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기다리던 그날은 8월 3일 토요일, 병환 중인 엄마를 모시고 가족여행을 하기로 한 날이다. 병이 위중할 때는 절망으로, 차도가 있을 때는 희망으로, 상황은 수시로 변덕을 부렸다.
엄마와 함께 1박2일 여행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우리 세 자매와 그 가족들이다. 사위와 손자손녀들까지 모두 20명이다.
투병 중인 아버지는 집에 계시고, 엄마를 중심으로 우리들 가족만 모이는 것이다.
엄마의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마음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경북 문경시 호계면 성보촌 유스호스텔에 오후 3시까지 도착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두 시간에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여름 휴가철이라 고속도로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일찍 출발하길 바랐는데 오후 1시쯤에야 온 큰아들 가족이 한 차, 우리 가족 한 차, 두 대가 동시에 출발했다.
일기예보에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오고 돌아오는 일요일엔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해 걱정이 되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나들인데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는구나.
마음이 심란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타면 느긋하게 바깥 경치를 구경한다든지, 여유롭게 여행의 낭만에 젖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다.
30년 전, 기계치인 남편이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첫 번에 바로 운전면허를 따서 감동했지만, 승용차를 마련해서 가족을 태우고 시승하는 날 사고가 났다.
운전석 옆에는 내가 타고, 뒷좌석엔 8세와 5세 두 아들을 태우고 제기동 고모님 댁으로 가는 중이었다.
버스 정류장 부근,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시내버스가 우리 차를 앞질러 정류장에 섰는데, 남편은 재빨리 세우질 못하고 그냥 질주, 아니면 반대로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차는 버스 뒤 아래쪽으로 들어가 멈췄다.
버스 기사가 나와서 확인하고는 참 안됐다는 표정을 하더니 그냥 버스에 올라 떠나버렸다.
주위 구경꾼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차는 헤드라이트가 깨지고 보닛은 사정없이 긁히고 쭈그러졌다.
이 날의 충격이 오늘까지도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지 않는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데, 날씨까지 변화무쌍하여 긴장의 끈은 점점 더 바짝 조여들고 있다.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비가 되어 억수같이 퍼붓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비치기도 하고, 가랑비가 오기도 했다.
큰 아들 차를 뒤따라 가는 터라 신경이 더 많이 쓰였다.
어디선가 사고가 나서 앰뷸런스 두 대가 요란하게 달려가는데 가슴이 서늘했다.
기상이변과 휴게소에서 보낸 시간으로 예상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도착했다.
운전하는 남편보다 신경이 더 곤두선 나는 도착하자마자 무너지듯 누울 자리부터 찾았다.
이미 도착한 엄마는 다행히도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얼굴이 전보다 나아 보였다.
통증이 극심하다는 췌장암으로 투병 중인 엄마는 체중이 많이 줄었다.
작은 바람에도 구르는 가랑잎이 되어갔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던 고운 얼굴은 칙칙해지고 주름투성이로 변했다.
손녀가 증조외할머니를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우리 5남매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은 엄마는 빈 껍데기만 남은 우렁이 신세가 되었다.
엄마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일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절망스럽다.
입원할 때마다 간병인으로 엄마 옆에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엄마가 건강할 때 이런 여행을 했어야 하는 것을. 때늦은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보촌 유스호스텔은 말이 호스텔이지, 폐교를 약간 수리하여 숙박시설로 만든 곳이다.
운동장엔 잔디를 심었고, 교실을 나누어서 화장실과 싱크대를 들여놓은 것이 전부다.
그런데도 성수기라 방 하나에 26만 원이다.
물론 식사비는 포함이 안된 가격이다.
모든 비용은 주최 측인 여동생이 부담했다.
그날 저녁 식사비는 우리가 냈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로 나눠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늦게까지 이야기 삼매에 들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빨리 가는 법이라 금방 이튿날이 되었다.
새벽 동이 트자 디카를 들고 주위 산책에 나섰다.
비온 뒤의 말끔한 풍경을 디카에 담았다.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빌었다.
무심히 떠있는 구름에게, 둥그스름하게 능선이 아름다운 산에게, 신비스러운 바위에게, 푸름을 자랑하고 선 모양 좋은 나무에게도 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고 빌었다.
가을 단풍이 고울 때 엄마 모시고 다시 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2013.8.5
첫댓글 담담한 필치가 아름답습니다.
따님들의 애끓는 사모곡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먼 길 떠나신 모친께서는
극락세계에 계실 것 입니다.
언니 아름답게 봐주셔서 고맙고 힘이 납니다.
이 여행하고 두 달후, 덥지도 춥지도 않은 10월에 가셨습니다.
올곧게 살아오셔서 좋은 곳에 가셨다고 믿습니다.
여동생 시아버님께서 종정이신 총지종 제석사에서 49제도 경건하게 모셨습니다.
기제사도 절에서 지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수채화같은 그림입니다.
어머님께서 얼마나 행복해 하셨을까요?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지요.
슬하의 자손들 다 모인 자리에서 잠시 통증도 잊어버리도록 행복해 하셨어요.
진작 이런 여행을 했어야 할 것을 후회막급입니다.
아우야 언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더 간절한 표현이 보태져 애절하구나. 최선을 다한 압두고 이런 여행 쉽지 않다는 걸 뼈속 깊이 와 닿는구나. 슬프 하지마여행 추억의 한토막 이다.
자매에게 엄마는 한도없이 사랑을 받았기에 잠시나마 병중이란 것도 잊었을거야.
내가 늙고 엄마되니 어쩔 수 없는 이
이보다 어떻게 더 잘 하겠니. 아름다운 이
예 2년 전에 두서없이 올렸습니다.
다시 손질해서 올렸습니다.
대구 여동생 내외가 1년 여 동안 집에 모시고 있으면서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고 온갖 효도를 다 했습니다.
생전에도 엄마에겐 늘 자랑스러운 딸과 사위였는데 그렇게 잘 해드리더군요.
선배님 꼭 수필집을 내시기 바래요.
올 10월에 가신 울엄니도 편찮으신 몸으로
서울에 있는 몇 대학교의 캠퍼스를 구경하셨지요.
물론 손주들의 졸업식이었지만요.
손주들 졸업식을 보시고 얼마나 뿌듯하셨을까요.
덥지도 춥지도 않은 10월에 가신 엄마를 생각하면 엄마는 끝까지 남은 자녀들을 위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필집은 먼 후일에나 가능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