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앙)아르키리드
https://youtu.be/HKxQ4A_QgY8
이 영상을 보다가 5회 솔베이 회의 뽕이 차서 당시 분위기를 잘 살린 도서인 만지트 쿠마르가 쓴 양자혁명을 읽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거부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관측(측정 혹은 상호작용)으로 파동함수가 붕괴한다는 가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양자정보이론과 양자중력이론의 연구가 심화되고 측정장치가 발달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문제제기가 타당했다는 게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고 이 도서에 당시 나치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남의 나라 과거 역사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해당 내용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
1930년 9월 14일의 독일제국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640만 표를 얻었다. 나치의 득표 규모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나치는 1924년 5월의 선거에서 32석의 의석을 얻었고, 같은 해 12월 선거에서는 겨우 14석을 확보했었다. 1928년 5월에는 12석과
81만2,000표를 얻어서 더욱 어려워졌다. 선거 결과는 나치가 극우 비주류파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런데 겨우 2년 남짓한 기간에
득표수가 8배가 늘어난 나치는 제국의회에서 107석을 가진 제2의 대 정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히틀러의 득표는 반드시 반유대적 증오가 아니라 잘못 판단한 독일 청년들 사이에서 경제난과 실업에 때문에 생기는 일시적인 분노의 증상일뿐”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인슈타인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치에 표를 준 유권자 중에서 젊은 투표자들은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나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중년 이상의 세대, 곧 사무직, 상점주인, 소기업인, 북부의 개신교 농부, 기능직, 중심 산업에서 소외된 미숙련 노동자들이었다. 1928년 선거와 1930년 선거 사이에서 독일의 정치적 지형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1929년 10월의 월가 붕괴였다.
독일은 뉴욕에서 시작된 재정 충격파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지난 5년 동안 위태롭게 추진했던 경제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생명선은 미국의 단기 융자였다. 커져가는 손실과 혼란 속에서 미국 금융기관들은 기존 융자의 즉각적인 반환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1929년 9월에 130만 명이었던 실업자가 1930년에는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한동안 아인슈타인은 나치를 곧 사라지게 될 “공화국의 유치한 질병”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질병은 명목상으로만 남아 있던 의회 민주주의 대신 권위주의 정권을 선택함으로써 깊이 병들어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가 탄 배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기다리던 기자들이 15분간의 기자회견을 요청하자 수락했다. 한 기자가 외쳤다.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인슈타인은 “그는 독일의 굶주림을 자신의 생존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경제 사정이 나아지기만 하면 그는 더 이상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2월 27일에 어느 친구에게 “나는 히틀러를 생각하면 감히 독일 땅을 밟지 못할 것 같소”라는 편지를 보냈다. 바로 그날 밤에 제국의회는 방화되었다. 정권이 주도하는 나치 테러의 첫 물결이 시작된 신호였다.
나치가 촉발시킨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행된 3월 5일의 제국의회 선거에서는 1,700만 명이 나치에게 투표를 했다. 아인슈타인은 패서디나를 떠나기로 했던 닷새 후, 어느 저녁에 인터뷰를 통해서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개했다. 그는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이 시민적 자유와 관용과 평등이 보장되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시민적 자유는 말과 글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하고,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의 신념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현재 독일에는 그런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세계적으로 알려지자, 나치 정권에 충성 경쟁을 벌이던 독일 언론은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발언 때문에 진퇴양난의 입장이 되었다. 그는 3월 19일에 아인슈타인에게 자신이 “이렇게 시끄럽고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공개적이고 개인적인 정치적 발언에 의해서 생기고 있는 온갖 종류의 소문” 때문에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플랑크는 “이런 보도 때문에 당신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모두가 당신을 옹호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라고 불평하고,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동족과 종교적 동지들”의 어려운 형편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아인슈타인은 배가 3월 28일 벨기에의 앤트워프에 도착하자 자신을 브뤼셀에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여권을 반납하고, 두 번째로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프로이센 과학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1933년 5월 10일에 나치 표지를 달고 횃불을 든 학생들과 학자들이 운터 덴 린덴에서 베를린 대학교의 정문 건너편에 있는 오페른플라츠까지 행진하면서 도서관과 서점에서 약탈한 2만여 권의 책을 불태웠다. 4만 명의 군중들이 마르크스, 브레히트, 프로이트, 졸라, 프로스트, 카프카,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들의 “비독일적”이고 “유대-볼셰비키적인” 책들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광경은 독일의 모든 주요 대학도시에서 반복되었고, 플랑크와 같은 사람들은 연기가 전하는 신호의 뜻을 알아차리고 반발조차 하지 않았다. 책을 불태우는 것은 “타락한” 예술과 문화에 대한 나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을 뿐이고, 현실적으로 반유대주의가 합법화되면서 독일 유대인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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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리드
@버미파더님
양자역학의 해석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크게 파동함수를 세상에 관한 지식을 부호화하는 하나의 도구로 간주하는가(프사이 인식론), 아니면 파동함수를 실재로 여기는가(프사이 존재론)에 따라 의견이 갈립니다
파동함수를 그저 도구로 간주하는 인식론적 사고방식은 파동함수의 붕괴는 물리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파동함수의 붕괴가 빛보다 빠르든 파동함수의 붕괴 시점이 언제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반면에 파동함수를 실재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은 파동함수의 붕괴, 측정의 정의, 파동함수의 근본적인 속성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그래서 파동함수가 붕괴하지 않고 모든 확률 진폭이 실재라고 가정하는 다세계 해석이나 비국소적 숨은 변수이론 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설명이 자연을 완전히 이해하기에 부족하다고 봤고 양자역학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숨은 변수가 어딘가에 존재하며, 이것을 추가하지 않는 한 양자역학은 절대로 완전한 이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리 스몰린이 쓴 아인슈타인처럼 양자역학하기
숀 캐럴이 쓴 다세계 애덤 베커가 쓴 실재란 무엇인가 이 도서들을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