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十字架)
윤동주
쫒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작품해설
연희전문 졸업반에 재학 중일 때(1941.5.31.)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시는
순절정신(殉節精神)과 속죄양(贖罪羊) 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기희생의 이념을 표출
하고 있어 휴머니티의 백미(白眉)로 손꼽힌다. 여기에서 ‘십자가’는 기독교의 징표나
형벌의 도구를 의미하는 습관적 상징만이 아니라, 종교적 또는 도덕적 생활의 목표를
의미하는 개인적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1연은 정의로운 삶을 추구해 온 화자가 시대적 상황 때문에 더 이상 그러한 삶을
추구하기가 어려워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화자가 ‘쫒아오던 햇빛’은 정의로운 삶의
지표, 즉 순결과 광명, 고매함을 뜻하는 이상의 빛이요, 나아가서는 조국 광복의 빛
이다. 그 ‘햇빛’이 교회당 꼭대기의 십자가에 걸렸다는 것은, 화자가 추구하는 삶이
이제 극한에 다다랐음을 알려 주는 것으로, 화자는 정의로운 삶의 새로운 방법을 선
택하게 된다. 그 새로운 방법이란 5연에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는 것’이다.
2연은 화자가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밝혀 주는 부분으로 1연의
부연에 해당한다. 화자는 그 ‘햇빛’을 따라 삶의 목표이자 이상의 상징인 교회당 ‘첨탑’
에 오르기를 소망하지만,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스스로 반문하며 자신이 처한 상
황이 극한에 이르렀음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여기서 ‘있을까요’라는 살의적 언
사(言辭)는 그 같은 상황의 인식에 대한 화자의 단정이라기보다는 독자에게 동의를 구
하는 것으로 보다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화자가 결코 근접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존재하는 대상물로 화자와의 거리감을 드러낸다. 이처럼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 화자는, 결국 3연에서 ‘휘파람이
나 불며 서성거리’는 나약하고 자조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 때, ‘교회당’에서는 그
같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4연에서는 그러한 갈등을 겪은 화자가 첨탑에 오를 수 없다면, 차라리 그리스도의 희생
을 본받아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족을 위해 속죄양이 되고 싶다는 거룩한 순절 의
식을 갖게된다. 모든 인류의 짐을 지고 괴로워했던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인류의 죄와 구원
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행복했던 그를 떠올리며, 화자는
자신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는 동일성에의 지향을 꿈꾼다. 1연의 ‘십자가’는 글자 그대로
교회당 꼭대이에 걸려 있는 것으로서의 일차적 의미를 지닌 데 반해, 여기서의 ‘십자가’는
단순히 교회당 꼭대기에 걸린 물질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화자가 도달하고 싶어 하는 종교
적, 도덕적 생활의 목표, 즉 그이 정신세계를 대변하고 있다.
5연은 자기희생이나 속죄양 의식이 응축되어 나타난 부분으로 주제연에 해당한다. ‘어두
워 가는 하늘밑’은 더욱 암울해져 가고 있는 당시의 현실 상황을 상징하고 있으며, ‘꽃처럼
피어나는 피’는 희생을 통한 구원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모가지’라는 비어(卑語)는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고, ‘조용히’는 자신의 행위가 과시적이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것임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했을 때, 화자는 자신
이 흘리는 ‘피’가 꽃처럼 피어나게 되어 십자가에 박히는 고통이 황홀한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
해왔던 ‘서성거리는’ 삶의 태도를 버리고 ‘모가지를 드리우는’ 고통을 감수하며 그리스도처
럼 영원히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일본 땅에서 28세의
나이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조용히’ 죽어 간 것이다.
[작가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宋夢奎) 등과 문예지 『새 명동』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별을 헤는 밤』(1977),
『윤동주 시집』(1984), 『윤동주자필시고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