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73
12월15일[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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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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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HIJsJTJH4g
[서울대교구 정진호 베드로(서울가틀릭사회복지회 회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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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세주의 찬란한 별빛을 뵙고자 한다면... >
다들 요즘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십니까?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니 서민 경제도 바닥이고,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자영업자들, 서민들 다들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언제 어디서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토록 어려운 국면에 처한 우리 현실 안에도 주님께서는 반드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꼭 그렇게 될 것을 믿고, 기도하는 대림시기 보내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아래쪽 숙소 거실 천장에 배관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끝낸 다음,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 부르면 인건비 엄청나서 혼자서 살살 하고 있었는데, 늦게 피정에 도착하신 분이 문을 확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열심히 도배하고 있는 저를 보신 형제님이 대뜸 묻습니다. “관리장님 되시나요? 제가 좀 늦었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제가 활짝 웃으면서 “네, 잘 오셨습니다. 제일 꼭대기 성당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강의 시간이 되서 대충 일 마무리 하고 옷 갈아입고 강의하러 갔더니 아까 그 형제님 깜짝 놀라시며 미안해하셨습니다.
저는 올해로 수도 생활 40년 째인데... 돌아보니 수도원 안에서 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쾌적한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주로 일을 했고, 매일 하는 일이 회의하고 결재하고 6개년 계획 짜고..
그런데 5년 전부터 피정 센터 와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궂은 일들, 잡일들을 기쁘게 하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높은 곳에만 있었던 것에 대해, 하느님께 형제들께 송구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가장 힘든 일을 찾고, 공동체 안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있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은혜로운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인생의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청소노동자들의 고충도 알게 되고 주방 노동자들의 노고와 그런 일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성탄 준비하고 있습니다. 탄생하실 주님을 더 깊이 뚜렷이 뵙고 싶다면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휘황찬란한 밝은 곳이 아니라 심연의 어두운 아래로 내려서야 합니다.
구세주의 찬란한 별빛을 뵙고자 한다면,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번화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어두운 밤길을 지속적으로 걸어야 합니다.
깊어가는 대림 시기 흥청망청 술잔치, 말잔치을 줄이고 좀 더 자제하고 좀 더 청빈한 삶을 추구하고, 그래서 생긴 여유분을 가난한 이웃과 적극적으로 나눌 때, 아래에 있는 이웃들을 기쁘게 찾아나설 때, 그 자리에 아기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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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lKVVS_sN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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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세례를 받지 않고 불의 세례를 받으면 벌어지는 일>
어떤 사람이 그릇 빚는 노인의 숙달된 솜씨와 작업대 위에 얹혀있는 갓 빚은 옹기들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감상했습니다. 모두가 근사하고 멋있는 모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옹기장이의 그 모든 수고가 헛되이 끝나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옹기들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일부 그릇들이 금이 가고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왜 어떤 것들은 금이 가고 깨어지는지 알기 위해 옹기장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같은 흙을 사용하면서 당신이 어느 것은 잘 빚고 어느 것은 못 빚었습니까? 아니면 어느 것에다가는 더 수고를 기울이고, 어느 것에는 수고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릇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것에는 어떤 재료가 부족했습니까?”
옹기장이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옹기가 손상되는 이유는 그 그릇들이 불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물의 세례와 성령의 불의 세례를 말합니다. 물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일일이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물의 세례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 파견된 자에게 순종하려는 의지’.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불의 세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를 당신 대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베르나데트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그들이 베르나데트가 손으로 파서 솟아 나오는 기적수의 효과를 볼 수 있었을까요? 믿음이 없어서 그 물을 마셔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의 능력을 믿지 않고 교회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교회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밀떡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게 될 것임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성체성사를 하더라도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그 불을 감당할 수 없어 몸이 터져버릴 수 있습니다.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뽀뽀하고 자려는 의지로 80년 결혼생활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은 부부의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의지 없이 결혼이라는 불의 세례는 오히려 두 사람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에 먼저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1943년, 미시시피의 한 감옥에서 클로드 뉴먼이라는 청년이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죄목은 매복하여 한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형을 앞두고 그는 다른 죄수의 목에 걸려 있는 메달을 보게 되었습니다. 클로드는 그 메달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죄수는 화를 내며 메달을 땅바닥에 던지며 말했습니다. “가져가라.”
그 메달은 기적의 메달이었고, 클로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누구를 상징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메달을 집어 기 목에 걸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손목을 누군가가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두려움에 떨던 클로드를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어머니로 모시고, 내가 너의 어머니가 되길 원한다면, 가톨릭 신부를 부르도록 하여라.”
클로드는 자신이 유령을 본 것으로 생각하며 곧바로 가톨릭 신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튿날 교정 사목 신부인 로버트 오리어리가 클로드를 만나러 왔습니다. 오리어리는 문맹이었던 클로드가 이미 성모님께 배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성모님께 서약했던 내용까지 알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클로드는 세례를 받고 사형당했지만, 기쁘게 주님 곁으로 갔고 이후 기적과 같은 일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는 클로드를 사제에게 보내 당신에 대해 더 알게 하시고 교회를 통해 성사에 참여하며 당신께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현대의 세례자는 가톨릭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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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주임 신부님이 새로운 미용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장소는 시온마켓 2층이라고 했습니다. 시온마켓은 자주 갔었고, 2층에 있는 미용실도 금세 찾을 것 같았습니다. 조금 여유 있게 올라갔는데 20분을 돌아도 미용실을 찾지 못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한테 전화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시온마켓 2층은 미국 몰하고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로 가면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다시 내려가서 한국 몰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약속 시간 전에 미용실에 도착했지만 당황했습니다. 미국 몰하고, 한국 몰하고 입구가 다른데 급한 성격에 미국 몰로 올라가서 그런 실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부주임 신부님과의 통화로 약속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성체를 가면서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습니다. 10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자매님이 곧 회복되어서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리가 아파서 누워있었고, 사정이 있어서 재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근육이 약해졌고, 걷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봉성체를 마치고 자매님에게 앞으로 남은 날들이 많은데 계속 이렇게 누워있으면 자매님도, 가족들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재활 치료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과 가족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군중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자선을 베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정직하게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군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힘을 부당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력은 적에게 사용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거침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뜨거운 열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이웃에게 나누는 것,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정직한 것, 정의를 실천하는 것, 겸손한 삶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은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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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3,10-18: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의 전례는 모두가 기쁨에의 초대의 내용이다. 이러한 기쁨을 주제로 하므로 기쁨의 주일, 장미 주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날 우리는 우리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 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 강생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항구히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요한 세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하여 준비시키고 있다.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엄격한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오시는 분은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16절)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16절)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손에 키를 드시고”(17절) 심판하시는 심판관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심판이란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이다.(참조: 요한 3,17)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엄한 윤리적인 경고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절)
군인이든 세리이든 어떤 사람이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 순간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며 활동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의 대림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필립비서는 처음부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믿음에 관한 기쁨 등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필립 1,4.18.25; 2,2.17.18.28.29; 3,1; 4,1.4,10 참조) 그것은 주님께서 오심이 내가 당하는 고통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 안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있는 바로 그때가 내 옆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필립 4,6) 아뢸 때,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필립 4,7)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때를 바로 은총의 때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가 은총의 때이기 때문에 고통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는 다닌다고 하여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다는 말만 한다. 성당에서 또 피정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강론을 많이 듣는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고 실천되지 못하면 우리의 귀는 한없이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기쁨을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기쁨이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기쁨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못 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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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군중도, 세리들도, 군사들도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똑같이 묻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세례자 요한은 이 물음에 다른 답을 합니다. 군중에게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멈추고, 나누라고 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3,11). 세리들에게는 돈으로 저지르는 악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3,13) 군사들에게는 폭력을 멈추고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4) 이러한 대답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당연하게 저지르던 악행을 멈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준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저지르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타협하던 크고 작은 죄악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예수님의 성탄이 다만 해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세례자 요한의 권고를 마음에 새기며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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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는 이가 행하는 보속은 ‘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루카 3,10-18)
1)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을 엄하게 꾸짖는 말이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9)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라는 말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믿고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 선포’가 되지만, 믿지 않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 선포’가 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은,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고, 그 말은 ‘빈말’이고 ‘거짓말’입니다. <‘빈말’과 ‘거짓말’도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라는 말은, 회개한다는 말만 하면서 ‘삶으로’(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과 함께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로마 2,6-8)
신앙생활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합니다. 회개도 말이 아니라 행실로 합니다.
2)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사람들의 질문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말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 실천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라는 말과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라는 말도, 이기적으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랑 실천’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또 군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강탈하거나 갈취해서, 자기들의 봉급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그냥 관례라고, 또는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부당하게 빼앗기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3)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라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은, “정말로 회개한다면 반드시 합당한 ‘보속’을 실행하여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고해성사는 보속까지 완전히 실행해야 완성됩니다. 보속 없는 회개는 말로만 하는 회개일 뿐입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모범적인 예로 삼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우리는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또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어떻든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맞아들이면서 회개했고, 주님께서 시키시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보속을 실행했습니다. 그의 말은, 그동안 사랑 실천이 부족했음을 회개하는 말이고, 사랑 실천으로 보속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말입니다. <보속은 벌이 아니라, 스스로 실행하는 ‘사랑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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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승정 베네딕토(사제평생교육원) 신부님]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번갈아 등장시킵니다. 요한의 출생 예고(1,5-25)에 이어 예수님의 탄생 예고(1,26- 38)를 전하고, 요한의 출생과 성장(1.57-80)에 뒤이어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2,1-52)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3,1-20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에 대해 기술하는데, 이것 역시 뒤따르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준비하는 문학적 배치입니다.
3.1-3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에 대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3,4-6에서 세례 운동을 이사야 예언의 실현으로 해석한 후, 3,7-9은 요한의 회개 요청을 직접화법으로 전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청하는데, 10절부터 등장하는 군중과 세리와 군사들의 반복되는 질문,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는 바로 그 합당한 열매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데, 7절에서 "독사의 자식들아!"를 소리쳤던 요한이 그들의 질문에는 자상하게 대답합니다. 그에게 질문하는 이들은 적어도 회개를 향한 마음을 갖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먼저 군중에게 '나눔'을 요청합니다. 회개가 하 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이라면, 회개의 열매는 이웃을 향한 자비와 자선, 그리고 선행이라고 이 말씀을 알아듣게 됩니다. 같은 질문을 던지는 세리와 군인들에게 요한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불의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로마제국의 편에서 일하던 세리와 군인들이 공정하고 절제된 형태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힘을 사용하는 것, 그것은 예언자들이 노래했던 신적 정의와 공정에 부합합니다.
3.15은 요한의 신원에 대한 질문입니다.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백성을 향해 요한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해 예고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이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실 것이라고. 그리고 요한은 메시아의 심판을 예고합니다. 추수한 농부가 타작하며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듯, 메시아는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물과 불로 정화된 이들은 곳간에 모이고, 다른 이들은 불태워질 것이라고, 요한은 성령을 받아들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경고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입니다. 그 기쁨은 스바니야서에서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3,14)라고 노래한 기쁨이고, 성 바오로가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라고 권고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 위해, 대림 셋째 주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서울주보 》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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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서철승 가롤로 신부님]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남에게 주어라.>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세 친구 이야기를 해봅니다. 어느 나라에 성질이 고약하고 포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감옥에 가두어 버리거나,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그 왕의 행차를 만났습니다. 길 가던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수그리고 깊은 절을 올렸는데, 그 사람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왕 앞에서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노발대발 분노하며 그 사람을 체포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내일 아침에 궁궐로 재판을 받으러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왕 앞에 가는 게 너무 겁이 난 그는 따라가 줄 친구를 찾았습니다. 평소 본인이 첫 번째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포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는 단칼에 거절하였습니다. 잘못했다가는 자신도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두 번째로 소중하게 생각했던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두 번째 친구도 왕이 무섭다고 말하면서, 왕 앞에까지는 갈 수 없고 왕이 보이지 않는 궁궐 대문까지만 따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에게 가서 같이 가자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그 포악한 왕 앞에 가서 너를 변호하고 지지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첫 번째 친구는 평소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돈이랍니다. 돈은 관까지만 따라갑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이랍니다. 가족은 무덤까지만 따라가서 울어준답니다. 세 번째 친구는 누구일까요? 자선, 선행이랍니다. 끝까지 따라가서 우리를 변호해 주고, 지지해 준답니다. 우리가 세상을 마치고 난 후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가 바락바락 긁어모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준 것이랍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33)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준다.(토빗 12,9) 자선은 튼튼한 방패와 단단한 창 이상으로, 너를 위해 원수와 맞서 싸워 주리라.(집회 29,13)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복음에서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라고 나와 있습니다.
옷 두 벌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량입니다. 한 벌은 입고, 동시에 다른 한 벌은 세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벌을 남에게 주라는 의미는, 나에게 꼭 필요한 거라 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과감하게 주라는 의미입니다.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나눔은 내가 배불리 먹고, 내가 다 쓰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해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진정한 자선의 정신입니다. 십자가 상 죽음에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주신 예수님께 나눔 실천에 필요한 신앙적 용기를 달라고 청해봅시다. 아멘.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잠언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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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동화 타라쿠스 신부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 3주의 복음은 우리를 세례자 요한에게로 인도합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오실 분을 기다리는 이였습니다. 요한은 구원의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삶의 방향 전환을 뜻합니다. 그러나 막상 삶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합니다.
이런 맥락 안에서 오늘 복음은 군중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중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요한은 군중들에게 여벌의 옷과 음식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고 요청합니다. 동시에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것을,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다른 이의 것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이 요청하는 회개란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사실 자선과 정의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의 요청이자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르치는 바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입니다. 자선은 단순히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참다운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자리(입장)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선은, 우리 자신이 노력해서 이루고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상 자기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기에 자선은 우리가 현세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자선은 참으로 자선이라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자선의 의미를 더욱 묵상하면 할수록, 자선은 정의의 요청에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거나 ‘강탈하거나 갈취’하는 마음으로 자선을 행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몫을 돌려주지 않는 정의란 거짓 정의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선과 정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사랑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기 위해 회개를 요청합니다. 회개란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한국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 및 사회 교리 주간으로, 그리고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보냅니다.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는 일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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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최훈 타대오 신부님]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세례자 요한에게 내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찾아오는 군중들에게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말 합니다. 이 말에 군중은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하고 대답합니다.
이해하는 데는 어렵지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그 가진 것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 더 주저하게 됩니다. 애착이라는 것은 마음이 있는 자리에서 생겨납니다. 내 마음자리가 세상 것에 있고 세상 걱정에 있다면 세상 것을 모으고 지키는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봐 노심초사, 전전긍긍, 좌불안석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자리에는 이웃을 둘러볼 여유가 없습니다.
눈이 가려져 이웃이 보이지 않으면 그가 헐벗었는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옷이 변변한 것이 없어 속상하고, 입맛에 맞는 것이 없어 불만입니다. 그러다 보면 감사함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주변을 채우게 됩니다. 불평, 불만은 한덩어리로 따라다니며 내 삶을 갉아 먹고 하느님에게서 나를 떼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서도 나를 떼어 놓고 맙니다. 삶은 풍요로운 선물이 아니라 지쳐가는 전쟁터처럼 변해 갑니다. 그 자리에서 불안은 무럭무럭 자라나 나를 방황하고 길잃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찾아간 군중들도 메마른 삶에 지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어른에게 물어보듯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라는 고립에서 벗어나 ‘하느님’, ‘이웃’을 보라고 초대합니다.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을 보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라고 말합니다. ‘요즘 세상에 한국 사회에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변을 보는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내가 당연하게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결핍되어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자선주일은 우리 주변을 둘러보는 마음을 회복하고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도록 초대하는 날입니다. 자선은 우선 주변을 보는데서 시작됩니다. ‘너’의 결핍이 보일 때,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 자리에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회개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회개란 세상 것에 대한 애착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애착으로 우리 마음을 돌려 놓는 행위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이 깊어가는 대림 제3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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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가톨릭 사제이자 시인인 ‘알프레드 디 수자’가 지은 시입니다. 이 시의 내용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찬찬히 묵상하다보면 우리가 한 번 뿐인 삶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 그 길이 보이지요. 첫째,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도록, 나도 그분과 그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가치들을 가꾸고 지켜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둘째,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맘껏 사랑하라고 합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이 주눅들면 나를 온전히 내어줄 수 없기에 제대로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랑이 주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걸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에 따르는 상처를 용기있게, 기꺼이 받아들여야 사랑이 주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고 합니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은 내 말을 다 듣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할 생각말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된 언어로 진심을 담아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내뱉은 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넷째,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안되는게 없는 세상이지만, 재물이 우리 삶의 목적이자 의미가 되어버리면 삶이 피폐해지고 우리 노동이 가치를 잃게 되지요. 그러니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는 그분의 동반자가 되어 내 자존감을 높이라는 뜻입니다. 다섯째,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면 지금 할 중요한 일을 ‘나중’으로 미루다가 뒤늦게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날인 것처럼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야 삶에 후회나 미련을 남기지 않고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대림 3주일은 ‘장미주일’이자,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라는 입당송의 메시지를 따서, ‘기뻐하라’(Gaudete)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대림시기에 사제는 참회하고 보속하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자색 제의를 입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히 신앙생활의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제의를 입지요. 우리를 구원의 잔치에 데려가실 주님을 깨어있는 자세로 끝까지 기다리려면 우리 마음 속에 참된 기쁨을 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고 나눌수록 그 기쁨은 점점 더 커져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기쁨으로 완성되지요. 그러니 어둠이 가장 짙은 한밤 중에 등불을 켜들고 신랑을 마중나갔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그분을 맞으러 나갈 때 필요한 신앙의 등불을 밝힐 기쁨이라는 기름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이 오늘 ‘기뻐하여라’ 주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기쁨이라는 기름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오늘 복음의 초반부에서 그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군중들이 요한에게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건 요한이 그들에게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궁금한 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이전 부분에서 요한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고하지요. 이에 군중들이 요한에게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은 건, 요한의 말을 듣고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든, ‘이대로는 안된다’는 경각심이, ‘달라지고 싶다’는 의지가 그들 마음에 생긴 겁니다. 그 의지야말로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지요.
그들의 마음 속 의지를 확인한 요한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처방전’을 써줍니다. 그런데 그 처방전이라는 게 특별하고 거창한 내용이 아닙니다. 제가 병원 가면 의사 선생님께 의례 듣는, ‘밀가루 음식 많이 드시지 마시고 운동 꾸준히 하시고 잠 푹 주무세요’ 수준의 일상적인 권고이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만약 그게 쉬웠다면 저도 진작에 살을 한 20킬로 정도 빼서 고지혈증 약을 끊어버렸을 겁니다. 잠깐 고생하면 끝나는 ‘특별한’ 그 무엇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 단단히 고정된 나의 ‘일상’에 균열을 내야 하는 것이기에, 꾸준히 반복되어 나의 습관이 되고 일부가 되어버린 것에 다시 꾸준한 반복을 통해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하는 것이기에 힘이 들지요.
요한의 첫번째 권고는 꼭 필요한 것 이상으로 소유한 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한 여유가 있어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요한은 옷이 두벌만 있어도 한 벌을, 음식이 이틀 치만 있어도 하루치를 나눌 수 있으며 또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야 나도 모르게 재물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하느님을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더 가진 것을 나누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움으로써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두번째 권고는 필요 이상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드는 ‘탐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적당한 욕심은 우리 삶에 활력을 주는 긍정적 에너지가 되지만, 과한 탐욕은 나를 재물에 집착하게 만들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죄’를 짓게 하기 때문이지요. 요한의 세번째 권고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소유를 욕망으로 나눈 것이 행복인데 소유는 어느 정도 이상으로 늘릴 수 없기에, 또한 가진 게 많을수록 ‘더더더’를 외치는 탐욕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에 삶의 기쁨을 더 크게 누리려면 욕망의 크기를 줄여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요한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가 나에게 ‘기쁜 소식’이 되려면, 내가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로만 ‘주님 주님’하지 말고,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일단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한의 권고부터 실천합시다. 쓸 데 없는 탐욕을 부리지 말고,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풉시다. 그러면 비로소 삶의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기뻐하여라 주일’인 오늘 ‘자선 주일’을 함께 지내는데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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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3,10.12.14)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은 장미 주일입니다. 그래서 사제의 제의는 연분홍 장밋빛으로 1년 중 가장 화사하고 아름답습니다. 장미는 기쁨을 상징하니 말씀의 전례 안에서 메아리치는 기쁨과 상통합니다. 성경 안에서 기쁨은 먼저 하느님 안에서 용솟음치는 기쁨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3,17-18)하고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과 함께 기쁨의 환성 올리며, 당신의 신적 생명인 기쁨으로 함께 어울리십니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과의 만남으로 가슴 설레며 기뻐하십니다. 사실 기쁨이란 우리가 흔히 알면서 사용하고 있는 즐거움, 쾌락과는 달리 인간이 높은 정신적인 상태에서 맛보는 행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인간은 보다 높은 능력의 단계에서 자기가 알고 소망하는 선(善)을 소유했을 때에 평온과 만족을 느끼며, 그런 기쁨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이 행복에는 다소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상한 표현이 기쁨이며,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행복을 가리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의 생명인 기쁨이 온 누리에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계시며 기다리신 겁니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선포하듯이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3,15,17참조) 문제는 가까이 계신 이 주님께서 내 안에 탄생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기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보여 주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오실 그분을 향해 돌아서라고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하며 세례를 받으러 와서는 질문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3,10.12.14참조) 구원받기 위하여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구원을 갈망하면서 행복을 바라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던졌을 질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까닭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은 평온함과 기쁨으로 남에게 전달됩니다. 많은 재물을 모으고 화려한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들의 얼굴에서는 그 누구보다 많은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늘 기쁘게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초조함과 불평이 표출되기도 하고 불만스런 그들의 얼굴은 남에게 혐오감과 짜증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헛된 부자입니다. 행복과 기쁨 그리고 평온함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적으로, 히말라야산맥의 기슭에 자리 잡은 인구 70만 명의 작은 나라 부탄, 부탄의 국민소득은 2,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90년대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TV가 보급됐을 정도로 문명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국가입니다. 하지만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행복한 국가 중의 한 곳입니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행복을 만든다, 는 생각을 바꾸게 만든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더 행복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선진국들이 이 작은 나라 부탄을 롤모델로 삼고 있답니다. 행복하기 위하여, 기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말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3,11) 옷을 벗어준다는 것은 단순히 내 몸에 걸친 것을 벗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벌밖에 없는 옷에서 한 벌을 주는 것은 내 존재를 떼어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요한은 받는 기쁨이 아니라 주는 기쁨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리나 군인들에게 한 조언도 주는 기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는 기쁨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기뻤던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받았을 때보다 자기의 소중한 것을 남에게 주었을 때가 아닐까요? 예전 본당 피정을 지도하고 난 뒤 본당 사목위원들과 어느 식당에 갔었습니다. 물론 주인은 교우분이셨는데 손수 요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난 뒤 계산하려고 했을 때, 그분의 말씀이 참 기쁘더라고요. 자신이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고 더욱 이렇게 신부님들과 형제들에게 베풀고 대접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 음식이 아니라 그 형제의 마음이 저와 다른 사람들을 더 기쁘게 했죠! 이처럼 주는 기쁨을 우리는 다 한 번쯤 경험해 봤으리라 봅니다. 저 또한 예전 베트남에서 살았을 때,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축복이고 은총임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특히 많은 제 은인들이 제게 너무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아주 많은 것을 사람들로부터 받았으며, 베트남에서는 다만 저는 받은 것을 사랑으로 전달 해 주면서 살았습니다. 이처럼 베풀고 주는 기쁨은 은은합니다. 이 기쁨은 시끄럽지 않고 내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은은하게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마음속에 파묻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성탄에 오는 아기 예수는 우리에게 이 기쁨을 다시 느끼게 해 줍니다. 아기의 얼굴에 피어 나는 기쁨은 주는 기쁨의 표지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다 내어 준 발가벗은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대림 3주의 미사 독서와 화답송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주고 베푸는 사람만이 이 기쁨의 맛을 알 것입니다. 다시금 반복해서 그 기쁨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볼까요?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3,14)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이사12,3)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4,4)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도다.”(알렐루야) 세례자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행복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베풀고 주는 기쁨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주는 기쁨으로 자기의 존재를 변화시킨 사람만이 구유에 계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기쁨을 선포하는 대림 3주를 자선 주일로 정한 까닭은, 이는 신자들에게 주는 기쁨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선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전 몇 닢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구유에 누운 불쌍한 아기는 단순히 부자들의 몸에 붙어있는 부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불쌍한 존재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을 선사하는 위대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받는 기쁨을 치유해 주고받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아기 예수님과도 같은 분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선물과도 같은 존재임에 감사하며 삽시다. 오늘 하루 주님의 기쁨 안에서 기쁜 하루와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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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은 본당신부라서 외부 강의를 나가지 않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강의 청탁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돈이 없어서 강사료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시는 분들 생각해서 강의해 주십시오.”
갈까요? 안 갈까요? 당연히 갑니다. 제가 필요하다는데 당연히 가야 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가고, 또 즐겁게 강의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소품을 준비하거나, 선물 같은 것은 준비하지 않습니다.(무조건 나눠주기에는 제가 그렇게 부자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희가 신부님 강사료로 ***원 잡았습니다. 강의해 주시겠습니까?”
강사료 액수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갖가지 배려를 해 주십니다. 갈까요? 안 갈까요? 역시 당연히 갑니다.
이 강의를 위한 준비를 아주 열심히 합니다. 이런 강의를 해달라면서 부탁하면 어떤 부탁이든 다 맞춰줍니다. 또 어떻게 하면 강의 듣는 분에게 도움이 될지 오랫동안 준비합니다. 완전히 다른 강의를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돈 때문일까요?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강의했다고 저에게 특별한 이득이 있지 않습니다. 강사료는 강의 때 나눠드리는 선물값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곳이나 필요한 곳에 모두 보냅니다. 특별히 돈 쓸데도 없고, 가지고 있어 봐야 욕심만 커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경우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정한다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상대가 인정하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를 사랑하고 인정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배려해 주시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나요?
벌써 대림초의 불이 세 개나 켜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이를 위한 정확한 규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아무에게도 빼앗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면서 겸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인정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인정에 보답하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끊임없이 요구만 하면서, 주님의 인정과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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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람>
루카 3,10-18(세례자 요한의 설교)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참사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16)
빛
스민 사람
스스로
결코
빛이라
하지 않으며
다만
스민 빛으로
비출 뿐입니다
사랑
품은 사람
스스로
결코
사랑이라
하지 않으며
다만
품은 사랑으로
사랑할 뿐입니다
길
나선 사람
스스로
결코
길이라
하지 않으며
다만
나선 길로
걸어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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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시간 자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게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겨울, 저녁 시간에 손님이 왔습니다. 젊은 부부가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큰아이는 보육원에 맡기고 일자리를 찾아 떠돌고 있다며 4살 된 아이도 맡길 수만 있다면 맡기고 싶다고 하면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낯선 사람이었지만 아기가 안쓰럽고, 마침 빈방이 있어서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일봉을 주고, 다음 날 다시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하고는 점퍼와 목도리를 둘러 주고는 보냈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옆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서 확인해 보니 제가 만난 분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밥을 사주고 여관에서 잠을 재우고 돈을 얼마 주고 보냈지만,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문자였습니다.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다른 지역의 성당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신부를 속이는 것인지, 신부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사실 신부가 이럴 때 곤란함을 느낍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이래서 속고 저래 속고 그래도 때가 되면 깨우칠 날이 오겠지? 나를 속여도,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진 않나요? 예수님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나요? 도움의 손길을 건넬 때, 그의 눈을 보나요? 그의 손을 잡아 그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있나요?... 착각하지 맙시다. 자선은 단순히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을 베풀 때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이는 바로 그 손을 내민 사람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리 13,2)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4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축복해 주는 이는 자기도 흡족해지고,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됩니다.’(잠언 11,25) 받기 위해 준다면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지혜롭게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위이지만 내 자신의 영생을 보장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클리솔로그). 그러므로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시고 동시에 영생의 복을 오늘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8)고 한 요한에게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세리도, 군인들도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옷을 두 벌 가진 이는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다른 이와 나눠야’ 하며,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군인들도 ‘갈취하지 말고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되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계명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신명 30,11-13참조)
여러분은 오늘 성당에 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이 묻거나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칩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아마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디에 비춰봅니까? 거울에 비춰보면 보입니까? 우리 영혼의 상태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 상태를 낱낱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를 비춰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 ‘영혼의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1장21절 이하에 보면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영혼의 거울인 성경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야 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대로 하면 축복이 주어지고, 행복해 집니다. 성경을 통해 ‘가진 것을,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하는 말씀을 들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기도하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말까? 망설일 수 없습니다.
오늘 2독서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어느날 놀부 집에 스님께서 시주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코웃음을 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눈을 감고 불경을 외었습니다. 네가 나를 외면 해도 나는 너에게 복을 빌어주마! 하고 “가나봐라 가나봐라 가나봐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놀부가 질세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하였답니다. 지나가던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잘해봐라 잘해봐라 잘해봐라”했습니다. 마침 고승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왼만하면 주지그래” 하였답니다.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주십시오!
“자비는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부터 저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릴 뿐이다.”(세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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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대림 제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 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스바 3,15.17)
이처럼, 그들이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삶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리피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생활과 하느님 말씀묵상과 성사거행과 공동체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가 일수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로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거부로 상처 입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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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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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기뻐하여라, 기도하여라, 회개하여라” -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이후 기상하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하루도 빠짐없이 바쳐온,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만세칠창 입니다. 참으로 기도가 절실한 어지럽고 혼란한 두려운 세상이요, 국내상황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아마도 제가 세상 마치는 날까지 계속될 ‘만세칠창’에 ‘매일강론쓰기’입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국민은 위대합니다.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 소임 마친 우의장의 한마디 소감이였습니다. 어제 새롭게 입증되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나 나라를 살리고 구원한 것은 언제나 평범하나 깨어 있는 민초(民草)들의 국민이었습니다. 더불어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독보적 존재, 보석같은 대한민국인지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어제는 탄핵이 의결됨으로 위기는 일단락 됐고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경탄(敬歎, 驚歎)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모든 일이 민의(民意)에 따라 민주적 절차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되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200백만 환호! 막힌 속 뻥 뚫려!”
“국민의 승리! 탄핵 가결에 200백만 기쁨의 함성!”
인터넷 머릿기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가톨릭교회의 양대 신문도 지난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교회지도자들의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내용이 일면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 피와 땀으로 이룩한 민주주의 지켜낼 것”
“국민 요청에 즉각 응답하는 책임과 처벌 촉구”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입당송 라틴어 첫 말마디에 따라 ‘가우데테(Gaudete;기뻐하여라)’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에 걸맞게 빛나는 기쁨을 상징하는 분홍색 장미제의를 입는 주일이기에 장미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어제의 탄핵의 역사적 사건에 이어 오늘 기쁨의 장미주일을 맞이하니 하느님의 오묘한 구원섭리를 깨닫게 되어 더욱 감사와 찬미의 마음 가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열화와 같은 설교를 듣고 감동한 군중은 그에게 묻습니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고, 답은 “기뻐하라, 기도하라, 회개하라” 셋으로 요약됩니다. 세 개의 영롱한 대림촛불이 이를 상징합니다.
첫째, “기뻐하여라”입니다. 그래서 ‘기뻐하여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여라’입니다. 슬픈 성인은 모순이요 너무 안 어울립니다. 우울과 슬픔, 심각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정말 믿는 이들의 특징은 기쁨과 유우머 감사요, 성인들은 고통과 시련중에도 기쁨의 꽃처럼 살았습니다.
어제 여의도에 운집한, 200만의 시민들의 모습도 평화롭고 즐겁고 질서정연하기가 흡사 꽃처럼, 꽃의 바다처럼, 꽃별 가득한 하늘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9월부터 저를 행복하게 했던 짧은 자작시도 생각났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주님이 계시기에, 오시는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기에 이런 저절로 샘솟는 기쁨,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오늘 스바니야 예언자도 우리에게 기쁨을 촉구합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내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축제의 날인 양,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우리 각자는 물론, 교회에 더 나아가 작금의 큰 트라우마를 겪은 대한민국에 주는 위로와 격려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느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그런데도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 모두 분발하여 기쁘게 살 것을 촉구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마중나가는 기쁨, 바로 대림의 기쁨입니다.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며 마중나가기에 샘솟는 기쁨입니다.
둘째, “기도하여라”입니다. 기쁨이 저절로 기도하게 합니다. 기쁨에서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입니다. 기뻐할 때 찬미와 감사요, 찬미와 감사를 바칠 때 샘솟는 기쁨에 순수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이요, 저절로 치유의 구원입니다. 심신의 힐링에 희망과 기쁨, 평화의 샘인 찬미와 감사의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옥같은 말씀이 또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셋째, “회개하여라”입니다. 참된 회개는 회개의 열매인 회개의 실천으로, 즉 정의의 실천, 사랑의 실천, 자선의 실천으로 입증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 말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는 가장 높은 자선이다” 말했습니다. 정말 좋은 정치, 정의와 평화의 정치라면 이보다 더 좋은 자선도 없을 것입니다.
날로 가난해지는 보편적 가난의 국민들입니다. 이제는 나라가 큰 가정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도래했습니다. 국민을 섬기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민생을 챙기는 것이 최고의 자선이자 정의임을 위정자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체적 회개의 실천을 말합니다. 다음 모두가 자선이자 동시에 정의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지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구체적으로 나눔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나눔이 자선이자 정의입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정직이 자선이자 정의입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군사들에게 준 회개의 실천 처방입니다. 분수에 만족하고 분수를 넘지 말라는 것이니 이 또한 자선이자 정의입니다.
조규만 주교는 이웃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도 자선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쁨의 삶이, 기도의 삶이, 회개의 삶이 주님을 닮아 날로 우리 존재자체가 주님의 자비와 지혜, 정의와 희망,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되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자선이자 정의와 평화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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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화창한 하늘처럼 맘껏 기뻐하라!!>
기뻐하라고 하는 주일입니다. 기뻐하라고 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오심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서들은 기뻐 소리치고 맘껏 기뻐하라고 재촉하는데 저의 기쁨은 화창한 하늘 같지 않고 구름 낀 하늘 같으며, 기뻐해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면서 선뜻 그리고 맘껏 기뻐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늘 옆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수난을 실제로는 잘살지 못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기쁨 구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기쁨보다는 싫어하는 사람이 사라질 때 더 기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기쁨보다는 미워하는 사람과 떨어질 때 더 기쁜, 그런 우리의 ‘기쁨 구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되는 기쁨과 주님께서 오시는 기쁨 가운데 우리는 어떤 것이 실제로 더 기쁩니까? 탄핵되는 기쁨이 더 짜릿하지 않습니까?
먹구름이 걷히는 것이 기쁩니까? 해가 뜨는 것이 더 기쁩니까? 그게 그거 같지만 우리는 해가 뜨고 화창한 하늘일 때는 기쁘지 않다가 먹구름이 걷힐 때 기뻐지거나 기뻐하지 않습니까?
늘 있는 것의 지루함이랄까 당연함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있지요. 그래서 늘 있는 것이 지루하지 않기 위해서는 있던 것이 사라지고 그로 인하여 고통에 시달리다가 다시 나타나야 합니다. 이는 엄마가 자신을 숨겼다가 ‘까꿍’하고 자신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기쁨도 그렇습니다. 늘 있는 기쁨은 지루하고 그래서 그것이 기쁨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기쁨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리고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지루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부재의 시간과 하느님 부재의 고통이 있어야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갈망하고 기다리게 되고 기뻐하게 됩니다.
아무튼 하느님을 만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을 만난 기쁨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기쁨을 누르거나 안에 가둬두지 말아야 하고 소리쳐야 합니다. 아니 우리의 기쁨은 가두거나 누를 수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그런데 기뻐 소리치는 것은 자기감정을 억누르거나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에 겨워 마구 표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의 확장이 목표인 복음의 선포이고 사랑의 실천입니다.
나만 행복하지 않고 모두 행복하게 해야겠다는 사랑으로 나만 주님의 오심으로 기쁘지 않고 모두 기쁘게 하려는 사랑으로 외치는 것이며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외침은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맘껏 기뻐할 뿐 아니라 크게 소리쳐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오심으로 기쁜 사람이 해야 할 것은 기쁨 자체도 나눠줘야겠지만 기쁜 나머지 가진 것도 나눠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나눔을 실천하고 자선을 실천하는 것과 같이 기쁨에 넘치는 사람도 나눔과 자선을 실천합니다. 이것이 기뻐하라 주일이 자선 주일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나눌 줄 모르고 인색한 사람은 아직 행복하지 않은 것이고, 아직 기쁘지 않거나 기쁨이 넘칠 정도로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넘친다는 것은 나를 채우고 넘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겁니다. 달리 말하면 아직 만족하지 못한 것이고 만족하고 남지 못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오심으로 너무 기쁜 사람은 감사해야 합니다. 진정 주님 안에서 기쁜 사람은 아무 걱정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서간의 말씀으로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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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자선 행위?>
오늘 복음(루카3,10-18)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그러자 군중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위해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구해 낼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가득했기 때문에, '혹시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16)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나눔인 자선'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봉헌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나누는 '생명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희생 행위'입니다.
세상이 '양극화'에 빠져 있습니다. 어느 한쪽은 먹을 것을 쌓아놓고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갑니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의 모습인 양극화'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주님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봉헌과 생명과 희생 행위인 자선'으로 주님 성탄을 잘 준비합시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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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해야 합니까?"(루카 3, 10)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길을 낸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커지시는
길을 낸다.
광야의 외침은
죄를 씻어주는
세례의
길이 된다.
길을 가르쳐 준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길은 소식인데
소식을 끝내
듣지 않는
완고한
우리들이다.
듣지 않으면
영혼 없는
시간만이
밀려오고
밀려갈 뿐이다.
이 대림시기는
길을 보수하듯
경청을 보수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방향을
보수(補修)하는
것이 기다림의
핵심이다.
들으려는
사랑이 끝내
길을 낸다.
복음은
경청의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또한
보수 공사가
필요한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의 모든
기쁜 소식은
끝까지 듣는
경청을 통하여
전달된다.
경청(傾聽)이
대림이고
사랑이다.
사랑의 실천
성탄은
제대로 듣는
들음에서
시작한다.
자선(慈善)또한
소식을 듣는
들음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도움이다.
도움도 듣지
않으면
독(毒)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경청이며
자선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다림의 실천은
다름아닌
경청이다.
듣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경청하는
사랑의 길이다.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묻는
경청의 주일이다.
고집 센
자아가
작아져야
들을 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
듣는 때가
사랑할 때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은
기다리고
들을 수 있는
이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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