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2. 02 (월) 생활일기
대경이로부터 그의 처갓댁에서 전화가 10시쯤 나의 집사람에게 “어머니 잠시후에 출발하게 되는데 서울 올라가면서 잠간 우리 APT에 잠간 들려 부모님 뵙고 가겠다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집사람은 감기가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다시 기침이 재발 얼른 병원에 갔다가 오려고 했던 중이였다.
어느때 쯤 집에 들어올지 몰라서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12시를 지났는데도 오지 않고 있다가 오후 2시쯤에 우리 APT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에 듣고 보니 여러 가지 서류 준비관계 때문에 늦어 졌다고 했었다.
종효는 그 사이에 잠이 깊이 들었는지 등에 들쳐 업고 들어와 우선 쇼파에 눕혀 놓았다.
내 사랑하는 손자 종윤이는 빙그레 웃으며 나와 집사람 앞으로 연달아 달려 들면서 품안에 안겼다.
나는 등어리를 다독거리며 다시 한번 더 꼬~옥 껴안아 주었다. 내 눈에 넣어도 눈 하나 아프지 않을 정도의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제 나와 통화를 나누었던 현재의 순천신용협동조합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사장 박기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분은 고인되신 임영규님하고 어렸을적부터 아주 절친한 친구이며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고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오~ 그렇게 가까운 분이셨느냐고” 했었다. 그러면서 그 분은 갑작스런 친구의 부음(訃音)을 듣고 너무나 깊은 슬픔에 빠지어 침통(沈痛)했었고 정말로 마음이 아프고 슬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참으로 애석한 마음 금할길이 없다고 했다. 그와 같이 나 역시도 슬픔과 애통한 마음이 별로 다르지 않했었다.
나는 상중(喪中)에 슬픔을 속으로 참느라 너무나 힘들었다.
그런데 하물며 가족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종윤이 외가쪽 가족들이 오열(嗚咽)할 때 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 박기수씨라고 하시는 분과 전화통화를 하게된 것은 2월 7일 순천신용협동조합으로 이사장 선거에 후보로 재도전하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 나에게 문자멧세지를 2번에 걸쳐 협조요청이 있었고 고인(故人)이 되신 임영규님의 안내 권유에 따라 지난해 8월 24일 조합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나 혼자 뿐만이 아니고 나의 집사람도 같이 했으며 통장까지 개설해 놓았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고인(故人)이 되신 임영규님의 유지(遺旨)를 소중하게 받들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끝가지 의리와 신의를 지켜야 할 것으로 여기고 그게 당위(當爲)라고 생각했다. 반드시 귀중한 1표를 그분에게 주려고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분을 직접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난번 장례식장을 4번이나 오셨다는 말을 그 분으로부터 직접 들었어도 나는 알 수도 없었고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떠튼 나는 고인(故人) 되신 종윤이 외할아버지하고는 비록 사돈관계라 할지라도 여느집 사돈들과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기 때문에 위의 박기수님과 같은 분께서 고마움을 보여준데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나는 상가쪽 집안을 대신해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드렸다.
그러면서 나는 그 분에게 “故임영규님의 문상(問喪)에 상가(喪家)로부터 핸드폰 문자나 전화상으로 감사의 뜻을 전달 받으셨더냐고”고 물어 보았더니 “아직은 아무런 것도 받은바 없었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상가 가족들이 아직 마음의 정리가 덜되고 경황중이라 그렇게 늦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대경이가 장인님 상을 치루고 난후 1주일쯤 후에 서울에서 다시 순천에 내려왔을때 대경이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의 말을 했다.
“조문(弔文)을 왔던 사람들 중에 여타(餘他)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철도청에서 퇴직하였던 10여명 정도의 분들에 대하여는 핸드폰으로 감사하다는 문자멧세지를 사위인 네가 보내주기 바라겠다” 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면서 이어진 나의 말은 그 10여명 정도는 김용식의 큰아들이고 상가댁 사위인 것을 다 알고 있다고 까지 일러 주면서 명단과 전화번호까지 넘겨 주었다.
그중에 문상을 오셨던 철도퇴직자 2명~3명 정도는 故임영규님과 가까운 사이도 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너의 아버지인 나와도 아주 절친한 관계로 친분이 두터운 분들이다.
그리고 나와 고인(故人)간에 사돈지간이라는 것을 유독 반겨주고 치하를 아끼지 않했던 분들이라고 알려주었다. 어떻게 좀 넓게 생각하면 나의 체면을 보아서 찾아 주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꼭 그랬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말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대경이는 그 마저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간 내가 물어 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자식이라도 다큰 자식에게 그것을 확인한다고 재차 물어 보기도 그렇고 또 아버지인 내가 그렇게 내가 단단히 부탁하였으면 의례껏 실행에 옮겼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게 만약 바쁘고 어설프다고 여겼으면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처남에게 부탁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어느 누구의 집안이건 슬픔에 잠겨있는 상가(喪家) 가족들을 위로하고 찾아 주신 문상객(問喪客) 모든 분들게 장례를 치루고 나서 감사편지나 아니면 그 대체 방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핸드폰 문자멧세지로 라도 보내주는게 최소한의 기본적 인사이고 예의를 갖춘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따라야 할 도리인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변한다고 해도 사람이 꼭 지켜야 할 기본적 예의와 도리는 지켜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도덕적 양심이고 양식인 것이다.
기성세대(旣成世代)의 뒤를 따르고 있는 후대세대(後代世代)가 잘 못 인식하고 있거나 가치관(價値觀)이 전도(顚倒)또는 혼돈(混沌)을 야기(惹起)하고 있다면 이에 대하여 올바르게 일러주거나 스스로 깨우치게끔 하여 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것은 올바르다고 해야하지 올바른 것을 뻔히 알고서도 슬금슬금 눈치나 보고 말 한마듸 못한 다면 그게 바로 주눅든 못난 병신이며 한 낱 헛깨비 인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한 사람 일수록 어데가서 사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째마리 중에 째마리로 천덕구러기 인생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당당하고 할 소리를 해야 직성(直星)이 풀리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 상황(狀況)과 경우에 따라서 누군가는 듣고서 싫은 껄그러운 소리로 거부감을 갖게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