 에베레스트 북벽에 누워 있던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했고, 1924년 그가 북동릉 상의 세컨드 스텝을 정말 돌파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높이 60여m의 세컨드 스텝을 프리 클라이밍으로 오르고 에베레스트를 무산소 등정한 산악인이다.
세 사람은 시샤팡마의 빙하를 정찰 중에 2,000m 위쪽에서 갑자기 거대한 눈사태가 발생하여 후폭풍을 맞았다. 앵커는 후폭풍에 의해 볼더 뒤쪽으로 날려갔다. 곧 시속 112km의 속력으로 돌진하는 거대한 눈사태가 그들을 덮쳤다. 두 친구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역부족이었다. 볼더 뒤쪽에 있던 앵커만 살아 돌아왔다.
총각인 앵커는 함께 등반하다 죽은 알렉스의 부인 제니퍼와 곧 결혼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친구의 장송곡이 귓가에 들리고 마음속에 친구의 모습이 어른거리는데, 어떻게 친구의 부인과 결혼할 수 있는가”라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앵커는 사람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친구의 세 어린 아들들의 양아버지가 되어 그들의 양육을 책임지려 했다. 그는 산악인의 강한 의리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