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알음알이가 방편인 것을 答 富樞密 李申
若要徑截理會이면 須得這一念子 嚗地一破하여야 方了得生死이며 方名悟入이니라. 然이나 切不可存心待破어다. 若存心在破處則 永劫에 無有破時하리라. 但將妄想顛倒底心과 思量分別底心과 好生惡死底心과 知見解會底心과 欣靜厭鬧底心을 一時에 按下하고 只就按下處하여 看箇話頭하되 僧이 問 趙州에 狗子도 還有佛性也無오하니 州 云에 無라.
이치를 빨리 알고자 하면 모름지기 이 한 생각이 한번에 꽉 터져야 비로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알 수 있고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깨침을 기대하는 마음을 두어 깨달음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깨달으려는 마음으로 깨친다는 생각을 하면 영원히 깨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망상으로 뒤바뀌어진 마음, 헤아려 가려내는 마음,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 지견으로 알려는 마음,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한꺼번에 눌러야 합니다.
오직 눌러 내리는 곳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개에게도 부처님 성품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조주 스님께서 ‘없다’라고 답했다”는 화두를 보아야만 합니다.
此一字者가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라. 不得作有無會하며 不得作道理會하며 不得向意根下하여 思量卜度하며 不得向揚眉瞬目處하여 椯根하며 不得向語路上하여 作活計하며 不得颺在無事甲裏하며 不得向舉起處하여 承當하며 不得向文字中引證하며 但向十二時中 四威儀內하여 時時提撕 時時舉覺하되 狗子도 還有佛性也無아하니 云에 無를 不離日用하라.
이 ‘無 ’란 한 글자가 숱한 나쁜 지견들을 꺾는 무기입니다.
有有와 無의 알음알이를 두지 말 것이며, 도리를 알았다 하지 말 것이며, 의근에서 헤아려 분별하지 말 것이며, 떡 버티고 앉아 자리만 지키지 말 것이며, 말의 논리만 가지고 살아가지 말 것이며, 별일 없는 데서 잘난 척하지 말 것이며, 화두 드는 자리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말 것이며, 글자에서 끌어와 증명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꾸준히 화두를 챙겨 들되 “개에게도 부처님 성품이 있느냐 없느냐”에 “없다”라고 말한 것을 생활 속에서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試如此做工夫看하면 月十日에 便自見得也라니 一郡千里之事가 都不相妨하리라. 古人이 云에 我遮裏는 是活底祖師意라. 有甚麼物이 能拘執他리요하니 若離日用하고 別有趣向則 是는 離波求水이고 離器求金이니 求之愈遠矣리라.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 화두를 챙기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스스로 깨치리니, 모든 일들이 조금도 방해되지를 않습니다. 옛 어른이 “나의 이 곳은 산조사의 뜻이다. 무슨 물건이 있어 그것을 얽어 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만약 날마다 주어진 삶 속을 여의고 달리 구해 가는 곳이 있다면 이는 물결을 떠나서 물을 구하고 금 그릇을 떠나서 금을 찾는 격이니, 구하면 구할수록 그 뜻은 더욱 멀어지는 것입니다.
☞ 화두를 들 때에는 화두에 모든 마음이 들어가야 한다. 경을 볼 때에는 경을 보는 데에 모든 마음이 집중되어야 한다. 일을 할 때에는 하는 일에 모든 의식이 집중되어야 한다.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그 삶 자체와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운 수행으로서 부처님의 모습이다.
출처: 禪 스승의 편지,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첫댓글 화두를 들 듯 하는 일에 집중하여 하는 일이 바로 화두이네요.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일이니 바로 보현행원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멀리서 화두를 찾기보다 하는 일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정성을 다하는 일!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