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 외 1편
강익수
땡볕에도 폭우에도 그곳에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벼와 콩을 키우고 풀과 개구리가 자라고 길을 만들고
밥상이었다가 의자였다가
하늘은 기꺼이 집이 되어주었습니다
굽은 허리를 펴는 동안
소가 풀을 뜯어 먹는 동안
미루나무 그림자 슬며시 등을 쓰다듬고 갑니다
물꼬를 내고 나면 짓무른 논두렁은
벼와 함께 익어갔으며
그 단단한 힘으로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겨울의 푸석푸석한 논두렁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모르는 무지렁이 같아서
봄이면 파릇파릇한 손길을 또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달빛 사과 향
강익수
사과를 먹으면 사과 향이 날까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달처럼 둥글게 빛날까 달밤의 농부는 계수나무를 클릭으로 지워보기도 한다
사과의 한쪽 면이 조금 더 붉다 가을이 깊도록 기다렸으면 고추잠자리처럼 붉어졌을까 둥근 밤을 지나왔으나 빈손으로 다시 아침이다 구겨진 달빛과 밋밋한 사과 향이 책상 밑에 널브러져 있다 저들이 책상을 키우기도 하지만 허기진 아침 아무런 쓸모가 없다
서랍 속엔 일 년을 넘게 생각에 잠긴 개미와 너른 보리밭과 네온사인도 있다 풋풋한 사과를 내밀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의 발자국도 서랍 속에 있다
눈꽃 내리는 날일까 진달래 산천을 물들이는 날일까 한 달이든 일 년이든 달빛 사과 향에 취하는 날이면 십리향도 천리향도 원치 않는다 딱 그에게까지만 닿기를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