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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주님...
이 종을 신실하게 하소서.
거짓과 불의에 동참하지 않게 하시고 의를 사랑하며 주님만 기뻐하는 자 되게 하소서.
내 안에 있는 온갖 불의와 부정, 음란과 정욕을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옵소서.
주님만이 나의 해답이오니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
오직 주의 품속이 나의 집임을 아오니 그 속에서 주님과 사귐을 누리게 하소서.
나의 영을 새롭게 하사 주의 영으로 충만케 하소서.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생명인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 영생을 누리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슥 9:1-17
제목 : 내가 예수님을 오해하여 나만의 괴물로 만들었나이다.
1.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2.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깥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처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7.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 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아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이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13.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 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 나의 묵상
본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열국에 대해 베푸실 심판의 경고 및 여호와께서 이 땅에 보내사 구원 사역을 감당케 하실 겸손한 왕의 도래와 통치에 관한 예언이다.
1-7절은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철저히 심판 하실 것이지만, 8절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곳은 하나님께서 진을 치심으로 그 어떤 세력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보호하실 것임을 대조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주변국에도 선포되어, 만국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살아남은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될 것임을 예언한다.
9-17절은 한 겸손한 왕을 통한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짐을 예언하고 있다.
이방의 불신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구원을 주실 한 겸손의 왕이 오신다는 것과 그가 행하실 통치 및 선민이 받을 복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겸손의 왕으로 오시는 그분은 겸손하고(9절), 화평을 전하고(10절), 갇힌 자들을 풀어주는 분(11절)이시다.
이러한 겸손의 왕으로 오시는 분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승리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모든 원수들을 물리칠 것이며(15절), 여호와의 영광으로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16절).
이러한 영광스러운 예언이 스가랴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무려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던 제2성전 공사를 재개하여 완성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이끌어 갈 지도자나 조직도 없었고 경제적인 풍요도 없었으며 백성들의 숫자도 옛날에 비하면 미미한 상태였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의 미래는 감히 장담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와 같은 어두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영광스러운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소망가운데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실의 상황에 압도당하여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비록 현실이 암담할지라도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소망의 내일을 바라보면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미래에 관한 복된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센 현실의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소망의 등대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은 그저 단순히 주어진 이 땅에서 삶을 사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사명은 제사장 나라이다.
그들 자신만 아니라 그들의 제사장 역할을 통하여 이방 나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어려움과 경제적인 문제에 봉착할지라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넉넉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현실에서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이지만 그 삶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히 받아 그 육신적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약속된 영생이다.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자연적인 생명, 즉 옛 사람으로 살던 자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어 이제는 옛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목적은 3번 생명에서 1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요, 이것을 일컬어 위로부터 태어난 생명이라고 한다(벧전 1:23-25).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심 같이 우리에게도 그 생명을 주어 영생을 누리도록 약속하셨고 그 영생은 이 땅에서 시작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와 같은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를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로 바꿔서 괴물로 만들려고 했다.
하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로 보내셨다.
전쟁이 없고 전 우주적인 통치권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화평을 전하는 메시야로 오셨는데, 유대인들은 이 메시야를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주는 정치적 메시야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경제 대통령으로, 그들의 상황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로써의 메시야를 원하였고 그렇게 만들어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처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거기서 십자가에 죽으시니까 유대인들은 모두 실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해결하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예수님도 자칭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술방망이로 만들어가고 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나를 이 땅 위에서 잘 되게 만들어 주는 분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내가 하는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어야 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암덩어리도 떨어져 나가야 하며, 자녀들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예수 잘 믿는다고 이런 일이 척척 이루어지는가?
이것은 지극히 유대교적 사고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어젯밤에 인천에 사는 누님과 오랜 시간 통화를 하였다.
요즘 심령이 갈급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담임목사님이 설교시간에 빼놓지 않고 하는 내용이 유태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과 예수 믿고 이 땅에서 복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설교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성도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단다.
매형도 지난 1월부터 그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지금 교회를 탐방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으면 누님도 그 교회로 옮길 것이란다.
그리고 요즘 누님은 인터넷에서 말씀을 듣고, 천국과 지옥에 관한 동영상을 자주 보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누님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누님이 나가는 교회의 모습이 현재 한국 교회의 자화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정말 복음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천국과 지옥에 관한 동영상은 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들이기에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전해준 ‘복음에서 생명으로’ 책을 최소한 10번은 읽고 내 것으로 만들라고 하였다.
우리의 눈자락이 이 세상 만물에만 매여 있으면 우리의 소망은 더 이상 소망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첫째도 영생, 둘째도 영생, 셋째도 영생이다.
이 영생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동일하게 예수님도 이 땅의 공생애 사역이 모두 영생이었다.
병을 고치는 것도 영생을 목적으로 하였고, 오병이어와 같이 먹이는 기적을 베푸신 것도 영생이 목적이었다.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 역시 그 자리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영생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미련한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뜻인 영생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 축귀사역, 음식을 먹이신 사역 등 그런 눈에 보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예수님 사역의 목적인양 호도하고 있다.
그런 모습은 누구랄 것도 없이 바로 내가 그런 자였다.
내가 바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셨으니 나도 예수님께 기도하여 우리 교회의 병든 자들을 고치려고 하였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으니 나도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배불리 먹여주셨으니 나도 우리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이 부자가 되도록 부르짖으며 기도하였다.
이런 나는 하나님의 뜻도,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도 전혀 알지 못하는 정말 무지몽매한 자였다.
이런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다를 바 없는 자였던 것이다.
복음을 듣고 생명으로 살기 전까지는 이것이 정말 목회를 잘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목회인 줄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복음은 내가 생각하는 목회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목회는 극히 이기적이고 정욕적이며,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 사람 중심의 목회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심을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끌어내는 미신적이고 우상을 섬기는 종교적 행위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랐고, 무엇보다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우스꽝스러운 목회를 하곤 하였다.
그저 옛날부터 전해오는 선배 목사님들의 목회가 목회의 전형인 줄로 착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급급하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들 많이 모으는 것이 목회에 성공하는 것이요, 교인이 많아지면 예배당 크게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면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노회와 총회에서 정치를 하고, 내 이름 석 자를 내밀고, 은퇴할 때 은퇴금 두둑이 받아서 챙겨가지고 남은 여생 세계 일주 하면서 사는 것이 목회에 성공한 인생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나뿐 아니라 대부분 목사들의 생각일 것이다.
나는 정말 죽어야만 하는 말씀 도둑놈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정욕과 음란에 빠졌던 괴악한 자며, 천사와 같이 앞에서는 환한 미소로 대하면서도 뒤에서는 악마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표리부동한 자였다.
이런 나를 생각하면 정말 몸서리 쳐지고, 끔찍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복음을 알게 하셨다.
복음은 가뭄에 단비와 같이 내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복음이 내 안에서 자라나 생명이 되었고, 그 생명은 나로 하여금 진정한 영생이 무엇인지 알게 하였다.
목회의 본질을 알게 되어, 성도들에게 온전한 복음을 전하여 영생을 누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나도록 이끌고 있다.
사람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목회를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는 목사가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목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니까 처음에는 성도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저항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들이 알던 복음도 아니요, 듣도 보도 못한 복음을 전하니까 거부하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주는 것은 복음 밖에 없음을 믿고 계속해서 이 통합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성도들은 이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이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목회를 하는 것이 고난이요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던 내가 복음을 전하면서 목회가 너무 행복하다.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이것저것 프로그램에 기웃거리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매일 말씀으로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가지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일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안에 영생이 있다.
거기서 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그 안에 하늘의 기쁨과 행복이 넘쳐 흐른다.
다윗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이 나의 고백이다.
아~ 참으로 나는 행복자이다.
주님께서 그토록 주의 백성들이 보기 원하셨던 아버지의 영광을 나는 날마다 보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린다.
그곳이 나의 천국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뜻도 알지 못하면서 목사가 되고 목회를 했던 나는 소경이었나이다.
이런 소경이 또 다른 소경을 인도한다고 깝죽대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황당한 일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모르나이다.
주여, 이런 나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주의 심판을 통하여 복음을 알게 하시고 나를 살려 주셨나이다.
복음으로 살아난 내 영혼은 당신의 생명을 얻어 오늘도 영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나이다.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 눈에 흐르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은 그 어느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결정체임을 믿습니다.
주님, 하루살이에 불과하나 매일매일 주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에 하루살이인 것이 더 좋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하오니 영광을 받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