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상황에서 발생한 “교회 예배” 이해
코로나19(COVID-19) 바이러스는 상상할 수 없이 무서운 전염력을 갖고 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었지만, 전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다. 메르스나 사스 사건에서도 발생하지 않았던, “교회 예배” 관련 문제가 대두되었다. 먼저
행정관청에서 예배 회집 상황에 대한 관찰에 대해서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교육기관은 행정조치로 개학이 연기된 상태이다. 둘째 단계
종교집회, 관혼상제 모임 등을 통제한다. 이동제한, 영업제한 등의 매우 강한 조치가 나오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이번 사태로 일용직, 영세
자영업종의 피해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다.
예배는 규정된
날과 시간에 해야 한다. 그 날짜(요일)와 시간은 노회가 정한다. 노회(local church)에서는 지교회(part-local church)가
규정된 회집을 준수하지 않은 사안이 발견되면, 시찰하여 권징할 수 있다. 대한민국 장로교회의 정규예배는 교회마다 사정이 다른 것은 적절하지
않다. 네덜란드 개혁파는 일주 한 날(주일) 2회 회집한다. 대한민국 교회에는 주일새벽, 주일오전(혹은 부수예배) 오후예배, 청년예배,
어린이예배, 중등부, 고등부, 기타 등등이 있고, 매일 새벽기도회, 삼일기도회, 금요기도회, 목요모임, 구역예배(셀모임) 등등이 있다. 우리는
많은 예배가 유익하지 않다고 파악했다. 중언부언한 기도, 알지 못한 일만마디의 기도가 무익하듯이, 수 없이 많은 예배가 유익하지 않다고
제언한다. 그것도 초과해서 심방예배, 장례예배, 혼인예배, 개업예배 등등 모든 행사에 예배를 부과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난무하는 예배
상황에서 “코로나19의 위급한 상황”에서 예배를 규정하려고 했을 때 혼선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가정예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house, home, family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 가정(家庭)은 house, 가옥(家屋)인
구조물 개념과 부부 관계로 형성된 사회관계 집단인 home 개념이 공존한다. 가족(家族)은 각 개체인 가구(家口)와 친족을 포함한 혈족에 관련한
의미이다. 가정(家庭)을 한 가족의 회(會), home으로 규정한다면 “가정예배”는 합당하지 않다. 사도행전 집, 가옥(家屋)에서 행한 회집은
가정(home)이 아니라 “집(house)”이다. 오이코스(oikos)가 가정과 집이란 의미가 있지만, 집, 처소에서 회집한 것이다. 그
가정(family, home)이 모인 공간인 집(house)에서 한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집”에서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집은 가옥(家屋)
혹은 처소(處所)이다. 가정예배는 교회 예배를 중심으로 아버지가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한 방편이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
국가교회(Anglican church)를 거부하려는 청교도주의자들이 주일 회집의 대안 방편으로 삼은 것이 가정예배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주일
회집을 하지 못하는 시기에 발생한 것이 가정예배(family worship)이다.
예배(禮拜,
worship)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기 때문에 천상적 성격(heavenly doctrine)을 갖는 공예배(公禮拜, the Holy
Worship)이고, 예배 질서도 신적 기원을 갖기 때문에 절대적이다(참 요 4:24). 장로교회는 예배모범을 두어 운용하고 있다. 교회 시찰이
유명무실이 되었기 때문에 예배모범에 대한 의식이 약하다. 예배모범이 있는 것은 강제 수단이 아니라, 예배의 신적 기원을 고백하는 것이며, 한
예배(The Worship)로 한 지체의 멤버십(membership)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 자기 사자(使者,
angels)를 파송하셔서, 자기 백성이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셨다(계 1-3장). 주께서 보낸 사자가 없거나 부정하는 공동체는
당연히 주의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비상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첫째 주의 교회에 사역자가 부재(不在)할 때이고, 둘째 자연재해로 회집이 불가능할 때이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께서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을 언제나 사모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합당하다. 성도가 주의 사역자를 만나지 못할 때는 영혼의 고통을
받는다. 영혼의 고통은 육체의 곤고함이 된다. 신자에게 허용된 고통에서 죄의 삯을 느끼기 때문에, 신자는 회개와 침묵으로 들어가야 한다. 회개와
침묵의 시간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경건에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 분주해야 할 시간에 회개와 침묵을 하겠다고 중지하는 것도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상황은
매우 위험한 전염병으로 자연재해로 평가할 수 있다. 회집이 위험하고 불가능할 수 있다. 지교회의 예배 회집은 당회가 결정한다. 당회는 사역
지역의 상황을 고려해서 예배 회집을 변경 혹은 조정할 수 있다. 현장 사역자가 신속하게 선제적 결정을 해야 한다. 당회에서 결정하지 못해 노회와
총회의 지도를 바라는 것은 이미 때가 늦을 수 있다. 총회가 예배중지를 권고해도 당회가 자기 지역은 안전하다면 판단되면 예배를 회집하는 것이
합당하다. 전염병 상황에서는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대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예배회집이라는 중요한 의무를 잊지 않아야 한다. 두 과제에서 어떤 것이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현장 사역자의 판단이 매우 중요하다. 직분의 계급의식을 타파한 장로교회는 더욱 그렇다. 지교회 경륜과
총회 경륜에서 차이가 없다. 총회의 결정을 지교회가 따르지 않음이 더 합당할 수 있을 때에는 합당한 결정을 유지해야 한다. 총회는 확률이
다수에게 높은 확률의 결정을 하게 된다. 총회는 특수한 상황을 빠르게 인지하여 지교회의 결정을 존중하며 협력하여 주 하나님 앞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룸이 장로교회 정치 체제이다. 가장 우선되는 것이 성도의 양심의 자유이다. 장로교회 지도자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liberty)를
적극 권장하며 증진해야 한다. 전염병은 성도의 육신에게 위협을 주는 사안이다. 현장 사역자가 행정관청과 전문가의 식견을 종합해서 빠르고 안전한
판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시기에
당회의 경륜, 지도자의 경륜이 요구된다. 지도력은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다. 가장 좋은 모습은 지도자의 지도를 성도들이 신뢰하는 구도이다.
지도자는 보호하고 양육하는 지위이다. 우리 사회의 위기는 지도자의 발표에 혼선이 발생하고, 국민들이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의식이 있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는 성도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영적이고 합리적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우물쭈물하는 지도자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 교회
사역자는 파송자께서 자기 백성을 위탁하셨다. 주의 양을 위해서 합당한 결단을 신속하게 해야 한다.
예배를 대체하는
어떤 수단도 영적으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효율성과 유용성보다 영적가치를 우선하게 생각한다. 예배를 드리지 못함으로 침묵과
인내를 배양하는 것은 영적으로 무익하지 않다. 그런데 매스 미디어를 의존한 영상예배로 주일예배를 대치하는 것은 여러 문제가 있다. 첫째 위기
시에 개방하면 평상시에도 그러한 형태를 유지할 빌미를 허용하게 될 것이다. 침묵하면서 예배와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합당하다. 둘째
영상예배를 허용한다면 차라리 “영적거장의 설교문”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더 유익하겠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셋째 영상예배는 다른 공간이기 때문에
인격적이지 않다. 한 건물에서 여러 층에서 영상으로 시행하는 예배도 유사할 것이다. 예배와 신앙은 엄격할수록 좋다. 엄격만을 추구할 때에
유연성이 떨어져, 영적 교만이나 폐쇄적 인격으로 경도될 우려가 있다. 신앙과 신학은 중도, 균형을 이루면서 정진할 뿐이다. 천재지변으로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예배에 참여하지 않음은 영적게으름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한 자기부정이며 인내이며 겸손이다.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의심이 있는데, 예배 참석을 수행했을 때에 일어난 사태에서 볼 수 있다. 예배에 대한 강박이 준 폐해일 것이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이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지만, 형제의 유익, 나의 행위로 형제가 예배하지 못할 개연성에 대한 자기 권리 포기가 더 영적인
선택이다.
필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장 사역자가 자기 현장에 적합하게 판단하고, 성도들과 함께해야 한다. 둘째, 영상예배를 대안으로 세울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인내를 이루도록 제언한다. 셋째, 그리스도인 개인 양심이 타인을 보호하려는 자세를 좀 더 과도하게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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