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97]서예가 향원 선생님과 우연한 상봉
향원(鄕園) 한윤숙 선생님. 중견 서예가가 아니면 이 이름 석 자를 어찌 알겠는가? 서예가가 아닌 나에게 이 이름이 뇌리에 확실히 박힌 건 ‘나만의 사연’이 있어서다. 7년전 42년만의 귀향(歸鄕)을 준비하면서 본채와 사랑채의 당호(堂號)를 ‘애일당’(愛日堂)과 ‘구경재’(久敬齋)로 정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 자문위원으로 10여년째 계신 학산(노상복) 선생님께 편액을 써달라고 했더니, 당신의 글씨는 아닌 것같다며 제자에게 부탁하면 외면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며칠 후 가져다주신 두 장의 글씨는 솔직히 마음에 쏙 들었다. 낯도 모르는 분께 어떻게 사례(謝禮)를 할 줄도 모르고, 그저 학산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래서 알게 된 이름이다. 선생님이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청계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친 제자였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7년 후인 어제 오후, 인사동 전각예술가 진공재갤러리에 있는데, 곱게 나이가 드신 여성분이 들어오는 것을 본 공재선생이 나에게 다짜고짜 “얼른 일어나 공손히 절을 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면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했더니, “우천, 자네 고향집 편액을 써준 분이네”하는 게 아닌가. “아, 그럼, 향원 선생님?” “맞아, 현재 한국서가협회 이사장이시네”나를 알 턱이 없는 그분도 당황했을 터. 7년 전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니, 그제서야 생각난다며 나를 반겼다. 살다보니 이런 고마운 분을 이렇게 만날 수도 있다는 게 몹시 신기했다. 공재가 우리집 편액 사연을 알았기에망정이지, 몰랐다면 이런 연결이 이뤄질 수는 없는 일.
좁은 공방에서 20여분 동안 초면인 분과 수다가 벌어졌다. 부군(성균관대 원모 교수)의 성함을 대며 뵌 적이 있다, 어르신들로 존경하는 분이 학산 선생님이다(향원 선생도 공감했다), 그때 폐백(幣帛, 글씨 써준 성의로 드리는 봉투)을 못드려 죄송했다, 언제 조용한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둥 얘기가 이어지면서 ‘우리의 인연’에 신기해 했다. 얼마 전 백악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그 도록을 내일 당장 고향집으로 보내드리겠다고도 했다. ‘만날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만나게 돼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돌아오는 길, 인공지능에게 향원 선생님의 모든 것을 알려달라고 하자, 독특한 이력(약사 출신으로 서예에 입문, 성균관대에서 예술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더구나 2년 선배의 동문으로 누님이 아닌가. 또한 여성으로서 최초로 2023년 한국서가협회 이사장에 당선돼 서단(書壇)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한다. 최근 개인전에서도 ‘무위’(無爲)를 주제로 한 서체를 선보이며 글씨 속에 자연 그대로의 경지를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으며, 예술철학박사답게 서예의 정신적 가치와 철학적 근거를 정립하는 데 관심을 크게 기울이고 있다고 알려줬다.
아하, 이럴 수가. 우리집 편액을 써준 분이 이렇게 고명한 분인 줄 어제 알게 돼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공재 친구가 아니었으면 그분이 향원 선생님인 줄 어찌 알았으랴. 향원 샘과 헤어진 직후 그분의 글씨를 받아주신 학산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 친구 글씨가 좋아요”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1936년생, 89세)의 목소리가 짱짱하신 것같아 안심도 됐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러잖아도 얼마 전부터 우천 생각이 났다. 제자들에게 내가 죽으면 우천(최영록)을 장례위원으로 꼭 넣으라고 당부할 생각이었다”는 말씀이 이상하게 길게 여운이 남았다. 내가 무어라고?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장례위원이 된다는 말인가. 4년여 동안 고전번역원에서 매일같이 말씀을 나누었을 뿐인데. 그때 왜 그런 줄은 몰라도 노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 오죽하면 귀향하는 나에게 <송서>(送序)를 직접 써주셨을까. 고맙게도 선생님은 우리집 가보(家寶)로도 손색이 없는 요즘 세상 보기 힘든 귀한 글이 아닐는가.
참, 세상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듯하다. 어제 귀인과 뜻밖의 만남도 그렇지 않은가. 불쑥 전라도 여행하는 일이 있으시걸랑 아무 때고 전화주시라고, 우리 고향집에서 얼마든지 모시겠다고 하니까, 향원 선생님이 “정말 갑니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선뜻 “하시(何時)라도 웰컴입니다”라며 헤어졌는데, 전통차 한잔도 못사드린 게 마음에 걸렸다. 허나 곧 또 만나 뵐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나마 위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