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통학길에 버스안에서 자주 만나던 내또래 여학생이 한명있었다.
나보다 한두정거장쯤 먼저 타는 그애는 큰키에 약간 까만 얼굴이었고 비좁은 버스안에서 내 무거운 책가방도 잘받아 주고 했다. 나는 은근히 그애가 또 내앞에 앉아 있기를 바래곤 했었다.
그해 여름방학이 되자 우리 동네 교회에서 양평으로 수양회를 간다고 동네 후배한놈이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그 교회는 우리동네 꼬마애들은 물론 나의 큰형도 다니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해 수양회를 가게 되었고 큰형도 묵시적으로 동의해줘서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출발당일 보니 그여학생도 있었다. 기차안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통성명하였다. 기차는 신원역에서 잠시 정차를 하게 되었고 한학년위 형과 그애가 역대합실에서 기타를 치며 당시 유행하던 양희은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부르는데 나의 이룰수없는 짝사랑을 예고하는 듯했다..
신원역 출발후 기차는 종착지인 양평에 도착했고 우리 일행은 강가 미류나무아래 텐트를 여러동 치고 머무르게 되었다. 텐트를 치고 그애와 나는 강가로 가서 나는 그애의 손을 잡아주고 그애는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얼마후 그애 먼저 저녁준비해야 한다고 들어갔고 나는 한참을 더 놀고 있는데 멀리서 그애가 나를 부르며 오고 있었다. 그때 그애등뒤로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그다음날 우리는 기차를 타고 이름모를 간이역에서 내려 개척교회까지 가게되었다. 나는 남자라고 무거운 짐을 지고 후미에 갔는데 그애가 기다리고 있다가 내짐을 받아주었다. 그곳에서 하루밤을 묵은후 다음날 아침 우리는 한참을 산속으로 걸어들어가 계곡옆 넓은 공터에 텐트를 치고 물가에서 열목어 비슷한 고기를 잡았고 밤에는 캠프파이어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서울로 돌아온후 나는 심한 여름앓이를 했고 교회도 다니지 않으면서 교회앞에서 서성였다.
그해 가을 우리는 경인 고속도로 건너 신정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그애를 만날수 있는 기회는 더 멀어졌다. 그
래도 나는 근방에 사는 중학교 동창을 만난다는 핑계로 자주 교회앞을 지났지만 그애를 볼수는 없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어느날 봄 우리동네에 그교회 목사님 아들이자 형의 친구가 급히 달려 오고 있어 나를 보자 마자 니형이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 잠시후 어머니에게 그사실을 말하자 마자 어머니는 그자리에서 쓰러지셨다. 장례를 지낸 후 그 형에게 그애의 소식을 물었더니 니형의 소식을 듣고 많이 울더라고 했다. 나는 그애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후 여름이 오면 그강가를 잊지 못해 친구들과 다시 찾아가 그 강가에 텐트를 치고 우리는 그때 유행하던 산이슬의 "마지막 남은것"을 노래하곤 했다.
그리고 그후 군에 입대하였고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을때 양평으로 팀스피리트 훈련을가는데 본부중대소속인 나도 가게 되었다.
우리는 연대에 집결하여 그다음날 새벽에 M60 이라 불리는 군용트럭을 타고 떠났는데 출발전 지침이 바뀌어 군용트럭덮개인 호로를 반만 치고 가게 되었다. 출발후 다른 병사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졌지만 나는 그강가를 다시 볼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런데 양평인근에 다다를 무렵 쿵하는 소리와 함께 트럭이 언덕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나는 큰소리로 트럭이 넘어간다하고 외쳤지만 이내 몸은 한참을 날라 논바닥에 쳐박히게 되었고 그짧은순간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죽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보니 트럭이 논바닥에 전복되었고 몇명은 논바닥에 엎어져 있고 트럭틈사이로 두세명의 다리가 나와 있는 것도보았다. 그트럭엔 앞에 선탑장교1명과 운전병 1명이 탔고 뒤에는 나를 포함 8명이 타고 있었다. 잠시후 다른 군인들과 우리뒤에 오던 버스 승객들이 내려와 우리를 구조했고 몇명은 앰브란스에 실렸고 걸을수 있었던 나는 지나가는 시외버스에 탔는데 아주머니들이 불쌍한 군인들이 많이 죽었다고 엉엉 우셨다.
얼마안가 버스에서 트럭으로 갈아타고 훈련 목적지인 양평 어느강가 언덕에 도착하여 나는 그밤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등허리가 쑤셔서 잠을 잘수 없었고 다음날 인근 20사단 61연대 의무반에 보내졌다. 거기서 나는 트럭에 함께 탔던 우리 부대원 3명이 죽었고 나머지 4명은 헬기로 수도통합병원에 이송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의무대에서 엑스레이도 정상으로 나왔고 다음날 대대장님이 나를 태우러 그곳까지 오셨고 너 혼자 살아왔으니 너는 8사단 오뚜기라고 하셨다. 부대에 도착한 나는 부대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33개월간의 군생활을 마무리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여름날 양평 그강가에서의 철없는 짝사랑이 나를 살린 셈이다
<봄을 기다리던 친구에게>
저산에 눈녹으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던 친구
봄이 오면 양지 바른곳에서
주머니속 묵은 먼지를 날려 보내고 싶다던 친구
봄날 햇살이 너무 눈부셔
서럽다던 친구
기다림의 포물선을 그리겠다며
떠나갔던 친구
그대들은 지금 내곁에 없다.
젊은 날의 나도
그대들 곁에 없다
이제 저산에 눈녹으면
내가슴속 빈먼지 날리며
봄날 햇살아래 미소짓고 싶다.
그대들을 그리워하며
나도 기다림의 포물선을 그리고 싶다.
첫댓글 안전 사고는 언제나 문제 입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안전이 제일이지요
젊은 시절에도 남자의 기사도 정신이 있어
무거운 짐을 지어주는 신사도 정신이 존경
스럽습니다 대부분 한국의 남성들은 짐을
지지 않고 여자들에게 지도록 하는것이
과거 남성 가부장제도의 시절의 잘못이지요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라고 그애앞에서 자랑하고 싶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저는 그후 2차선이었던 영동고속도로에서 빗길에 과속하다 차량이 전복됐는데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후 운전은 항상 조심하지만 작업중 여러번 다쳐 지금도 고생합니다.
아련한 풋사랑의 기억, 그 기억이 돌발 사고 속에서 기정수님의 생명을 구했군요.
형님이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뜨셨는데
기정수님까지 잘못 되셨다면 어머님의 충격이 어떠하셨을지는 상상도 안 됩니다.
일찌기 생사의 고비를 넘기시고 성실하게 잘 살아오신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
8사단 오뚜기 부대는 제가 오래 살았던 포천에 있는 것 같은데 맞나요?
우리네 젊을 적 인기 높던 여성 듀엣 산이슬의 노래도 반갑게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양평 그강가에서의 짧은 추억이 저를 살렸고 지금까지 지탱한 원동력이 되었나 봅니다.
형님의 갑작스런 사고로 두분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수 없고 철없던 저도 제대후 너무 힘들어 그때 죽었으면 부모님에게 연금혜택을 드렸을텐데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요. 8사단은 포천 일동. 이동인근에 있고 부모님 묘소가 포천군 북방 관인에 있어 옛날 부대앞을 자주 지나다닙니다. 한참동안 산이슬의 마지막 남은 것들을 들을때마다 가슴이 에이는 듯 했는데 이젠 세월이 많이 흘러 무덤덤해졌고 늘 성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정수 선배님글 넘 잼나게 진지하게
잘 읽었습니다 아런한 추억속의 짝사랑
짝사랑은 언제나 이루질수없나 봅니다
우리들의 젊은날 ᆢ
감사합니다. 당시 가난한 고등학생에 불과한 저는 오로지 공부해서 성공하겠다는 일념이었고
그애 앞에 내세울것도 없어 나서지 못했습니다. 지금쯤 서울 어디서 저처럼 60대 중반의 나이로 잘 살아갈겁니다.
그 여학생과 이루어지나 했더니 아니었군요.
트럭전복사고에서 살려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추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구요. 부모님 부양 사명 등, 암튼 사명이 있으셔서 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다시 교회엔 나가셨는지요?
맛깔스런 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참 소심한 아이라 표현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두번의 큰사고로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지상에 할일이 많아 남겨주신거 같습니다. 어릴때 천주교 유아영세를 받았지만 그후 나가지 않았고 지금도 교회는 안다녀도 그분이 계셔서 모든걸 주재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바쳐 고향 찾으리
친정아버지가 평안도 분이시라
저도 이북 DNA 가 있답니다
아버지와 저는
이노래를 유독 좋아하는데
여기서 듣네요.....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고향 그동포 웃는 얼굴
보고싶고나
ㅜㅜ
아버지 생각에 울적해지네요
반갑습니다 잘찾아오셨네요. 마지막남은것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했더니
삼팔선의 봄에 꽂히셨군요 ^^ 저도 아버지 고향이 평남입니다. 단신월남하셔서 통일되면
고향에 찾아가 할아버지묘소에 술한잔 올려드리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못지켜드릴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